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사찰건축과 가람배치에 대하여...
첫째, 백제는 왜 목탑을 만들다말고, 석탑을 만들었을까?
둘째, 사비성시대 백제의 1금당 1탑식 가람배치와 사찰건축
셋째, 일본의 사찰건축과 가람배치
첫째, 백제는 왜 목탑을 만들다말고, 석탑을 만들었을까?
1-1) 아비지와 아사달...
1-2) 4~500년대 백제와 중국 (위진)남북조의 역사...
1-3) 백제의 불교유적들은 중국 남북조시대 제, 양나라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1-4) 해상왕국 백제의 특성과 활동범위...
1-5) 사비성 시대의 준비와 겸익의 귀국...
1-6) 겸익이 경험했던 500년대 인도와 중국의 불교사상의 변화...
1-7) 백제 불교의 특징과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완성...
1-3) 백제의 불교유적들은 중국 남북조시대 제, 양나라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흔히 백제의 불교는 고구려와 중국 특히 남조-송,제,양나라 등-의 영향을 받았다고 알려져 있다. 고구려의 고분이 북조의 영향을 받았다면, 백제의 무령왕릉과 백제식 하앙구조는 남조의 영향을 받았다는 고고학적 근거까지 내세우면서 말이다. 그러나 이 당시 중국의 5호16국이 남북조로 정립된 상황과 해상왕국 백제의 특징을 본다면 다른 해석도 가능하다. 광개토왕에게 패한 백제는 진(晉)나라(위촉오, 삼국을 통일한 조조의 위나라를 제갈공명과 지략대결을 벌렸던 사마의의 손자 사마염이 제위를 찬탈하고 세운 나라, 백제 근초고왕 시대)때부터 영위했던 요서와 진평 등을 잃고, 장수왕대에는 수도 한성이 함락되는 위기를 맞는다. 한강유역을 빼앗긴 백제의 선택은 웅진(공주)으로의 천도였는데, 이때 만약 여주로 천도했다면 백제는 이때 멸망했을지 모른다. 웅진시대를 연 왕이 바로 동성왕으로 이때 다시 요서와 진평을 회복한 백제는 동성왕이 중국에서 죽음을 맞이할 때까지 중원진출에 매달린다.
그리고 이때부터 동성왕 사후 일본에서 귀국한 무령왕이 등극한 시기 백제는 남북조와 어깨를 나란히 할 정도로 요서에서 양자강에 이르는 광대한 중국영토(동성왕 8년인 488년, 백제를 침공한 북위 기병 수십만 대군을 물리친 사법명 등을 왕에 봉하고, 목간나 등을 후에 봉했고 고달 등을 광양(廣陽), 광릉(廣陵), 대방(帶方), 조선(朝鮮), 청하(淸河), 낙랑(樂浪), 성양(城陽)태수로 임명했다는 기록이 있는데, 요서지방이 조선, 낙랑은 발해만 서쪽, 대방은 산동, 청하/광릉/광양/성양은 황하, 양자강 일대로 추정되고 있다)를 경영한다. 그리고 그 시기는 성왕을 거쳐 위덕왕대, 즉 수나라에 의해 남북조시대가 끝날 때까지라고 생각하며, 요서에서 산둥반도까지의 직할지와 양자강 일대의 식민지(단재 신채호는 직할지 식민지 구분없이 식민지란 표현을 사용했다. 그는 근초고왕이후 근수구왕대에 더욱 번성했다고 기록했다) 형태로 나뉜다고 생각한다.
<남제서에 근거한 7태수 위치도... 워낙 많이 인용되고 사용된 지도인데, 대략의 위치가 비슷한 거 같아 그대로 올린다... 이런 사료들을 근거로 웅진닷컴에서 한권으로 읽는 "백제왕조실록"과 "고구려왕조실록"에 구체적인 지도가 있으니 참고바란다...>
<남제서 백제전 판본... 1981년 국회에서 국사청문회가 있었던 모양이다... 이때 중국정부는 "이하결문"이란 표기와 함께 15줄이 삭제된 "남제서 백제전 1739년 판본"이 제출되었다고 한다... 문제는 537년 남조 양나라에서 편찬된 남제서 백제전에는 있었던 내용이 명대에 이르러 삭제되었다는 말이다... 조금 더 살펴보면, 1637년, 1652년, 1739년 판본에 삭제된 형태로 판본이 제작된 것이 분명하나, 고려대학교 중앙도서관 한적실에는 같은 1637년 제작된 남제서 백제전의 원본이 남아있어, 고 임승국 교수가 국회청문회에 그 내용을 제출하면서 화제가 되었다고 한다... 그 원본에 대한 스크랩이 있지만, 아래(↓)와 같은 내용이어서 소개한다...>
당시 중국의 여러나라를 비롯해 청나라때 만들어진 만주원류고 등 수많은 사서에 이러한 내용이 기록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지역이 백제의 영토였는지, 그 사람들이 백제인의 의식을 가졌는지 알 수 없다는 이유로 우리는 이 사실을 믿지 않으려 한다. 그러나 5호16국부터 남북조 시대까지 중국에서 명멸해간 나라들의 평균수명은 수십년에 불과했기에(남조의 제나라는 23년, 양나라는 55년, 그리고 그 이전 우리에게 익숙한 유비나 조조의 촉과 위나라 등의 수명은 45년밖에 되지 않는다), 그 지역에 백제의 흔적이 남아있었는지 또는 백성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백제인이었다고 주장했는지는 애초 문제제기 대상이 아니다.
해당 지역 백성들에게 백제는 스쳐지나가는 수많은 나라들 중 하나에 불과했을 수 있고, 그 지역의 영주들에게 국가는 자신들의 존속을 위한 선택과 힘의 문제였지 영구적인 소속감은 아니었을 수 있기 때문이다.(그들에게는 백제든, 북위든, 제나라든, 양나라 등이 중요한 게 아니었을 수 있다) 그리고 백제왕이 중국의 여러 왕조에서 작위를 받고, 자신의 수하들에게 남북조의 벼슬을 청하는 것을 보면, 백제가 기록한 자료가 없을뿐, 백제도 그들에게 벼슬과 작위를 내렸을 수도 있다.(한나라가 정복지에 한사군을 설치한 것처럼, 당나라는 이민족 융화정책의 일환, 또는 영구불변의 항구적 지배를 위해 정복국가의 왕족과 귀족, 그리고 유민들을 강제로 중국의 오지 또는 수도 등으로 이주시키는 정책을 폈다. 이 과정에서 사서 등의 기록들을 폐기하고 중국사관의 입장에서 다시 역사를 기록했다. 특히 그들의 입장에서 정통성을 갖출 수 없는 고구려, 백제에 대해서는 철저했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부분... 대당평백제국비명이란 글과 함께 당시 백제를 평정(?)한 소정방의 전승기록과 함께 의자왕과 백제 유민을 어떻게 처리(?)했는지의 기록이 새겨져있다... 여기에 기록된 백제인구가 620만명... 잘못된 기록, 허구적인 수치 등등 논란도 많았는데, 750년 당나라 인구가 841만호 4,800만명이라고 하는데, 당시 백제의 76만호를 단순하게 계산해도 430만명쯤 되며, 이 정도면 조선시대 1650년대 인구와 비슷하다... 당시의 다른 역사기록은 모두 믿으면서 명확한 근거가 없다는 이유로, 우리는 돌에 새겨진 기록도 때로는 외면한다... 아무튼 당나라는 백제만이 아니라 고구려 유민도 중국 각지로 분산 배치한다... 사진을 남들처럼 잘 찍질 못한다...^^>
더군다나 태수가 책봉된 지역들은 백제의 왕궁이 있던 본국이 아니라 속국의 지위다. 오늘날 캐나다와 호주 등이 영연방의 일원이라고 해서 영국의 식민지라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다. 캐나다와 호주 등이 영연방에서 탈퇴하지 않는 것은 그들의 선택이지 영국의 강제력 때문은 아니란 것과 똑같다. 그들은 백제가 필요할 때 그들에게서 작위를 받고 백제에 조공만 하면 되는 존재들이었다. 여기에서 한가지 우려가 풀린다. 남북조 시대 중국과 백제의 관계는 선진/후진, 상/하의 관계가 아니라 동등한 동일 문화권으로 존속했다는 사실, 백제의 입장에서는 중국의 선진문물을 수입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통치하는 여러 제국의 문물을 필요에 의해 흡수하고 포괄할 수 있는 위치였다는 말이다.
즉 불교를 완전히 중국의 토착종교로 정착시킨 북위와 경쟁하기 위해 그리고 남조와 긴밀히 협력하기 위해 자신의 영향력이 미치는 중국내 영토(월왕 구천(와신상담의 주인공)의 고도를 둘러싼 대략 수천리가 모두 백제땅이니라(문헌비고), 원래 백가제해라는 데서 백제라 부르게 되었다(송서/양서), 서로는 월주에 이르고 북으로는 바다를 건너 고구려에 이르고 남으로는 바다를 건너 왜에 이른다(구당서), 백제국이 양자강 어구의 좌안을 진대로부터 시작하여 송,제,양대에 이르기까기 점령하고 있었고, 후위 때는 중원을 차지했다(주서)는 기록)에서는 해당 지역에 맞는 불교문화를 정착시켰을 것이고, 본국 한반도와 일본에서는 그곳에 적합한 문화양식을 선택했다는 말이 된다.
<백제 무령왕릉 재현... 이 양식과 거의 똑 같은 무덤이 남조시대 중국에도 있다... 우리는 이를 근거로 무령왕릉이 제나라, 혹은 양나라의 문물을 그대로 흡수했다고만 배워왔다...>
결국 왜 속국인 중국에서 백제의 독자적 문물을 발견할 수 없냐는 문제제기는 백제와 중국의 문화와 유물들은 애초부터 달라야한다는 것을 전제한 것으로 잘못된 문제제기인 것이다. 오히려 중요한 것은 당시의 백제를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당대 중국의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상과 문화에 대해 정확히 알아야 한다는 점이다.
1-4) 해상왕국 백제의 특성과 활동범위...
또 하나는 백제가 대륙을 호령할 수 있는 근거가 해상왕국이라는 점이다. 즉 초기부터 황해 재해권을 확보했을 때 백제는 흥했고(로마처럼), 황해에 대한 통제권을 잃었을 때 백제는 쇠약해지거나 몰락했다.(회귀본능일지 모르겠지만 백제는 늘 발해만 주위의 중원을 경략했고, 기마민족이던 그들에게 한반도는 너무 좁았을지도 모른다) 근초고왕, 동성왕 때 백제는 황해를 자신들의 내해(內海)로 삼을 정도로 강성했고, 광개토왕에게 패배한 근수구왕때 약해졌고, 마지막 백제/일본 부흥군이 나당 연합군에 패배한 결정적 원인은 해전에서의 패배다.
농경문화에 의존하는 국가들이 영토를 넓히는 이유는 하나다. 농사지을 땅과 농사지을 사람들이 많아야 한다는 점이다. 이에 반해 해상왕국은 지극히 상업적이어서 영토의 크기 보다는 네트워크의 다양함과 풍요로운 물산의 거점 확보가 중요하다.(2009년 기준 우리나라 수출은 세계 9위인데, 5위 네덜란드나 8위 벨기에, 11위 홍콩은 우리나라보다 국토가 넓어서 수출강국이 된 것도 아니고, 영토확장을 위해 해외 식민지를 경영했던 것은 아니다) 그리고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자전거가 페달을 밟아야만 넘어지지 않듯이,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과 교역이 이루어져야만 유지될 수 있는 나라라는 특징이 있다.
<백제 의자왕이 일본에 보낸 바둑판과 바둑알... 일본 동대사 정창원에 보관하는 유물로 몇년전에 기록과 함께 공개되었다... 상아를 상감기법으로 새겨넣고 옻칠을 했다지? 해상무역왕국 백제가 누렸던 부와 사치(?)의 수준을 읽을 수있을 것 같아 올린다... 중앙일보에 실련던 사진...>
때문에 양자강 일대의 백제 영역이나 7태수 운운한 것은 그것이 백제의 실체라는 주장을 위해서가 아니고, 그들의 활동영역이 우리들의 생각보다 넓었을 뿐만 아니라 끊임없이 새로운 시장을 개척해야만 유지될 수 있는 상업국가의 특성상 백제의 활동범위는 황해를 중심으로 한 중국의 남북조 국가와 일본 열도에 만족할 수 없었다는 생각 때문이다.
인도의 아요디아 왕국이 멸망한 이후 태국의 아유티아 또는 중국 사천성 안악현 이민자촌에서 넘어온 것으로 보이는 가야 김수로왕의 부인, 허황후의 설화에서 보듯이 100년대 후반부터 한반도에서 동남아에 이르는 해상뱃길은 이미 열려 있었고, 384년 동진을 거쳐 백제에 불교를 전파한 인도승 마라난타 이야기, 531년 인도에서 귀국한 겸익의 이야기, 그리고 백제의 22담로와 필리핀 출신이 거의 확실한 흑치상지 장군 등을 생각한다면 새로운 시장 개척과 새로운 문물을 섭렵하기 위한 백제인들의 폭넓은 시야와 진취적인 해상활동은 인도차이나 반도(이 지역 한 원주민과 우리나라의 고어가 동일하다(오빠와 아빠가 다르지만^^)는 기록)를 거쳐 인도까지도 이르는 뱃길을 스스로 개척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아유티아 왕국... 기원 전후 해상무역에 뛰어들었던 아유티아 왕국은 여러곳에 식민지를 경영했던 해상무역왕국이었던 거 같다... 그 연장선상에 가야로 들어온 허황후의 설화가 있다... 이 왕국의 특징 중 아직까지 남아있는 게 목조건축의 용마루 끝, 마감부재로 사용되었던 치미가 "물고기(잉어라고도 한다) 꼬리 문양"이라는 점이다... 가야지방과 일본의 큐슈지방에 아직까지 흔적이 남아있고, 그 대표적인 예가 아래(↓) 오사카성에 남아있는 물고기 꼬리 문양의 치미다...>
<오사카성... 1583년 도요토미 히데요시(임진왜란을 일으킨 풍신수길)에 의해 축성되어 파괴되었다가, 1931년 재건되었는데, 이때 재건했을 때도 예전에 사용했던 황금색의 물고기 꼬리 문양의 치미를 그대로 사용했다... 한번 새겨진 상징과 흔적의 질긴 생명력도 놀랍지만, 근대에 다시 지으면서도 전통의 양식을 훼손하지 않은 일본인들의 정신도 대단하다는 생각... >
또한 그렇게 확장된 광범위한 백제의 활동거점이었거나 백제인들이 집단 거주했던 지역에 백제의 영향력이 얼마나 남아있는가가 중요할텐데 예를 들면 10여년전 TV 다큐프로에서 방영된 것처럼 지금도 백제향이나 백제현 등에 사는 사람들은 백제의 실체를 모르면서도 자신들을 백제인의 후손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나는 백제가 해상왕국으로서 해양상인 집단을 통해 성장했다고 말했다. 그들에게 중요한 것은 공통되고 일관된 정신이지 국가의 백성이라는 소속감과는 다른 의식이라고 생각한다. 의식과 영토를 생각하더라도, 삼성그룹이 우리나라 GNP의 1/4(주식총액도 그만하지?)을 감당한다고 해서 누구도 우리나라 땅의 1/4를 삼성그룹이 소유하고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삼성에서 퇴사했다 하더라도 그들은 여전히 삼성맨을 자처한다(꼭 삼성이라는 기업에 국한된 것은 아니지만).
<백제현 위치... 백제향, 백제구 등 다양한 이름이 있지만, 온령현의 백제는 1999년 KBS 다큐프로에 소개되었으므로 이곳 지도를 첨부한다...>
또 하나의 예, 800년에서 1050년까지 북유럽을 지배했던 바이킹의 실체는 국가가 아니라 해양상인 집단에 불과했다. 그렇지만 그들의 신화와 전설은 오늘날까지 이어진다. 중국에 존재하는 백제라는 이름 때문에 중국 네티즌들의 험난한 비난이 있었다고 하는데, 단초가 된 광서자치구의 백제향 지명 외에도 소림사 인근 숭산에도 백제라는 지명이 남아있다고 한다. 이유가 무엇일까? 그곳은 백제의 영토였거나, 백제의 멸망 후 유민들을 강제 정착시킨 지역이거나, 그냥 백제향이나 백제현이라는 이름이 옛날부터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문제는 삼성출신처럼, 바이킹들처럼 그들은 아직도 자신들이 백제의 후손이라고 생각한다는 점인데, 이런 의식은 그것으로 끝나야지 확대해석될 필요는 없다. 다만, 백제와 연관이 있었다는 객관적이고 합리적인 근거까지 우리가 부정할 필요는 없는 것이고, 그만큼 활동범위가 넓었다는 의미만 확인하면 되지 않을까 싶다.
<백제현을 가는 삼륜차와 버스...>
결국 해상왕국 백제에게 중요한 것은 얼마나 넓은 영토를 가지고 있는가가 아니라 필요한 거점을 충분히 장악하고 지속적으로 관리할 수 있는가? 확장 가능성은 열려 있는가? 그리고 여기에서 창출된 부를 안정적으로 본국으로 가져올 수 있는 힘이 있었는가가 중요했다. 그런 이유에서 백제를 영토와 인구수를 기준으로만 국력과 실체를 판단하는 것 자체가 잘못된 관점이며(그럼에도 불구하고 660년대, 멸망 당시 백제 인구는 고구려의 69만7천호보다 많은 76만호였다/구당서), 이를 기준으로 중국대륙에 백제의 영토가 있었는가 없는가에 매몰된 문제의식은 역사적 진실을 파악하는데 큰 도움이 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일본서기에 기록된바와 같이 한반도의 본국(本國) 백제는 성왕의 전사와 함께 한강유역을 상실했지만, 해상 네트워크를 보존하고 있는 이상 위덕왕과 무왕대에 이르기까지 화려한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고 생각된다. 그런 이유로 해상왕국의 실체는 영토의 넓이가 아니라 일관된 백제의 정신이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같은 다큐프로에 나온 이 지도로 중국 네티즌들이 떠들석했는 모양이다... 화성도 한국땅이라 우겨라고 말이다...^^ 나는 여기에 표기된 곳들이 무엇이라 표현하든, 해상(무역)왕국 백제의 활동영역이었다고 생각하고 있고, 백제가 닦아놓은 이 터전들은 이미 앞선 여러글에서 표현했지만, 장보고의 활동무대가 되고, 16세기까지 이어진 왜구들의 전초기지가 되었다고 생각하고 있다...>
교류와 가치이전에 정통한 상업집단으로서 백제인들은 세상을 충분히 넓게 볼 수 있는 역량과 존재하는 것들을 조합하고 재해석하는데도 탁월한 기지를 발취했다고 생각한다.(그게 없었다면 백제의 금동대향로나 반가사유상, 정림사를 시원으로 한 석탑 등은 만들어지지 않았을 것이다) 그만큼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백제의 해상지배권은 광대하고 확고했으며, 그 네트워크를 지속시키기 위해 그들은 교류하는 지역의 사상에 밀접하게 동화되거나, 또한 자신들의 독자성 확립을 위해 훨씬 많은 공력을 투입했을 것이라는 사실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 결실이 사비성 시대의 개막과 531년 백제로 귀국한 겸익의 시너지 효과가 아닐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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