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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영화> 카핑 베토벤... 100316

 

 

 

 


지치고 피곤한 나날들이다.

너무 채워졌거나, 너무 작아져버린 일상.

오늘도 들어오자마자 드러누워 리모컨과 씨름을 벌인다.

아직 익숙하지 않은 채널에 조그마한 제목...

<카핑 베토벤>


달리는 마차에서 한 여인이 내다보는 차창 밖으로 무수한 소리와 빛과 풍경이 스쳐지나간다.

오버랩 되고, 구상 되고, 추상 되는 모든 것들에 동화되는 여인의 눈빛과 멈춰진 시간.

흐르는 음악 제목을 미처 알지 못하지만,

이건 분명 내 귀에 익숙하지 않을 뿐, 베토벤의 음악이 분명하다 !

더 이상의 리모컨 조작은 끝이 나고, 나의 시선도 나의 마음도 그렇게 고정되었다.

베토벤에 관한 영화라면 졸리운 눈꺼풀도 나의 피곤함도 이 시간을 용서하리라...


음(音)에 빛과 색이 더해지고, 역사의 시간과 인간의 향기가 들어가면 음악영화가 되겠지?

전기(傳記)형식, 한 사람의 생애를 그린 이야기 - 혹은 영화들이 모두 그러하듯이

나는 주인공이 완성하고자 했던 미학(美學)의 정점을 음악으로, 미술로, 조각으로 접하게 된다.

물론 시나리오 작가나 연출자의 의도, 그리고 연기자의 깊이가 더해진다면 더할 나위 없겠지만,

지금 이순간 내가 피곤한 몸을 누이고, 맘을 풀어헤쳐놓고, 시간의 구애를 받지 않고 영화를 보는 이유는

단 하나 ; 베토벤이 좋고, 그의 음악이 좋기 때문이다.




당신은 베토벤을 좋아하는가?

^^~ 나는 여느 한국사람처럼 베토벤을 좋아 한다 !

실제로 우리나라 사람들이 제일 좋아하는 음악가 1위(대략 30%)가 베토벤이란다.

물론, 나 역시 그런 사람 중 하나고.

그러면 당신은 베토벤에 대해 충분히 알고 있는가?


좋아하는 만큼 알고 있는가? 라는 질문은 그리 썩 중요하지 않다.

음악, 생애, 그리고 그의 시대정신에 대해 우리가 충분히 알고 있다며 더 좋겠지만,

우리들에게 실제로 필요한 것은 그의 음악에서 느끼는 <무엇>이 아닐까?

내가 좋아하는 만큼 알고 싶고, 아는 만큼 느끼기 위해 영화는 내게 좋은 길잡이가 된다.

왜냐하면 누군가에 의해 각색된 어떤 소재도 내가 알고자하는 것을 풍부하게 만들어 준다.

<아마데우스>도 <오페라의 유령>도 <고흐>도 나는 그렇게 친해졌기 때문이다.


어쩌면 활자화되고 해석과 설명이 부언되더라도 그 어떤 생각과 마음도 만든 이 - 창작자의 고뇌에

쉽게 혹은 깊이 있게 조응하는 것도 맘대로 되지 않겠지만,

음악이나 미술이나 조각이나 건축이나 사진 등, 그 어떤 예술이란 개념으로 포장된 창작물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순간, 그 어떤 정형이나 실체로 사람들을 획일화 시키는 것은 아닐 것이다.

만든 이의 손을 떠나는 순간, 우리에게는 우리들의 개체 수만큼, 들리는 귀만큼, 보는 눈만큼,

느끼는 마음만큼의 해석과 감상과 이야기를 만들어낼 것이기 때문이다.


모차르트와 바흐, 고흐와 김홍도, 미켈란젤로와 김대성...

그들이 내게 건낸 열 개를 하나로 이해하든, 하나를 열로 해석하든 중요한 것은 깊이이지,

감동의 폭이고, 감상의 향기고, 순화의 농도, 교감의 일체감이지 해석의 다양함과 형식의 이해는 아니다.

설혹 베토벤이 내게 무엇을 강요한다 하더라도, 나에게 소중한 것은 나의 느낌일 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존경하고 그들의 작품에 감탄하는 건, 그들은 고립된 내가 아닌

불특정 다수의 공감, 어쩌면 보편적인 인간들의 심금을 울리게 한다는 점일 거다.




<카핑 베토벤>은 교향곡 9번 <합창>이 완성되는 시점에서 베토벤이 운명한 3년여의 시간을 그리고 있다.

그렇다고 만년의 고독과 외로움, 자만과 오만에 가득찬 음악 천재의 광기를 재해석한 영화는 아니고,

더 이상 들을 수 없고, 악보를 그릴 수 없는 작곡가를 대신한 카피라이터와의 관계를 그린 것도 아니다.

또한 카피라이터가, 작곡과 지휘를 지망한 여성이 겪어야했던 당대의 편견을 폭로한 영화가 아니고,

통일된 독일에 울려퍼진 첫 번째 합주곡, 혹은 오늘날 출범한 유럽연합의 공식국가로 채택된

<합창 교향곡>의 초연 장면을 재현한 영화는 더더욱 아니다.


스키점프를 그린 <국가대표>식의 클라이막스-합창 교향곡 초연장면-는 극 중간에 배치되어 있고,

어렵고 난해한 대<푸카>로 시작해서 또 다시 대<푸카>의 여운을 강요하는 영화 줄거리는,

베토벤의 집착과 자만을 무장해제 시키고, 베토벤 음악의 장중함과 깊이도 포기한체

새로움과 파격이란 형식을 주입시키며, 조금은 맥없고, 약간은 느슨하게 음악을 흩트려 놓는다.

그것이 감독이 말하고자 하는 베토벤의 실체일지, 베토벤이 우리에게 남긴 또다른 숙제일지 모르지만,

안나 홀츠라는 카피라이터와 베토벤의 지휘장면에서 보여준 교감은 깊은 감동으로 다가온다.


박자와 높낮이, 그리고 악기의 구성을 지휘하는 그의 손끝에서 나는 무엇을 바라보고 느끼는가 ;

오선지에 그려진 콩나물 꼬리표를 붙잡고 나는 천상의 언어를 해석한 베토벤을 만나고,

나폴레온 시대의 유럽을 느끼며, 동유럽의 음습한 자연과 게르만족의 육중한 몸짓을 만난다.

그를 통해 모차르트와 살리에르, 하이든을 만나고, 괴테와 쉴러를 생각하며,

역사와 사상에 형식적 완성을 서두르는 고전주의와 신에게서 독립을 재촉하는 낭만주의를 해석한다.

나는 그렇게 그의 음악을 통해 그 당시를 살았던 사람들의 희노애락과 자연의 풍광을 감상한다.  


스토리텔러의 문제의식과 무관하게, 감독과 연출자의 의도를 비켜나서 나는 그렇게 시간을 즐긴다.

음악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들과 악기를 통해 만들 수 없는 거,

소리를 통해 들리는 것들과 바람을 통해 이해할 수 없는 것들...

말로 설명하는 것들과 언어로 해석되지 않은 것들,

마음으로 만드는 것들과 몸으로 실현될 수 없는 것들이 뒤섞여 합창이 되고 운명이 되고, 교향이 된다.

교향곡(交響曲)이란 본래 조화로운 울림, 그러면서도 휘어진 그 어떤 것이 아니겠는가.




채널을 넘나들며 시시콜콜한 뉴스와 감당하지 못한 사실들, 그리고 꼬여진 현실에서 벗어난다.

내 맘대로 될리 만무한 일과 관계, 그리고 생각을 따르지 못하는 무거운 몸에서 해방된다.

시간을 잃어버려도 탓할 이 없고, 머무는 공간의 조악함도 지금 이순간은 방해받지 않는다.

베토벤의 음악 때문인지, 간만의 영상세례인지, 전파로 교감하는 아름다운 장면 때문인지,

존재하지 않았을지도 모를 카피라이터와의 교감이 눈을 즐겁게 만들고 전율을 안겨준다.


대화와 교감, 그리고 동화...

아름다운 몸짓이다.

채워지지도 비워지지도 않는 그 어떤 특정한 순간과 공간에서 나는 음악의 여운에 젖어있다.

영화여서 더 그랬을까? 지금의 내 맘 때문일까?

썩 칭찬하고 싶지 않은(?) 영화를 붙들고 나는 나의 감상을 노래하며 베토벤을 감사한다.


57년여 생애동안, 이십대 후반부터 반평생 사라지는 소리를 조각한 베토벤,

그 절망과 회한이 있어 그만의 언어로 그는 그가 말하고자하는 영원, 영혼의 소리를 작곡했을까?

그는 평면의 조각난 종이에 오성 칠음을 그려, 채울 수 없는 공간을 만들고, 음악에 생명을 부여했다.

들리지 않는 소리와 들을 수 없는 귀가 마음을 흔들고 향기를 색칠한다.

어쩌면 그가 보지 못한 것은 훨씬 더 많은 사람들이,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어 그의 소리를 사랑하고, 찬양하게 되리라는 진실일지도 모른다.


열정만으로, 장애만으로, 천부적인 재질만으로 그를 해석할 이유는 없다.

믿음으로, 소망으로, 신앙으로 그의 신념과 집념과 광기를 갇어 둘 필요도 없다.

오만과 자만, 성실과 충실... 배타적이고 부정적인 그 어떤 행위에 조화로 포장할 명분도 필요 없다.

교감과 열림, 그리고 자유라는 또 다른 틀(?)로 나는 베토벤을 바라본다.

영혼을 울리는 교감, 모든 걸 통섭하는 열림, 그리고 하나되는 자유...

그에게 자유는 누구처럼, 그의 마음이 가는 것이 틀을 넘지 않았고, 순응한 것이 새로운 틀을 만들었다.


그가 완성하지 못한 열 번째 교향곡은 과연 어떤 소리였을까?

 

 

 

 

 

<실제 합창 교향곡은 1시간 10분이 넘는다.../ 

제7교향곡이 발표된 이후 11년, 그리고 베토벤이 운명하기 3년전에 완성된 이 곡은 제10교향곡과 함께 쓰여졌지만, 결국 9번 합창교향곡만 완성되고, 제10교향곡은 미완성 스케치만으로 남게 된다.../

쉴러의 <환희의 송가>에서 영감을 얻어 5년 이상의 구상을 한후 만들어졌다는 말이 있고, 결국 연주음악 최초로 인간의 목소리가 들어간 교향곡으로 완성된다.../

 

초연에서 실질적인 지휘자가 누구였는가에 대한 말도 많고, 청중들의 박수소리를 들을 수 있게 베토벤을 돌려 세웠던 이가 누구였는지에 대해서도 몇개의 설이 있다... 이 영화는 <한 여인>과 베토벤과 교감을 나누었던 <카피라이터>에 방점을 둔거 같다.../ 

당시에도 합창교향곡의 초연은 베토벤의 명성을 다시 확인시켜줄만한 대단한 성황을 이루었다고 한다... 그러나 두번째 공연에서는 실패했다고 한다.../

 

언젠가 합창교향곡을 들으려고 여러 지휘자와 오케스트라의 음반을 들으면서 이런 궁긍중을 가졌었다. 과연 베토벤 시대에도 현재의 오케스트라 규모가 동원되어 연주되었을까? 베토벤은 수십개의 현악기가 동원된 교향곡을 작곡했을까? 그때 베토벤의 악보대로 구성된 오케스트라에서는 어떤 느낌이 들까??? ^^

 

내가 음악사를 공부한 사람은 아니지만, 그 당시의 악기편성은 30개를 넘지 않았던 걸로 생각된다... 타악기(심볼즈와 북 등)와 현악기(바이올린 등)이 비슷한 규모였고, 관악기(플릇, 오보에, 클라리넷, 호른 등등) 위주로 편성된 걸로 알고 있다... 물론 이렇게 녹음된 실제 원곡은 아직 들어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