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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 風,造,關...

내가 좋아하는 공간 6> 6. 허허로운 공간(3)...110320

 

 

    6-1) 영양 입암면 산해리 봉감오층탑 - 적막의 공간

    6-2) 창녕 창녕읍 옥천리 화왕산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 그리움과 기다림의 크기...

    6-3) 충주 가금면 탑평리 중원칠층탑 - 열린공간에 세워진 이정표

    6-4) 경주 남산 용장골 용장사지삼층탑과 석불좌상 - 호연지기를 느끼고 싶거든...

    6-5) 강릉 구정면 학산리 굴산사지 당간지주 - 풍요속에 자만을 경계하는 긴장감

 

 

 

 

 

6-4) 경주 남산 용장골 용장사지 삼층탑과 석불좌상 - 호연지기를 느끼고 싶거든...

(이 글은 2003년1월에 쓴 글을 참조하였다)

 

청량사, 법수사, 수도암, 늠비봉...

팔공산 관봉석조여래, 경주 남산 신선암 마애불, 창녕 화왕산 관룡사 용선대...

그리고 부석사, 보리암, 수종사, 보문사...

공통점이 무엇일까?

단적으로 말하면 넓은 조망이 가능한 높고 극적인 공간이라는 점이다.

그리고 조금은 다를지 모르겠지만, 그런 곳을 대표하는 곳 중 하나가 경주 남산의 용장사지다.

 

높다는 게 항상 좋음과 최선을 뜻하는 건 아니다.

충만한 자연을 품에 앉고 있음이 항상 호방하고 호탕함과 동치는 아닐 것이다.

굽어보고 내려 보는 것이 항상 군림과 권위만을 의미하는 바도 아닐 것이다.

계곡과 벌판과 산 굽이굽이를 품에 안고서 의연하고 당당하게 서있는 탑과 석불좌상...

호연지기를 알고, 호연지기를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아는 사람이 만든 공간이 용장사지다.

 

 

 

 

 

 

4단의 층급받침이지만 4.5m의 적절한 규모에

전형적인 신라탑의 비례와 체감률을 가진 잘 생긴 탑하나...

게다가 올려만 보는 게 아니라 내려 보아도 시원한 정경이다.

완전한 꼭대기가 아니지만 어디서도 보이는 접근성을 가지고 있고,

천길 낭떠러지가 아니면서도 가장 시원한 조망권을 가졌다.

꼭 그 자리... 조금 뒤도 조금 앞도 아닌 꼭 그 자리...

아마도 삼층석탑이 서있는 곳의 위치가 그렇지 않을까 싶다.

 

 

그리고 용장사지에는 그런 삼층탑만 있는 것이 아니다.

사왕천, 도리천, 야마천 삼단의 기단부와 도솔천을 형상화 시킨 연화 원형대좌에

의젓하고 거리낌없이 의연하게 앉아 계신 얼굴 없는 미륵불상이 모셔져 있다.

3단의 원형대좌... 너무나 도식적이고 작위적인 저 모습이

어떻게 저렇게 하늘에 자연스럽게 조응하고 동화되어 있을까...

 

 

그 높이에 앉아있던 부처님의 표정은 어떠했을까?

얼굴이 아예 없음에도 불구하고 하늘을 떠받치고 있다는 느낌은

의연하고 차분한, 그리고 풍파에 초연한 자세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삼층탑은 땅을 내려다보지만, 석불좌상은 하늘을 떠받치고 있는지도 모른다.

삼층탑이 용장골 바위전체를 하층기단으로 삼았다면

하늘을 광배로 삼은 석불좌상이 함께 있어 용장사지는 더욱 빛이 난다.

 

 

 

 

용장사지는 속이 후련해질만큼 넓거나 높거나 크고 광활한 곳은 아니다.

넓지 않은 공간에 조성된 석불좌상도 그렇고, 용장골을 기단으로 삼았다지만 삼층탑이 큰 것도 아니다.

용장사지가 자리한 곳도 맨 꼭대기가 아닌 2% 낮은 곳에 있어 천하를 굽어보며 군림하는 위치가 아니다.

그러나 만약 용장사탑이 감은사탑만큼 컸다면, 석불좌상이 탑만큼 높은 곳으로 올라왔다면 어떻게 됐을까?

 

용장사지는 심산유곡 은둔과 수양의 장소도 아니며, 유유자적 유희와 소요의 공간도 아니다.

경주에 있지만 경주를 보지 않고, 남산 한가운데 있지만 남산을 모두 포괄하는 곳도 아니다.

바라보이는 자연과 딱 어울릴만한 크기와 높이, 그 곳에 필요한 만큼의 공간으로 조성되었다.

석불좌상을 보려면 주변의 공간을 잊어버리고 높은 하늘만을 바라보게 시선을 유도했을 뿐이고,

삼층탑은 산하를 내려보고, 먼 하늘을 올려보기에 꼭 알맞은 위치를 점하고 있을 뿐이다.

 

 

청량사, 법수사, 팔공산, 신선암, 부석사, 보리암... 점하는 위치는 비슷할지 몰라도 그 맛은 모두 다르다.

내가 굳이 용장사지를 골라 호연지기를 일컫는 이유는 가장 극적이어서가 아니라 가장 적절하기 때문이다.

이곳에 서면 탑이나 석불에 몰입되지 않고, 그렇다고 산과 물과 들판으로 시선이 흩어지지도 않는다.

주변의 자연과 적절히 조화를 이루면서, 조그마한 변화를 통해, 얻고자 하는 걸 잃지 않은 곳이 여기다.

어쩌면 조금 더 넓게, 조금 더 깊이, 조금 더 높았으면 하는 아쉬움이 있어 오히려 인상적인 곳이다.

은둔과 유희, 절제와 수양, 소요와 도전을 모두 담을 수 있어서, 부족한 무엇인가를 느끼고 깨달아,

이제야 완성을 향해 나아가는 출발을 어떻게 해야할지 호기심을 자극하기 때문에 사랑받는 곳이다.

 

그런 이유로, 이곳에 서면 호연지기가 무엇인지 다시 생각해보곤 한다.

군림하지 않으면서 방탕하지도 않고, 높으면서도 깊어야 갖출 수 있는 기운.

땅을 바라보고 하늘을 우러르는 거침이 없는 넓고 큰 기개...

용장골 만큼 높아서 큰 게 아니고, 하늘만큼 넓어서 당당한 게 아니라

정제되고 과장이 없으면서 거침이 없고 군더더기가 없어 시원시원한 게 호연지기다.

 

 

 

생각해보면 우리나라 사람들만큼 시원하다는 말을 좋아하고 즐기는 사람들도 없을 것이다.

추운 겨울, 따끈따끈하고 얼큰한 국물을 마시면서 우리는 속이 시원하다고 말한다.

답답한 현실, 꼬여있는 관계와 일이 풀렸을 때도 우리들은 속이 다 시원하다고 말한다.

그래서 그런지 우리들은 앞이 탁 트이고 넓은 조망이 보장되어 충분히 멀리 보이는 곳,

어느 곳하나 막힌데 없이 사방이 자유롭게 보이고, 시원한 바람이 불 것 같은 곳들을 정말 좋아한다.

 

생각해보라, 로마에 영국에 중국에 일본에 동남아에 이런 공간들이 많이 있는지...

산꼭대기 독일의 성들은 방어를 위해 건축되었고, 일본의 천수각은 군림하기 위해 건축되었고,

로마의 두오모는 신을 위해 건축했고, 미국의 초고층은 인간의 의지를 실험하기 위해 건축되었지만,

우리들은 산꼭대기, 절벽, 산허리에 풍류와 수양과 기도를 위해 정자를 짓고 불탑, 불상을 조성했다.

그 곳에서 우리는 자연을 벗 삼아, 시원한 바람을 즐기고, 음주가무(?)를 즐기고, 소망을 기원한다.

우리네 그것은 꼭 필요한 크기로 자연과 주변 환경을 거스리지 않아 그것(!)이 없어도 무방하지만,

그것이 그곳에 있어서 자연공간이 인간의 영역으로 전환되는 지점을 찾아 건축된 것들이다.

 

 

그 출발이 어디일까?

신라인들이 아니었을까?

경주 남산 용장골 용장사지에 오르면 신라인의 활달한 발상과 의지와 기개를 만난다.

시원하고 호탕한 웃음이 절로 나오는 곳.

부처의 장엄에 고개 숙이기보다는, 대자연의 장관에 위축되기보다는,

마음 한구석의 자잘한 주름하나까지도 쫙쫙 펴게 하는 시원함을 담지한 깊고 높은 기상을 만난다.

그리고 그 곳에 그 탑과 그 불상이 있어 더 멋진 곳으로 만들 줄 아는 사람들을 만날 수 있다.

허망하지도 공허하지 않고 위축되지 않는 호연지기를 느끼고 싶다면 용장사지에 올라볼만 하다.

 

 

 

 

6-5) 강릉 구정면 학산리 굴산사지 당간지주 - 풍요속에 자만을 경계하는 긴장감

 

강릉 구정면 학산리에 가면 충분히 넉넉한 공간에 우락부락한 당간지주가 한 기 서 있다.

아무것도 다듬지 않은, 거친 정 자국이 울퉁불퉁 남아있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큰

높이 5.4m, 보물86호로 지정된 굴산사지 당간지주다.

 

대부분의 폐사지들이 그렇지만 아직도 조용하고 그 규모와 실체에 대해서는 설화만 남아있는

그래서 한편으론 허허롭고 한편으론 적막하며, 한편으론 안타깝게 남아있는 게 폐사지의 모습이다.

그렇지만 넓고 풍요로운 굴산사지 어디에서도 안타까움이나 허전함은 느낄 수 없다.

그런 넉넉한 공간, 무엇을 건축하고 경계를 만들기 조심스러운 공간이 굴산사지다.

 

 

 

 

 

아무것도 없는 공간,

무엇을 건축하여 채워야만 존재할 수 있는 곳이 아닌,

텅 빈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풍요롭고 넉넉하며 스산하지 않은 공간,

외로움과 쓸쓸함, 허망함과 덧없음을 한탄하지 않아도 될 폐사지가 굴산사터다.

 

동해 가까이, 대관령에 의지해 황량하지 않고, 풍요로운 벌판의 생명들 때문에 그런 생각이 들까?

아니면 너무 천연덕스럽고 거칠고 당당한 당간지주 때문에 그런 느낌이 들까?

그렇다고 굴산사지 당간지주만 보고서 조악하고 고졸하다고 폄하할 이유가 없다.

세련됨과 정연한 느낌은 갖추지 못했지만, 화려한 조각과 섬세한 손놀림의 부도탑이 공존하고

대관령국사성황신, 지역의 수호신이 되어 잊혀질 수 없는 전설을 만든 곳이기 때문이다.

 

 

 

굴산사지에 가면 범일국사가 창건했다는 무량사의 오층탑과 이곳을 점지했다는 정취보살이 생각난다.

무량사가 위치한 만수산 서편에는 성주산문 개창자 무염이 창건한 성주사가 있고, 그의 호가 무량이다.

구산선문중 성주산문과 사굴산문의 개창자들이 한 산의 동쪽과 서쪽에 동시에 존재한 건 우연일까?

그리고 두 사람은 태어난 시기만 10년 차이가 날뿐, 사망시점(889년)이 1년차이 밖에 나지 않는다.

당나라에서 귀국한 시점(844년)도 비슷하고, 40년 동안 활동한 시기도 똑같다.

 

 

물론 성주사지에 있는 국보8호 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에 새겨진 무염의 행적에 대한 기록과

태종무열왕의 8대손 무염과 해가 뜬물을 마시고 태어난 범일(梵日)의 탄생설화는 분명 다르지만,

그들이 개창한 성주산문과 사굴산문의 <무설토 - 소견을 내지 않는 마음이 도>라는 가르침은 같다.

엄연한 사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자꾸 두사람이 동일한 인물이라는 생각이 드는 건 왜 일까?

혹 동에 번쩍 서에 번쩍이 아니라 성주산문과 사굴산문을 창건한 사람은 동일 인물이 아닐까?

 

 

 

 

 

하하하~~~

억지임을 모르는 건 아니지만, 착각과 상상은 자유인만큼 나는 굴산사에서 그런 생각을 해본다.

범일은 무량사를 떠나 굴산사 창건 이후 40년 동안 한번도 밖으로 나가지 않고 세속과 대립했다지만,

고려시대까지 사굴산문은 구산선문중 가장 번창 했었고, 임진왜란때 술법으로 지역을 지키고,

조선시대에는 조사선의 논쟁을 일으킨 범일은 현세에는 대관령국사 성황신(서낭신)이 되었다.

거칠고 세련되지 못한 굴산사지 당간지주를 보고 있자면, 범일국사 김품일의 큰 이름에

하나는 부드럽고 하나는 거칠지만, 장대한 크기의 당간지주와 무량사탑이 묶이면서 오해를 해본다.

 

 

 

그리고 또 하나, 당나라에서 범일국사에게 굴산사를 점지해 준 이가 정취보살이었다는 설이 있다.

범일은 한쪽 귀가 떨어져 나간 승려의 부탁을 잊고 있다가 불현듯 이곳을 찾아 굴산사를 지었다는데,

가만히 그 설화와 주변을 엮어서 생각해보면, 자만을 경계하라는 가르침이 숨어있지 않나 싶다.

아무 것도 없어도 될 공간, 풍요롭고 넉넉한 공간, 밝고 맑은 공간...

풍요로움에 취하지 않고, 넉넉함에 풀어지지 않고, 맑은 공간에서 자신을 잃지 않으려는 긴장감...

자만에 대한 경계심을 읽어 볼 수 있는 곳이 바로 이곳 굴산사지가 아닐런지...

 

 

 

폐사지들이 그렇지만, 대부분의 선문들은 인적이 드물고 비교적 문명과 먼 자연속에 자리하고 있다.

중앙집권적 통치체제의 완성을 위해, 그리고 왕권강화를 위해 권력의 한가운데 조성되었던 가람이,

권력과 향락을 거부하면서 다시 인간 개개인의 심성으로 향하면서 가람들은 자연으로 찾아들었다.

도시 한가운데서 권위와 권력을 행사하던 백제식 가람과 신라 초기의 가람 위치가 완전히 바뀐 것이다.

보림사가 그렇고, 보원사지가 그렇고, 성주사지가 그렇고, 고달사지가 그렇다.

그 정점에, 그래서 시작인 지점에 굴산사가 자리하고 있고 범일국사가 위치하고 있다.

 

 

 

동쪽으로는 동해바다가, 서쪽으로는 대관령으로 막혀있는 공간, 그래서 굴산사지는 갇힌 공간이다.

원형은 찾을 수 없지만 신라식 산지가람도 아니고, 평지가람이지만 백제식으로 도심에 자리하지도 않는다.

깊은 산 깊은 계곡의 척박한 곳도 아니고, 도도하고 수려한 강에 의지하는 선경에 있지도 않다.

그렇지만 오곡이 무르익는 풍요로운 들판의 호위를 받는 넉넉하고 따사로운 공간이다.

자족하지만 단절되지 않고, 풍요속에 망각을 경계하며, 선도의 명예를 자제하지만 선진을 갈구하는...

 

 

그래서 굴산사터에서는 건축의 경계를 찾기 어렵다.

철저히 부서지고 폐허가 되어 스산하고 허전하고 공허해서가 아니라, 아무것도 없어도 만족하기 때문이다.

권력은 경계를 필요로 하며, 욕심을 그릇을 필요로 하고, 집착은 대상을 필요로 한다.

그러나 법도 없고, 격식도 없고, 치장도 없는 굴산사지 당간지주를 보고 있자면 이름외에 그 무엇도 없다.

굴산사에 가거든 선을 긋지 말아야 한다. 건축도 하지 말아야 한다. 무엇을 채울 필요도 없다.

아무것도 남지 않았기에 시대의 변천을 떠나 이름도, 말하지 않는 정신도 읽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지금가지 허허로운 공간속으로 흩어지는 그리움이란 이름으로 다섯곳을 골라봤다.

영양 봉감오층탑을 보면서 무위와 무욕을 강제하는 적막한 공간을,

창녕 화왕산 관룡사 용선대에서는 그리움과 기다림이 채워야할 그릇의 크기를,

충주 탑평리칠층탑에서는 열린공간에 세워진 이정표의 품격을,

경주 남산 용장골 용장사지에서는 내가 생각하는 호연지기를,

그리고 강릉 학산리 굴산사지에서는 풍요속에서 경계해야할 자만을 생각해 보았다.

 

이 곳(!)들은 하나의 유물로 채울 수 없는 느낌이고 감상이며, 그래서 건축 공간이 주는 감동이었다.

무엇이 채워지고, 경계를 이루고, 소유해야만 만들어지는 충만과 행복과 행운이 아니라

비워지고, 모두에게 열려지고, 그래서 경계를 가지지 않는 바람이 주는 그윽한 향기 같은 존재들이다.

그 곳에, 그 것이 있어 자연과 사람과 사상과 역사와 예술이 바람처럼 빛처럼 존재하는 공간이다.

무엇이, 어떤 건축의지와 소명이 있어 천년이 지난 나에게 그런 감흥과 감동을 줄 수 있을까?

 

생명이 없는, 말 하지 않는, 향기없는 돌을 다듬어 원초적 본능을 제어하고 깨우침을 열려면

사람의 마음을 움직이고 감화시키려는 의지와 무형의 기운을 형상화 시킬 예술적 감성이 있어야만 한다.

또한 그 것(!)에는 그것을 요구하는 시대와 사상적 심화, 경제적 정치적 뒷받침이 없어도 안 된다.

그리고 그 것(!)이 존재해야할 공간과 조화를 이루지 못한다면 바위에 불과하거나 관상용으로 전락한다.

내가 이 시대의 탑 등을 좋아하는 이유는 관상용 소유물이 아닌 대중들과 동화되기 위한 수단이기 때문이고

그것들이 점하는 공간은 분명한 이유를 가지면서, 대중들의 의식을 새롭게 자극하고 열었기 때문이다.

 

보이는 것도 없고 보이지 않는 것도 없는 시선을 지나가는 청량한 향기,

들리는 것도 없고 들리지 않는 것도 없는 호흡에 깃든 상큼한 바람소리,

생각도 없고 기억도 없는 소망들을 떠올리며 지워지지 않는 고운 색깔의 꿈,

변한 것도 없고 움직임도 없는 허허로운 적막속으로 흐르는 시간을 새겨놓은 투명한 빛.

그런 곳에 서면 참 감사하는 마음이 일렁인다.

하늘 같은, 산 같은, 물 같은 그런 얼굴들을 그리워하며 감동하고 기뻐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