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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영화> 인셉션 - 내 꿈 꿔~~~^^ 100830

인셉션 - 꿈은 꿈일뿐?!! ... 100830

 

1.

일요일 아침, 쏟아지는 빗소리에 벌떡 일어나 시계를 보니 아직은 이른 5시...

지난주에 이어 이번주 금요일 밤도 집에서 잤다!??

주 5일 근무란 이렇게나 느긋할 수 있음을 느끼며 이불 속을 뒹구는데도 몸은 더 피곤해진다.

쪼개어진 시간들의 얇은 여유에도 불구하고, 생활의 리듬은 직장을 벗어나지 못하는 강박감 탓이리라.

직장이란 얽매인 틀과 해결해야할 현실의 많은 굴레를 벗어나려 투덜대고 있지만,

내 무의식은 집에서의 휴식보다 일터에서 개김(?)이 내게 편하다는 걸 강요하고 있다.

아이들과 색시에게 미안한 마음의 근원은 바로 이것 때문이 아닐까?

 

끝없이 쏟아지는 비속을 뚫고 현장으로 출근...

썩 유쾌하지 않은 출발이지만, 그래도 일요일이라 늦은 시간이다.

이럴 때, 이럴 때 어디론가 쓰윽 날아갈 생각이 간절했건만 결국 나는 오늘도 무의식의 편리를 택했다.

미안함과 편안함의 갈등이 쉽게 해소될 바 없지만, 그래도 버티는 건 인지와 망각 때문이 아닐까?

빗길 속에서도 멈춰지지 않는 고속 혹은 과속의 관성은 엊그제 보았던 <인셉션>의 한 장면을 강요한다.

망각되지 않는 무의식과, 선명하게 인지되는 꿈이 각기 다른 시간 속에서 조합되었던 그 장면...

그런데 요즘 나는 꿈을 꾸고 있는가?

 

 

<모처럼 블록버스터 영화의 포스터에 주인공 얼굴이 강조되지 않았다... 디카프리오의 이름보다 다크나이트와 매트릭스를 더 강조한 포스터... 그렇지만 매트릭스 운운은 국내 공급자의 상업적 워딩에 불과하지?> 

 

 

곰곰 생각해봐도 언제 내가 꿈을 꿨는지 불분명하다.

게다가 나는 <인셉션>처럼 선명하게, 디테일과 감정까지 살아있는 꿈을 꿔본 적도 없다.

기승전결과 의도와 목적이 분명하면서도 현실을 분간 못할 정도로 치명적인 꿈은 더더욱...

그리고 너무나 현실적이 되어버린 내가 찾는 꿈은 <희망으로서의 꿈>임에도 불구하고

나는 눈을 감고 상상의 나래를 펼 수 있는 <잠속의 꿈>도 꾸지를 못하고 있다.

인셉션이란 영화를 되새기면서, 나도 무의식과 내가 꾸고 싶은 꿈이란 것에 대해 생각해 볼까?

 

 

2.

부리나케 달려간 극장...

어찌저찌 달려갔지만, 영화는 이미 시작되었고, 초반 얼마동안을 건너뛰었는지 알 길이 없었다.

알바 오빠 꼬드겨 다시 필름을 이어보려 노력했지만, 결국은 정직하지 못한 방법을 택해야만 했고.^^

꿈에서 깨어나라고 물에 처박았더니 그도 꿈이더라~~~를 이해하는데 상당한 시간을 빼앗기고,

도대체 나 혼자서 뒹굴며 꿈꾸기도 힘든 세상에 다른 사람들과 동일한 꿈을 꿀 수 있게 만드는,

저 기발한 기계가 어디서, 누구에 의해, 어떻게 만들어졌는지 이해하질 못해 한동안 헤매고...

 

 

<결국 꿈을 공유할 수 있으면서 연결만하면 잠들 수 있는 이 기계의 비밀은 끝까지 밝혀지지 않았다?^^

스토리텔링이 강조된 영화중 쥬라기공원이 창조의 비밀을 사전에 공개해 대중적 오락영화로 성공했다면,

이 인셉션이란 영화는 비약과 암시와 비대칭적 조합을 통해 논리와 추리를 자극하는 매트릭스 스타일이다...>

 

 

 

가만 돌아가는 스토리를 보아하니, 누군가의 의도로 남의 꿈까지 침범해야하는 고도의 사기행각을

차원이 다른 블록버스터, 누구도 상상하지 못한 꿈같은 이야기라는 이야길 듣고 이영화를 선택했다니,

세계적인 금융위기 이후 얼마나 살기 각박해졌으면 이런 스토리에 열광하는지 의아해지기도 했다.

이젠 살기위해, 남의 무의식에 잠재된 정신착란을 약물로 치료하는 걸 넘어서서 꿈까지 훔쳐야 되나?

도대체 언제부터 희망의 꿈을 선동하는 걸 넘어서서, 잠속의 꿈까지 조작해야 되지? ^^

 

“내 꿈 꿔~~~” 내 친구들과 애인과 색시에게 남발했던 애교와 아양이

“꿈에 놀러 갈께”로 뻔뻔하게(?) 바뀐지 얼마나 되었는지 기억나지도 않는데,

이젠 아예 대놓고 “같이 꿈을 꾸자~~~ 내가 설계한 꿈속의 공간에서!!!”로 발전(?)하는 영화를 봤다.

꿈속에서라도 나를 기억해달라는 낭만이, 꿈에 놀러 갈테니 딴 생각하지 마(!)라는 강요로 바뀌더니,

이제는 지금 꿀 수 있는 꿈이 내 것인지, 네 것인지도 구별하기 힘든 <사기성 협박>으로 바뀌었다.

그것도 벅찬데 인셉션이란 영화는 꿈속에 또 다른 꿈까지 끌어내 무의식에 도달할 통로까지 만들었다.

무의식에 근접할 수 있는 유일한 통로가 꿈 - 잠속의 꿈인 것처럼 말이다.

 

 

3.

영화가 끝나고, 도저히 첫 시작을 보지 않으면 후회하리라는 다짐을 하면서 필름을 이어봤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이 나를 놀래킬려고 만들어 놓은 장치의 흡입력이 대단함을 인정했기에...

그런데 스토리가 이어지고, 하나씩 벗겨지던 구성이 이해되는 순간... 사실 허전했지?

왜?

꿈이니까...ㅋㅋ

 

 

<미국과 유럽에서는 정신병(? - 우리식으로는 화병, 혹은 마음의 병???)을 치료하는데 기본이 약물이다... 물론 상담과 가정복지 시스템이 따라가지는 하지만, 정신병을 마음의 병으로 보지 않는 그들의 의학적(해부학과 건축적인) 상식에 기초하기 때문에 약으로 치료하는 걸 기본으로 한다...? 인셉션에서도 약물은 여전히 중요한 역할을 한다... 음악과 함께... 잠에서 깨어나는, 그리고 원하는 동안 모든 고통을 망각하면서도 잠에서 깨어나지 않는 가장 중요한 매개이다...> 

 

 

기껏 감독의 도발처럼 느껴져 흥미를 가졌더니, 꿈 깨라고 욕조에 처박는 것 같은 <킥> 한방에

림보니 찰스니 인셉션이니 하는, 사람이름인지 리셉션의 변형인지 모를 용어들에 머릿속이 복잡했었다.

사실 그래서 영화는 영화고, 꿈은 꿈이고, 헐리우드는 헐리우드겠지?

그래도 결말은 허전했지만, 그 시간이 허무하지 않았던 것은 놀란감독의 놀래키는 재능이 아닐까 싶다.

놀란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나의 무엇을 자극하고 놀래켰기에 내가 꿈에 대해 고민하고 있을까?

 

감독은 이야기를 창조하면서 하고 싶은 것을 했지만, 바라보는 우리들은 이야기를 해석하고 분석한다.

그리고 이제는 연출자의 의도와 소통하려하고, 영화를 통해 그들에게 반영된 사회상을 들춰내려 한다.

놀란 감독이 관객들에게 도발해온 게임에서 우리는 그 게임의 룰까지 깨려고 또다른 도발을 감행한다.

왜냐면 영화라는 문화를 우리는 소비하고 있으며, 소비에는 만족이 따라야한다는 무의식적 강제 때문이다.

안다/모른다, 잘 혹은 못만들었다를 넘어서서 자극을 찾고 그 자극에 열광하는게 지금의 소비패턴이다.

그게 현재 영화라는 장르와 극예술을 오락적인 소비문화로 이해해야하는 우리들의 과제가 되었다.

 

영화에 대한 비평과 감상이 연출자 혹은 감독으로 모아진 것은 물론 우리들 수준의 문제임이 분명하다.

예전처럼 연기자의 사실성과 플롯의 개연성, 그리고 소품의 구체성에 얽매여 있던 우리들이

소위 비평과 감상이란 이름으로 연출자의 의도나 내재된 사회현상의 의미를 되짚는 것은 관객의 몫이지

흥행과 명성, 그리고 차기 작품에 대한 투자 달성을 목표로 하는 배우나 감독의 의무는 아니다.

더군다나 놀란 감독이 장자의 호접몽이나 프로이트의 무의식에 소쉬르의 구조주의를 안다는 보장도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인셉션을 통해 융의 집단적 무의식과 라캉의 정신분석학까지 살피고 있다.

 

 

<추출자 코브와 설계자 아리아드네... 거울은 인식론에서도 정신분석학에서도 주요한 개념이다... 반영과 자아인지의 가장 기초적인 단계이기도 하며, 진실과 허상, 진리와 허위에 대한 논의에서도 거울은 중요한 영감의 매개체이며 개념이기도 하다...> 

 

 

굳이 감독에 대한 이해와 이 영화의 의도를 추적하고자 이렇게 거창하게 끌고 가는 이유는,

이미 놀란 감독의 전작 <다크 나이트(배트맨)>의 연속성속에서 <인셉션>이란 영화를 보기 때문이고,

<매트릭스>의 진실과 허상, <아바타>의 전도된 진정성이 어떤 결말을 야기하는지를 추적하기 위함이다.

불필요한 이야기인지 모르겠지만 이 영화의 만만치 않은 파급력에는 계보와 사회상이 반영되어 있고,

현대의 영화를 오래전의 <詩(시)>라고 명명한다면 예술과 진리의 상관관계에 도달한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렇지만 놀란 감독은 그 경로로 <잠자는 꿈>을 끄집어냈고, 나는 <희망의 꿈>을 구분하고 있을 뿐이다.

 

 

 

4.

<다크 나이트>에서 출발한다면 그 영화는 우리가 즐겨보는 여러 장르 중, <액션영화>에 포함될 것이다.

내가 인지하는 액션영화를 간단히 정리해본다면 맨처음 기억은 서부영화와 홍콩영화가 아닐까 싶다.

<권선징악>, 그 간단한 주제에서 우리편과 나쁜편을 구분하기 바쁜 와중에 우리는 선악 이분법을 배웠다.

善(선)은 무조건 좋은 것이며 惡(악)은 그 단어, 개념 그대로 무조건 나쁜 것이어야만 했지.

그때 중요했던 것은 배우-연기자의 인상이었고, 우리는 얼굴만으로도 선과 악을 구별할 경지에 올랐다.

 

친구의 배신과 복수, 그리고 개인적 은원의 정의감에 불타던 우리들에게 그 다음 등장한 게 <영웅>이다.

한 도시를 지키는 <배트맨>과 지구를 수호하는 <슈퍼맨>에서 한 마을의 수호신을 쫓아다닌 <옹박>까지...

이런 공간적 개념에 이념적 가치와 개인의 신념을 버무리면 역사적 설화가 되고, 전쟁의 영웅이 되었지.

슈퍼맨 신드룸에 자연과학의 발달과 달착륙이란 호재는 우주와 미지의 자연(바다/높은 산)을 끌어들이고,

과거와 미래라는 시간의 경계를 허물면 인간의 영역은 무한정 늘어나며 멸종된 공룡까지 살려낼수 있었다.

 

이때부터는 이미 영화가 배우에 의해 좌우되는 게 아니라 정교한 스토리와 보여주는 기술이 중시됐고.

아마도 그 결말은 미국 대통령이 액션의 주인공으로 등장하거나 핵폭발로 인류문명의 파멸을 예고하면서

극단의 정점으로 다달았지만, 모처럼 세계적인 경기호황은 오락성과 긍정적 환상으로 상업성을 강요했고,

이런 현상이 예술-문화에 반영되면서 영화는 드디어 <꿈>을 통해 가상과 현실, 선과 악의 경계를 허물었다.

 

<우리나라와 달리 영어로된 포스터의 주제는 DREAM과  REAL이란 개념이다... 그리고 당연한 강조일지 모르지만, 감독의 전작이 다크 나이트임도 분명히 했다... 이점은 감독의 일관되고 집요한 문제의식도 확인시켜주지만, 많은 대중과 비평가들에게 새로운 게임을 주문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즉 창조와 상상력이 동일시되면서 신화가 재해석되고, 기존의 신념들은 더 이상 교훈이 되지 못하게 됐다.

아마도 <매트릭스 / 아바타>가 만든 센세이션이 바로 계몽적 교훈에서 벗어나려는 결정체가 아닌가싶다.

선악의 경계를 허문 <다크 나이트>와 무의식의 경계를 무너뜨린 <인셉션>은 그런 연장선상에 있고.

그렇게 내가 봐온 영화의 계보를 그리면 <권선징악→영웅→꿈(과 무의식)>의 재해석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현재 나의 인식으로는 영화가 그릴 수 있는 상상력의 마지막(!) 단계에 다다랐다는 생각이 든다.

놀란 감독은 그가 의도했든 의도하지 않았든, 이런 영화의 계보를 잇고 있고, 사회상을 담지하고 있으며,

내가 우려하는 것은, 아직 완성되지 못한 마지막 단계에서는 많은 문제와 한계를 노출할 수 있다는 점과

또다시 근본으로 회귀하려는 현상과 함께 영화만을 위한 영화로 전락되는 예술의 도구화라는 점이다.

(최근 신화의 재해석과 무한한 시간과 극세의 공간이 자주 등장하지만, 아직 오락단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내가 지루하게 <인셉션>이란 영화의 계보를 들춰내 <꿈>을 현대사회 현상의 반영이라 규정하는 이유는

그 연속성에도 불구하고 꿈으로도 완전한 충만을 얻지 못했다는 점과 개체로의 후퇴를 경계하기 때문이다.

미국의 중산층들이 가져야만 할 것 같은 <가부장적 책임감>과 <혼자라도 지켜야하는 정의감>,

그리고 <무의식을 죄의식으로 대체한 기독교적 원죄의식>과 <목적의식과 집착이 혼재된 모호한 주체성>

결국 헐리우드 영화와 유럽의 영화들이 벗어나지 못하는 <자아란 개념의 완성>이 바로 후퇴의 내용이다.

오이디푸스 콤플렉스나 <건축>학도에 의해서만 설계되는 공간이란 설정도 완전한 충만을 방해할 뿐이다.

 

 

<복잡한 이야기를 담고 있지만, 결국 추출자 코브의 자아란 개념을 영화는 벗어나지 않는다... 인셉션이란 영화는 쥬라기 공원처럼 스토리텔링이 영화전반을 주도하는 만큼, 배우의 역할은 부차적이다?... 아무튼 나는 그렇게 봤다...^^ 분명한 것은 서양철학에서 가장 강조하는 " I " 는 의식을 다루는 영화의 시작이자 끝이 되기도 한다... > 

 

 

 

5.

어쩌면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야 할 이야기꾼(!)이, 현실의 굴레와 과거의 구태를 벗어나지 못한 것처럼

<인셉션>이 다양한 조합과 복잡다단한 구조에도 불구하고 불완전하게 보이는 이유는 그 때문이 아닐까?

꿈속의 꿈에서 창조되는 무한한 공간감과 영원한 시간 개념은 결코 희망으로서의 꿈으로 대체되지 못하고,

자극을 위한 자극, 오락을 위한 오락, 영화를 위한 영화로 전락되는 이유는 꿈이 꿈으로 끝나기 때문이다.

꿈이 카타르시스로, 희망 혹은 진실로 꽃피우지 못하고 붕괴와 파멸의 잔상만을 남기기 때문이다.

 

 

<결국 영화는 파괴와 붕괴를 통한 화해와 망각, 그리고 변화를 암시한다... 예전 심시티란 도시건축 CD프로그램이 있었는데, 코브의 무의식을 보면서 왜 그 생각이 났을까?... 내가 만약 도시를 설계한다면 어떻게 할까??? 나는 꿈속에 설계된 이 도시 = 건축 = 공간을 통해 감독 혹은 현재의 사람들이 그리는 이상향을 읽고 싶었다... 그러나 이 꿈속의 공간은 전체적인 윤곽을 드러내기 전부터 무너지기 시작한다... >

 

 

 

사실, <인셉션>이란 영화에 대해 이야기하고 생각하면서 이런 문제까지를 바란다면 그건 어울리지 않는다.

영화라는 예술이 사회를 반영하고, 예술이 철학적으로 이해되며, 철학이 진리를 담는다는 것도 구태일 수 있고,

아마도 이런 비평을 한다면 나는 플라톤에서 맑스로 이어지는 목적의식의 추종자일지도 모른다.

그렇다고 나는 아리스토텔레스처럼 예술과 철학을 분리하고 카타르시스라는 유용성만으로 영화를 이해하지 않으며,

철학을 방기하고 구현된 예술만이 진리라고 강조하는 해석학적, 낭만적인 미학론에 동의하지도 않는다.

물론 플라톤처럼 철학이 예술을 통제해야 한다는 결과론적 목적의식을 강변하는 건 더더욱 아니고...

 

 

<아르스토텔레스의 고전적이며 정신분석학적(?) 분석에 따르면 예술의 목표는 진리가 아니라 카타르씨스이며, 그것은 비극의 눈물을 통한 정화다... 감독의 의도와 무관하게 나는 극 주인공의 눈물이 아니라 타자화된 주체의 눈물이 왜 필요했을까 생각했었다... 하나도 놓치지 싫은 감독의 욕심이 아니었을까? 왜냐고? 만약 이 영화가 추출자 코브의 시각이 아니라 죽은 그의 아내가 주인공이었다면, 이 영화는 비극이다... 주인공에게는 화해를 통한 극복이었겠지만, 멜에게는 결별을 통한 파괴일뿐이니까... 결국 이 모든 것은 망각을 통해 이루어지는 것이고...> 

 

 

 

단지 내가 말하고 싶은 것은 우리들의 인식과 의식은 꿈처럼 평화롭거나 여유로웠으면 하는 것이다.

이미 선악과 시공간, 그리고 가상과 현실의 경계가 허물어져야만 창조되는 공간에서 자유를 원한다면,

아바타처럼 깔끔하게 일어설 수 없는 다리를 포기해버리던지, 매트릭스처럼 하늘을 나는 게 편하다.

인셉션이 복잡하면서도 진지하고, 중층적이면서도 일관됐던 스토리를 가지면서도 불편했던 이유는,

놀란 감독 스스로 그 자신이 속해있고 자라왔던 미국식 중산층의 가치관을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미 모든 경계를 허물어버리고 <타인의 무의식까지 조작>할 단계에서 개인의 의지를 그는 강조했다.

그것도 누가 누구에 의해 조작되고 건축되고 기획되는지도 불분명한 집단적 무의식의 공간에서 말이다.

하긴, 여전히 수학적 논리와 건축학도가 나서야만 공간은 구축될 수 있다는 점이나,

꿈과 무의식의 영역에서도 물리적인 충격과 의학적이며 화학적인 약물에 의존해야 한다는 점,

존재하는 공간과 속도마다 다르게 설정되는 상대성이론에 근거한 양자역학적인 시간의 개념을 본다면

놀란 감독의 <현학적 자기과시>는 이 영화의 결정적이고 궁극적인 <한계>가 될 수밖에 없었을 것 같다.

 

 

<설계와 기획은 수학을 바탕으로한 건축가의 독점적 영역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꿈의 설계자는 건축학도다... 이것은 서양철학의 체계가 건축적(구축적) 사유와 구조를 중시기 때문이다... >

 

 

 

6.

언제부턴가 꿈꾸지 못하는 나를 지켜보고 있다.

놀란 감독은 꿈속의 꿈까지도 훔칠 수 있다고 강변하는데 나는 꾸고 싶은 꿈도 못 꾸고 있다.

게다가 그이는 나의 무의식마저도 조작될 수 있음을 암시하며 꿈도둑(?)을 경계하라고 암시를 보낸다.

그것도 파리시를 정육면체로 접을 수 있는 전지전능한 - 이건 신도 꿈(!)꾸지 못했겠지? - 힘과

강물로 처박히는 봉고차가 떨어지는 20초를 무한대로 확장할 수 있다는 사기를 치면서 말이다.

 

그런데 나는 선악과 시공간, 가상과 현실이 해체된 상상속의 영역에서 새로운 <신화>를 찾고 있었다.

그것이 오락이든, 소비든, 이야기꺼리든 나의 결핍을 채워줄 궁극의 충만점을 말이다.

개체에 잠재된 무의식의 해체나 무의식의 의식화가 그 길인지,

아니면 외부로부터의 자극을 통한 이식된 무의식이 현실의 굴레를 벗어나게 해주는 길인지 모르겠지만,

불행하게도 이 영화를 통해 인지하고 인정할 수밖에 없는 진실은, 꿈에서도 현실을 벗어나지 못하고,

심지어 타인의 꿈을 도둑질하고 타인의 무의식을 파괴해야만 굴레를 벗어날 수 있다는 냉혹한 현실뿐이다.

 

 

<인셉션의 의뢰인은 일본인이다... 그것도 철저히 중국적으로 보이는... 의뢰인이 문제의 핵심에 있다고 봐야함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이야기를 끌어가는 화자의 의도대로 끌려가기 쉽다... 르네상스를 꽃피운 것은 미켈란젤로, 라파엘로 같은 천재들이지만, 그들에게는 메디치가 등의 의뢰인이 있어야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다... 아무튼 이 의뢰인을 통해 내가 느끼는 것은, 현재의 미국과 유럽이 두려워하는 것은 일본화된 중국일지도 모르겠다는 점이다...> 

 

 

코브역의 ‘디카프리오’가 무의식속에서 또 다른 무의식과 화해하는 그 장치를 우리는 가지고 있지 못하다.

설혹 그런 장치가 있다하더라도 놀란 감독의 의도와 계시가 맞는지는 더더욱 불분명하다.

심지어 이 영화가 ‘추출자 코브’가 ‘표적’인 ‘피셔’의 무의식에 도달하기 위한 ‘인셉션’이 아니라,

코브의 무의식에 도달하기 위한 이중의 장치를 설계한 ‘아리아드네’의 ‘인셉션’인지도 모른다.

참여자 각자가 서로의 꿈을 공유하면서 서로가 서로를 인셉션한다면 그것은 이미 꿈의 영역이 아니다.

왜냐하면 이것이 바로 현실에서 벌어지는 만인의 만인에 대한 투쟁이며, 공생이며 경쟁이기 때문이다.

 

 

<꼬이고 또 꼬이고 중첩된 각각의 단계와 영역들... 그곳에서도 흔들림 없이, 최선을 다해 임무를 완수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 영화의 포인트 맨으로 나오는 '아서'역이 그것이다... 그의 끝없는 신뢰를 바탕으로 한 일관된 충성과 치밀함은 매우 매력적인 캐릭터로 그의 역할을 상승시킨다... 단, 극 전개가 우리를 가끔 혼란스럽게 만드는 것은 자의식이 만든 적을, 그 꿈을 공유하고 지켜보는 타인 지켜야 한다는 점이다?  그래서 꿈이기도 하지만...^^>

 

 

그런 이유로 인셉션은 상상할 수 있는 많은 단초들을 수집하고 조합했음에도 불구하고 유쾌하지 못하다.

장자의 호접몽처럼 통쾌하지 못한 것은 주체와 자아를 충분히 관조할만한 여유가 없기 때문이고,

아바타의 분신처럼 낭만적이지 못한 것은 잠재된 무의식을 의식적으로 통제해야하기 때문이고,

융이나 라캉의 정신분석학만큼 과학적이지 못한 것은 집단적이거나 사회적 의식의 꿈이 없기 때문이다.

그리고 잠자야 꿀 수 있는 꿈보다, 내게는 힘을 주고 맑아질 수 있는 희망의 꿈이 없기 때문이다.

 

 

 

7.

나는 희망의 꿈뿐만이 아니라 망각의 꿈도 꾸고 싶다.

기억나지 않는다고 회피하거나 눈치를 보면서 거짓을 고하지 않아도 되는 뻔뻔한 망각의 꿈을...

그리고 내가 상상하는 모든 것을 쉽게 또는 원하는대로 얻을 수 있는 그런 부질없는 꿈도 꾸고 싶다.

또한 모든 관계에서 당당하면서도 자유로운, 그렇지만 건강하고 생산적인 무의식도 갖고 싶다.

문제는 이런 꿈과 상상과 희망은 <영화화 될 수 없다>는 점이겠지.

 

놀란 감독의 <인셉션>을 통한 꿈의 화석화와 기획능력은 그런 이유로 탁월함이 분명하다.

망각되지 않는 무의식과 의도적으로 의식하지 않는 기억의 회피, 그걸 그림으로 풀어내기 때문이다.

현실과 가상, 진실과 허위의 경계속에서 그는 꿈을 중층화 시켜 저장하고 타인에게 공개한다.

세상에 자신의 무의식을 타인에게 공개하고도 그것이 무의식이라고 주장하는 이가 어디 있겠는가?

그런 사기와 거짓과 왜곡을 영화라는 이름으로 당당하게, 거침없이 써내려가니까 감독이겠지...^^

 

우리는 그런 꿈을 말할 줄 모르고, 말해야하는 이유도 알지 않는다.

늘 꿈꾸기를 바라고, 꿈은 이루어질 수 있다고 기도하고 주문하면서도 말이다.

그는 혼자서 꿀 수 있는 꿈을 말하고 있고, 우리는 모두가 생각하는 꿈만 꾸고 있다.

차라리 그런 점이 이 <인셉션>이란 영화를 순간순간 떠올리며 이렇게 딴지를 걸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어쩌면 꿈은 모래성일지도 모른다... 모래...>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이렇게 긴 이야기를 끌어 온 것은 꿈을 꾸고 싶기 때문이다.

내 무의식의 편린을 찾고, 희망의 꿈으로 무장된 미소를 띄우며, 즐겁고 행복하기 싶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이 영화를 통해 나는 또 다시 현실의 냉정함을 배우며 확인한다. 

꿈을 제대로 꿀려면 합리적이서는 안 된다.

꿈을 제대로 꾸고 싶으면 정직해서도 안 되고, 거창해서도 안 된다.

더더군다나 꿈은 시시하거나 재미없을 필요도 없다.

어차피 우리들이 꾸고 싶은 꿈은 그냥 꿈일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나는 여전히 <잠자는 숲속 공주의 꿈>이 아닌 <모두의 희망으로서의 꿈>을 꾸고 싶다.

그리고 언젠가 그런 꿈들을 이야기하는 <꿈 같은 공간>을 만들어 보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