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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 風,造,關...

공간10/ 한국불교역사> 5. 고구려,백제, 신라, 고려,조선의 불교 흐름...1105

 

 

 

 

한국 불교의 역사

 

   1. 초창기

   2. 한국의 불교와 종교, 사상의 정착과정을 이해하기 위한 몇가지 메모.

      1) 종교와 사상은 시대의 반영

      2) 사상과 종교는 비판의 방법이면서, 토속전통과 습합의 결과

      3) 한반도에서의 불교 도입

   3. 인도의 불교 흐름

   4. 중국의 불교 흐름

   5. 고구려, 백제의 불교 흐름

   6. 신라의 불교 흐름

   7. 고려, 조선의 불교 흐름

   8. 원효의 사상

   9. 신라와 한국 불교의 특성

 

* 가람배치의 이해를 위해 메모하기 시작한 부분을 <한국 불교의 역사>로 나누어 올려본다.

* 여러자료와 서책, 도판 등을 참조한 것으로 인용한 곳들은 따로 표기하지 않았다.

  (한국철학, 중국철학, 인도철학, 한국건축, 중국건축, 인도건축 등등이며 Daum의 백과사전을 많이 참조했다)

* 가람배치와는 별개의 챕터와 다름없기에 굳이 읽지 않으셔도 된다...

 

 

 

 

 

 

5. 고구려, 백제에서의 불교 흐름...

 

 

 

이렇게보면 중국 불교사는 구마라습의 구역불교와 현장법사의 신역불교, 혜능의 남종선으로 크게 구획되고,

우리나라에서는 자장율사까지가 구역불교, 원효와 의상부터는 신역불교로 맥을 잇게 된다.

그러면 그 이전, 고구려와 백제에서는 불교가 어떻게 정착하고 보급되고 가람배치를 이루어나갔을까?

신라에만 익숙한 우리에게 고구려, 백제가 생소하지만 우리 불교사의 흐름을 추적하는데 소홀할 수도 없고,

고구려, 백제 나름의 특성과 신라를 비교하는 것도 중요하다고 생각되어 간단히 메모만 남겨본다.

 

 

요즘 주말 연속극 <근초고왕>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보자.

드라마에서도 나오지만 근초고왕은 한반도의 대동강 이남과 중국의 요서일대에서 산둥지방,

그리고 일본 열도까지를 포괄하는 서해(황해)의 패권자로서 백제를 해상왕국으로 만든 장본인이다.

이때가 5호16국 시대로 중국은 분열되어 있었고, 이제야 고구려가 요동지방에서 한사군을 몰아낼 때고.

한사군을 몰아내면서 불기 시작한 예,맥,한족의 통합분위기는 절정에 달하고 양국은 제국을 지향한다.

왕은 중앙집권을 완성하기 위해 귀족세력과 대립 또는 그들을 흡수하기 위해 선진문물을 흡수하면서

정통성을 확보하게 되는데, 그때 중국에서 들어온게 구태의 유교와 신흥 불교의 사상이었다고 생각된다.

 

 

<근초고왕의 활동무대를 확인하는 것은 비단 백제사에 대한 이해뿐만 아니라 원삼국시대 이전의 고조선(기원전 2세기), 삼국시대의 고구려와 일본(5~6세기), 그리고 삼국통일 이후 신라시대 장보고(9세기)세력과 고려시대의 해상무역(11세기), 조금 더 멀리 일본의 해적인 왜구(16세기)를 이해하기 위해 꼭 필요한 공간개념이다...> 

 

 

근초고왕 초기 5호16국중 선비족인 연나라 모용황과 대립했지만, 이내 티베트족인 전진이 패자로 등장한다.

이때 근초고왕과의 전투중 사망한 고국원왕의 아들 소수림왕은 백제와 대적하기 위해 전진과 교류하고,

부견을 통해 유교, 불교를 적극적으로 수용하면서 국력을 다지는데 고국원왕의 손자가 바로 광개토대왕이다.

북중국의 패자가 된 전진은 불교로 흥하다 불교로 망하게 되는데 이때 득세한게 구마라습의 구역불교고,

곧바로 티베트 계열의 전진을 몰락시킨 탁발선비 계열의 북위는 불교에 엄청난 제재를 가하며 탄압한다.

 

 

후한의 몰락이후 당시 한족(화족) 입장에서 오랑캐라 불리우던 선비족과 티베트족에 의해 제국이 분열되고

한나라를 이끌던 유교와 도교를 비판하면서 중국의 불교는 선진사상이자 신앙으로 본격적으로 등장한다.

그러나 선비족과 티베트족의 전연,전진,북주,북위 등은 불교를 통해 권력의 정통성을 부여하려 노력했지만,

교단화 되는 불교에의 방만한 재정지출과 지속적인 한화정책에 대한 내분으로 몰락하고 수나라로 통일된다.

어쩌면 이 시기(300년부터 600년까지)가 고구려, 백제의 전성기였고, 당시 불교의 성격도 고착되는데,

크게 미천왕(300년)-고국원왕(백제의 근초고왕)-소수림왕-광개토왕-장수왕대(491년까지)가 고구려 중심의 1차 전성기였다면, 동성왕(479년)-무령왕-성왕-위덕왕-무왕(고구려의 영양왕-연개소문)까지 양국은 2차 전성기(이때 고구려의 몰락은 중국역사에서 엄청나게 큰 의미를 가진다 ; 요-금-청나라)를 맞이한다.

 

 

 

먼저 고구려부터 살펴보면 북중국 문물과 크게 다르지 않았던 고구려 불교는 상당한 체계를 갖추고 있었다.

중국 남북조 시대 불교는 중관파 계열의 삼론종으로 대변할 수 있는데 이 이론적 사상적 지도자가

장수왕(400년대 중반)대 활동했던 <승랑>이며, 일본 삼론종의 시조 혜관(625년)도 고구려 승려다.

진흥왕대 신라 최초의 승통 혜량(551년), 쇼토쿠태자의 스승 혜자(595년), 법륭사 벽화를 그린 담징(610년),

일본서기 이전에 편찬된 일본세기를 지은 도현(670년경)도 모두 고구려의 승려였을만큼 고구려 불교는

내용과 질적인 면에서 당대 한중일을 대표한다 할만했는데, 이런 성격을 통칭해 <학술외교불교>라 부른다.

그러나 미타와 미륵의 혼동 등 구역 중관파의 한계는 연개소문대에 도교가 득세하는 계기가 되었다.

 

 

<담징이 법륭사 금당에 그린 아미타정토도... 고구려의 벽화미술은 동북아시아 벽화미술의 최고봉이었다... 실제로 중국에 남은 무덤벽화의 대부분은 고구려 고분이었고 백제와 신라, 그리고 일본의 고분벽화도 모두 고구려의 영향이었다... 5~7세기 동서양을 막론하고 고구려의 벽화는 세계 최고의 수준이었다...> 

 

 

이에 반해 백제불교의 성격은 <율종>이었는데, 중국 당나라 율종보다 100년이 더 빠르게 형성되었다.

중국불교가 400년경 선비족과 티베트족의 전진,북주 시대에 구마라습의 번역으로 논리적 체계를 갖춘다면,

백제의 <겸익>은 526년 직접 인도를 순례하며 불경들을 모아 직접 번역을 완료하여 율종의 토대를 만든다.

 

원서를 가져와 직접 <번역>한다는 것은 일본인들을 통해 번역된 문안을 2차로 한역하여 문서를 접하던

1970년대와, 원서를 수입 직접 번역한 1980년대 이후의 우리나라 학계의 변화만큼이나 급진적 사건이며,

비록 소승불교의 색깔이 강하기는 하지만 구법순례승으로 불경을 독자적으로 번역하여 종파를 완성하고

왕실과 귀족세력과 견줄만한 지식인 세력을 결집, 승가 공동체 형성에 기반을 만든 것은 엄청난 것으로

당나라 현장보다 100년이 빨랐고, 혜초의 왕오천축국전(五天竺國=다섯개로 분열된 인도)은 200년후 일이다.

 

 

<정림사탑... 탑은 처음부터 불교의 상징이었고, 불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시대에도 가람배치의 중심이었다... 선종의 영향으로 부도탑과 부도비가 중시되고, 교종의 영향으로 불상의 의미가 강조되면서 그 의미가 축소되어가지만... 백제가 어떤 이유로 석등과 석탑, 석당간 등을 만들어졌는지는 불분명하지만(나는 그 원류를 한반도의 고인돌문화-거석문화에서 찾았었다) 백제의 독창적인 불교의 이해가 있었기에 이런 석탑조성이 가능했다고 믿고 있으며, 그 시초를 이 정림사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계율중심의 율종이란 대중들의 윤리생활을 포괄하는 것으로 고구려의 이론적 성향이나 신라의 불국토사상과

분명한 차이를 내포한 것이며, 내가 보기에 백제 율종의 전통은 신라를 지나 현대까지도 이어진다고 보는데,

선덕여왕의 불교치국책으로 신라의 토대를 구축했지만 구역불교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한 자장도 율사였고,

미륵보살을 미륵불 신앙으로 승화시켜 경덕왕대 신라 전성기를 꽃피운 진표도 백제계 출신의 율사였고,

오늘날 선을 주, 교를 종으로 하는 사교입선(捨敎入禪)적 한국 조계종도 교로부터 시작하는 게 전통이다.

아무튼 극단적인 계율주의와 귀족적 성격으로 불교의 대중화에는 실패할 수밖에 없는 한계를 드러냈지만,

백제의 이러한 전통은 일본에 정착했고, 아스카문화는 일본만이 아니라 백제 문화의 꽃이 아닐까 싶다.

 

 

<아스카 문화의 꽃중 하나라 할 수 있는 법륭사의 백제관음... 석가모니불과 아미타불 외에 관음불상이 만들어졌다는 것은 이미 백제의 불교수준이 대승불교를 완전히 체득했음을 이해할 수 있는 근거가 되기도 한다... 이에 반해 신라에서는 미륵보살이 주류를 이루고 있었고, 신라와 일본에서 밀교적 성격의 천수관음이 만들어지고 유행한 것은 조금 더 후대다... 이후 교종 성격의 화엄종으로 신라와 일본의 불교는 통합되는데, 신라에서 불국사가 만들어진 때에 일본에서는 동대사가 함께 만들어지고, 두 절의 주불이 바로 비로자나불이다...>

 

 

 

또 하나 꼭 체크해야할 내용이 중국의 지속적인 분열과 흥망속에서 고구려, 백제가 존재했다는 점이다.

즉, 수많은 귀족과 왕족들이 제국의 몰락을 통해 망명하면서 인적자원의 교류가 활발할 수밖에 없었고,

후한의 몰락이후 북중국에서의 국가란 유교적 체계하에 통치되던 중앙집권적 농경문화체제가 아니라

오아시스를 점으로 이은 유목민의 전통, 즉 성과 성이 점으로 이어진 제국이 국가의 형태였기 때문에

이합집산이 빠른만큼 다양한 문화와 사상들이 교류하고 실험되기에 최적(?)의 조건을 갖췄다는 말이다.

고구려와 백제역시 5부족 연합의 전통(오늘날 이슬람의 부족연맹체 같은)을 왕권중심의 중앙집권체로

변화시켜야할 격동기에 직접 노출되어 있었고, 그런만큼 정통성확보를 위한 통합사상이 절실했던 때다.

 

 

<백제의 대향로... 이 대향로는 6세기 동아시아 불교미술의 수준과 사상을 이해하는 척도가 될만큼 대단한 발견이었다... 기원전 2~1세기, 중국 도교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향로부터 기원후 2세기경 불교영향의 향로의 전통을 이어받고 백제의 5부족 전통까지 융합시킨 백제대향로는 그 크기와 완성도, 독창성에 있어서 당대 최고의 문화를 상징하는 것이고, 사상적 체계를 예술적 상징으로 구현해낼 수 있는 수준높은 문화성을 드러낸 걸작중 걸작이다... 이 향로가 발견 될 당시 중국과 일본 학계에서는 공통으로 한반도에서 만들 수 없는 중국의 작품이었다고 주장되었으나, 중국에서는 유사한 작품을 찾을 수 없는 반면, 백제의 와당과 향로 등에서 그 시원적 형태가 추가로 해석되면서 백제의 것으로 공인되는 분위기다...> 

 

 

종래의 샤머니즘(무속)적 신령숭배와 달리 불상으로 형상화된 숭배대상과 논리적인 내세관을 갖추고,

심오한 철학 체계와 복식과 계율을 갖춘 승가공동체가 평등을 중시한 보편적인 윤리관을 주장하며,

선진적인 문물인 건축, 예술까지 갖춘 지식인들이 앞장섰으니 왕권과 귀족들에게 얼마나 매력적이었겠는가.

여기에 무속과 유교와 도교에 대한 비판적 입장까지 겸비했으니 당대의 불교는 분명 선진사상이었다.

이런 사상으로 무장된 4~600년대 고구려, 백제는 중국의 변방이 아닌 여러 강대국중 하나의 제국이었다.

그리고 이때의 가람배치의 주요한 골격은 달마가 비판했던 행랑+탑+금당+강당 구조가 아니었나 싶다.

 

 

<백제의 익산 미륵사지 복원모형... 7세기 전반에 해당하는 미륵사 가람배치라면 그 시기를 대표한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인도의 가람배치가 탑원과 승원의 이원적 배치에 강원이 추가되어 간다면, 중국의 가람배치는 탑과 금당이 수직적-위계적 서열을 가지고 일직선으로 배치가 된다... 이런 요소들이 종합되어 한반도의 삼국시대에는 탑+금당+강당이 평면적으로 구성된다... 그리고 이 당시까지 가람은 도시평지형이었기 때문에 항상 행랑으로 외부와 격리되어 있었다...> 

 

 

 

 

 

6. 신라에서의 불교 흐름...

 

 

이미 앞서 지적했지만 신라의 불교는 자장, 원효와 의상, 그리고 경덕왕대와 후기 구산선문으로 요약된다.

너무 익숙해진 말들이지만 신라불교는 결국 오늘날 한국불교의 출발이자 모태이므로 그냥 넘어갈 순 없고,

간단하게 역사적인 흐름을 살펴보면서 고구려,백제 그리고 인도나 중국불교와 차이를 전제로 비교해 본다.

먼저 고구려, 백제와 달리 신라에서는 왕통이 형성되는 시점에서부터 불교를 받아들이고 의지한다.

이미 근초고왕때 백제의 속국에도 이르지 못했던 신라에게 불교는 귀족의 사치가 아니라 왕족의 생존이었다.

그리고 이 맹아기의 정체성은 한반도에 전래된 대승불교와 융합하며 <호국불교>의 입지를 굳히게 된다.

 

 

<미륵보살반가사유상... 신라의 혹은 백제의 것으로 각기 추정되고 있으나 나는 50:50이다...^^ 그렇지만 국보78는 확실히 백제 작품이라 믿고 있다...^^ 7세기까지 신라는 미륵보살 사상을 통해 결집되어 있었고, 그것은 국가 공동체를 지향하는 호국적 성격이었다... 아직 성불하지 않은-혹은 못한 보살의 의미와 청년의 모습이 미래지향적인 신라의 패기와 가장 잘 맞지 않았을까 싶다... 삼국통일 후, 원원사 조성에 관한 설화에서 보듯이 그때부터는 밀교적 성격과 다양한 종파들이 득세하며 불상은 다양한 모습을 이루게 된다...> 

 

 

백제에 반해 너무 미약했던 신라는 눌지왕부터 자비-소지-지증-법흥-진흥-진지-진평-선덕-진덕왕까지

10대 150년에 걸쳐 왕명부터 불교식으로 칭하고 <불국토>를 이루기 위한 호국신앙으로 공고화 된다.

왕은 불법의 수호자가 되고, 귀족의 자제들은 <미륵신앙(화랑도, 김유신의 용화향도 등)>으로 무장한다.

이때 고구려계 승려들의 활동도 주요했지만, 중국 유학승으로 왕실에 뛰어든 이가 바로 <원광>이다.

전통적인 불교의 계율과 다른 유교적 덕목과 군사적 용맹을 포괄한 세속오계는 신라의 욕구를 대변한 것이고

이어 유학에서 돌아온 <자장>에 의해 불교는 교단으로 조직되고 대대적인 불사를 통해 확산되기에 이른다.

백제에서는 대승불교의 화신인 관음보살이, 신라에서는 미륵보살이 반가사유상 형태로 조성되기 시작했고,

이후 석가모니의 협시불로 문수,보현보살이 체계화되고, 전쟁의 혼란기인만큼 아미타불이 대세를 이룬다.

 

 

 

<경주 황룡사 복원모형... 비슷한 시기의 백제 미륵사지 모형과 비교해보면 재미있다... 아무튼 자장율사가 귀국하여 처음 시도한 것이 바로 황룡사 불사였다... 그렇게 국가의 지원을 받으며 재원을 마련하고 불사를 일으키고, 또 그렇게 교단을 조직하고... 자장율사에 의해 신라불교는 탄탄한 초석을 마련하게 된다... 그러나 정선 정암사에서 입적한 자장율사의 설화에서 보듯이 그는 문수보살과 아상의 집착에서 벗어나지 못한 한계를 드러낸다... 그 설화에는 그의 불교사상이 아직 대승불교의 정화를 간파하지 못했음을 나타내는 징후들이다... 문수보살에 대한 설화는 끊이지 않지만, 청나라 시조 누르하치는 스스로 문수보살의 화신을 자처한다... 여성의 몸으로 미륵보살을 자처하지 못한 선덕여왕, 전륜성왕을 자처한 경덕왕, 미륵불을 자처한 견훤과 궁예 등등 시대를 주도한 이들은 종교와 신앙, 사상을 시대정신에 결합시키는 지혜와 용기가 있었다...>

 

 

 

그러나 교단과 학술에 의존하며 귀족적 성격을 벗어나지 못한 <구역불교>의 폐습을 혁신하며 나타난 이가

한국불교의 최고 최후의 사상가 <원효와 의상>이니 이들에 의해 불교는 논리적 체계와 대중성을 갖춘다.

신라 불교의 교학은 극치를 이루며 현장법사의 유식론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여 <화엄종>을 창시한 의상과

중국 <법상종>의 창시자 자은대사 규기와 쌍벽을 이룬 <원측>에 이러 논리적 철학적 체계를 완비한다.

태종무열왕까지 기초를 닦고, 경덕왕까지 전성기를 맞이한 이때 신라<학해(學解)불교>는 절정에 달한다.

 

 

<불국사 무설전... 경덕왕대, 학해불교의 정점에서 만들어지는 게 바로 불국사다...>

 

 

미륵신앙과 정토신앙을 바탕에 깔고 화엄종과 법상종(교종)을 골격으로 전성기를 맞이한 신라불교는

경덕왕대부터 실천적 성격이 퇴화되고 귀족적 교단중심의 폐단을 일으키면서 <선종>의 역풍을 맞게 된다.

한반도에서 당나라 군대가 완전히 철수하여 실질적으로 삼국통일을 완성한 경덕왕은 BC3세기 아소카왕처럼 불국토를 이루기 위한 신라왕들의 오랜 염원을 해소하며 스스로 전륜성왕을 자처하면서 불국사, 석굴암등을 조성하였고, 동시대에 백제계 율종을 바탕으로 고행한 <진표율사>에 의해 미륵신앙에 입각한 대규모 불사가 이루어지고, 한편으론 대승불교 최후의 완성태인 비로자나불 조성시대가 열린다.

 

 

그러나 무엇이든 완성이 이루어지면 이론은 교조화 되고, 실천에서는 자세만 강조된 계율이 확산되는 법.

화엄종과 미륵신앙의 불편한 동거는 잦은 정변속에서 새로운 사상을 요구하는데 이때 등장하는 게 장보고다.

중국 남종선 마조도일의 법맥을 전수받아 784년 가지산문을 일으킨 도의선사 이후 염거-체징 등으로 이어지며 유행한 신라의 <구산선문>은, 해상무역을 통해 선진문물과 정치력, 군사력을 장악한 장보고의 후원을 받아 삽시간에 세를 확산시키는데, 불립문자/교외별전/직지인심/견성성불을 요체로 850년경 전라도, 충청도등 백제지역에서부터 승가공동체를 만들며 종파적으로 파편화 되기에 이른다. 

여기에 불교의 밀교적 성격은 더욱 강화되고, 선근공덕과 도교의 음양오행, 풍수지리를 묶은 <도선>의 도참설까지 유행하며 신라시대는 종말을 고하고 고려시대로 이어지게 된다.

* 전라도 답사여행 중 전북답사4> 6. 신라말 고려시대에 대한 몇 가지 첨언(20090318) 포스팅을 참고

 

 

 

 

 

7. 고려, 조선에서의 불교 흐름...

 

 

초기 선종과 교종의 갈등이 증폭되고, 과거제도를 도입한 광종대에 승려들도 승과를 통해 법계를 받았는데,

이는 불교와 승려들이 국가가 관장하는 관료조직으로 흡수되면서 사상적, 정신적 창의성을 잃었다는 의미다.

이때 화엄종과 법상종을 중심으로 선종의 수미산파를 묶어서 만든 것이 대각국사 <의천>의 <천태종>이다.

교관(敎觀)겸수(兼修)를 주창하여 교종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들어서는게 <조계종>이다.

그리고 이때에 송나라와 요(거란)에서는 대장경을 만들었는데, 그것을 집대성한 것이 의천의 고려대장경이다.

 

 

<법천사 지광국사현묘국탑... 대각국사 의천이 활동하기 바로 전 사람이 지광국사다... 당시 고려의 불교는 이 정도의 부도탑을 만들 수 있는 역량이 있었고, 이런 분위기가 있어 의천은 송, 요(거란)나라의 대장경을 취합하여 속장경을 만들었고, 이후 거란의 침입을 불력으로 막고자한 초조대장경을 거쳐, 원나라의 침입을 막고자  팔만대장경이 만들어진다...> 

 

 

다시 100년이 지나 선을 중심으로 교를 흡수하며 경절문(화두의 명상을 통해 깨달음을 얻음)을 강조한 이가

보조국사 <지눌(1210몰)>이며, 그에 의해 고려의 5교양종이 통합되고 한국적인 선불교가 토착화된다.

그는 화엄, 천태, 선종 등을 정혜(定慧)겸수(兼修)로 포괄하고 그 위에 돈오(頓悟)점수(漸修)를 제창하였다.

무신정권, 원나라 침공으로 쇠퇴하는 고려말에 <지공>, 백운, 나옹 등이 고려불교의 마지막 불씨를 지피며,

태고 <보우>에 의해 법맥을 이어가지만, 사탑의 남설, 행사의 번다, 병역기피의 폐단을 이겨내지 못했다.

 

 

<영산전 거조암... 보조국사 지눌이 정착한 곳은 송광사지만, 처음으로 정혜결사를 일으킨 곳이 바로 이곳이다...아무런 군더더기 없이 솔직과 정직만 투명하게 드러낸 건축물이 거조암이고, 그 내부에 안치된 5백 석조나한들이다... 그렇지만 그렇게 크면서 무미건조하지 않고, 높으면서 허허롭지 않는 게 거조암이듯이 지눌의 큰 뜻은 지금까지 이어지는지도 모르겠다...>

 

 

고려사회의 붕괴와 조선시대로의 이행은 동북아시아에서 불교의 주도권이 완전히 상실되는 시점과 일치한다.

쿠샨-굽타왕조까지 전성기를 맞이했던 인도 불교가 9세기부터 쇠퇴, 13세기에 완전히 힌두교에 흡수되고,

5호16국-남북조를 거쳐 당나라대에 전성기를 맞이한 중국 불교가 12세기 중국(유교중심)철학에 흡수되고,

아스카-나라-헤이안 시대까지 전성기를 지난 일본 불교가 14세기부터 신불교의 순수타력신앙으로 퇴색하듯

삼국시대를 거쳐 신라-고려시대에 전성기를 맞이한 한국의 불교가 14세기부터 성리학에 맥을 못 추게 된다.

 

 

그리고 잊지 말아야할 것이 몰락하기 100여년전에 각국 혹은 각민족은 자신들이 할 수 있는 범위내에서의

최고, 최대의 성과를 집적 완료하였는데 그것이 바로 국가적 차원에서 완성한 <대장경>의 등장이었다.

당나라의 몰락과 함께 시작된 동북아의 혼란기에 또다시 신앙은 변질되고 불교 사상은 변화를 모색하는데

11세기, 송(한족)나라, 요(거란)나라, 금(여진)나라, 고려(의천)는 대장경을 편찬하고 사상적 완결을 꾀하며

이를 독창적으로 집대성한 것이 13세기 고려의 팔만대장경(1251년 완성, 1398년 해인사 봉안)이었다.

산이 높으면 골이 깊은 법... 불교사상의 외연내포는 더 이상 인류의 변화발전에 추동력이 되지 못했다.

 

 

 

<해인사 장경각... 13만장에 달한 송나라의 대장경판각이 소실 된 이후, 고려의 팔만대장경은 당대부터 지금에 이르기까지 그 범위와 내용면에서 최고의 수준으로 평가되고 있다...> 

 

 

앞서 5호16국 시대 중국 불교와 똑같은 양상의 사원경제 폐해와 불교의 관념성이 고려불교를 타락시킬때,

북위의 폐불정책과 유사한 배불정책이 시행되는데 천년후 조선의 억불책은 훨씬 체계적이고 지속적이었다.

조선건국에 일조한 무학대사가 있지만, 사상적으로 정도전의 배불론에 맞짱을 뜬 이가 <함허기화>인데

그는 불교의 이단성을 가지고 중국중심주의와 보편주의, 불교의 멸인륜성에서는 입세간주의와 출세간주의,

불교의 교리에 관해서는 윤리주의와 종교주의, 조화의 가능성에서는 유학독존주의와 유불조화주의로 대립하는데, 이 유불논쟁을 통해 우리는 신앙체계를 넘어서서 통치사상에서 지도적 역할을 해야만 했던 그 당시 불교의 역할과 조선 성리학이 인성론, 심성론적 사유를 불교에서 받아들여 심화시키게 되는 과정을 함께 읽을 수 있다.

 

 

 

 

<남양주 진접의 봉선사... 1500년대 선종을 대표하는 사찰이 서울 강남의 봉은사라면, 교종을 대표하는 사찰이 바로 봉선사다... 그리고 서산대사 휴정과 사명대사 유정이 승과를 본 곳도 이곳이고, 봉선사는 1902년 당시까지 경기도의 전 사찰을 관장했던 본사이기도 했다...>

 

 

흥불, 호불정책이 없었던 것이 아니고 보우 등에 의한 불교부흥 시도 등도 있었지만 그 세는 미약했고,

백성들의 출가와 승려의 도성 출입마저 금지 되는 등 가혹한 배불정책 속에 <서산대사 휴정>이 등장한다.

서산대사 이후 한국불교는 결정적으로 교로 시작하여 선으로 들어가는 사교입선(捨敎入禪)적 불교가 되는데,

그 교육체계는 강원에서 선과 교를 교육받고, 선원에서 수행하는 이원적 방식으로 고착되었다고 볼 수 있다.

 

 

그리고 임진왜란과 양자호란 이후 조선의 정체성 확립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조선후기, 근대이전으론 마지막

가장 대대적이고 호불적 불사가 시행되는데 그것이 광해군-인조시대의 전국적인 보수와 중창이 유행했다.

또한 병자호란을 계기로 유입된 천주교의 새로운 종교관과 내세관이 등장하면서 불교는 완전히 신앙으로 회귀하고, 당대 민초들의 요구인 <보국안민,구제창생,후천개벽> 사상(공동체를 위한 호국적, 정토사상과 미륵사상 등)으로 맥을 이을 뿐 주도적 위치를 상실한다.

유일하게 <백곡 처능의 간폐석교소>가 있었지만 1700년대 이후부터 왕실과 사대부에 흡수된 사원경제를 반영하듯 한국불교의 또하나 특징인 사찰의 살림과 운영을 맡은 사판승과 수도에만 전념하는 이판승으로 분리 된다.

* 전라도 답사여행 중 전북답사6> 8. 조선후기-동학농민운동과 민간신앙(20090322)을 참조

 

 

 

<통도사... 신라시대 자장율사에 의해 만들어진 통도사는 인조시대에 다시 중창된다... 지금의 대웅전은 그때 만들어진 수많은 대웅전(법주사 대웅보전, 금산사 미륵전, 무량사 극락전, 마곡사 대웅보전 등) 중 하나다...>

 

 

근대 이후 불교가 다시 조직되는 것은 아니러니하게도 일본의 침탈과정에서 진출하는 일본불교 때문이었다.

백제에 의해 일본에 불교를 전파된지 1400년이 지나 다시 일본불교에 의해 한국불교가 깨어나는 것이다.

1895년에 이르러 일본승려들의 요구로 승려들의 입성 금지령이 해제되고 승단을 국가가 관리하기 시작한다.

 

 

<송광사 대웅보전... 송광사가 유명한 이유는 비단 삼보사찰 중 승보사찰이어서만이 아니다... 지눌에서부터 한용운에 이르기까지 시대을 선도하는 역할을 하였으며, 또 그만큼의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는 방법과 승단과 신도들의 지지를 끌어낼 수 있는 대안을 선택하고 주도했기 때문에 역사를 가질 수 있는 것이라 믿는다...>

 

 

이때 백성들 사이에서 미륵신앙과 정토신앙, 미타신앙이 다시 성행하기 시작하고(신라시대를 생각하라),

승가의 친일세력에 대항, 한국불교의 독립성과 고유한 전통을 지키려는 승려로 나뉘어 갈등하면서

교단으로 조직되는데 일본의 조동종(송대의 묵조선)에 대항하여 임제종(800년대 남종선)이 세워지는데

그 중심인물이 <만해 한용운>이다(지눌이 송광사에 정착했듯이, 임제종도 송광사에서 총회를 연다).

이후 사찰령에 의해 본산, 교구 등이 만들어지고, 1941년 <조선불교 선교양종>은 <조계종>으로 개칭,

현재 비구승과 대처승을 기준으로 <조계종>과 <태고종>으로 양분되며, <천태종>을 포함 3대종단이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