쓸쓸하고 찬란하神 도깨비
1. 찬란하神 도깨비
한바탕 도깨비장난이었을까?
드라마에 시간을 뺏겨 한참 울고 웃었다.
물론 내가 사수했던 본방이라 해봐야 마지막 2편에 불과하지만,
어딘가 연원이 있었을 것 같은 설화와 민담을 현재로 되살려 놓은 구수한 재치와,
내공이 느껴지는 응축된 대사와 절묘하게 어우러진 센스 있는 독백들,
그리고 이승과 이계, 과거와 현재, 현실과 상상을 넘나드는 판타지의 얼개를 갖추면서도
도깨비를 중심으로 이어진 인연과 첫사랑이란 중심을 잃지 않은 일관된 구성...
여기에 몽환적이거나 아련한 음악들이 뒤섞인 한편의 드라마에 푹 취해 있었다.
야~ 이 정도면 우리의 정서와 풍토를 잘 버무린 한국판 판타지의 전형이 아닐까?
<Daum 스크랩... 드라마 "도깨비"와 관련된 모든 이미지는 인터넷에서 스크랩하였다... >
마른하늘의 천둥번개, 한겨울에 피어난 벚꽃, 이런 게 바로 도깨비장난이었나?
물론 이런 에피소드가 드라마에 재미를 더해줬지만,
아무래도 이야기의 기본 얼개가 흥미진진했던 거 같다.
천년 세월만에 이루어진 첫사랑과 역시 천년의 시공을 넘나드는 은원이 버무러진 -
서정이라면 빠질 수 없는 애절한 사랑이야기로 도깨비는 시작한다.
은행나무처럼 지고지순한 기다림도 아니고,
신탁을 빙자한 제우스의 의미 있는(?) 바람기도 아니지만,
버림과 비움이 만드는 희생은 서사를 떠나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무겁지 않게
비극만이 줄 수 있는 카타르시스의 오랜 여운을 만들지도 모른다는 기대를 갖게 했다.
그렇지만 그리스의 고대 비극이 현대 민주주의사회의 비극과 무조건 닮은 건 아니다.
게다가 킬링타임을 모토로 제작되는 TV드라마의 특성은
관객들의 열망이란 이름으로 비극마저 희극으로 바꿔버린다.
때문에 기본 얼개의 비극은 먹먹했지만 무거운 한숨만 강요하진 않았다.
스마트폰 촛불만으로도 소환됐던 도깨비는 無로 돌아감과 동시에 모두에게서 잊혀지지만,
신의 섭리 때문인지 간절함 기도와 염원 속에서 도깨비는 다시 9년 만에 부활한다.
잊어야만 살아갈 수 있었던 기타누락자는 떨어지는 단풍잎을 바라보며 기억을 되찾고,
(이때 기타누락자 김고은의 '보고싶다'는 절규는 참 압권이었지~~~ ~~~)
도깨비와 도깨비신부의 첫 행복과 완벽한 타이밍은 또 다른 희생을 강요했지만,
망각의 차를 거부한 인간-기타누락자의 의지는 첫사랑의 신탁을 완성한다.
또 도깨비와 저승사자의 애증은 우정으로 승화하고,
생을 포기했던 저승사자의 저주가 풀리는 날 왕유는
망각에 굴하지 않았던 김선과 천국의 계단을 함께 오르며 내생에 재회하고...
해피엔딩을 위해 각색된 반전이 어설픈 것만은 아니어서,
에필로그처럼 다뤄진 극후반은 커플들이 다시 결합될 수 있는 조건을 갖추는데,
김신와 지은탁, 왕유와 김선, 900여년전 인연의 얼개가 현세에 그대로 재현되지만,
또다시 30년 후, 지극한 우연 속에 현생이 아닌 이생에서 서로를 확인하며 웃는다.
진정한 사랑은 간절함과 희생,
버려서만 채워야 하는 아픔과 고통을 초월해야만 얻을 수 있는 것일까?
그 인연들은 어차피 과거에도, 현생에서도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들이었을까?
아니면 망각과 상실의 끝자락에 놓인 화해와 용서 때문일까?
그들의 우연한 인연과 재회, 그리고 사랑과 평화의 완성을 위한 조건은
내게 또 다른 의미로 다가온다.
그대만은 해피엔딩... 써니에게 저승사자가 이야기했던 엔딩은 바램만으로 되는 걸까?
가벼운 자극과 인스탄트에 목말라하는 우리들의 아쉬움이 웃을 수 있는 결말을 강요했겠지만,
우리들의 판타지 <도깨비>는 저승과 來世(내세)까지 사유의 시공간을 넓혀줬다.
여운은 엷어지고 카타르시스는 짧아졌지만,
때로는 애틋하게 때로는 먹먹한 장면들이 나를 울고 웃게 만들면서
찬란하神 도깨비의 사연에 한동안 푹 빠져 있었다.
2. 쓸쓸하神 도깨비
많이도 눈물을 흘렸다. 작가의 오랜 준비와 탄탄한 내공도 한 몫 했지만,
주제보다 곁가지에 더 진지한 나의 오랜 습성 때문인지,
나의 대부분 눈물은 죽음을 대하는 인간들의 다양한 상황에 기인한지도 모르겠다.
영원한 이별의 문턱 (혹은 갈림길)인 죽음에 희비가 따로 있겠냐만,
<도깨비>에는 결코 찬란할 수 없는 수많은 죽음이 나온다.
편안한, 서글프고 애절한, 그리고 억울한 죽음...
인간 스스로 선택할 수 없는 수많은 죽음의 군상들에 나는 참 많은 상념을 할애했다.
죽어서도 자신의 삶을 관조할 수 있을까?
죽으면 현세의 은원과 소망은 망각의 차 한 잔으로 비워질 수 있을까?
저승문에 다다라 恨을 풀어줄 힘, 나를 반겨줄 또 다른 기다림이 있을 수 있을까?
이미 현실적이지 않다는 전제에도 불구하고 죽음을 대하는 인간들의 면면에서 나는
산자의 상실감, 잊혀짐을 두려워하며 살아가는 자들의 몸부림을 읽는다.
물론 우리들의 생은 기억, 추억, 노스텔지어 외에도
이별과 단절, 소외와 상실이란 아픈 나이테들이 겹겹이 쌓여 농축된다.
그리고 이것들은 모두 미래의 꿈이 아닌 과거에서 연속된 현재의 감상이기에,
우리의 정신과 감성을 지배하는 대부분의 심상은 과거에 기인함이 분명하다.
문제는 그런 과거 - 기억만으로 살아갈 수 없다는 것...
문득 생각해 본다.
어쩌면 우리들은 신이 배려하는 망각이 추억과 균형을 이룰 때
비로소 안도하고 지금을 살아가는 거 아닐까?
(잃어버린 기억의 아픔을, 약에 의존하지 않고...)
내가 본 드라마 <도깨비>는 균형이란 미묘한 틈새에서 외줄을 타고 있었다.
(도깨비의) 불로장생은 끊임없는 이별에 오열해야 하는 신의 저주로,
예측불가한 신통력은 피폐된 정신을 잊게 하는 도깨비란 하급신의 장난으로 대체되고,
죽음과 망각을 동일 선상에 올려놓은 저승사자가 우려낸 찻잔에서
신이 점지한 운명을 벗어나려는 욕망의 간절함과
인간의 선택이란 취하는 것이 아니라 버리는 것이어야만 하는 비극을 읽어본다.
결국 상실이란 굴레를 벗어나지 못하는 인간의 운명은
박애와 자비보다 간절한 사랑의 일탈과 희생을 통해서만 완성되는 것이었을까?
(희생은 당사자가 아닌 화자들의 뒷담화속에서만 존재할 수 있다.)
모두가 망각 늪에서 현실을 즐기고 있을 때,
우리는 상실을 아픔으로만 담지 않았던 몇몇의 존재를 더 애틋하게 바라보며 동화된다.
어차피 망각을 자신의 것이라 생각하지 않고 질문으로 대체하는 神은 나와 무관하다.
잊혀진 수많은 생명들의 소멸엔 무관심하면서, 오로지 점지할 때의 기쁨만 기억하는 삼신할머니의 바람기도 나와 무관하며,
저주란 이름으로 무수한 이별에 아파하는 도깨비도 신통력으로 보상을 받으니 이도 열외,
유일하게 신과 도깨비와 저승사자를 모두 잊지 않았던 써니-김선의 슬픔을 느낄 때
우리는 그녀의 시선으로 삶과 죽음을 또 다른 관조의 대상으로 승화시키며 동화된다.
어쩌면 우리들의 기억, 추억-향수와 갈등하는 상실-이별은 그녀와 닮지 않았을까?
30년을 버리지 못하고 그 작은 가슴에 다 담고 어찌 버텼을까? 안타까워하면서도,
우리들이 살아가는 모습이 그녀와 똑같다는 생각을 한다.
다만, 그녀는 작은 소리에도 귀기울이는 신에게 독설을 내뱉으며 단절을 선언한다는 점.
더 이상 질문하지 않으며, 더 이상 과거에 연연해하지 않겠다는 써니의 외침을 생각하며
나는 그게 작가가 세상을 바라보는 窓(창)이었고 프레임이었을 거라 미루어 짐작해본다.
그래~ 어쩌면 우리들은 그렇게 잊으려고 살아가거나 잊지 못해 살아가는 거 아닐까?
쓸쓸함은 천년 묵은 도깨비가 아니라, 한평생을 담담히 살아가는 써니의 몫인지도...
3. 찬란하고 쓸쓸한 판타지...
도깨비...
방망이 대신 가슴에 칼을 꽂은 도깨비가 익숙한 것은 아니지만,
우리들에게 도깨비는 참 한국적임에도 이미 잊혀졌던 존재였다.
중국의 귀신도, 서양의 악귀도, 페르시아의 요정도 아니면서,
일본 오니의 탈을 쓴 도깨비는, 한동안 요괴형상에 귀신사촌쯤으로 전락했었다.
잠깐...
오랫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 존재했던 도깨비, 유물들을 통해 살펴본다...
1. 먼저 귀면와를 한자리에...
우리들에게 익숙한 도깨비는 아무래도 기와지붕의 망새나 막새 등에 많이 살아있지 않나 싶다.
특히 귀면와라 불리는 것들... 내가 봐왔던 귀면와를 한자리에 모아본다.
<부여 박물관...>
<경북대 박물관...>
<경북대 박물관>
<경주 박물관...>
<춘천 박물관...>
<춘천 박물관>
악귀를 쫓는 도깨비...
우리는 언제 부턴가 전국적으로 발견되는 귀면와의 형상을 도깨비라 부르지 않았을까?
2. 그럼 이 도깨비 형상은 언제부터 사용됐을까?
<경주 박물관... 금관총(5세기말)에서 발견된 못신의 바닥... 이미 삼국시대부터 도깨비 형상은 귀면와 뿐만 아니라 다양한 용도로 제작, 사용됐다고 생각해서 찾아봤다...>
<중앙박물관 못신... 흔히 금동신발이라 불리는 못신은 기마병들이 전투에 출병하면서 신던 무기다... 이 유물은 고구려산으로 설명되고 있으며, 신라, 가야, 일본의 고분에서도 발견되는데, 가장 대표적인 것은 백제 무령왕릉 출토품이 아닐까 싶다...>
<여수 흥국사 홍예교... 선암사 뿐만 아니라 흥국사에도 귀면상이 있는데, 악귀를 물리치고 우리 일상을 지켜줬으면 하는 공공시설에도 이 형상들은 존재했다...>
<창덕궁의 귀면...>
<반대편은 약간 다른 모습으로...맞는지 모르겠다...?? >
鬼面(귀면)이라 쓰고 도깨비라 읽는다??
아무튼 이 도깨비 형상은 삼국시대부터 조선시대, 그리고 현재에 이르기까지 오랜동안 우리 민족과 함께 했다...
3. 귀면의 정체는?
도깨비얼굴은 어떻게 창조되었을까?
치우에서부터 처용에 이르기까지 험상궂고 붉은 얼굴을 했을 것 같은 도깨비는, 용의 정면상이었을 거라는 강우방 선생의 주장에 나는 동감하는 편이다...
<고달사 원종대사 부도비의 귀수와 이부...>
<용의 얼굴을 정면에서 보면, 그게 우리들이 보는 귀면의 정체가 아닐까??>
<중앙박물관의 귀면...>
4. 도깨비는 어디에...
시대를 내려와 이 귀면에서 뿔이 없어지면 우리들이 일상적으로 보는 도깨비가 되는 게 아닐런지...
그리고 그 얼굴들은 불상의 모습으로 장승의 모습으로, 혹은 기와와 돌의자 등, 악귀를 쫓아주는 우리들의 수호신으로 항상 우리 주변에 존재하지 않았을까?
<우리네 도깨비는 여타 민속의 악귀나 수호신과는 다른 느낌을 준다... 라틴아메리카 박물관에서...>
<부여박물관... 귀면와와 판돌들에 이 형상이 있었다는 건, 우리가 먹고 쉬는 가장 가까운 공간에 함께 존재한다는 말...>
<선운사 도솔암 마애불좌상... 이 모습도 불상보다는 귀면-도깨비상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 골라봤다...>
<민속박물관의 장승들...>
<벽송사의 호법대장군상... 마을어귀와 길목에는 항상 수호신들이 있었다...>
<호림미술관... 차를 마실 때 썼을까? 바둑 둘 때 사용했을까?...>
<제주 돌하루방까지 이들의 사촌으로?? 수호신의 범위를 무한 확장해 본다...^^>
그렇지만 <도깨비>로 인해 도깨비는 신통력을 갖춘, 귀신이 무서워하는 존재로 환생했다.
무엇보다 권선징악의 수호자로,
너무 미련해 천년의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 백년전 첫사랑을 잊지 못하는 아이콘으로,
가장 인간적인 神으로...
(공유의 큰 눈과 선한 마스크는 도깨비 이미지와 잘 매치된다...^^)
또 있다. 드라마 <도깨비>는,
귀신 곡할 노릇이란 의미, 도깨비에 홀린 게 무엇인지
이유없이 내뱉고 들었던 익숙한 민담들의 의미를 짜 맞추는 쏠쏠한 재미를 보장했다.
데자뷰, 기승전결 없는 단상들이 조합되는 공상,,,
이제는 이계의 존재인 도깨비, 귀신, 저승사자들의 농간이 우리 주변을 꿈틀거릴 거 같은
판타지와 신세계를 현재에 - 우리 공간에 새롭게 부활시켰다.
답답하고 녹록치 않은 현재, 그리고 불확실한 미래의 틈바구니에 판타지가 존재하겠지만,
잠시의 일탈이 우리 존재의 관계를 무한 확장하며 울고 웃게 한다는 힘이 판타지의 존재이유다.
그것만 있었을까?
천진난만하게 보이는 도깨비를 보며 어르신-노인들이 다시 생각된다.
상실과 이별과 망각이 일상이 돼버린 노인들, 미래가 없는 그들은 도깨비를 닮았다.
산전수전 다 겪은 그들에게 남는 것은 무엇이었을까?
세상사에 초월한 듯 무미건조하면서도,
때로는 능청맞기도 하고, 때로는 어린아이들처럼 장난기 어린 노인들.
몽니로도 보이고 때로는 심술로도 보였던 그들의 변덕은,
망각 없이는 하루하루를 버틸 수 없는 아픔을 잊기 위한 몸부림이 아니었을까?
도깨비에 경의를, 노인들에게도 경의를...
나도 하루하루 나이를 먹어가고, 드디어 늙어질 것이다.
내가 기억하는 하루하루의 프레임들이 단조로워 만큼 나의 시간은 빨라진다.
상대적으로 느려지는 몸과 느슨해진 마음들만큼 나의 하루, 한달, 일년은 더 짧아지고.
나이를 먹는다는 게 그런걸까?
생로병사의 섭리를 벗어나지 못한 자연인인 나는,
도깨비의 기억을 펼쳐보며 나의 늙은 미래를 그려본다.
나도 잊혀지지 않기 위해, 잊기 위해, 또는 잊지 않기 위해 몸부림을 칠까?
아직 늙지 않았다 자부하는 내가, 망각과 상실과 죽음을 관조하는 게 너무 진지한가?
쓸쓸하고 찬란한 노인들, 찬란하고 쓸쓸한 도깨비, 그리고 판타지에 다시한번 경의를...
4.
인간과 인간이 아닌 존재들의 인연과 스토리를 보면서 그리스 신화도 연상해보고,
섭리를 거부한 선택과 비극을 보며 적지 않은 생각들을 정리해본다.
서사와 서정이 얽히고,
공상과 설화가 어우러지면서 풍부해지는 감성에 우쭐해본다.
별에서 온 그대 이후 한국판 판타지의 전형이 만들어진 것 같아 즐겁고,
이제야 우리 감성으로 엮어낸 스토리텔링이 문예부흥처럼 풍부하게 다가와 좋다.
단순한 몇줄 스토리로 정리될 드라마는 끝났지만
나는 여전히 <쓸쓸하고 찬란하神 도깨비>를 붙잡고 있다.
혹시라도 지금의 내가 놓치고 있는 무엇인가를 찾기 위해.
허하고, 집중하지 못하고, 꿈을 꾸지 못하는,
그래서 잃어버린, 잊어버린 판타지를 응원하는 나를 바라본다.
이제 다시 현실로 돌아와야겠지?
지금에 갇혀 스스로에 매몰된 거 같은 나를 놓기 위해,
다시 한 번 의미, 관계, 미래???를 생각하며,
또 내 눈물들에 의미를 부여하기 위해 <도깨비> 음악을 찾고 영상을 그려본다.
그러고보니 <도깨비>에는 참 많은 상징들이 등장한다.
신의 뜻과 의지가 작용할 때는 하얀나비가 날아다니고,
저승사자와 귀신의 등장에는 검은 연기가,
도깨비의 신통력에는 푸르스름한 녹색기운이 일어난다.
저승사자와 써니 사이에 놓인 노란 수국은 ‘짝사랑’이란 꽃말을 가지고 있다하고,
우리들의 간절한 염원을 대변하는 촛불은 도깨비 소환의 도구로 상징된다.
그래도 <도깨비>는 꽃과 함께 시작해 꽃으로 마무리 됐으니,
그 꽃들의 향기를 생각하며 나의 감상을 마무리해본다.
(도깨비빤스를 상징으로 사용하지 않아 다행이다...ㅋㅋ)
먼저 기타누락자의 아홉 살 생일 때 받은 배추는 ‘쾌활, 명랑’이라지?
축복 혹은 희생도 부연되지만 아무튼 그녀의 생애는 그것들의 결핍이거나 완성이었다.
처음 도깨비와 기타누락자의 만남은 메밀꽃으로 시작하지?
꽃말은 ‘연인’이다. 복선이고 암시겠지.
조실부모하고 사고무탁한 기타누락자의 졸업식을 축하한 꽃은 목화.
‘어머니의 사랑’이란다. 어머니의...
도깨비가 이승과 저승을 헤매다 쓰러진 눈밭에 꽂힌 마른가지는 당귀꽃.
재회란다... 그것도 남편이 돌아온다는 의미의 재회...
그리고 마지막, 환생한 은탁이가 들고 있던 민들레는 ‘불사신, 사랑의 신탁’이라고...
그것도 내 사랑을 그대에게 드린다는 의미의...
그래~ 그렇게 그 꽃말들처럼 자잘한 소품까지 복선으로 깔고,
상징적 언어들을 차용했다면 이건 온전한 작가와 감독의 내공.
그래서 <도깨비>가 더 풍부하게 느껴졌을까?
이제부턴 때 아닌 겨울에 피어난 벚꽃 소식을 접하면,
그 순간 그 주변 어디쯤에
도깨비가 기뻐할 또 하나의 사연이 생겼을 거란 상상을 해보기로 했다.
상실과 단절, 죽음을 대면하는 우리들의 일상,
희생과 화해, 용서로 균형을 이루는 우리들의 세상,
쓸쓸하지만 찬란한 많은 것들의 조화에는 항상 간절한 염원과 용기가 필요할 게다.
우리들의 질문에는 항상 우리들의 선택이 있었고,
백년을 미처 채우지 못하는 인간의 짧은 생애를 無로, 또는 무한으로 확장할 수 있는
판타지를 꿈꾸며 라이타를 만지작거린다.
(허걱~ 이건 담배 때문인데??? ㅎㅎ)
누구나 도깨비-수호신 하나쯤 가지고 있어야 하지 않을까 상상하며 달을 본다.
이것도 한바탕 도깨비장난일텐데...
'영화를 보고...'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IMDB 선정 2000년대 최고의영화 TOP50 (0) | 2016.11.27 |
---|---|
영화> Proof Of Life / 2000 / 러셀 크로우 - 관계와 사랑과 향기...1205 (0) | 2012.05.18 |
영화> 아메리칸 히스토리 X... 1112 (0) | 2011.12.31 |
영화> 인셉션 - 내 꿈 꿔~~~^^ 100830 (0) | 2010.08.31 |
인도영화> 조다 악바르 / 왕의여자 - 인도/인도인들...100724 (0) | 2010.07.24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