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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 風,造,關...

내가 좋아하는 공간 4> 6. 허허로운 공간(1)...110317

 

 

 

6. 허허로운 공간속으로 흩어지는 그리움...

 

    6-1) 영양 입암면 산해리 봉감오층탑 - 적막의 공간

    6-2) 창녕 창녕읍 옥천리 화왕산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 그리움과 기다림의 크기...

    6-3) 충주 가금면 탑평리 중원칠층탑 - 열린공간에 세워진 이정표

    6-4) 경주 남산 용장골 용장사지삼층탑과 석불좌상 - 호연지기를 느끼고 싶거든...

    6-5) 강릉 구정면 학산리 굴산사지 당간지주 - 풍요속에 자만을 경계하는 긴장감

 

 

 

같은 폐사지이지만, 인위적인 공간보다 자연풍광이 먼저 생각나는 곳들도 있다.

하나는 유적/유물이 너무나 보기 좋게 자연풍광과 어울려 나를 설레이게 만드는 곳이고,

또 하나는 유적 또는 유물로 인해 시공을 초월하고 자연마저 잃게 만드는 곳으로 나뉠 것 같다.

이곳들은 종교적 예배의 공간으로서 기능도 상실하고, 문명과 접목된 역사와 사상을 읽기 어렵지만

자연에 마음을 열고, 자신을 반추하고자하는 이유가 있다면 충분한 시간을 유희해도 좋을 곳이다.

 

 

허허로운 공간이지만, 생각할수록 새록새록 진가를 발휘하는 다섯곳을 꼽아봤다.

하나 하나의 유적 또는 유물이 차지하는 비중도 탁월하지만,

정작 이곳들이 내 기억속에 오래 잠재하는 건 그들이 점하고 있는 <공간> 때문일 것이다.

어쩌면 그곳(!)에 그것(!)이 없었다면 그 공간을 결코 기억하거나 유의미하게 설명할 이유가 없는

그래서 더 이상 채울 것도 없고, 더 이상 비울 것도 없는 딱 그 상태...

그런 곳들이 탑 또는 불상 등과 어울려 기운으로 다가오고 그리움으로 채색되는 공간들이다.

 

 

 

 

6-1) 영양 입암면 산해리 봉감오층탑 - 적막의 공간

(이미 한번씩 소개했던 공간들이어서 그때의 감흥을 되살리기 위해 예전 글들을 인용한다.

그때보다 더 잘 쓸 자신도 없고, 해서 2007년 2월에 썼던 글을 참조했다)

 

 

 

 

 

 

 

 

제일 먼저 꼽고 싶은 곳은 영양 봉감 오층탑이 자리하고 있는 곳이다.

높이 11m, 굄돌의 변형인 별석의 돌출, 그리고 규모를 상쇄하는 안정되고 정연한 구조,

당당한 크기에 적절한 체감과 아름다운 비례를 갖춘 국보187호 봉감 모전오층석탑은

저절로 보는 이를 너그럽게 허용하는 의연함과 차분한 맛을 느끼게 해준다.

 

 

 

 

감은사탑 보다 큰 장대한 규모지만 사람을 압도하는 카리스마가 없고

남한강변 넓은 공간을 포괄하는 중원탑처럼 극적이지 않다.

나원리탑처럼 답답하지 않고, 장항리탑처럼 여리지 않고, 탑리오층탑처럼 밋밋하지도 않다.

같은 모전석탑이지만 죽장동이나 낙산동탑 같은 우람함에 의지하지 않고,

전탑 양식이지만 송림사전탑, 정암사전탑처럼 도식적이거나 인위적인 체감을 따르지도 않았다.

 

 

 

 

 

그리고 여기에 장엄하면서 권위적이지 않고,

우람하면서 둔중하지 않은 세련된, 준수한, 늠름함...

화려하면서도 숨겨지지 않는 단정함이 편안하고,

독야청청 의연하면서도 넉넉한 포용력이 친숙하게 다가오는 봉감 오층탑.

이런 매력에 푹 빠질 수 있는 것은 이 탑이 서 있는 이 공간에서의 느낌 때문이 아닐까?

 

 

 

 

 

 

 

 

 

골속골속 낙동강의 지류들이 만드는 변화무쌍한 길에 마음을 맡기고,

소백산맥을 넘어 태백준령을 등지고 자리 잡은 영양에 들어서면,

산의 변화가 바람을 만들고 물의 변화는 생명을 만들고,

산을 거스리지 않는 물이 주는 변화를 우리는 땅의 이치로 받아들임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우리네 삶의 터전은 물을 향하고 마음의 한쪽은 산을 바라보지 않을까란 생각을 하면서...

 

 

 

 

입암면 산해리...

바위를 머금은 산에 둘러 싸여 바다를 이룬 곳?!!

반변천과 태백준령들이 토해 놓은 산골짜기 고지대.

그나마 발길을 허용한 너른 들판의 막다른 끄트머리,

더 이상 갈 곳 없는 산과 물과 들이 만나는 한편에 오층탑이 서있다.

 

 

 

 

 

 

 

신선한 바람과 상큼한 들판의 향기를 모두 모으고

굽이치는 물길의 거친 호흡을 잠재우고

물결치는 산호령의 가파름을 안정시키며

너른 들판의 사람들 영역을 살짝 비껴 바라보며

하늘을 우러러 의연하며 당당하게 차분한 시선을 열어준다.

 

 

사람들의 시선이 멈추고 발길마저 끝나는 곳,

산으로 갈라지고, 물로 나뉘는 산하에 오로지 하늘과 바람만 존재할 것 같은 허허로운 공간...

무위(無爲)와 무욕(無慾), 시작과 끝을 잊고, 因과 緣의 고리를 잃어도 막막하지 않은 고요한 공간...

무색, 무취, 무미의 빛과 바람과 향기만 존재할 것 같은 적막의 공간이 바로 이 곳이 아닐까?

 

 

참으로 즐겁고 행복한 순간...

마음은 크게 웃고,

온 몸의 생기가 자유를 만끽하지만

이리도 차분해지고 정연해짐은

흐트러지지 않는 봉감탑과 함께하는 아름다운 풍광 때문일 터...

그 적막한 공간이 있어 나는 감사하고 귀한 마음으로 봉감탑을 느껴 볼 수 있었다.

 

 

 

 

 

 

 

복잡한 세상, 답답한 관계에서 조용히 나를 돌아보고 싶거든,

변하는 시대, 무엇을 쫓아야할지 모른다 하소연하고 싶거든,

참과 거짓을 가르고 어떻게 기억되어야 할까 묻고 싶거든,

시간과 세월에 조금 더 의연하고 굳건히 뿌리를 내려 흔들리지 않고 싶거든,

영양 봉감 오층탑이 서 있는 그곳에 서 보라.

 

 

허허로운 공간도,

녹녹찮은 시간의 풍랑도,

부질없다 탓하는 인연의 바람도,

모두 잔잔한 그리움이 되어 그대 마음속 깊이깊이 새겨질테니...

적막만 감도는 공간, 적막을 즐기고 싶다면 영양 봉감 모전오층석탑이 있는 곳을 추천한다.

그 곳에 그 탑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