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제의 사찰건축과 가람배치에 대하여...
첫째, 백제는 왜 목탑을 만들다말고, 석탑을 만들었을까?
둘째, 사비성시대 백제의 1금당 1탑식 가람배치와 사찰건축
셋째, 일본의 사찰건축과 가람배치
글을 쓰는 두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연역적 방법이고, 또 하나는 귀납적 방법이다. 과학은 귀납적 방법에 의존하고 철학은 연역적 방법을 즐긴다. 둘다 칼로 물 베듯이 구별할 수 없는 영역도 많지만, 역사는 과학과 철학이 적당히 뒤섞여야 재미있다고 생각한다. 그러나 이게 잘못 엉키면 죽도 밥도 안 된다...^^ 직관적일 수 있는 전제가 공감을 얻으면 증빙이 부족해도 상상으로 보완되고, 명징한 기록과 증거에 의존하면, 논리적 전개가 부실해도 용서 받을 수 있다. 고구려에 대한 이야기를 꺼내다보니 둘다 부족하다. 생각은 많고 자료는 적고, 논리는 명쾌하지 않는데 구성도 조잡하다...ㅠㅠ 그나마 연역적 방법을 취하다보니 개연성이 풍부해 빠져나갈 구멍은 많은데, 애초 대전제에 관심이 없는 분들에게는 재미가 없을 거 같고...ㅉㅉ 게다가 제대로 정리하고 있는지도 불분명한 거 같고...ㅋㅋ
화구최난(畵狗最難)이란 말이 있다. 개는 누구나 그릴 수 있지만, 잘 그리기는 어렵다는 뜻이다. 너무나 잘 아는 주제일수록 잘 알아듣게 설명하기가 어렵다는 말일 게다. 불국사나 부석사에 대해 잘 못쓰면 욕을 바가지로 먹을 수밖에 없는 상황을 비유한 말인데, 고구려나 백제 역사는 모르는 사람도 없지만, 충분히 아는 사람도 없다는 생각에 전혀 어울리지 않는 화구최난이란 말이 왜 떠오를까? 그래서 쉽기도 하고 어렵기도 하겠지... 아무튼 고구려의 사찰건축에 대한 글만큼 수정을 많이 해 본적이 없다. 다 써놓고 올리거나 한번 올리면 수정하지 않고 싶어 하는 마음 때문에 올린 글들을 고치지 않았는데 고구려는 그렇지 않았다. 다시 백제에 대해 쓰려니 또 다시 난감해진다. 어디서부터 시작해 어디로 끝낼지... 조금 다른 방법으로 접근을 해보려 하는데 잘 될지 모르겠다...쩝
백제의 사찰건축과 가람배치에 대한 글을 시작하면서 제 멋대로 나가는 타이핑을 감출 수 없다...ㅋㅋ 백제에 대해 쓰겠다는 것인지, 가람배치에 대해서만 쓰겠다는 것인지... 문제는 지금 말하지 않는다면 언제 할지 모르겠다는 조급함이 고구려에 대한 글을 엉망으로 만들었듯이, 필히 백제도 그럴 것 같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 백제는 왜 석탑을 만들었을까? 2) 백제의 1금당 1탑식의 7당 가람제란 무엇인가? 3) 그렇게 완성된 형태의 사찰은 어떤 느낌일까란 주제를 가지고 또 시작해본다. 이 글의 주제를 벗어나는 이야기들은 잡담으로 생각하시고, 필요한 부분만 읽으시길 바란다. 나는... 그냥 맘 가는데로 쓸 수밖에 없다. 왜냐하면, 당신도 나도 백제에 대해 충분히 모르고 있음이 분명할 것이므로...^^
<부여 능사 복원지... 백제의 금동대향로가 발굴된 능사를 부여의 백제문화단지에 복원해 놓았다... 사찰이 아니라 제사를 지내던 건물이었다고 일부 중국학자는 주장하고 있다... 함께 발굴된 목탑터 사리함의 기록으로 567년 위덕왕대에 만들어졌음이 밝혀졌는데, 규모는 정림사지와 거의 비슷하다... 금당의 이름이나 강당의 이름 등에 이견이 많을 수 있지만, 나에게는 오층목탑의 모습이 가장 궁금했었다... 시간을 놓쳐 땀을 뻘뻘 흘리며 간신히 사진에 담았다...^^>
첫째, 백제는 왜 목탑을 만들다말고, 석탑을 만들었을까?
1-1) 아비지와 아사달...
1-2) 4~500년대 백제와 중국 (위진)남북조의 역사...
1-3) 백제의 불교유적들은 중국 남북조시대 제, 양나라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1-4) 해상왕국 백제의 특성과 활동범위...
1-5) 사비성 시대의 준비와 겸익의 귀국...
1-6) 겸익이 경험했던 500년대 인도와 중국의 불교사상의 변화...
1-7) 백제 불교의 특징과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완성...
1-1) 아비지와 아사달...
우리는 황룡사 구층탑을 만든 이가 백제인이었음을 알고 있고, 불국사 석가탑을 만든 이도 백제인이었음을 알고 있다. 한사람은 아비지고 또 한사람은 아사달이었으니 두 양반 모두 아(阿)씨 성을 가진 사람이었다는 말인가? 110년의 시차가 있으니 아비지가 아사달의 증조나 고조할아버지쯤 되겠지만, 한사람은 목공이고 한사람은 석공이니 한 집안 사람은 아닐 것 같고, 본래 아씨들이 뛰어난 손재주를 가졌다는 말일까? 아니면 백제인들에게 아씨는 그만큼 흔한 성씨였을까(아사달의 부인 아사녀도 아(阿)씨다...^^ 그래서 혹자는 두사람이 부부가 아니라 남매라고도 주장한다)?
<황룡사지 복원 모형... 나는 이미 여러 글에서 황룡사 구층탑 모형은 잘 못된, 혹은 내 맘에 들지 않음^^을 표명한 바 있다... 백제의 기술자 아비지의 손으로 만들어진 구층목탑은 결코, 절대로 저런 모습일 수 없다고 지금도 굳게 믿고 있다...ㅎㅎㅎ 능사에 복원된 오층목탑뿐만 아니라, 비슷한 시기 백제의 기술자들에 의해 만들어진 일본 법륭사 오중탑 등을 참고하면 탑의 미감은 완전히 틀리다...>
두가지의 가설을 세워볼 수 있는데, 먼저 이들은 국가에서 관리하는 공인된 기술자들이었다기 보다, 농촌출신의 다른 표현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든다. 이유는 백제국의 공인이라면 백제에서 보내주었다는 기록이 있었을 것이(백제 멸망 전에 건축된 백제사나 백제 멸망 후에 조성된 동대사 등에는 백제출신과 이름(이들은 아씨가 아니다^^) 분명히 기록되어 있다)이지만, 단순히 이름 있는 기술자란 소개만 나올 뿐이기 때문이다. 또 하나의 가정은 애초에 그들의 이름은 비지와 사달, 사녀였는데, 신라에서 그들의 이름을 소개하면서 또는 후대에 기술자들을 조금 더 고급스럽게 포장하기 위해 아(阿)란 성을 붙였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아(阿)란, 언덕/산비탈/구석이란 뜻을 가지고 있었으니 이 사람들은 필히 산비탈, 언덕이 있던 시골 촌구석에서 농사를 짓고 살았다는 말을 의미할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석가탑... 아사달과 아사녀의 설화가 남아있는 석탑인데, 일부 중국학자들은 중국인 기술자가 만들었다고 주장되기도 한다(의외지?) 신영훈 대목수는 다보탑 기단 판석을 미륵사탑과 비교하면서 완벽히 백제의 미감이라고 주장하기도 했고... 석가탑이 비친 영지에 대한 설은 두가지로 나뉘지만, 중요한 것은 백제인 기술자 아사달의 이름이다... >
웃기는 이야기라고? 일본인 성씨(姓氏) 중 서너번째로 흔한 게 다나카(田中)인데, 한마디로 농사꾼이라는 말이고, 하야시(林)란 성을 가진 사람은 산에 살던 사람이란 뜻이다. 심지어 오사카(大阪), 후꾸오까(福岡)씨도 있는데 이런 성은 그 사람이 살았던 지역이름이 곧바로 성씨가 된 사례다. 이런 예는 일본만이 아니라 독일을 비롯한 유럽, 미국도 마찬가지다. Miller는 방앗간 출신이란 말이고, Becker는 빵공장 출신이며, 미국에 가장 많은 성씨인 Smith는 대장장이란 말에서 유래한다. 일본에서처럼 독일의 Auerbach(아우에르바흐)나 Ginzberg(긴즈버그)씨도 있는데 이 성씨들 역시 자신이 살던 도시이름이다. 물론 일본에서 오랜 역사를 가진 후지와라나 모노베씨 등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이런 성씨들이 만들어진 이유는 메이지 유신(1868~1889년)때 호적법을 새롭게 정리하면서 성이 없는 사람들을 위해 강제로 급조하면서 발생된 역사적 사실로, 유럽에서 유대인들에게 성씨를 부여하면서 만들어진 방식과 유사하다. 나의 주장에 역으로, 백제 혹은 신라에서 부여한 아(阿)씨 성에 대한 추측이 틀렸다는 근거를 당신을 제시할 수 있을까? ㅎㅎ
엉뚱하게 이 말을 꺼낸 이유는, 1800년대 후반 유럽과 일본 등에서 이름만 가진 사람들에게 국가가 성씨를 부여하던 방식은, 이미 600년대 백제나 신라에서도 통용되고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에서 추측해본 것이고, 만약 이게 사실이라면 당시 백제나 신라역시 그만큼 사회제도가 합리적이고 체계적으로 정립되었음을 말하고 싶기 때문이다. 물론 약간의 비약이 있겠지만 내가 진짜 하고 싶은 말은, 예전에는 목공 기술자들이 많았지만, 백제 멸망 이후에도 백제출신의 목공과 석재 기술자들은 충분히 대접받고 있었다는 점과, 그것도 크고 중요한 건축경험이 축적된 사람들이 많았다는 점, 그리고 목공이나 석공 등 다양한 분야에서 체계적으로 기술을 전수하고 전승받으며 집단적으로 존재(이들 뿐만 아니라 노반, 와공, 화공 등 다양한 분야 기술자를 국가 또는 주요 귀족집단이 조직하고 관리)했을 가능성 때문이다. 이 말이 백제의 수준을 가늠하는 잣대가 되지 못하지만, 백제는 그런 건축 기능공, 기술자만으로도 먹고 살 수 있을 만큼 국가와 귀족들이 주도하는 공사(궁궐, 사찰, 주거 등)가 많았고, 그 기술과 인력은 국외인, 신라와 일본 등지에서도 부러워하고 의존할 정도로 뛰어났음을 반증한다는 생각 때문이다.(내가 삼천포로 빠지면 이처럼 끝이 없다...^^)
1-2) 4~500년대 백제와 중국 남북조의 역사...
각설하고, 지금도 남아있는 법륭사 오중탑을 보면 지진을 비롯한 각종 자연재해에 고스란히 노출된 고층의 목조건축물을 1400여년씩이나 버티게 만든 백제인들의 목탑 축조 기술을 충분히 인정할 수밖에 없는데, 왜 그들은 그렇게 멋진 건축물을 만들다 말고 느닷없이 석탑을 만들었는가가 나의 첫 번째 의문이었다. 목재는 떨어지고, 돌은 남아돌아서? 화강암이란 질 좋은 소재는 천년세월을 버틸 수 있다는 생각에서? 아니면 심심해서?^^ 나는 몇 년전 전북지역 답사여행을 다룰 때, 고인돌이란 거석문화의 연속성에서 석탑과 석불을 이해하려 했지만, 오늘은 여기에 두 가지 요인을 덧붙이고 싶다. 그것은 400년대 전후로 만들어진 돈황석굴(병령사 석굴 포함)과 400년대 후반부터 만들기 시작한 운강석굴의 자극과, 384년 백제에 불교를 전파한 인도승 마라난타와 531년 인도에서 귀국한 겸익이라는 존재에서 유추할 수 있는 인도의 영향이라는 생각이 든다는 점이다.
중국에서 어떤 자극을 받았냐고? 고구려는 5호16국중 북중국의 문물과 대립하고 교류하면서 정립된 나라임에 반해, 백제는 같은 부여씨에서 분파되었지만 황해를 매개로 해양제국으로 성장한 나라다. 또한 고구려와의 경쟁과 대립 때문에 남중국과 긴밀한 친분이 있었고 필요에 따라 북중국의 연, 오, 월, 제, 노나라나 북위 등과 교류하거나 전쟁을 치뤘던 나라다.(남제정발과 호한융합을 기치로 494년 단행된 북위의 낙양천도의 직접적 원인이, 488년 백제와의 전쟁에서 패하면서 북경근처의 평성에서 벗어날 수밖에 없었다는 추측과, 이후에도 4차례씩이나 수십만의 기병을 동원했으나 패하면서 몰락해 갔다는 주장도 있는데, 오죽했으면 당나라 입장에서 역사를 인식한 최치원이 고구려와 백제는 남으로 오월을 침략하고 북으로 유연제노를 흔든 중국의 좀이자 큰 적이라고 했겠는가...) 要는 해상왕국 백제의 활동영역은 우리의 생각보다 넓어 인도와도 직접(700년대 신라승 혜초는 당나라를 통해서 인도에 갔고, 800년대 일본승 엔닌은 장보고 선단을 통해 당나라를 순례했다) 거래할 역량을 갖추고 있었고, 중국의 문물을 직접 대하면서 경쟁하고 교류해야할 입장의 나라였다는 점이다.
<남북조시대... 90년대에는 위진남북조시대라고 했지? 백제는 이 당시 남북조와 긴밀한 관계를 유지했다... 5차례에 걸쳐 해전이 아닌 기마전을 벌린 북위도 그렇고, 송-제-이후 양(502~557년)로 변천하는 남조도 그렇고... 당대와 후대의 사서를 보면 중국에 존재했었던 백제의 근거지는 교역중심지를 넘어서 영토의 개념이 존재했음이 분명하다...>
중국의 여러 사서들에서도 기록된 동성왕과 전쟁하거나 연맹을 맺었던 북위, 제나라가 어떤 나라인가? 바로 5호16국을 통합하고 수나라에 의해 중국이 통일될 때까지 남북조시대(이 시대구분은 중국의 공식 역사관이다)를 열고, 장안파와 양주파(북위 바로 전, 16국 시대에 만들어진 게 업도파 불상양식이다), 그리고 강남파 불상양식 등 자주적 입장에서 중국인의 얼굴과 복식을 갖춘 불상을 만들어낸 장본인들이다. 특히 북위는 북중국을 통일하면서 폐불(조선의 억불정책과 동일함)과 복불과정에서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인 돈황석굴과 운강석굴 등을 조성할 정도로 수준 높고 독자적인 불교문화를 이루었던 나라다. 여기에 자신들을 백잔이라고 천시하던 고구려까지 상대해야할 입장에서 천하사방의 중심을 선언하려면 백제는 어떤 천하관을 가져야 했을까? 백제는 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고구려나 북위, 제나라 등과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을 수준과 독자성 확립을 위해 무엇을 하였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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