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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를 보고...

영화> Proof Of Life / 2000 / 러셀 크로우 - 관계와 사랑과 향기...1205

 

 

 

 

 

 

1.

 

책꽂이에서 책을 고르듯, TV에서도 영화를 고르는 시대가 되었다.

이 많은 진열장에서 어떻게 “후회하지 않을 시간”을 고를 수 있지?

나는 제목(영화든, 노래든, 책이든...)을 기억하는 사람들이 신기하다.

주인공 이름을 아는 사람들은 존경스럽고,

보지 않았던 영화나 모르는 책을 주저없이 선택할 수 있는 사람들은 더더욱...

왜냐하면 나는 본 영화의 스토리와 그 걸 보던 “때”의 “나”만 기억할 뿐이기 때문일 것이다.

 

그런 이유로 나는 봐야할 영화를 무수히 많이 체크하고 있으면서도

정작 보고싶은 영화의 제목과 주인공 이름, 그리고 스토리를 알고 있지 않다.

물론 한번 본 영화는 제목이나 주인공과 무관하게 장면 하나하나까지 기억하기는 하지만,

수십, 수백개의 목록에서 “누군가에게 추천하고 싶은 & 보고 싶은” 영화를 고른다는 것은

늘 가지 않았던 길을 선택하는 것만큼이나 나에게 항상 고역일 수밖에 없다.

 

 

 

 

 

아무튼 오늘은 그 고충을 견디고 고른 영화가 있으니 <Proof Of Life>다.

쿡에서 별★이 3개반(Daum에는 별이 4개)으로 조금 주저했지만,

러셀 크로우와 맥 라이언... 일단 주인공 이름을 알고 있다는 이유로 택했는데,

납치된 기술자의 아내와 인질협상가의 만남, 이별, 가족의 재회 등을 다룬 영화로

제목을 이해하는데 한참의 시간을 투여해야만 했다.

"proof ..." 삶의 증거? 증명? 어줍잖은 영어실력으로 제목을 해석하려니 여간 힘든 게 아니었지만

결국 영화 말미에 proof를 “견디는 힘”쯤으로 이해하기로 했다.

 

 

 

 

2.

 

스토리는 로맨스도 아닌데 액션도 아니고, 멜로나 추리, 다규멘터리(?)는 더더욱 아니다.

색깔도 청순하지도 농염하지도 않고, 긴박하거나 느슨하지도 않다.

뭐 그렇다고 생각만큼 탄탄한 것 같지도 않고... 애매하지?

그렇지만 제3세계에서 국가 기간산업 프로젝트를 보조하는 다국적기업을 매개로

그곳에 종사하는 기술자와 관리자를 매개로 한 인질 협상가의 시선을 통해 본 불편한 진실도 있고,

우애을 최고의 가치로 생각하는 가족이나, 휴머니즘과 비즈니스 사이에서 갈등하는 틈새 시장구조,

여기에 기회를 포착하려는 야심과 이벤트성 만남에서 신뢰와 절제를 넘나드는 감성적 교류까지

우리들 일상을 조금만 확대하더라도 그렇게 극적이지 않을 보편성과 다양한 개연성을 담았다는 건 분명하다.

 

아마 감독의 욕심이 많았는지 그는 이 영화 하나에 자신의 인생관을 모두 삽입시키지 않았을까 싶은데

그는 일상에서 현대의 모든 구조를 갈등과 대립으로 포착하려는 의무감에 사로잡히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선지 디테일에 호흡도 끊기고, 제목에 스토리도 사라져버린 그런 정도의 밀도...(그래서 별이 3갠가?)

단, 그럼에도 불구하고 내가 재미있게 본 것은 우리들 일상은 끊임없는 대립과 선택이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그 평범해질 수밖에 없는 결론에는 수많은 미련과 가지 않았던 길의(선택하지 않은) 결과라는 점,

그리고 우리들 삶을 견디게 하는 힘은 신념이든, 가족이든, 사랑이든 결국 “관계”라는 점이다.

 

 

 

 

문제는 그 관계라는 것이 과거로부터 지속되어 왔던 것인가, 새롭게 만들어지는 것인가,

외부의 시선으로부터 강제된 것인가, 아니면 너무 평범해서 의심으로부터 자유로운 것인가,

절제를 통해 완성되는 것인가, 도전과 모험을 통해 개척해가는 것인가에 대한 “선택”이 남는다.

감독은 이 영화를 통해 평범한 일상 속에 숨어있는 “관계의 완성”이란 과연 무엇인지 묻고 싶었던 거 같다.

그리고 그 완성의 관문은 항상 “사랑-가족/이성/직업/신념/꿈 등등등”을 통해 귀결되는 게 아닌가고 말이다.

 

 

 

 

 

3.

 

그렇지만 보는 내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던 질문은 엉뚱한 주제였다. “사랑...”

사랑은 주는 걸까? 받는 걸까?

아니면 주고 싶은 걸까? 받고 싶은 걸까?

주는 것과 주고 싶은 것, 받는 것과 받고 싶은 것...

“싶은”이라는 보조형용사가 들어가는 문장과 그렇지 않은 문장의 차이(뉘앙스)만큼

사랑은 “해 주고 싶은 것”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영화를 보는 내내 머리를 떠나지 않았다.

 

생각해보면 사랑만큼 풍부한 게 있을까 싶다.

또 그런만큼 우리들이 생각하는 사랑은 너무나 다양한 얼굴을 하고 있다.

주고 싶은 사랑, 받고 싶은 사랑...

살아가면서 우리들이 추억하면 간직하고 싶은 사랑은 어디 한두가지, 한두번 뿐이겠는가...

갖고 싶어 애틋함이 되고, 그것이 추억이 되고, 그리움이 되고,

또 설레임이 되고, 다시 미련이 되고...

 

그렇지만 분명한 것은,

사랑은 느낄 때 해야만 한다는 것이고,

사랑은 지금(!) 바로(!) 이 순간(!)이고, 그 때의 그 마음이라는 것이다.

그 마음의 표현 혹은 색깔이 기쁨일지, 슬픔일지, 행복일지, 고통일지,

절제, 모험, 질투, 시기, 집착, 분노, 인내, 외면, 무시, 포용, 쾌락일지...

또는 나누는 것일지, 지키는 것일지, 간직하는 것일지, 버리는 것일지, 채우는 것일지 모르지만

또 하나 분명한 것은 이미 싹튼 그 어떤 관계에서의 사랑도, 그 어떤 사랑의 감정도 아름답다는 것이다.

참는 것도 참지 않는 것도, 절제하는 것도 허용하는 것도 모두 다...

 

 

 

 

 

 

4.

 

생각해보면 나는 나의 시간에 참 진지하다는 생각이 든다.

준비하는 자세도, 임하는 태도도, 공유하는 순간에도 나의 시선은 너무 자유(?)롭지만,

주어진 그 순간과 그것을 접하는 처음과 끝의 일관성, 그리고 그 시간을 소중하게 여긴다는 점에서...

어쩌면 그것은 영화를 이해하기 위한 나의 습관이라기보다, 그때의 나를 염두에 둔 태도 때문일지 모른다.

그래서 나는 남들에게는 극적이지 않고, 무미건조하며, 그렇고 그런 영화까지 재미를 가지고 본다 - 정말로.

 

스크린에 비친 사회의 전반도 바라보고, 잠깐 지나가는 도시와 자연의 풍광에도 감탄하며,

연기에 임하는 사람들의 변화에도 공감하고, 이걸 포괄하려는 감독의 욕심까지 이해하려 탐을 낸다.

<Proof of life...> 삶을 견디는 힘이라 번안해본 이 영화 역시 제목부터 스토리까지

나는 나만의 시선으로 100여분을 몰입하며, 그속에서 관계와 사랑, 그리고 삶을 읽어보고 있다.

 

 

 

 

삶에 임한다는 건 자신의 의지만으로, 계획만으로, 준비만으로 이루어지지 않다는 걸

비로서 인정하면서부터 시작되는지도 모르겠다.

우리들의 삶에서 선택해야 하는 것의 잣대는 시간이 될 수도, 공간이 될 수도, 관계가 될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선택에 집중했고, 감정에 충실했으며, 그로 인해 성숙했다면

그 어떤 결과도 아름답다는 것도 인정해야 할 것 같다.

그리고 진정한 삶의 향기는 가까이에서 시작했을지 모르지만, 또 한편 향기란 멀수록 맑을 수도 있다.

중요한 것은 그 향기를 가질 수 있을만큼 지금 그 순간에 충실했는가?! 하는 점이 아닐까??

그랬다면 그 향기는 오래오래 나와 나의 관계를 지속적으로 행복하게 만들어 주는 마법이 아닐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