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긴 일차선이 빨라.
이 “길”에서는 이차선이 좋고!!!
모처럼 조수석에 앉아서 차선을 유도하고 있다.
이 “길”에서는 네번째 차선이 빠르고, 저 “길”에서는 삼차선이 빠르고...
나는 “길”을 달리는 게 아니라 차선을 달리고 있다.
생각해보면 “길”은 다녀라고 있는 것인데,
나의 머릿속에는 “길”에서 가장 빨리 벗어날 수 있는 방법만 찾고 있다.
이제는 네비게이션이라는 게 있어 머릿속의 “길”도 지워버렸다.
예쁘장할 것 같은 아가씨 목소리의 ‘전방 50m 좌회전, 우회전’만 들릴뿐,
나에게 “길”은 다만 달리는 공간으로만 남았다.
목적지까지 가는 과정, 혹은 수단으로서의 “길”을 말하고자 하는 것은 아니다.
“길”을 달리면서, 나는 “길”에서 느껴야할 많은 것들을 보지 못하다는 걸 고백하는 것이다.
틀어놓은 라디오 소리와 간간이 켜는 CD 음악 소리에 시선을 포기하고,
늦었다는 강박관념에 나를 추월하는 차와 나에게 앞을 막는 차만을 바라본다.
만약 여유가 있다면, 이보다 빨리 갈 수 있는 “길”은 없는가를 찾는다.
“길” 위에 서있는 나는, “길”에서 가장 빨리 벗어날 수 있는 “길”을 찾고 있다는 것이다.
가끔 기억나는 “길”들을 생각한다.
담양 메타쉐콰이어 가로수 “길”에서는 베토벤의 장중한 음률을 기억하고,
청주 플라타나스 가로수 “길”에서는 짙은 녹음의 상큼한 향기를 기억하고,
전군가도에 휘날리는 벚나무 “길”에서는 활짝 펴진 화사한 미소를 기억하고,
원주에서 충주 넘어가는 19번 국도 어디쯤의 그럴 수없이 평화로운 햇살을 기억하고,
강진 천일각에서 바라보이는 포구의 더할 수 없는 넉넉한 바람을 기억하고,
이어졌다 끊어졌다, 숨박꼭질을 즐기며 바다(!)를 볼 수 있는 7번 국도도 기억한다.
좋은 “길”이 없어 “길” 위의 풍경과 정경과 광경을 보지 못하는 게 아니라,
막상 “길”을 나서면 “길”이 열어놓은 다양한 상상의 시간을 내 스스로 포기하고 있다는 말이다.
“길” 위에서 사람을 보지 못하고, 자연을 보지 않고, 문명을 보지 않는다면,
“길”이 내게 주는 네트워크와 정보와 시간을 포기하는 건 아닌지...
시간과 목적지와 약속 혹은 다짐을 핑계로 나는 절대 느려서는 안 될 현실에 강박된다.
송도에서 넘어가는 인천대교와 청라에서 넘어가는 영종대교는 멋진 풍경들을 제공한다.
오늘도 영종대교로 떠오르는 아침햇살을 바라보며 출근했고,
영종대교로 떨어지는 주홍빛 석양의 햇살에 마음을 뺏긴 채 퇴근했다.
이런 멋진 풍경과 광경을 “길”이 내게 제공함에도 불구하고 그걸 느낀 때는 미미하다.
어느 순간부터 “길”위에서 나는, 지금 이 순간이라는 시간을 잃어버렸다.
마냥 달리기만 하고, 자꾸 늦었다 조급해 하고, 가서 해야할 일만 생각한다.
“길” 위에 머무는 시간을 즐길 필요가 있다.
“길”에서 볼 수 있는 더 많은 것들을 누릴 이유가 있다.
“길”을 나서면서 조금은 빨리 출발하고, 느리게 도착 할 필요가 있다.
자꾸 넓어지는 “길”, 자꾸 빨라지는 “길”, 직선화되는 그래서 친절하지 못한 “길”에서
나는 “길”의 목적과 기능에서 조금 더 자유로워져야할 이유가 분명히 있다.
“길”은 공간이고, 과정이고, 그 자체가 하나의 목적이다.
“길”에서 시간에 쫓기고,
“길”에서 목적만 생각하고,
“길”을 수단으로만 생각한다면
나는 내가 생각하는 것보다 많은 것을 “길” 위에서 포기하게 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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