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사찰건축과 가람배치에 대하여...
첫째, 백제는 왜 목탑을 만들다말고, 석탑을 만들었을까?
둘째, 사비성시대 백제의 1금당 1탑식 가람배치와 사찰건축
셋째, 일본의 사찰건축과 가람배치
첫째, 백제는 왜 목탑을 만들다말고, 석탑을 만들었을까?
1-1) 아비지와 아사달...
1-2) 4~500년대 백제와 중국 (위진)남북조의 역사...
1-3) 백제의 불교유적들은 중국 남북조시대 제, 양나라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1-4) 해상왕국 백제의 특성과 활동범위...
1-5) 사비성 시대의 준비와 겸익의 귀국...
1-6) 겸익이 경험했던 500년대 인도와 중국의 불교사상의 변화...
1-7) 백제 불교의 특징과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완성...
1-7) 백제 불교의 특징과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완성...
직관성이 강한 중국철학과 분석력이 강한 인도철학이, 고구려의 천문사상과 만나면서 조화롭게 섞인다. 그것이 백제의 <비빔밥 불교(?)>가 아닐까?^^ 본래 비빔밥이란 그 비빔밥 그릇에 들어오지 않는 재료에 대해서는 무시하지만, 들어온 모든 식재료는 하나로 섞이는 것이다. 고추장과 참기름, 된장 등 식재료를 섞는 양념이 맛을 좌우하지만, 육류든 채소든 식재료의 맛은 사라지지 않은 상태에서, 새로운 맛을 만들어내는 것이지. 그렇다고 식재료가 부실하거나 양념이 강해도 그 맛은 살아날 수 없고... 또한 비빔밥의 맛을 맞추기 위해 우리는 밥이든 고추장이든 다른 식재료를 더 투입해서 입맛에 맞추지, 비비고 난 식재료를 빼내어 맛을 맞추는 법이 없다.
나는 이런 특성이 백제불교 형성과 비슷하지 않을까 싶어 비빔밥식 불교라 이름을 붙여봤는데, 그 과정도 몇 대에 걸쳐 이루어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근초고왕때부터 시작하면 180년이 걸린거고... 그래서 타력적 신앙활동에 기초한 대승불교의 흐름속에, 도교의 우주관도 살아있고, 유교의 예의와 격식도 살아있고, 소승불교의 고행도 살아있고, 전통적 천문사상인 천하사방의 개념도 살아있고...
나는 그 결과가 본격적으로 시작된 것이 겸익의 율종이라 생각하고 있으며, 조금씩 세월이 지나면서 만들어지는 사방불 개념의 예산사면석불과, 새로운 유형의 서산 마애삼존불, 그리고 능사에서 발견된 백제 금동대향로와, 사각형의 정림사 등의 석탑과, 미륵하생을 주도하는 미륵반가사유상 등이라고 생각한다.(법륭사에 있는 백제관음, 구세관음처럼 불상이 아닌 보살이 조성 목적으로 부각되기도 한다)
<미륵반가사유상... 우리나라에는 많은 미륵반가사유상이 있지만, 그걸 대표하는 것이 국보78호와 83호일 것이다... 최완수씨는 78호는 백제, 83호는 신라의 유물로 추정하고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둘다 백제의 유물이라고도 생각하고 있다... 일단 78호는 백제 유물로 이견이 없어 이걸 올린다...>
이런 발전형태는 깨달음의 주체는 자아이며, 그 속에 우주가 있다는 인도의 소승불교나, 기복과 추복을 위해 사찰과 석굴에 만들고, 그 속에 불국토를 완성하려는 중국이나 고구려의 대승불교, 현세의 왕이 곧 부처고 그 왕이 통치하는 나라 전체가 불국토라는 신라의 불교와는 다른 형태로, 백제는 나라를 불교식으로 바꾼 것이 아니라, 불교를 백제식으로 해석하면서 통치와 결합시켰다고 볼 수 있지 않을까? 그리고 승려조직에는 율종을 강조하고, 백성들에게는 미륵사상을 유포하면서, 이를 토대로 백제를 통해 미륵세상을 완성해 나간다는 자신감을 표출하기 시작한 게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예산사면석불... 이미 고구려 천문사상편에서 소개했지만, 천하사방의 중심이 백제라는 천하관이 담기 시작한 당당한 선언이 예산사면석불이었다는 점만 확인하기로 하고, 각도를 달리한 사진을 한장 더 첨부한다...>
이제야 본 궤도를 찾았다...^^ 예산 사면석불은 이미 이야기(고구려 천문사상편)했고, 금동 대향로도 다른 글(2007년 부여박물관 답사기)에서 소개했고, 서산마애불상은 협시보살 중 하나가 반가미륵보살이라는 것만 다시 강조하기로 하고, 이제 정림사지탑으로 넘어간다. 첫 번째 글의 목적이 이것이므로...
<서산마애삼존불... 지금은 보호각이 해체되었지만, 97년 보호각 내부에서 등을 옮겨가며 열심히 흑백사진으로 찍었던 것 중 한장을 올린다... 조금 더 잘 나온 사진은(?^^) 이미 소개했기에 역시 전등의 각도가 틀린 사진을 첨부한다... 미륵반가사유상, 예산사면석불, 서산마애삼존불, 정림사탑, 백제관음, 백제금동대향로 등등 시대를 초월한 이 걸작들은 모두 500년대 백제의 불교예술품이다...>
정림사탑은 사각형이고, 오층이며, 석탑이다. 하나씩 풀어본다. 탑은 모두가 사각형이 아니다. 팔각형도 있고, 원형도 있다. 중국이나 고구려에 익숙한 사람들이라면 팔각 혹은 팔면의 목탑이 많았다는 것을 알고 있고, 고려를 비롯, 조선시대에도 그런 탑(월정사탑, 수종사탑 등)들이 만들어진 것을 알고 있다. 사방팔방에서 어원을 찾든, 둥근 하늘을 빗대 원과 가장 가까운 도형으로 팔각형을 생각하든, 세상 이치의 기원을 도교에 입각한 우주론에서 찾아 의미를 부여하든 팔각형은 태극 방위의 팔괘개념에서 출발한다. 또한 방위개념이 팔방으로만 표현된 것도 아니다. 십이지신사상도 있다. 동서남북을 각각 분할하지만 십이 방향으로 천하를 구분하기도 하고, 음양오행사상에 맞춰 천하사방을 표현할 수도 있다. 그리고 드물지만 육각형도 있고...
중요한 것은 중국이나 고구려와 달리 백제는 사각형을 고집했다는 점이다. 훨씬 직설적이며 단순한 형태의 천하사방을 선택했기에 그들은 사각형을 모든 방위의 기준으로 삼지 않았을까? 그래서 백제가 만든 목탑은 중국/고구려와 달리 사면이며, 정림사탑도 사각이다.
<정림사탑... 내가 최고로 꼽는 다섯기의 탑중 어딘지 불완전하고 뭔가 손대고 싶은 게 정림사지탑이 아닐까 싶다... 내 생각에 그 가장 근본적 이유는 목탑의 체감과 구조를 그대로 따랐기 때문이다... 목탑의 형태를 석탑으로 풀어서 불완전하고 불안하게 보이는 게 아닐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그보다는 목탑(중국의 목탑 말고, 일본의 목탑들을 생각해보라) 자체가 정림사탑처럼 생겼기 때문이다...>
두 번째는 오층이라는 개념... 탑의 층수는 고구려의 칠층이나 구층, 중국의 짝수나 11층 이상의 다층전각에서 알 수 있듯이 오층탑은 대세가 아니었을뿐만 아니라, 존재했다는 기록도 없다. 그리고 백제의 목탑 기술은 층수와 높이에 구애받지 않을 정도의 수준을 자랑하고 있다.(82m 높이의 황룡사 구층탑 뿐만 아니라, 일본내 여러 목탑과, 백제인 기술자 기록이 남아있는 동대사 칠층목탑도 높이가 100m 정도였다고 한다) 즉 사각면과 마찬가지로 오층탑을 고집했던 것도 기술이나 소재의 문제가 아니라 사상적 미감의 결과였다는 생각이다.
<일본 동대사 복원 모형... 750년대 일본을 대표하는 만큼 동대사의 가람배치도 독특하다... 대불전 영역 밖으로 칠층목탑이 좌우 쌍탑으로 만들어졌는데, 그 높이가 각각 90~100m였다고 한다...>
백제가 국가의 틀을 만든 근초고왕 시기까지 5부족 연맹체였다는 것은 이미 알려진 사실이고 이것은 부여의 전통을 따라 고구려에서도 지속된 형태다. 그리고 또 하나 금동대향로에는 맨위 다섯봉우리에 5악사가 세상의 태평을 노래하는 조각이 새겨져 있다. 그것이 5부족의 형태든, 음양오행에서 따왔든 백제인들의 정신사에서 다듬어진 미감 중 5층은 가장 안정적이고 평화로운 세상을 표현하는 형식이지 않았을까?
<백제금동대향로... 봉황 바로 밑에 다섯마리의 기러기가 다섯 봉우리 위에 서있고, 그 산에는 다섯 악사가 각기 다른 악기를 들고 연주하는 모습이 부조되어 있다...>
결국 같은 전통을 가졌던 고구려에서도 만들지 않는 5층탑을 고집했다(백제 8성이 있지만 8각형 탑을 만든 것도 아니듯이)는 것은 특정한 사상적 규범이 있지 않고서는 불가능한 일... 고구려의 오성좌사상을 받아들였든, 또 다른 이유에서든 백제는 5층탑을 선택했고, 이 양식은 백제멸망과 무관하게 이 지역에 그대로 고착(왕궁리, 비인, 보원사지, 무량사, 담양 읍내리, 곡성 가곡리, 계룡산 청량사지 등 시대를 불문하고 이 지역에는 오층탑이 주류다) 되게 된다.
<왕궁리탑... 백제시대 마지막 만든 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세 번째는 석탑의 출현이다. 우리나라 석탑의 시원을 미륵사지 서탑으로 보든, 정림사탑으로 보든 분명한 것은 백제에서 석탑이 시작한다는 점이다.(분황사탑도 석탑이지만 634년이다) 나는 앞에서, 그리고 전북지역에 대한 글(2009년)에서 고인돌 등 거석숭배사상을 계승했을 거라는 생각을 밝힌바 있다.
<세계 거석문화 분포도...>
혹자는 요즘 유행하는 올레길/둘레길 등이, 트레킹이라는 유럽에서 수입된 문화의 변형으로 이해하거나, 트레킹 신발이 트레킹의 시원이었던 아프리카의 문물이라고 말하고 있지만, 지구상에 가장 많은 산악회를 가진 나라가 대한민국이라는 말이 있다. 등산도 커다란 의미에서 트레킹이며, 우리민족만큼 산을 좋아하는 곳도 없고, 우리 곁에 있는 다양하면서도 자연발생적으로 만들어진 산악회야 말로 오래된 산악숭배사상의 또 다른 모습이라는 것은 이견의 여지가 없으며, 한 나라의 수도를 정할 때 풍수지리 등을 근거로 꼬박꼬박 영산을 강조하는 곳(일주문도 보면 항상 00산 xx사란 현판이 붙어 있다)도 극히 드물다.
<우리나라 북방식 고인돌과 비슷하지? 이것은 아일랜드에 있는 고인돌이다... 우리것과 똑같지?^^ 사실 고인돌 분포는 우리나라보다 유럽에서 면밀히 조사되었다... 왜냐하면 그들에게 존재하는 문화였기 때문이다... 그리고 조사결과는 의외의 결과를 낳는다... 한반도에 전세계에 분포된 고인돌중 절반가량이 존재한다는 사실... 스스로 종주국이라 자처하며 시작했는데 정말 의외의 결과가 조사된 것이다...>
<인도의 고인돌... 아래쪽은(↓) 프랑스 고인돌... 우리나라의 남방식 북방식을 생각하며 비교해보시길...>
산악숭배사상이 전통적인 문화 DNA의 하나인 것처럼, 거석에 대한 경외심은 전통과 신앙처럼 우리 삶속에 깊이 각인되어 있는 문화 DNA중 하나고, 이때에는 이미 영원불멸의 질감과 속성을 표출하기 위해, 불상들이 흙이나 나무가 아닌 거대한 바위와 석굴내부에 조각되고 있던 시점이다. 그리고 여기에 하나 덧붙이고 싶은 것이 겸익의 영향이다.
당시 중국과 고구려, 그리고 백제는 목탑을 만들만큼 만들던 시점이다. 오죽하면 494년 북위가 천도한 낙양의 1/3이 사찰이고, 그중 높은 탑은 200m라는 기록까지 남았겠는가. 그런데 겸익이 불교의 본고장이라는 인도에 가봤더니 무덤은 있지만 탑, 망루형태든 제식건축이든, 다층전각 형태의 목탑은 존재하지 않았었다. 브라만교의 전통인지 불교와 경쟁하던 자이나교 사원뿐만 아니라 불교의 사원들도 석굴형태로 만들어져 있고 그 석굴 앞에는 아소카왕의 열주 같은 기념탑이 있고, 쿠샨왕조 시대에는 돌산을 조각해놓은 것 같은 사원들과 스투파가 즐비했을 것이다. 온통 돌로 만들어진 사원과 스투파... 목탑과 목조건축이 낯설 정도로 인도 사원들의 풍경은 겸익을 깜짝 놀라게 만들지 않았을까? 돌, 돌로 만들어진 불상과 스투파와 사원들... 백제로 돌아온 겸익과 겸익을 따라온 인도승려는 강력히 주장했을지도 모른다. 돌로 만들어진 탑을...
<기원전 200년대 아소카왕대부터 석굴은 조성되었다... 맨 왼쪽에 당시의 기념탑(?)을 보면 좌우 양쪽에 세워졌음을 추측할 수 있고, 무불상시대 석굴내부에는 불상이 아니라 인도 고유의 스투파가 안치되어 있음을 알 수 있다...>
<산치탑과 함께 가장 오래된 유적이 바르하트 스투파다... 기원전 2세기 경으로 추정되는 이때는 불상을 표현하지 않는 시대였다... 상징적으로 보리수만 새기든지, 발바닥만 조각하든지, 이처럼 부처 대신에 스투파나 법륜을 새겼음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스투파에 스투파를 조각했던 것이다... >
<그리고 당시 스투파는 흙이나 돌무더기로 꽉 채워진 무덤이 아니라, 이처럼 내부가 조각으로 채워진 신전형태임을 알 수 있다... 난순(欄楯)이란 난간, 울타리란 뜻이다...>
<초기 무불상 시대와 비교하면 스투파에 부처가 조각되기 시작함을 알 수 있다... 타흐티 바하이 사원 주탑을 자세히보면 2층의 기단부가 있어 계단을 통해 올라가고(다보탑을 생각해보라), 다시 원형의 탑신이 몇개층으로 나누어져 있고,(여기서도 다보탑을 생각해보라) 그위로(노반은 잘 모르겠지만, 우리나라 탑을 기준으로 비교해보면)- 복발 - (앙화가 사각으로) - 보륜 - (보개-수련은 보이지 않고) - 용차 - 보주의 형식을 갖추었음을 알 수 있다... 후대에 내려오면서 스투파는 중국과 일본, 우리나라 탑위에 있는 상륜부의 축소판 같은 형태로 변형되는 것을 추측할 수 있다... 초기에는 앞선 글에 올린 아산치 스투파처럼 봉분의 형태를 띠었었다...>
인도인들은 그들의 전통대로 석굴(아잔타 석굴)과 석굴식의 사원(엘로라 석굴사원)과 석굴형식의 스투파(산치 등)를 만들고 간다라, 미투라 불상을 만들었다. 중국인들은 인도의 석굴과 석굴식 사원을 받아들여 석굴(둔황석굴, 윈강석굴, 룽먼석굴 등)석굴을 만들고, 또한 도교와 유교의 제례건축 전통을 살려 목조의 사찰을 만들고 그 중심에 목탑을 만들다가 차츰 전탑을 세우게 된다. 고구려는 내세를 관장하는 석조의 고분을 만들고 팔면목탑과 오성좌 사상을 가미한 가람배치를 완성했다. 그리고 백제는 그들의 수준과 필요와 전통을 계승하고 융합하여 각각의 형태에서 최고의 수준이 될만한 대향로와 반가사유상과 사면목탑, 그리고 드디어 돌로 만들어진 사면의 오층석탑(우리는 아예 사면석탑을 기준으로 하기에 이렇게 부르지도 않는다)을 만들기 시작했다(석굴식 사원은 신라 경덕왕대 만들어진 석굴암을 기다려야 했지만).
당대의 사상과 역사와 전통이 비빔밥처럼 융화되어 만들어진 사면의 오층 석탑... 나는 그것이 정림사지 오층석탑이라고 생각한다. 또한 석탑의 한계인 높이와 크기는 조성되는 사찰의 규모에 따라 결정되었을 수 있다. 목탑조성에 들어가는 시간과 비용을 석탑은 절감했을지도 모르지만, 석탑조성의 필연성은 시간과 비용의 문제가 아니라 당시의 백제에게는 선택의 문제였고 질감의 문제였을지 모른다. 돌로 만들어진 인도의 스투파처럼 백제의 탑은 석재로 만들어지기 시작했고, 중국과 고구려 목탑처럼 다층전각의 형태의 오층을 고집했으며, 천하사방의 중심으로서 사면의 탑을 만들었던 것이다.
<정림사지 복원 모형... 정림사탑은 작기도 하고, 크기도 하다? 사찰의 규모에 어울리는 적당한 크기였을 것이다>
당대에 가장 커다란 제례를 위한 의식용 향로를 만들었던 백제였지만, 당대에 가장 작은 탑을 만든 것도 백제였을지 모른다. 천불탑 사상으로 탑 속에 부장시킨 초소형 탑도 아니고, 장식용으로 만든 탑도 아닌, 사찰건축의 중심에 버젓이 자리 잡은 작지만 영원불멸의 석탑을 백제가 만들었다. 사찰 규모에 맞게 필요한 만큼의 크기로 만들 수 있는 자부심과 역량을 백제는 충분히 가지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미륵사지 서탑... 이 탑을 예쁘게 찍기는 정말 힘들다... 97년도 찍은 사진인데, 이제는 볼 수가 없다...ㅠㅠ 아무튼 미륵사지는 탑을 비롯해 석등과 석당간까지 모든 것을 석재로 만든 최초의 사찰건축이었다...>
소장하기 좋은 크기의 불상이 처음엔 돌조각이었다가 금동불로 바뀌고, 목불, 소조불, 석불이 뒤섞이다가 철불이 만들어지고, 다시 소조불이 유행하듯이 백제의 유연하고 자유스러운 창작의지의 산물인 석탑은 이후 한반도에 조성되는 탑의 전형이 되었다. 그것은 소재의 변화가 아니라 닮고 싶은 멘토가 되고, 궁극의 완성태가 되었다.
<정림사 오층석탑... 미감으로 예술로 이탑을 보기 시작했던 것이 96년이었던 것 같다... 한번씩 더 볼 때마다, 정림사지와 탑에 대한 정보를 접할 때마다 엉뚱한 질문들이 하나씩 하나씩 쌓여갔다... 왜 저렇게 만들었을까? 무얼 보여주고 싶었던 것일까? 왜 석탑이어야만 했을까? 왜 오층일까? 왜 사각일까? 점점 단순해지고 그 무식해지던(?) 자문에 대한 답을 오늘에서야 정리하고 있다...^^>
석탑을 만들었다고 해서 목탑이 없어진 것은 아니지만, 석탑이 만들어지면서 석등도 만들어지고, 석당간과 석당간지주도 만들어졌다. 목탑과 석탑이 공존하는 미륵사지에서 이루어진 일이지만, 백제의 천하관과 불교관, 그리고 조형의지는 그들 나름의 독자적 체계속에서 천하사방의 중심으로 사찰건축과 가람배치를 석탑과 석등과 석당간 등을 통해 완성해 나갔으며, 그 불국토에 미륵하생의 염원을 기획하고 표현할 줄 알았다.
<97년 같이 사진 배우던 분들과 함께 전시회에 참여한 적이 있다... 무엇을 주제로 할까 고민했었지... 폭포사진을 다시 찍을까? 서울의 문(門)에 대한 작업? 사람들의 얼굴? 하늘?? 탑으로 결론을 내리고도 한참 고민했었지... 감은사탑? 석가탑? 다보탑? 지광국사현묘탑? 나름 고심끝에 내린 주제가 정림사탑이었다... 대지 위에 우뚝 솟은, 굳건히 뿌리내린, 그리고 하늘을 이고 있는 연작 사진 중 하나다... 본래 사진은, 하늘이 훨씬 넓은데 스캔하는 과정에서 위쪽이 생략어 아쉽지만 그냥 올린다... 이탑을 만들었던 그 때 백제인들은 이 탑에 자신들이 담고 싶었던 모든 것을 다 담았다는 생각을 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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