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의 역사
1. 초창기
2. 한국의 불교와 종교, 사상의 정착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몇가지 메모.
1) 종교와 사상은 시대의 반영
2) 사상과 종교는 비판의 방법이면서, 토속전통과 습합의 결과
3) 한반도에서의 불교 도입
3. 인도의 불교 흐름
4. 중국의 불교 흐름
5. 고구려, 백제의 불교 흐름
6. 신라의 불교 흐름
7. 고려, 조선의 불교 흐름
8. 원효의 사상
9. 신라와 한국 불교의 특성
* 가람배치의 이해를 위해 메모하기 시작한 부분을 <한국 불교의 역사>로 나누어 올려본다.
* 여러자료와 서책, 도판 등을 참조한 것으로 인용한 곳들은 따로 표기하지 않았다.
(한국철학, 중국철학, 인도철학, 한국건축, 중국건축, 인도건축 등등이며 Daum의 백과사전을 많이 참조했다)
* 가람배치와는 별개의 챕터와 다름없기에 굳이 읽지 않으셔도 된다...
2. 한국의 불교 정착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몇가지 메모
1) 종교와 사상은 시대의 반영.
어떤 종교나 사상이나 신문물이 하나의 문명과 문화로 뿌리내리려면 열린 교류와 소통이라는 하드웨어와,
내재적인 파괴를 통한 소프트웨어적인 반성을 거쳐, 집단적이고 반복적인 검증을 통해 정착하기 마련이다.
여기에는 필히 권력의 의도적인 수용과 경제적인 만족, 그리고 대중들의 무조건적인 추종이 전제되어야 한다.
그것이 사회적 정의든, 개인적 각성이든 불안을 달래고, 불만을 개선하며, 평화와 안전(정)을 추구하기 위해
종교나 사상 등은 존재하는 것이며, 대게 혼란기에 시작하여 급격한 경제성장기에 혁명적 추동력을 얻는다.
그러나 토속적 관습이든 체계적 종교든, 맹목적 신앙이든 논리적인 사상이든 그것은 오랜 세월의 결집이며
과거와 당대와 그리고 미래의 염원을 반영한 것이지, 사상과 종교가 있어 세상이 변화된 것 아니다.
(미네르바 부엉이는 황혼이 되어서야 나는 것이지, 부엉이가 날아서 황혼이 깃들고 밤이 오는 것은 아니다)
왜냐하면 가슴에 각인된 것은 급진적이지만 맹목적이거나 사회적 파급력에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머리로 기억되는 건 논리적이고 지속적이지만 조직과 네트워크를 갖지 못하면 무기력하거나 관념적이고,
몸으로 체득되고 공유되는 것만이 집단적이고 근본적으로 세상을 변화시킬 힘을 얻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회적 운동은 어려운 시기에 폭발성과 파괴력을 갖추지만 이제야 비판의 씨앗만 잉태하는 것이고,
가장 풍족한 시기에 운동은 사상적 완성을 갖추며 급성장하지만 미답의 전망에서는 불안할 수밖에 없다.
비판적 분노든, 맹목적 환상이든, 사회적 정의든 몸으로 체득된 종교와 사상만 살아남는 것이다.
<5월... 눈부시게 빛나는 연초록색의 햇살... 참 좋타...^^>
2) 사상과 종교는 비판의 방법이면서 토속전통과 습합의 결과.
그런면에서보면 오늘날 사상과 신앙을 대변하는 모든 경전은 비판의 방법이었지, 궁극의 완성은 아니었다.
무위를 통해 자유와 자연스런 조절을 노래했던 노장사상은 1100년만에 권력을 잡았지만, 무기력했고,
신과 함께를 내건 기독교가 내세에 천당을 구현하기 위해서는 1000년의 시간이 걸렸지만, 피안은 아니었고,
왕도를 통해 과거의 이상향을 쫓던 유학이 뿌리내리기 위해서는 300년이 걸렸지만, 200년을 버티지 못했고,
문답을 통해 현명한 지혜를 추구했던 소크라테스의 가르침은 200년만에 꽃을 피우지만 지속될 수 없었다.
유일신에의 복종을 통해 평화를 꿈꾸던 이슬람은 예언자를 통해 완성되지만 천년이 지나 주체를 자각하고,
맑스도 휴머니즘과 과학적 세계관으로 자본과 물신성을 비판했지 완성된 코뮤니즘을 그려준 적은 없다.
마찬가지로 구원자는 존재하지 않으며, 스스로를 의지하고 깨달아라고 가르친 불교도 완성태일 수 없다.
결국 어떤 신앙, 종교, 신념, 사상도 오랜 세월동안 만들어지면서 변질되고 혹은 근본을 지향하지만
그것은 오랜 경험을 축적하는 것이며, 현재를 반영하는 것이지 미래의 완성태를 강요할 수 없다는 말이다.
이런 이유로 그것들은 시대의 요구와 해당 문명의 동력과 관습, 그리고 비판을 통해 적응하는 것이고
한걸음 한걸음 보다 나은 미래와 지속가능한 발전을 지향하기 위한 방법론적인 비판의 무기이자 시작이지
결과와 이상향, 피안의 종국을 의미할 수 없고, 그런면에서 더디게 정착하고 생물처럼 변화하는 것이다.
불교의 탄생과 각국에 전파되어 고유의 특성을 가지며 정착하는 과정도 이런 흐름을 벗어나지 못한다.
불교철학의 양대산맥이라 할 수 있는 인도와 중국에서도 브라만(바라문)교, 도교와 유교를 비판하면서
출발했던 불교는 결국 이들과 융합되고 습합되면서 독창성과 보편성을 갖추면서 변질 혹은 발전하였다.
한국과 일본에서는 보다 원시적인 무속신앙과 신도적 성향과 습합되면서 또 다른 모습으로 변화하고,
각각의 사상적 완성이 이루어진 시점에서 논리적 경향을 갖춘 가람배치가 일어나게 되고 또 고착되었다.
결국 우리의 불교도 당대의 요구와 근본적 지향을 끊임없이 반영하면서 변화했지 완성된 적은 없었다.
<이렇게 얽히고 섞이면서 걷고, 만들어지고,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간들...>
3) 한반도에서의 불교의 도입
4세기후반 고구려, 백제가 불교를 받아들인 때도 그런 과정을 밟았으며, 이 시기는 농업생산력의 발전과
상업의 활성화, 그리고 영토의 확장을 수반했고, 필히 중앙집권 체제의 요구에 부흥할 사상이 필요했다.
인본적이면서 고도의 통치철학인 유학은 한 대 동중서에 의해 집대성되었지만 허례허식으로 교조화 됐고,
이를 보완하는 노장사상의 무위자연도 공리공담을 벗어나지 못하던 때, 인도 불교의 유입은 혁명적이었다.
윤회설에 기초한 내세관은 논리적이면서 충격적이었고, 인격을 신성으로 끌어올린 평등성은 혁명적이었으며,
탈정치적인 구세이념은 권력층과 식자층, 그리고 기층민중 모두에게 새로운 변화를 촉발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러나 불교가 정착하는 과정은 하나의 관습으로 자리잡아야 할만큼의 시간이 필요했고(5대 150여년)
고구려, 백제, 신라가 완성된 국가체계를 갖춰가는 것만큼 더디고 집요하며 끈질긴 시간이 요구되었다.
그러나 한반도에 불교가 정착하는 과정은 우리의 근대화 과정만큼이나 집약적이고 폭발적이었다.
인도에서 불교가 철학적 담론과 체계(중관파와 유식유가행파)를 갖춘 것은 석가 사후 7~900년이 걸렸고,
중국에서 자신들의 언어와 세계관으로 해석한 불교철학을 처음 집대성(천태종)하는데 500년 이상 걸렸지만,
한반도에서는 300년만에 원효가 정토사상을 보급했고, 의상의 화엄종은 중국보다 30년이나 앞선다.
예로부터 <따라잡기>와 <압축성장>, 그리고 <원산지보다 집단적인 교조화>는 우리들의 본성이었을까?
<독야청청... 여전히 우리네 종교와 사상과 신념은 그렇게 질기게 이어져오면서 더디게 더디게 성장했다...>
3. 인도에서의 불교흐름...
여기에서 불교역사와 흐름에 대해 몇가지만 메모하고자 한다. 앞으로의 가람배치를 이해하기 위해서...
인도에서는 맨 먼저 <수도공동체(오늘날의 하안거, 동안거가 관습화된 정사생활)>로 시작하여,
<불,법,승 3보 귀의>와 <공덕과 법시>를 중심으로 한 <재가불교>가 나타나고
<산치사원... 초기 스투파 위주의 가람배치... 귀족들의 보시로 수도 공동체가 만들어졌다...>
아라한들이 결집하여 <합송>하는 <부파불교>시대에 <경/률/논의 삼장체계>를 갖추면서 분열이 되고,
출가승들의 안일한 삶과 소극적이며 현세도피적인 경향에 반발하여 일체중생을 계도하기 위한 <대승불교>가
<이타행>을 강조하면서 행동주의적 불교를 제창하는데 3세기 아소카왕 시대에 절정을 이루게 된다.
그리고 이때 스투파 위주의 가람배치는 탑원과 승원의 2원체계로 정착하고 강원이 추가되었다고 보인다.
<인도에서는 석가탄생 700여년이 지난 아소카왕에 이르러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불교는 화려하게 꽃을 피운다...>
<굽타왕조시대 사르나트 사원... 탑원과 승원으로 이원화된 가람배치...>
그러면 인도의 불교는 어떤 철학적 체계를 갖추고 있고, 그것은 얼마나 논리적이며 근대적일까?
대승불교를 실천하기 위한 <자비(마이트리)와 최상의 지혜(프라즈나)를 갖춘 보살>의 개념이 등장하고
진정한 자비심을 체득을 위하여 <공(空,순야타)>개념이 비로서 정립되는데(유마경이 최고최후의 경전)
그것이 200년대 용수가 체계화시킨 <중관파>이며, 오늘날 비트겐슈타인의 주장과 너무나 비슷하다.
올바른 종류의 철학적 사고가 낳는 결과는 진리를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혼돈을 해체하는 것이며,
철학의 복잡성은 주제의 복잡성이 아니라 우리가 매듭지어 놓은 앎의 복잡성 때문이라는 말이 바로
반야심경에 나오는 <색즉시공, 공즉시색>의 의미이며, 그것이 대승불교의 철학적 체계와 입장이었다.
오늘날 논리 실증주의와 언어철학의 대가로 꼽히는 비트겐슈타인과 中觀파를 동일시 하는게 비약 같지만
내가 보기에 분석철학을 빼면 크게 다를바 없고, 송대에 완성된 주자학의 중용사상도 일맥상통한다.
그리고 도교의 무위와 비슷한 공의 개념 때문에 인도의 불교는 중국에 쉽게 정착했을지도 모른다.
단지 노장사상은 뒤집어 보기를 통해 유쾌통쾌한 면이 좋지만 현실에서는 지극히 무기력했던데 반해
중관파의 공개념은 객관성을 지향하며 실천적이라는 측면에서 적극적이며 현실참여적이었다고 보인다.
용수의 중관파적 입장은 훗날 화엄종으로 이어지는데 의상보다는 원효가 더 적통에 가깝지 않을런지...
그리고 4세기경에 객관적 실재를 부정하고 순수한 정신과 경험을 중시한 <유식유가행파>가 등장하게 된다.
서양철학사에서 중세철학을 대변하는 스콜라철학처럼 형이상학적 인식론에 치중한 분파라 생각되는데
이후 불가지론과 근대철학을 태동시킨 경험주의까지를 포괄하는 것이 유식(唯識)유가행(瑜伽行)파다.
근대서양철학이 칸트 등을 통해 합리주의로 성장했다면 인도불교는 중관파와 유식파의 한계를 넘지 못했고
이후 7세기 중국의 현장법사에 의해 정립되고, 우리나라에는 의상대사를 통해 그 맥을 잇게 된다.
인도철학사에서는 철학체계를 확립시킨데 주요 역할을 한 불교는 이후 흉노족의 침입시기부터 와해되고,
(이 흉노족의 이동과정에서 당대 최고최대의 제국이었던 한나라, 굽타왕조, 로마가 멸망한다)
자아와 신, 그리고 인식론에 집착한 브라만교의 전통과 카스트 제도의 부정이라는 한계를 극복하지 못한체
요가학파, 비슈누파, 쉬바파등 베단타학파 등의 분열을 거치다가 9세기부터 피지배층에 호소력을 갖춘
브라만교 계열의 힌두교에 의해 통합돼 가고 11세기부터 유입된 이슬람에 의한 탄압이후 급격히 몰락,
<5세기 흉노족의 침입으로 인도왕국은 분열 분리되고, 다시 불교에서 비판했던 구원자로서 신이 부각되면서 가람배치는 신전의 양식으로 전환된다... 우주와 신과 자아에 대한 인식론의 한계를 그들은 벗어나지 않았다...>
13세기에 인도에서 불교는 사라진다. 그리고 초기 인도의 불교철학은 티베트의 금강승 불교로 전파되는데
소승불교와 대승불교의 초기형태를 한차원 높게 통합시켰다는 티베트의 금강승을 통해 그 맥을 잇고 있다.
결국 브라만, 이슬람의 영향으로 탑원에 신전이 가미된, 수도공동체의 공간으로 가람배치가 완성된거 같다.
<델리술탄시대 티야가라자 사원... 신전형식으로 완전히 변화되지만 탑원과 수도공동체의 전통은 이어지는듯...>
<델리술탄시대... 1370년 투르크족이 세운 오스만 제국의 확장으로 1526년 인도는 이슬람의 무굴제국으로 통일된다... 그렇게 브라만교-불교/자이나교-힌두교-이슬람교는 인도에서 융합된다...>
4. 중국에서의 불교 흐름...
실크로드를 통해 <현세적 구복 신앙>으로 도입된 중국의 불교는 시대변천을 따라 중국적으로 변화하는데,
초기, 유학이나 도교의 언어로 불교를 이해한 <격의불교>시대를 거쳐 5호16국시대 도교와 융합하다가
400년경 구마라습에 의해 최초로 중국식 언어로 불경들이 <번역>되어 대승불교의 철학적 정수가 보급되고
470년경 인도에서 건너온 <달마>가 귀족적 가람불교와 수행체험을 도외시한 강설불교를 비판했다 할 정도로
남북조시대(420~581) 후반에 이르러 번창했는데 당시 북위의 수도 낙양 건축의 1/3이 사원이었다 한다.
아마도 회랑으로 외부와 격리되고, 하늘 높은 탑이 자리하며 금당과 강당이 주요한 가람배치였을 듯 싶다.
<한산사... 20세기 미국 등 서양에서는 이 시기 낙양에 200m 넘는 높이의 탑이 세워졌다고 믿고 있다...>
<대만... 한중일 삼국의 절에 가면 정말 다른 관습 혹은 문화를 볼 수 있다... 우리는 금당내부에 들어가서 절을 하며 향을 한두개 피우고, 일본에서는 금당 밖에서 절을하며 향연기를 몸에 쐬며, 중국에서는 이렇게 향다발을 태우며 소원을 기원한다... 종교와 신앙이 갖는 구복적 기복적 성향은 영원히 변하지 않을 듯 싶다...>
589년 수나라 통일과정에 <천태종>으로 통합되면서 남북의 사회적, 정치적 통합에 주도적 역할을 하게 되고
당나라 측천무후의 지시로 인도에 다녀온 서유기의 주인공 삼장법사 현장에 의해 완성된 체계를 갖추는데
600년경 유식사상에 근거한 <법상종>과 699년 <화엄종>에 이르러 인도불교보다 더 포괄적으로 정립된다.
그러나 대중들에게 각인된 것은 <천태종,법상종,화엄종>이 아니라 실천적 선과 대중적 정토신앙이었고,
결국 남종선과 정토교를 골격으로 송(960~1279년)대의 불교는 선정쌍수(참선+염불)의 전통을 이어진다.
천태종, 법상종, 화엄종의 교리에 입각한 형이상학적 가람배치에 다양한 유형이 모색된 시기가 이때이고,
수나라때 득세한 도교의 영향이 가람배치에 주체적으로 접목되면서 강당보다는 불전위주로 고착되어 간다.
<중국의 가람배치와 함께 변화하는 주거건축의 융합... 수당대에 그들이 이해하는 불교의 체계속에서 그들은 수많은 배치의 양식을 실험하고 고착시켜 나갔다...>
<그리고 이미 수당대에 우리가 말하는 신라식 산지가람이 대규모로 조성된다... 그리고 이 시대부터 그들의 가람배치의 중심은 금당-불전이 되었다...>
<대소경중이 분명한 체계와 좌우대칭에 입각한 선화사 가람배치도... 그들의 전통은 그렇게 자금성까지 이어진다...>
<그리고 송대에 완성된 도교사원들을 보면 정원과 원림이 사원에 완전히 결합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도식의 좌선이나 수행보다 평범한 일상적 삶의 행위 가운데서 진리를 깨닫는 체험을 중시하는
선종을 중심으로 중국 불교는 정착하게 되는데, 석가의 제자 마하가섭의 염화미소에서 시작된 선종은
500년경 인도 28대조이자 중국 선종 1조인 달마대사 이후 4대 도신(황매산), 5대 홍인(쌍봉산)에 이어
700년경 점진적 깨달음(점오)을 강조하는 북종선과 즉각적 깨달음(돈오)를 중시한 남종선으로 분열된 이후
남종선이 주류를 이루게 되고 800년대 진정한 자유를 추구하는 무위 도인을 지향하는 임제종이 등장,
송대에는 5가7종을 통해 간화선(화두를 통해 깨달음)과 묵조선(묵묵히 앉아서, 조동종)을 중시하게 된다.
선종의 등장부터 가람배치는 회랑이 완전히 해체되고, 탑은 부도와 동치되며, 강당은 승원으로 흡수된다.
<송대의 광승사 가람배치도... 산문을 지나 탑이 있고, 아미타불-석가모니불-비로나자불이 역시 체계에 입각해 별도의 금당/불전을 통해 구현되었다...>
<가람배치와 함께 도교사원과 유교사원을 같이 비교한다는 의미에서 올린다... 우리의 서원과 비교해보려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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