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불교의 역사
1. 초창기
2. 한국의 불교와 종교, 사상의 정착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몇가지 메모.
1) 종교와 사상은 시대의 반영
2) 사상과 종교는 비판의 방법이면서, 토속전통과 습합의 결과
3) 한반도에서의 불교 도입
3. 인도의 불교 흐름
4. 중국의 불교 흐름
5. 고구려, 백제의 불교 흐름
6. 신라의 불교 흐름
7. 고려, 조선의 불교 흐름
8. 원효의 사상
9. 신라와 한국 불교의 특성
* 가람배치의 이해를 위해 메모하기 시작한 부분을 <한국 불교의 역사>로 나누어 올려본다.
* 여러자료와 서책, 도판 등을 참조한 것으로 인용한 곳들은 따로 표기하지 않았다.
(한국철학, 중국철학, 인도철학, 한국건축, 중국건축, 인도건축 등등이며 Daum의 백과사전을 많이 참조했다)
* 가람배치와는 별개의 챕터와 다름없기에 굳이 읽지 않으셔도 된다...
8. 원효의 사상
지금까지 간략하게나마 가람건축과 가람배치의 이해를 위해(?^^나의 정리를 위해!!) 불교사를 요약했는데,
이제 고구려, 백제와 신라의 불교의 특수성, 그리고 인도, 중국, 일본과 한국불교를 비교해보고자 한다.
많은 자료와 의견들을 바라보면서 나는 개인적으로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근본적인 특성이 600년대
신라의 삼국통일을 전후하여 형성되었다고 보고 있으며, 실제로 그때의 역사가 가장 역동적이었다.
지속적인 대립속에서 다양한 교류가 있었고, 분열과 통합을 위한 구태의 전통과 혁신이 격돌했으며,
또한 만인의 행복을 위한 공통된 이념과 발전이 지속가능한 미래상에 대한 사상이 요구되었던 때였다.
한국철학 형성의 맹아기이면서 한국철학의 정체성이 형성되었던 이때 등장한 사상가가 바로 원효다.
<원효... 그가 있어 신라의 불교사상은 통합되고, 한국의 철학은 시작된다면 비약일까?>
이미 앞에서와 예전의 여러 글을 통해 한국불교와 한국철학의 시조이자 최고봉으로 원효를 거론했는데,
신라불교의 특성을 총합하고, 한국불교의 특징을 고착시킨 원효의 사상에 대해 짧게나마 메모하고자 한다.
한국불교사를 신라말의 5교9산, 고려시대의 5교양종, 조선시대의 선교양종, 현대의 조계종으로 보든
화엄종(법상종)-선종구산-천태종-조계종으로 구획하든 불교내부의 사상적 갈등과 대립뿐만 아니라
유교를 포괄한 한국철학의 논쟁에 원효의 문제의식이 관통하며, 원효를 넘지 못한다고 생각기 때문이다.
한국불교의 특징을 크게 호국적 성격, 통불교적 성격, 자심을 밝히는 것을 중시한다는 세가지로 드는데
호국적 성격은 이미 설명했고, 통불교적이라 함은 화엄+유식+정토+밀교 사상 등을 통합한다는 말이고,
선종의 영향으로 중시된 자심(自心)을 밝히는 문제는 비단 불교를 벗어나 오랜 논쟁사를 가지고 있는데
중국철학사에서 정주리학, 양명학, 한국철학사에서 유불, 사칠, 인심도심, 인물성동이, 심설, 돈점논쟁까지
한마디로 불교가 중국에 전래되고 한국에 정착된 이후 불교, 유교를 막론하고 지속되었던 내용으로서,
조선조 이이와 이황으로 대변되는 성리학 이기논쟁의 심성론, 인식론, 수양론을 관통하는 문제이기도 하다.
<경복궁 경회루에서 바라본 풍경... 복잡하게 꼬이고 가려지고 우거지고... 그만큼 원효의 사상은 방대하지?>
원효의 사상에 대해서는 여기저기에서 조금씩 언급하였으나 간단히(?) 요약하면(그게 가능할까?^^),
먼저 중관파와 유식론 등 모든 불교사상(귀일사상)을 화쟁의 논리로 조화시켜 하나로(통불교적) 묶었다.
또한 그 자신이 교학의 대가이면서 만법유심의 진리를 직접체득(해골바가지)하면서 주석서를 남겼으며,
신역불교와 구역불교를 모순없이 하나의 체계로 통합하고, 대중포교활동을 통해 정토신앙을 구축해낸다.
삼매를 통한 심식의 연구, 교학과 계율을 통한 수행실천, 대승/열반/불성으로 이어지는 깨달음은
자리(自利-상구보시)와 이타(利他-하화중생)의 겸수를 통해 원융회통하고 무애자유의 사상으로 완성된다.
그의 법화경 해석에서 會三歸一은 삼국통일의 사상적 기반이 되고, 그의 화엄론은 의상을 통해 <화엄종>으로
의천의 성상(成相)겸학의 <천태종>으로, 무심은 정혜쌍수의 무심합도와 돈오점수의 <조계종>으로 이어진다.
자장의 불국토사상을 일심사상으로 승화시키고, 교학의 대가이면서 미륵신앙과 함께 정토신앙을 정착시켜
중국의 고승들에게 <용수>와 비견되는 사상가로 칭송받은 원효사상의 특징을 호국, 일심, 화쟁, 무애, 정토,
율종계학 등으로 요약하고 있지만, 그의 사상은 종교와 시대를 넘어서 한국철학의 장대한 서막을 열었다.
아무튼 내 생각에 그를 이해하지 않고서 신라와 한국불교, 그리고 한국철학의 출발을 정리할 수 없다고 본다.
<경복궁에서... 담장너머 살짝 살짝 보이는 것으로 모든 것을 판단할 수 없지만, 그 푸르름과 변화, 그리고 영원성을 읽는다면, 화사한 신록과 눈부신 햇살도 조금씩은 담을 수 있지 않을까?>
9. 신라불교(고구려,백제와 비교)와 한국불교(인도,중국,일본과 비교)의 특수성...
이제 불교사 등에 대해 정리해보았고, 개인적 의견이지만 한국불교의 특수성에 대해 메모해본다.
한국불교의 독자성은 조계종 지눌에 의해 완성되지만, 그 뿌리는 신라의 특수성에서부터 시작한다.
불교가 도입될 때 고구려와 백제는 귀족이 중심이었지만, 신라는 왕실이 불교의 수호자를 자처했다.
지식인 중심, 귀족적 성격은 비슷하지만 초기부터 호국불교와 불국토 사상으로 무장되면서 성장했다.
불교가 전성기를 맞이할 때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라는 되살려야할 과거의 영광이 없는 나라였다.
근초고왕, 광개토대왕, 동성왕, 무령왕의 영광을 재현해야할 이유가 없는 신라는 미래지향적이었고,
그것은 <미륵신앙-초기에는 미륵보살, 후기에는 미륵불>이 대중적인 지지를 얻을 수 있음을 의미한다.
또한 유교적 국가체계에 불교의 정신과 율법을 융합시킨 고구려, 백제에 비해 신라는 처음부터
불교치국책을 통해 <국가공동체>를 지향했고, 여기에 대중들의 구복적 성향을 논리적으로 흡수했다.
결국 신라의 <호국불교, 미륵신앙, 정토신앙>은 <국가공동체, 불국토사상>으로 정착하게 되는데, 이점은
고구려, 백제와의 차이점일뿐만 아니라 인도, 중국, 그리고 일본불교와도 구별되는 한국적 특성이 된다.
<감은사탑... 이 탑을 볼 때마다 나는 신라의 선택과 그 역사가 남긴 깊은 향기를 읽으려 노력한다...>
인도의 대승불교는 브라만교의 숙명적인 계급성과 승가공동체에 만족하는 소승불교를 비판하면서 확산됐고,
중국의 대승불교는 유교와 도교의 폐단 비판과 이민족의 한족지배를 위한 정통성을 확보의 명분이었으며,
일본의 대승불교는 신도를 고집하는 구(舊)귀족과 불교를 통해 귀족세력으로 부상한 도래인들의 권력다툼을
왕실이 수렴하면서 선진문물과 함께 수입되었으나 대중적 포교활동은 의도적이고 지속적으로 통제되었다.
(일본에서 불교가 국교로 보호된 것은 도쿠가와시대(1603~1867) 유입되는 그리스도교를 추방하기 위한
방편이었고, 메이지 시대에는 천황을 중심으로 한 국수주의가 대두되면서 불교와 신도는 분리 배격된다.
처음 나라시대에는 법상종/화엄종, 헤이안시대에는 천태종/진언종, 가마쿠라시대부터 말법사상에 근거한
정토종(임제종/조동종) 중심의 신불교(계율부정, 결혼허용)가 정착하고 다도, 서도, 하이쿠가 유행한다)
<중국 영은사... 불상을 통해 그 공간에 정착한 불교와 그 양식을 선택한 사람들의 성향을 생각해본다...>
<일본 동대사 계단원의 천수관음... 흔히 밀교의 상징으로 천수관음을 떠올리기도 하는데, 이 불상을 만들 때는 이미 백제나 고구려, 신라의 영향에서 벗어난 일본만의 특성이 충분히 살아있다고 생각되어 올려본다...>
<태국 왓찰롱 사원... 이곳이 소승불교 분위기를 대변한다고 말 할 수는 없지만 참고로 올려본다...>
<불국사 극락전의 아미타불... 780년경 조성된 불상으로 최완수씨는 경덕왕의 모습이라고 말한다... 불국사와 석굴암이 경덕왕대에 시작하여 혜공왕대에 완성되는데, 왜 최완수씨는 석굴암 본존불은 효소왕의 얼굴이라하고, 불국사의 아미타불과 비로자나불은 경덕왕의 얼굴이라 했을까? 그리고 본존불, 다보탑, 석가탑을 만든 김대성은 왜 불상은 금동불로 조성했을까?? 아무튼 한중일, 그리고 동남아 불상은 얼굴 모습도 다르고 전각내부의 분위기와 격식도 완전히 다르다...>
그러나 신라는 대승불교가 정착하기 위해 비판해야할 소승불교도 브라만교도 유교, 도교도 없었다.
또한 불교의 수용을 거부하는 구 귀족세력의 반발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왕실이 불법수호자를 자처했다.
그리고 일본의 신도와 비슷한 무속신앙이 있었지만 대중적 포교를 통해 오히려 적극적으로 권장한다.
무속신앙의 구복적 성향을 미륵신앙을 통해 불국토사상으로 승화시키고, 전쟁의 혼란기에는 아미타신앙을,
삼국통일을 달성하면서부터는 정토신앙을, 그 이후에는 화엄사상을 통해 국가적 공동체를 지향했다.
귀족들은 법상종/화엄종으로 무장되고, 대중은 아미타/정토신앙으로 흡수하고, 왕은 미륵불을 자처한 것이다.
<금산사 미륵불... 1930년대 김복진이 만들었다... 미륵사상은 왕과 권력의 전유물도 아니었고, 완성된 최후의 형태도 아니었다... 어려울 때는 후천개벽의 상징이 되었고, 성장하고 있을 때는 미래를 향한 구심점이 되기도 했다... 이 불상이 조성된 1930년대와 진표율사가 만든 750년대의 금산사에는 다르면서 같은, 혹은 하나이면서 하나일 수 없는 많은 의미들이 내포되어 있는 게 아닐지... 그렇게 불교가 들어온 이후 신라에서부터 고려, 조선, 일제강점기와 근대를 거치면서 미륵사상은 토착화된 민간신앙이 돼 버렸다... >
원형의 뿌리는 중간 과도기의 다양한 실험을 통해 변신하고 그 결과를 흡수하면서 새롭게 발전하는 법.
결국 인도에서는 대승불교를 만들지만 그렇게 비판했던 브라만교의 변신인 힌두교로 완전히 흡수되고,
중국에서도 종파를 만들고 선불교로 재편되지만 그렇게 비판했던 유교, 도교에 배척받으면서 흡수되고,
일본에서도 신도와 습합된 형태로 정토종과 선불교의 맥을 이으며 국교가 되었으나 신도로 흡수된다.
<우리나라의 많은 불상은 코가 없고 수많은 사람들의 염원으로 새까맣게 닳았다... 비단 우리만이 아니라 홍콩의 이 관음불도 그만큼 많은 이들의 소망만큼 새까매졌고, 아래 삼화령부처의 발가락도 윤이 나도록 새까맣게 닳았다...>
결국 이렇게 보면, 인도인들은 불교사상을 통해 브라만교의 후신인 힌두교를 더욱 정교하게 만들었고,
중국인들은 불교사상을 받아 도교의 외연을 확장하고, 유학사상을 보다 논리적이고 철학적으로 다듬었고,
일본인들은 불교를 통해 선진문물을 받아들여 문예진흥을 꾀하고 신도의 기복적 성격을 강화시켰을 뿐이다.
(실제로 일본에서는 대장경을 스스로 총합하거나, 불교사상을 한단계 끌어올린 사상가를 배출하지 않았다)
즉 각각의 문명에서 대략 1천년 정도를 불교사상에 지배되었지만, 이내 원형을 회복하고 심화시켰다.
그렇다면 한국에서의 불교는 어떤 역할을 했고, 지금은 어떤 모습으로 변화하고 있을까?
신라에 불교가 들어왔을 때 불교가 비판해야 할 어떠한 체계적인 사상도 없었다는 말은 이미 지적했다.
다만 있었다면 구복(기복)적 성격의 샤머니즘(무속)이 신앙의 형태로 파편화되어 존재했을 뿐이다.
또한 신라는 고구려, 백제, 가야처럼 부족연맹체가 아니라 처음부터 왕족에 의한 정복국가 체계였다.
그들에게는 천손(단군)의 개념도 없었고, 받들어 모셔야할 시조(추모대왕, 동명성왕)도 존재하지 않았다.
오로지 불교에 의지하여 신라를 불국토로 만들기 위해 교단을 만들고 공동체를 위한 신앙을 보급하였다.
때문에 신라불교는 처음부터 호국적, 통합지향적 성격을 가지게 되었고, 개인의 구복을 만족시켜야 했다.
그리고 이를 철학적, 논리적, 대중적으로 체계화시키고 보급하는데 <원효>라는 걸출한 사상가를 가졌다.
<분황사 석탑... 분황사가 원효의 전유물은 아니겠지만, 또 분황사에 남은 원효의 흔적은 영원히 살아있는지도 모르겠다...>
이런 호국적 특성이 있어 신라 이후 고려, 조선, 근대에 이르기까지 한국의 불교는 중국이나 일본과 달리
무수한 종파적 대립이 있었지만, 왕실/귀족/지식인들이 중심이 되어 통합을 지향하며 인정받아야 했다.
삼국통일의 사상적 기반도 불교사상이었고, 원나라 침공에 대항하기 위해 대장경을 불심으로 조각하고,
임진년 조일전쟁에서도 나라를 지키기 위해 승병이 조직되고, 항일운동에도 승려들은 나서야만 했다.
또한 구복적 성격을 만족시키기 위해 정토신앙이 저변에 깔리는데, 미륵사상은 삼국통일의 원동력이 되고,
민초들은 미륵세상을 꿈꾸었고, 전쟁과 궁핍기에는 아미타신앙으로 위로를 받으며, 선적 깨달음을 갈구했다.
문제는 신라의 원형을 무속적 성격의 불교사상으로 볼 수 있는가와 우리의 원형으로 볼 수 있는가다.
신라의 원형을 우리의 원형으로 보기에는 비약이 많겠지만 한가지 분명한 것은 기복적 성격으로의 퇴화다.
조선의 억불정책과 근대 기독교의 비판이 있었지만 가장 많은 신도를 가진 현재의 불교는 구복신앙이다.
절에가면 불상에 절을 하고, 복을 빌고, 부적을 받고, 등을 달지만 염불은 없고, 승려와도 분리되어 있다.
불교를 비판하며 부상한 조선의 유교와 성리학은 불교사상을 흡수하여 한국철학을 한단계 발전시키지만,
또 그런 이유로 봉건적이라는 의미가 유교적인지 불교적인지 불분명한 현대에 불교는 사상적 지위도 없다.
<불국사 석가탑... 고구려, 백제, 신라에 들어온 불교는 단지 신앙으로서 기복의 대상이 되었던 것만이 아니었다... 그리고 신라의 불교는 개개인의 수양과 깨달음을 넘어선, 대승적 구제창생에 만족하는 것으로 끝나지도 않았다... 중세까지의 불교는 분명 공동체를 위한 통치이념과 철학적 사상체계를 함께 갖추었기에 오랜 역사를 대중들과 함께 할 수 있었다... 지금도 신앙의 대상이 되고, 예술작품이 되고, 문화의 상징으로만 남아있지만 사상으로서 완결성과 주도적 역할을 하기 위해 불교는 또 다른 모색을 해야만 하는 시점이 아닐까?>
비단 신라불교의 특징을 계승한 고려와 조선 근대의 불교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까지를 포괄한다면,
불교가 비판하려고 했던 것이 무엇이고, 이루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그 목적이 분명해져야만 한다.
이런 사상적 철학적 뒷받침이 없다면, 지금 진행되고 앞으로 구축될 불사는 무속신앙을 벗어나지 못한다.
무불상시대, 교파와 종파가 존재하지 않던 승가공동체를 경험하지 못한채 한국에 유입된 불교의 파급력은
신화와 설화, 막연한 믿음을 형상화 시킨 불상이라는 예배대상이 있다데서 출발하였다는 점이었고,
이 원형을 극복해내지 못하면 인도, 중국, 일본처럼 구복신앙을 강화시킬 방편으로 불교는 종속될 것이다.
이미 앞에서 사상과 종교는 시대의 반영이며, 습합의 결과이자 완성태가 아닌 변하는 생물이라 말했다.
또 따라잡기와 압축성장, 그리고 원산지보다 집단적인 교조화가 우리의 본성이자 장점이라 말했는데,
우리나라에 수입된 불교도 유교도 가장 빠른 시간내에 압축성장을 이루었고 사상적으로도 최고의 체계를
갖추었으며, 심지어 근대의 산업화에서도 어느 나라 어느 민족도 이루지 못한 기적을 창출해냈다.
그것들은 원산지보다 더 집단적인 통합적 성격과 국가 공동체의 일체감 속에서 추동되고 완성되었지만
이것의 문제는 <조루성>이다. 완성태가 아닌 봉우리에서 새롭게 승화발전되는 미래상을 찾지 못하게 되면
가장 많은 문제점을 내포하면서 급격히 침체되거나, 독창성과 역동성을 잃고 교조화돼버리는 한계를 갖는다.
<석굴암 본존불... 신라와 경덕왕과 김대성과 아사달이 함께 만든 대승불교의 걸작... 지금 시대에 다시 그만한 그릇을 가진 깊이와 높이와 장기적인 안목을 보고 싶다는 생각은 나만의 욕심일까?>
법수동류... 인도에서 불교가 만들어지고 소승불교, 대승불교를 거쳐 중국식 불교가 다양하게 유입되었지만,
그 불교가 건축적, 예술적으로 최후로 완벽하게 꽃피웠다 것이 신라의 불국사와 석굴암임은 분명하다.
그러나 700여년의 불국은 내부의 병폐를 치유하지 못하고 유학에 배척되면서 민초들에게서 멀어졌다.
다시 600여년이 지나 비록 무속적 성격의 기복신앙으로 전성기를 맞이하는 우리나라의 현대 불교는
우리의 문명을 한차원 높게 끌어올리며 동질성과 일관성을 어떻게 살리면서 완성되어갈지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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