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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 風,造,關...

공간 16> 고구려 사찰건축과 가람배치에 대하여(4)...110710

 

 

 

고구려 사찰건축과 가람배치에 대하여...

 

 

사족1> 고구려의 근거지 만주지역의 역사적 배경...

사족2> 만주지역의 보편성과 고구려의 특수성...

첫째, 회랑의 존재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초기 사찰건축과 가람배치 ;

둘째, 탑의 시원 ; 탑은 어떻게, 왜 만들어졌을까?

셋째, 고구려의 3금당 1탑식 가람 배치와 변천, 왜 금당이라고 부를까?

넷째, 고구려 3금당 1탑식 가람배치에서 읽어보는 오성좌 사상, 천문사상...

다섯째, 고구려 천문사상의 전파 - 백제, 일본, 신라, 그리고 조선...

 

 

 

 

 

다섯째, 고구려 천문사상의 전파 - 백제, 일본, 신라, 그리고 조선...

 

 

조금 지루하다 싶을 정도로 고구려의 천문사상에 대해 살펴봤다. 이유는 단순하다. 이 기회가 아니면 한국사상의 전통으로 뿌리를 내린 고구려의 천문사상이 형성되어가는 과정을 정리할 공간이 없을지 모른다는 객기와, 불교전파 초기의 일본과 신라에 대한 가람배치를 이해할 수 없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일본의 비조사와 신라의 황룡사지는, 이후의 여타 가람배치와 분명한 차이를 이루거니와, 그 이후부터 일본이나 신라 고유의 색깔을 찾아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간단하게나마 백제와 일본, 그리고 신라에 전승된 고구려의 천문사상과 이후의 흔적에 대해 메모해 본다.

 

 

 

<예산사면석불... 천문사상에 대해 이야기하면서 왠 뜬금없는 사방불??  불상이든 가람배치든 그것을 만들려는 의지에 깔린 내재적 요인과 시대적 배경은 공통점이 있다는데서 이야기는 시작한다... 고구려가 남긴 고분벽화에서 우리의 오래된 천문사상을 읽듯이, 백제가 남긴 유물에서 또 하나의 천하사방의 중심이라는 사상을 읽을 수 있다는 의미에서 백제의 사방불에 대해 살펴본다... 사방불을 만들어낼 정도의 자긍심과 문화적 수준이 없었다면 고구려의 천문사상은 또다른 교조와 답습을 위한 전통에 머물렀을지 모른다... 아무도 만들지 않았던 형식에 천하의 중심관을 담을 수 있는 문화적 역량... 백제는 이미 그런 것을 갖춘 문화강국이었다...>

 

 

 

 

먼저 살펴볼 곳은 백제다. 백제의 가장 오래된 유물 중 하나가 예산사면석불이고, 이 사면석불은 삼국을 통틀어 국가차원에서 조성된 최고(最古, 이 보다 앞선 유물이라고 해봐야 400년대 만들어진 뚝섬출토 선정불좌상인데, 무덤 부장품이나 개인 소장품으로 밖에 볼 수 없는 4.9cm 크기다)의 불교유물에 가깝다. 고구려보다 늦게 불교를 받아들인 백제의 이 석불이 가장 오래된 유물로 남게 된 이유는, 당시 고구려가 광개토왕 비문이나 고분벽화를 살펴보아도 알 수 있듯이, 불교가 국교의 지위나 사후세계를 관장하는 종교로서 지위를 가지고 있지 못했음에 반해, 527년 성왕이 무령왕을 추도하기 위해 만든 것으로 보이는 예산사면석불은 불교가 나라를 수호하는 정신적 지주로 정착하여 왕실차원에서 대대적으로 사찰건축과 불상이 조성되고 있었음을 반증한다.

 

 

 

<예산사면석불... 이런 가치를 가진 이 유물이 보물급이라는데 불만이 많다...^^ 목이 없어서일까? 그 뜻을 충분히 이해하지 않는 우리의 게으름의 결과일지도 모르겠다...ㅋㅋㅎ>

 

 

 

 

역대 황제를 추복(追福)하는 의미에서 만들어진 북위의 운강석굴의 풍습에 따랐다는 연구보고(최완수)도 있지만, 중요한 것은 이 예산사면석불이 백제의 독자적인 천하사방에 대한 자신감의 발로라고 나는 생각한다. 물론 중국에서도 사방불과 비슷한 오방불 사상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음양오행사상에 근거하여 동방 아촉불, 남방 보상불, 서방 무량수불, 북방 미묘성불에 대해 정립하였는데 중앙에 석가불이 존재함을 전제하였다(523년, 소림사 소장 비문)고 하는데, 백제에서는 법화경을 근거로 미륵사상을 받아들여 구마라습의 <불설아미타경/402년>에서 서방 아미타불을, 백시리밀다라의 <관정경/322년>에서 동방 약사유리광여래를, 남쪽 인도에서 출현한 석가여래를 남방에, 그리고 미륵하생은 백제에서 이루어진다고 생각하여 인도의 북쪽인 북방에 배치하는 독자적인 사방불 사상을 완성한다.

 

 

 

 

<칠불암 사면석불... 740년경, 신라 경덕왕대 만들어진 사면석불... 백제의 사면석불은 이렇게 이어진다... 스스로 전륜성왕을 자처할만한 성취와 자신감이 있었기에 이제서야 불국토를 이루었다는 자신감과 자부심이 있어 가능한 유적이 아니었을까?>

 

 

 

 

천문사상이 천하사방의 중심이라는 정체성 확립의 신화적 우주론적 담론이라면, 고구려는 중국의 음양오행사상이라는 도교적 우주관을 수용하여 오성좌 사상에 근거한 3금당 1탑식 가람배치를 정착시켰고, 백제는 한걸음 더 나아가 천하사방의 중심이라는 천문사상에 불교식 오방불 사상과 미륵사상을 흡수하여 백제가 불국토의 이상향을 상징한다는 사방불로 대체한다. 실제로 동서남북을 표현하는 방위개념이 분묘와 불상, 사찰에 적용될 때 그곳에는 천하사방의 중심을 선언 또는 완성했다는 의지를 읽을 수 있는데, 고구려의 피라미드형 고분(4~500년대)이나, 백제의 사방불(예산사면석불/해상강국의 입지를 회복한 동성왕-무령왕-성왕대), 신라(신라가 당군을 격퇴한 679년)와 일본(쇼토쿠태자가 593년 오사카에 만든)의 사천왕사, 신라(당나라가 도독부를 해체하고 완전한 남북국시대가 열린 경덕왕대 만들어진 칠불암(740년)과 굴불사(750년))와 일본(나라 원흥사 오중탑(593년)과 흥복사 오중탑(730년))의 사방불 등이 그것이다. 백제에 의해서 각색된 고구려의 천문사상은 불교의 미륵사상을 통해 수정되고 천손사상으로 승화되지는 못했지만, 고대 일본과 신라를 통해 전승됨을 알 수 있다.

 

 

 

<굴불사 사면석불... 750년경 경덕왕대... 이런 실험들이 있어 경덕왕대 신라는 불국사와 석굴암이라는 불후의 걸작을 남길 수 있었다... 천하사방의 중심이 아니라 완성된 불국토라는 사상이...>

 

 

 

가람배치에 사방불을 끼워 넣으니 주제를 벗어난 감이 없지 않지만, 각국은 필요에 의해 자주적인 천하관을 가지고 싶어하는 시기가 있을 수밖에 없음을 인지하기로 하고, 고구려의 천문사상에 근거한 3금당 1탑식 가람배치가 신라와 일본에 전파된 흔적을 찾아보기로 한다. 먼저 황룡사... 황룡사는 553년 진흥왕이 조성하기 시작한 사찰이고, 그 주지가 고구려에서 귀화하여 신라의 승통이 된 혜량이다. 즉 이제 한반도의 주체로 나서기 시작한 신라에서 왕실주도로 사찰을 건축하는 것은 왕실의 정당성과 나라의 정체성을 과시하기 위한 매우 주요한 공사였을 것이고, 이때 받아들인 것이 고구려의 오성좌 사상과 천문사상에 입각한 3금당 1탑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황룡사지 가람배치 변천도... 고구려의 천문사상에 입각한 3금당 1탑식을 정리하면, 신라 초기에 해당하는 황룡사지 가람배치는 어떻게 이해해야 하는 고심이 많았다... 왜냐하면 사천왕사지나 황룡사지를 보면 삼국시대 신라에서도 다양한 가람배치를 실험했음을 추측할 수 있는데 분명히 다른 구조였기 때문이다... 나는 신라의 가람배치중 가장 독특한 것이 황룡사지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그것이 고구려의 천문사상 영향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물론 신라의 이러한 시도는 오래가지 못했다...^^>

 

 

 

 

 

이런 이유로 600년대 후반부터 만들어진 신라의 가람배치와 553년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황룡사지는 커다란 차이를 보일 수밖에 없는데, 초기 1금당 1탑식으로 조성되었던 황룡사지가 자장율사가 주도한 구층탑 규모 때문에 확장되는 과정에서 3금당 1탑이 된 것이 아니라 혜량이 주지로 있던 중건 당시부터 고구려의 영향을 받았다고 생각한다. 오히려 신라는 자장율사가 귀국한 시점부터, 급변하는 대외정세에 대처하기 위해 당나라 문화를 무비판적이다 싶을 정도로 추종하게 되고, 태종무열왕대에 이르러 최고조에 달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고구려의 천문사상은 더 이상 발전하지 못하다가, 고려말 원나라의 침공이후부터 다시 고조선까지 시대를 확장하여, 고조선-부여-고구려의 정통성을 확립하게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그리고 일본에도 3금당 1탑식 사찰이 존재하는데 그것이 쇼토쿠태자가 만든 7개 사찰 중 비조(飛鳥)사(아스카데라/588~609년)가 그것이다. 익히 알다시피 일본 고유의 신도를 고집하며 불교를 반대하는 귀족세력에 백제계 소가씨 주도로 불교를 받아들이게 되는데, 이때 쇼토쿠 태자의 스승이 백제승 혜총과 고구려승 혜자다. 발굴된 와당이나 기록 등에 의하면 백제계 소가씨 주도가 주도로 백제계 장인들의 손으로 만들어졌음이 확실한 비조사는, 동시대 만들어진 법륭사 등 다른 사찰건축이 백제식의 1금당 1탑식으로 조성됐음에도 불구하고 비조사 만큼은 3금당 1탑식으로 조성되었는데, 개인적으로는 고구려승 혜자의 영향력과 쇼토쿠태자의 자주성 확보를 위한 다양한 실험(쇼토쿠태자는 이때 이미 견당사 등을 파견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극복하기 위한 다양한 정책을 내놓았다)의 결과가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다.(645년 쇼토쿠태자의 정신을 계승한다는 명분으로 소가씨를 전복하고 다이카 개신이 추진된다)

 

 

 

 

<비조사 가람배치도... 황룡사보다 조금 후대일지 모를 비조사는 청암리사지나 정릉사지 가람배치와 훨씬 유사하다... 최소한 이런 유구들은 모본이나 모방보다는 꼭 한번 거쳐야할 홍역처럼 시대와 사상의 필요때문에 만들어진 게 아닐까? 또 이런 실험들과 연구가 있어 그들은 또다른 변화와 발전을 이룰 수 있지 않았을까?>

 

 

 

 

이렇듯 고구려의 3금당 1탑식 가람배치는 500년대 중반 신라의 황룡사와 500년대 후반 일본의 비조사 창건의 교본이 되었고, 인적 사상적으로 맥이 이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천하사방의 중심을 선포하기 위한 천하관은 백제의 사방불 조성에 촉매제가 되고, 신라의 선덕여왕대에는 첨성대 건립을 자극하지 않았을까 상상해본다. 왜냐하면 광개토대왕 비문에서 나타나는 것처럼, 초기 신라는 백제가 아니라 고구려에 의존하고 있었고, 부흥기를 맞이하려는 신라에게 독자적 체계의 천문사상은 왕권과 국가의 정체성 확립에 필수불가결한 요소였기 때문이다. 물론 백제와 신라, 일본은 각각 고유한 특성과 내적 필요에 의해 3금당 1탑식을 선택하지 않았고, 오히려 백제의 1금당 1탑을 거쳐 1금당 2탑식 등으로 다양하게 변화해 나가지만 매우 중요한 연결고리가 되었음은 분명하다고 생각한다.

 

 

 

 

<첨성대... 나는 지금까지 왜 선덕여왕대에 와서야 신라가 첨성대를 만들었는지 생각했었다... 오늘, 그 대답을 억지로(?!)해 본다...^^>

 

 

 

 

 

그리고 이러한 사상적 필요성과 당위성은 조선시대의 개창에서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이 태조 이성계의 역성혁명 이후 맨처음 시작한 것이 독자적 역법을 만들기 위한 천문해석이었고, 그 결실이 세계에서 두 번째로 오래된 석각 천문도인 천상열차분야지도(1395년)라는 점에서도 확인할 수 있다. 공교롭게도 이 천상열차분야지도는 대동강에 빠뜨린 고구려의 석각천문도를 고쳐 그렸다고 권근(정도전과 함께 조선의 대표적 개국공신)이 기술했듯이 고구려의 천문사상은 시대를 뛰어넘는 과학으로도 우리에게 전승되었다.

 

 

<천상열차분야지도... 여주 영릉에 가면 세종대왕대의 각종 천문기구의 모형이 복원되어 있다... 태조, 세종, 숙종대 각각의 석각본이 있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만원권 지폐 뒷면에 그려져 있는 작은 동그라미들이 바로 천상열차분야지도의 일부분으로 별이다... 권근 등이 기술한 내용을 찾아보면 ;

" 옛우리 조상은 이처럼 하늘의 별자리를 크게 보아 일곱 영역으로 나누었다.

즉 북극성 주변에 있는 일년내내 볼 수 있는 별자리는 자미원으로 정해 두었고,

그 아래에 봄철별자리와 여름철별자리 일부를 태미원과 천시원으로 나누었으며

여기에 사방 칠사 별자리가 청룡 백호 주작 현무 사령의 모습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다...

결국 동양별자리는 이러한 사령과 태미원의 대신, 천시원의 일반 백성이

자미원에 사는 하늘나라 임금을 옹위하는 형상이다... ">

 

 

 

 

요약하면 ;

유목과 해양문화에 필수적이었던 방위개념과 농경생활에 필수적인 역법을 정립하는 과정에 필요한 천문과학은,

신분질서의 당위성과 제왕의 정당성, 나라의 정체성 확립을 위해 인문사상으로 발전하게 되고, 여기에 사후세계를 관장하는 북두칠성사상과 현세의 삶을 관장하는 남두육성과 사신 등 도교적 관점과 복희, 여와 등 한나라의 신화와 부여의 일월관 등을 흡수하는 종합적 사상체계로 발전한 고구려의 천문사상은, 천하사방의 중심으로서 독자적인 천손사상으로 완성되었는데,

 

우리는 고분벽화를 통해 천문사상의 변화를 읽을 수 있으며, 광개토대왕의 비문을 비롯한 당시의 기록들을 통해 중국사상이라 할 수 있는 유교의 천명사상이나 도교의 음양오행설과 또다른 독자성을 갖추고 있었고, 후대 만주지역에서 발호하는 발해, 요, 금, 청나라 등의 정신적 지주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고도의 과학적 체계로 조선에까지 영향을 미쳤음을 확인할 수 있다.

 

또한 고구려는 중국을 통해 불교를 받아들이면서 다양한 가람배치 중 그들의 사상에 합치되는 3금당 1탑식 가람배치를 선택하게 되었고, 이 가람배치 형식은 초창기 백제를 비롯해 신라와 일본에까지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는 것이 내 결론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