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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 風,造,關...

공간8/ 한국불교역사> 1 한반도 불교전파 초창기...110502

 

 

한국 불교의 역사

 

   1. 초창기

   2. 한국의 불교와 종교, 사상의 정착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몇가지 메모.

      1) 종교와 사상은 시대의 반영

      2) 사상과 종교는 비판의 방법이면서, 토속전통과 습합의 결과

      3) 한반도에서의 불교 도입

   3. 인도의 불교 흐름

   4. 중국의 불교 흐름

   5. 고구려, 백제의 불교 흐름

   6. 신라의 불교 흐름

   7. 고려, 조선의 불교 흐름

   8. 원효의 사상

   9. 신라와 한국 불교의 특성

 

* 가람배치의 이해를 위해 메모하기 시작한 부분을 <한국 불교의 역사>로 나누어 올려본다.

* 여러자료와 서책, 도판 등을 참조한 것으로 인용한 곳들은 따라 표기하지 않았다.

  (한국철학, 중국철학, 인도철학, 한국건축, 중국건축, 인도건축 등등이며 Daum의 백과사전을 많이 참조했다)

* 가람배치와는 별개의 챕터와 다름없기에 굳이 읽지 않으셔도 된다...

 

 

 

 

 

 

내가 좋아한다고 말했던 폐사지 다섯곳은 공교롭게도 신라말 고려초(라말려초) 시대의 가람들이다.

그리고 자연속에 덩그러이 놓여있지만 한때의 영화로 빛났을 다섯곳도 주로 신라시대 가람들이다.

생각해보면 내가 인정하든 무시하든 <신라>란 역사는 우리에게 너무 깊이 각인되어

불지불식간 무의식적으로 망각되고 있는지 모르겠지만, 신라는 한국적이라는 것의 출발일지 모르겠다.

아무튼 이 점은 추후 거론하기로 하고, 일단 가람배치의 역사에서부터 출발하는 게 좋을 듯 싶다.

 

 

<봉정사/극락전 안마당... 고려중후기, 조선초기 건물이 확실한 봉정사의 극락전과 봉정사 대웅전을 보면 꼭 이만큼이 한국적 스케일이 아닌가 생각할 때가 많다... 어쩌면 신라시대의 화엄사나 불국사에 비해서도 좁고, 백제시대의 법륭사나 미륵사지와 비교하면 얼마나 축소되어 있는지 짐작할 수 있다... 분명한 것은 봉정사의 이 스케일이 조선시대 대부분 가람배치의 표준이나 마찬가지란 점과 근대와 현대에 이루어진 대부분의 불사도 이 스케일을 넘지 않는다... 신라의 스케일이 애초 작았던 것은 아니지만, 1000년 후에도 그 스케일을 우리는 넘지 못하고 있다는 점이 내게 의미심장하다는 말이다...>

 

 

 

현대에도 많은 중창과 보수가 있지만, 우리나라의 절집 역사를 살펴보면 큰틀로 정리가 될 거 같다.

관리소홀 또는 미필적 고의 화재도 있지만, 역사를 거꾸로 거슬러 올라가면 625 한국전쟁에서부터,

일제 강점기, 그리고 1592년 임진왜란(조일전쟁)과 양자호란을 통해 우리의 가람배치는 파괴되었다.

물론 이런 구분은 손괴와 망실에 의한 변화이고, 중창과 부흥을 통한 확장과 중흥도 있었으니

조선의 광해군-인조시대, 고려의 대각국사 의천-보조국사 지눌시대, 그리고 라말려초시대가 그것이다.

 

 

<거돈사 당간지주... 폰으로 찍어 화질이 좋지는 않지만, 크기와 형태에 대한 감은 잡을 수 있을 것 같아 올려본다... 양식과 마감수준을 보면, 굴산사 당간지주를 모본으로 하지 않았을까 생각되며, 법천사 당간지주는 다시 이 거돈사 당간지주를 모본으로 만들어졌다는 생각이 든다... 만약 이 당간지주를 다시 세운다면, 거돈사의 모습도 달라지지만, 굴산사 당간지주만큼 유명해지지 않을까 생각된다... 아무튼 폐사지의 안타까움이 들어 주변모습까지 그대로 올린다...>

 

처음엔 외래문물로, 그 다음엔 관념적으로, 그 다음엔 토착화되고, 현실적으로 바뀌고, 정형화 되고...

무작정 따라하기에서 시작된 한반도의 가람배치는 막혔다가 터지고, 넘쳤다가 무너지고,

다시 정형화 되었다가 멀어지고, 그렇게 지켜지고 변하고 부서지면서 고유의 가람을 형성하게 되었다.

내 나름의 생각을 가지고 가람건축을 역사적으로 재구성해 정리해 보았다.

 

 

 

 

 

1. 초창기

 

고구려는 순도, 백제는 마라난타, 신라는 아도화상을 통해 불교가 전파되었다는 게 정설이지만

(순도조려 - 374년, 난타백제 - 384년, 아도기라 - 417년 설이 있지만 나는 460년 전후가 맞다고 봄)

마라난타가 남겼다는 영광의 갑사나 아도화상의 구미 도리사 등이 없는 것도 아니고 그들이 남겼다는

초문사(흥국사) 이불란사(흥복사) 등의 이름도 있지만 불행히 가람배치를 확인할 수는 없다.

 

<백제에 처음으로 불교가 전파되었다는 법성포...> 

<그리고 甲자가 들어간 영광의 불갑사... 그렇다고 나는 이곳이 우리나라 가람배치의 원형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영광 법성포 불교성지의 조각... 마라난타의 모습이 이렇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가 가지고 들어온 것은 불상이었지, 이런 성자의 모습은 분명 아니었을 것이다...>

<아도화상이 세웠다는 도리사 전경... 이곳도 초기의 가람배치를 추정할 곳은 분명아니다...>

<도리사 석탑... 분명 고려시대의 탑으로 보인다... 단지 삼국사기나 삼국유사 등에 등장하는 세번의 아도화상 중 나는 두번째, 세번째 아도화상을 추정하고 있으며, 신라에 불교가 들어온 것은 김씨왕들이 본격적으로 세습을 시작한 눌지왕이 즉위한 417년이후라고 생각한다... > 

 

 

 

 

 

이 시기를 가만 생각해보면, 중국은 한이 망하고 우리에게 익숙한 위,촉,오나라의 삼국시대를 거쳐,

전진, 북연, 동진 등, 중국인 입장에서보면 북방 오랑캐(동이족)들이 패자를 자처하던 5호16국시대였다.

주나라가 멸망하고 시작된 춘추전국시대가 공자,맹자,한비자 등을 거쳐 유학의 이념으로 통일되어갔다면,

한나라가 멸망하고 시작된 오호16국시대는 유학에 불교가 새롭게 해석되면서 남북조시대로 통일된다.

요즘 주말연속극으로 나오는 백제 근초고왕 시대의 모용황 등 모용씨와 후대의 부견 등이 당대의 영웅들...

(이때 대승불교의 최고 경전인 반야경과 법화경도 번역되지만, 불상은 선정인과 시무외인이었다)

 

 

 <경주 남산 부처골... 5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되는 불상으로 이 모습이 선정인 자세이며, 복식도 완전히 중국의 포복식이다... 그리고 이 모습이 200년대 중국에서 만들어진 중국식 불상과 거의 비슷한 양식이다...>

 

<서산 마애불... 500년대 후반 백제 위덕왕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인다... 이 손모양이 시무외인-두려워마라-다>

 

 

 

즉 분열의 시대에 민중들의 평화에 대한 염원과 중앙집권적 통치체제 형성을 위해 불교가 정착하는데

시대의 요구는 쿠샨왕조에 의해 성립된 대승불교였지만 중국불교는 개인적 수양과 기복적 성격이 강했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대승불교가 전성기를 맞이하는 굽타왕조(320년)시대에는 오히려 그 너그러움으로 인해

불교가 쇠락하면서 브라만, 힌두교 등에 흡수되어 갔지만, 420년대 남북조(북위와 동진)시대가 열리면서

중국의 불교는 대승불교가 사상적으로 통일되고, 국가적 지원을 받으며 온전히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불교는 유학의 허례허식과 노장의 공리공담을 비판하며, 내세와 인격신상, 탈정치적 구세이념을 전파한다)

(결정적 계기는 구마라습에 의한 불경의 한문번역에 있으며, 이때 불상의 옷도 중국식 포복으로 바뀐다)

 

 

<간다라 불상... 2세기 중반, 늦어도 4세기를 결코 벗어나지 않는 양식이다... 상투가 변형된 나발과 우단편견 양식인데, 상투의 끈이 완전히 사라지지 않는 것은 2세기 후반이다... 그리고 쿠샨왕조에서 굽타왕조로 넘어가는 이때에 인도에서는 미륵보살상이 많이 만들어졌다...>

 

<그렇다면 초기 인도의 가람배치는 어땠을까? 이 글의 주제가 공간과 가람배치가 중심인만큼 아예 건축적으로 인도의 가람배치를 통해 원형의 모습을 살펴본다... 인도의 건축/윤장섭/서울대학교출반부에서 스캔했다...> 

<쿠샨왕조시대(서기 25년에 쿠샨왕조가 성립된다)... 초기에는 스투파 중심이었다...>

<쿠샨왕조시대(2세기 경)... 스투파와 다탑원이 분리되고, 승원과 회당이 구별되는 가람배치가 정형화된다...> 

<굽타왕조 전성기... 사원이 완전히 하나의 건축물로 통일된 듯 보이며, 신전이 연상되는 가람배치...> 

<델리술탄시대... 앙코리와트가 연상되는데 1526년 무굴제국이 들어서면서 형성된 이슬람의 영향을 느껴보면 어떨지...>

 

 

 

 

즉 초창기 한반도 삼국시대에 전래된 불교는 성격은 대승불교였지만, 아직 불상을 바라보며 기원하는

기복적 성격과, 수양의 도량으로서 절이 지어졌을뿐 가람배치에 있어서 정형화된 틀을 찾기는 어려웠다.

전진이나 북위와 대립과 교류의 틀을 가졌던 고구려나 동진과 일체나 다름없던 백제의 불교는

일부 권력층과 지식인 계층에 새로운 문물과 사상으로 받아들여졌을뿐 대승불교의 체계를 갖지는 못했다.

게다가 쿠샨왕조나 굽타왕조를 통해 정형화된 인도의 가람배치가 곧바로 정착하기는 어려웠단 말이다.

(이 당시 중국불교는 돈황석굴, 벙령사석굴, 운강석굴 등 신성을 형상화한 불상조성이 중심이었다)

 

<예산사면석불... 백제 성왕, 527년으로 추정되며, 최완수씨는 무령왕을 추복하기 위해 조성했다고 주장한다... 아무튼 우리나라 불상의 시원이라고 봐도 좋을 듯 싶다...> 

 

<태안마애삼존불... 558년 위덕왕대에 성왕을 위로하기 위해 조성됐을 거라고 최완수씨는 추정하고 있다...> 

 

<연가7년명불입상... 539년 고구려 안원왕때 문들어진 제작년도가 분명한 불상으로 경남 의령에서 출토되었다... 굳이 백제의 예산사면석불이나 태안마애삼존불, 신라의 부처골 부처, 고구려의 불입상 사진을 올린 이유는, 초기 한반도의 불교는 중국처럼 대승불교를 지향하였으나 이를 국가적으로 사회적으로 정착 부흥시키기 힘들었고, 기복적 성격이 강한 불상-몸에 지니고 다닐만한 크기이거나, 한 지역의 랜드마크처럼 크거나-조성을 위주로 전파되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내 생각에 한반도의 가람배치는 백제 위덕왕대에 이르러 본격적으로 완벽한 틀을 갖추어 간다고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