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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 風,造,關...

공간 15> 고구려 사찰건축과 가람배치에 대하여(3)...110708

 

 

 

 

고구려 사찰건축과 가람배치에 대하여...

 

 

사족1> 고구려의 근거지 만주지역의 역사적 배경...

사족2> 만주지역의 보편성과 고구려의 특수성...

첫째, 회랑의 존재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초기 사찰건축과 가람배치 ;

둘째, 탑의 시원 ; 탑은 어떻게, 왜 만들어졌을까?

셋째, 고구려의 3금당 1탑식 가람 배치와 변천, 왜 금당이라고 부를까?

넷째, 고구려 3금당 1탑식 가람배치에서 읽어보는 오성좌 사상, 천문사상...

다섯째, 고구려 천문사상의 전파 - 백제, 일본, 신라, 그리고 조선...

 

 

 

 

 

 

 

 

셋째, 고구려의 3금당 1탑식 가람배치, 왜 금당이라고 부를까?

 

 

이미 앞에서 고구려에 정착된 사찰건축은 그 지역과 시대의 건축적 특성을 불교의 교리를 통해 재구성하면서 완성되어 간다고 말했다. 현재 평양에 남아있는 유구인 청암리사지나 정릉사지가 완성된 형태인지, 완성되어가는 과정인지 불분명하지만, 오늘날 우리는 백제나 신라의 사람배치와 구분하기 위해 편의상 고구려 사찰 가람배치 특징을 3금당 1탑식이라 부르고 있다. 탑에 대한 설명은 이미 했고, 왜 3금당이라 부르고, 이런 가람배치에 오성좌 등의 천문사상을 왜 결합시켜 우리는 해석할까?

 

 

고구려의 사찰건축을 통해 가람배치의 기본적인 문제들은 모두 해결해야 한다는 차원에서 <금당>이라 부를 수밖에 없는 이유도 설명할 필요가 있다(본래 이 부분은 백제에서 설명하려 했는데...) 요즘 우리가 답사여행 등을 통해 사찰을 접하면 중심 건축물을 대웅전, 극락전, 미륵전, 대광명전 등등으로 부르지 금당이라고 부르지 않는다. 왜냐고? 단순하다. 전각에 이름이 있다는 사실은 그 건축물에 모셔진 부처의 내용과 사상을 알았기 때문일 것이고, 그 사찰이 소속된 종파가 조계종인지 천태종인지 태고종인지 구별할 필요도 있었기 때문이지만,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현판에 그렇게 쓰여 있다는 점이다. 대웅전 혹은 극락전이라고..!^^ 역으로 생각하면, 초창기 가람배치를 해석하면서 불전을 금당이라고 불렀다는 것은 현판도 없고 아무것도 안 쓰여 있었거나, 그곳에 안치된 부처가 누구인지 만든 사람들도 몰랐거나, 또는 모셔진 부처들이 너무 많아서 뭐라고 말해야할지 몰랐다는 말이 된다...^^

 

 

<법륭사 금당... 법륭사 오중탑과 함께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축물이다... 담징의 벽화뿐만 아니라, 석가삼존상을 중심으로 백제관음과 금강역사 등 상당수의 불상과 보살상, 조각상들이 입체적으로 배치되어있다... 아무튼, 이 금당에 현판은 없다...>

 

 

 

억지라고?^^ 오늘날 법륭사나 동대사 등 6~700년대, 초창기 원시적 형태의 전각, 혹은 불전이 보존되어 있는 일본의 사찰에 가보면 현판이 없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아직까지 법륭사의 금당은 그냥 <금당>이라고 불리우고 있고, 1700년대까지 다섯차례 중수를 거듭했던 동대사의 비로자나불(노사나불)을 모신 주불전도 <대불전>이지 화엄전이나 비로전이 아니다. 생각해보면 동양삼국중 가장 분석적이고 명사 만들기를 가장 좋아했던 일본의 절에는 초창기의 전통이 그대로 살아있어 금당, 본당, 불전이라고만 부르는데, 중국과 한국의 불전들은 단칸짜리 전각에도 무수한 종류의 이름을 꼭 붙여야만 직성이 풀리는 아이러니를 볼 수 있다. 아무튼 너무 오래전이어서 건축물이 소실되었거나 기록에 남아있지 않은 것이 아니라, 애초부터 이 건축물들에는 현판이 없었고, 그 이유는 현판을 붙여야할 이유가 없었기 때문일 것이다.

 

 

<동대사 대불전... 752년 창건되어 지진, 화재 등으로 인해 1709년까지 다섯차례 재건되면서도 이 불전에 현판은 붙여지지 않았다... 그들에게 전통의 답습과 복원은 숙명만큼이나 중요했을까?>

 

 

 

사찰건축과 가람배치가 정형화 되어가던 초창기(3~400년대 5호 16국의 중국과 고구려, 500년대 백제, 600년대 일본과 신라) 사찰건축에는 불상이 모셔진 전각이 있었을 뿐이고, 우리는 이것을 최고의 권위를 가진 성스러운 공간으로 <금당(金堂)>이라고 불렀기에 별도의 명칭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왜 옥당(玉堂)이라고 부르지 않았을까?^^) 아직 불교를 이해하는 수준이 미흡했던 구역불교에 의존하던 시기, 종파의 체계도 완결되지 못한 상태에서 각 분파의 차별성과 독립성도 미진했기 때문이다. 다양한 위계와 영역이 구분된 부처에 대한 이해도 구분할 필요가 없고, 불국토 의식은 세련되지 못한 상태에서 금당에 담아야 할 부처와 보살은 넘치고... 부처의 사리탑이 있는데 굳이 다른 이름이 필요없었을지도 모르겠다.

 

 

<청수사... 법륭사나 동대사보다 후대에 지어진 청수사 역시 본당 등으로 부르지 별도의 이름을 가지고 있지 않다...>

 

<홍콩 리펄스베이 옆 사찰... 이름이 잘 생각나지 않는다.^^  굳이 이 사진을 올린 이유는 중국인들은 하나의 건물에 하나의 현판만 붙이지 않았다... 칸칸이 부르기 좋고 듣기 좋은 온갖 이름을 붙여 놓았을 뿐만 아니라 불상 하나하나에도 제각각 이름들을 붙여 놓았다... 중국인과 일본인의 극명한 차이점일까? 이 중간이 우리나라다...^^>

 

 

 

 

 

때문에 초창기 가람배치는, 그 중심에 하늘 높이 솟아있는 탑이 있고, 그 주변에 금당이 좌우배면에 존재했는데 건축물 형태는 감은사지 가람배치도에서 봤던 것처럼 긴직사각형 모양이었고, 그 후면에 넓고 긴 강당이 존재하는 단순한 3원 구성체제였다. 그리고 우리나라에서 가람배치가 여러개의 공간으로 구획되고 다양한 불전이 들어서는 다불전 시대가 되려면, 대승불교가 완벽히 해석되는 신역불교가 뿌리를 내리고 화엄종이 정립되는 원효를 기다려야만 했다.

 

 

<가람배치도... 삼국시대 우리나라 초기의 가람배치도들이다... 문과 탑, 금당, 강당이 회랑으로 둘러쌓인 매우 단순한 구조였으며, 그 중심은 탑이었음을 알 수 있다...>

 

 

 

하나 더, "3금당 1탑식"과 "1탑 3금당식"을 가지고 고민을 많이 했었다. 어느 걸 먼저 써야하나 하고...^^

교종이 뿌리를 내리던 시기 가람배치는 탑과 금당, 강당이 균형을 맞춰가지만,

교종이 확고해질수록 가람배치는 금당위주로 재편된다.

그리고 선종이 득세하고 부도와 부도비가 만들어지면서부터 탑은 사찰건축에서 중심적 상징성을 상실하게 되고, 산문과 탑, 금당으로 대표성은 분산되면서 강당도 존재감을 잃게 된다.

이후 숭유억불 정책하에서(이것은 한,중,일 삼국이 비슷하다) 불교는 민간신앙으로 하강하게 되는데, 이때부터 탑은 완전히 사라지고, 부도와 부도비도 한쪽으로 치워지고, 승려들이 기거하는 공간은 점점 강조되고, 강당은 누각으로 대체되면서 다용도로 목적으로 변질되게 된다.

결국 탑은 없어지고 금당만 남게 되었기에 나는 처음부터 금당을 먼저 쓰게 되었다.

 

그러면 위 그림에서 보이는 초기의 가람배치가 통일신라(남국북시대로 공식 표명되고 있지만, 내가 발해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 없다)-고려-조선을 거치면서 어떻게 변천하는지 간략하게 살펴볼까? 

 

<불국사 가람배치도... 초창기라 볼 수 있는 삼국시대를 지나, 불교의 최고 전성기이자 황금기라 불릴 수 있는 신라를 대표하는 곳이 불국사인데, 이 배치야말로 다불전 시대 완성된 형태의 가람배치가 아니었을까 생각한다...>

 

<봉정사 가람배치도...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가람배치다... 고려중기까지 아직 탑의 흔적은 남아있지만 다불전 영역은 2곳으로 축소되고, 금당 중심으로 가람배치가 이루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이 시기에는 이미 강당이 금당의 부속건물로 전락하게 된다...>

 

<전등사 가람배치도... 용주사 등과 함께 조선후기를 대표하는 가람배치다... 조선후기, 이제 사찰건축과 가람배치에서 탑은 완전히 사라지고, 지금은 철거되어 없지만 요사채가 강당만큼의 비중으로 사찰의 중심영역에 배치됨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 일부 사찰에서는 강당이 누각건축물과 통합되기도 한다... 초기 가람배치에서 맨 뒤에 배치되었던 강당이 시대가 흘러 가람의 맨 앞자리, 산문역할까지 병행할 정도로 위상과 기능, 목적이 달라지게 된다...>

 

 

 

 

 

 

 

 

넷째, 고구려 3금당 1탑식 가람배치에서 읽어보는 오성좌 사상, 천문사상...

 

 

책자와 자료들을 찾아보면, 정릉사지나 청암리 사찰 등의 3금당 1탑식 가람배치는 고구려의 오성좌 사상과 천문사상에 기초하여 배치되었다고 하는데, 오성좌 사상이란 문과 금당, 탑, 강당 등을 각각 오성좌인 좌청룡, 우백호, 남주작, 북현무, 황도와 중궁의 상징으로 이해했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이런 가람배치는 고구려의 특수성일까? 아니면 중국을 포괄하여 당시 가람배치의 공통점일까 하는 점인데, 앞서 고구려가 기반한 지역전통과 당시 역사적 배경을 생각하면, 가람배치는 보편적인 형식이었지만, 그 형식에 의미를 부여한 것은 고구려의 독자성에 기인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걸 이해하기 위해 먼저 오성좌사상이 무엇이면, 고구려의 천문사상이 어떻게 불교를 수용했는지, 불교는 고구려의 천문사상에 어떻게 적응했는지 살펴볼 필요가 있다. 

 

 

<청암리 가람배치도... 이 가람배치도는 오성좌 사상/천문사상에 입각해 고구려의 가람배치를 해설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중국의 연구에서도 확인되듯이 사찰건축의 가람배치는 중국과 만주 특유의 사합원이란 주거건축 양식에 궁궐의 회랑과 불교의 금당, 그리고 유교적 묘사건축과 망루건축의 변형인 탑이 복합적으로 조합되고 융화되면서 형성 되어감을 확인할 수 있다. 즉 불교가 체계화되기 시작한 구역불교 시대부터 불교가 전성기를 맞이하는 수/당대에 이르기까지 3금당 1탑이든, 1금당 1탑이든, 1금당 2탑이든 다양한 형식은 만들어지고 있었고, 다양한 형식 중 하나를 선택하여 이를 체계화 시키고 교범적 양식으로 정착시킨 것은 각나라와 지역의 전통 사상과 고유한 해석의 기법에 따라 체계화되어 간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 때문에 3금당 1탑식을 고구려의 독창적이거나 특수한 형태로 이해할 이유도 없으며, 고구려의 문물이 후진적이거나 불교에 대한 이해가 저급하여 중국의 선진문물을 답습, 무비판적으로 수용했다고 설명할 필요도 없다.

 

 

<중국 가람배치의 변천도... 사찰건축이 본격적으로 시작된 300년대 이후부터 수당대(600년대)에 이르기까지 중국의 사찰들은 다양한 형식의 가람배치를 실험했음을 알 수 있다... 이 변천도를 보면, 가람배치의 출발은 "사합원"이라는 중국 고유의 주거양식이었다는 점과, 사찰건축의 중심이 되는 탑/금당/강당이 어떻게 조합되고 변형되고 유형화되는지 한눈에 파악할 수 있다... 즉 3금당 1탑식이든, 1금당 1탑식이든, 1금당 2탑식이든 독자적인 사상으로 새롭게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시대를 흘러 변형되는 다양한 가람배치 형식중 하나임을 알 수 있다...>

 

 

 

그렇다면 3금당 1탑식에 스며있는 고구려의 오성좌 사상이나 이를 통해 확인할 수 있는 고구려의 천문사상은 과연 토착적인 고구려만의 독창적인 문화이자 사상이었는가 먼저 답해야 한다. 왜냐하면 좌청룡 우백호 등은, 도교적 우주론과 유교적 사상을 막론하고 오랜 세월 풍수지리의 근간이 되었으며, 오늘날에도 우리에게 익숙한 내용이고, 오성좌 사상은 한나라 시대부터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어떤 이유에서 고구려의 독자성으로 규정하는지 설명해야하기 때문이다. 조금 무리가 되더라도 고구려의 천문사상은 고려, 조선시대의 사찰건축과 가람배치 뿐만 아니라 우리민족의 전통사상을 이해하는데 매우 중요하기 때문에 천문, 즉 하늘의 별자리에서부터 이야기를 시작해 본다...^^ 

 

 

우리는 이 문제를 이해하기 위해서 역시 오랜 세월동안 변하지 않는 무덤과 기록 등 고고학적 유물에서 힌트를 얻을 수밖에 없다. 그것이 바로 고구려의 고분벽화고, 광개토대왕비문이다. 오늘날 우리에게 별자리는 우주탐험의 대상이나 그리스 로마신화를 이해하는 매개체, 그리고 연인과 밤하늘을 바라보기 위한 낭만적 상식이나 별자리 운세를 보기 위한 심심풀이의 대상에 불과할지 모르겠다.

 

하지만 중세까지 별자리는 유목과 해양문화를 가진 사람들에게는 방위의 지표였고, 농경생활을 하는 사람들에게는 역법의 지표로서 최고급 지식이었고, 그것을 이해한 사람들은 항상 권력의 중심부였다. (또한 별자리는 영웅과 지도자를 상징하기도 하는데, 명나라때 쓰여진 수호지(북송을 배경)를 보면 108명 도적 수괴(?)들을 32천강성과 72지살성으로 대응시킬 정도로 당시의 천문지식과 사상은 아주 정교하고 체계적으로 정립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에 대비해 아주 저급할지 모르겠지만, 라이언 킹에서 하늘의 별자리를 부모와 선조들의 영혼으로 바라봤다는 코드를 읽는다면 그런 생각과 신화, 사상은 동서고금을 막론하고 일반적이었음을 알 수 있다)

 

 

<장군총... 시작은 고구려 고분에서부터 출발한다... 제단형식을 갖추고 동서남북 방위개념에 호석까지 갖춘 장군총... 고구려의 고분은 멀리 홍산문화에서부터 전통양식을 계승하고 있다... 그리고 고구려 고분은 3단계로 나뉘어 발전하는데 그 전성기가 광개토대왕에서 장수왕으로 이어지는 400년대고, 강대국으로서 넘치는 자부심을 천손사상으로 연결시켜 나라의 정체성을 확고히 만들었다...>

 

 

 

조금 더 멀리 토템사상이 지배하던 고대까지 나가면 하늘과 별자리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이들은 제사장으로서 최고의 권력집단이었고, 그들의 흔적은 오늘날 <점성술(占星術)>이라는 개념으로 남아있다. 물론 현대 우리에게 하늘과 인간사회를 매개하는 천문(天文)의 사상적 측면은 사라지고 과학적 지식과 인문(人文)적 지식만 남게 되어, 성술은 사라지고 점술만 남게 되었지만, 또한 천기(天氣)를 읽는 게 민심을 읽는 것으로 대체되었지만, 하늘의 뜻을 읽는다는 고대의 천문사상은 왕권의 정당성과 국가의 정체성, 신분질서의 당위성을 설명하는 근거였고, 사후세계와 현재의 질서를 설명하는 주요한 매개체였음을 부정하는 이는 없을 것이다.(예전에도 이야기했지만, 현대에도 의미는 달라졌지만 여전히 세상을 지배하는 자가 하늘을, 하늘을 가장 먼저 가장 많이 읽는 자가 세상을 지배하고 있다. 그래서 미국을 쫓는 러시아,일본,프랑스뿐만 아니라 이제 중국까지도 우주개발에 본격적으로 끼어들고 있다)

 

 

<고구려의 고분과 고분벽화는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많다...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고분의 양(!)이다... 진시황 병마총은 하나로 끝날 뿐이고,, 피라미드는 특정 왕들에 치중되어 있지만, 고구려의 고분은 북한학계에서 "떼무덤"이라고 말하듯이 엄청난 양이 집단적으로 모여있다는 점이다... 그 집단성만큼, 고구려인들의 사후세계에 대한 관심과 이것을 주도한 천문사상은 특정층, 일정시대에 한정되지 않고 광범위하고 오랜 세월 지속되었음을 알 수 있다...>

 

 

 

이런 보편적이고 일반적 상황이 전제되지만, 고구려의 고분벽화를 통해 해석된 고구려의 천문사상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체계적이고 독자적인 사상으로 형성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지금까지 고분에 벽화가 그려진 무덤은 총 93기로 그중 81기(1990년대까지 30여기에 대한 발굴만 전해졌다)가 300년대부터 600년대까지 고구려가 만든 것이다. (그만큼 사후세계에 대해 고구려인들이 얼마나 집착했는가 짐작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들은 진시황의 병마총과 이집트의 피라미드는 알지만 고구려 고분벽화에 대해서는 너무 모른다) 여기에는 우리에게 익숙한 수렵도 등과 다양한 복식과 주거건축, 풍속 등이 그려져 있지만, 그들의 사상을 이해하는 주요한 단서인 사신(四神)과 일월상, 그리고 사방위 성상(星像) 등 방위와 별자리가 그려진 고분벽화중 대부분인 22기가 고구려 고분벽화다.

 

 

<무용총... 춤추는 모습이 그려져 있어 무용총이 되었지?^^ 나는 지금까지 어렸을적 배웠던 이 그림을 기본으로 광활한 만주지역을 말달리던 고구려인들의 호방한 기상만 기억하고 있지만, 고분벽화를 통해 훨씬 더 많은 정보를 읽었어야함을 몰랐다...^^ >

 

 

 

간단히 설명하면 사신이란 좌청룡(左靑龍), 우백호(右白虎), 남주작(南朱雀), 북현무(北玄武),

일월상이란 태양을 상징하는 삼족오(三足烏), 달을 상징하는 옥토(玉免)끼와 두꺼비(섬(蟾)),

사방위 성상이란 북두칠성(北斗七星), 남두육성(南斗六星), 동서 쌍삼성(雙三星)를 말하는 것이고,

 

우리에게 익숙한 28성숙이란 매일 하늘에서 보이는 달의 위치를 기준으로 별자리를 나누어 28수라 하고,

다시 28수(宿)를 일곱 개씩 넷으로 나누어 봄 여름 가을 겨울과 동서남북에 배정하여,

동사칠사는 각항저방심미기(角亢氐房心尾箕)으로 청룡의 모습을

서방칠사는 규루위묘필자삼(奎婁胃昴畢觜參)으로 백호의 모습을

남방칠사는 정귀류성장익진(井鬼柳星張翼軫)으로 주작의 모습을

북방칠사는 두우녀허위실벽(斗牛女虛危室壁)으로 현무의 모습을 결합시켜 붙인 별자리다.

 

중요한 것은 이런 개념을 중국(사신과 28수의 결합은 B.C91년 사마천의 사기에도 등장하고, 조선시대에도 등장한다)과 고구려는 공유하고 있었지만, 고구려는 고분벽화에서 추측할 수 있듯이 우주를 해석하는 잣대로 체계적으로 정립하고 일상적으로 매우 긴밀하면서 주요하게 사용하였다는 점이다.

 

 

 

 

<법천사 지광국사현묘탑비 탁본 부분... 1085년 만들어진 이 탑비에는 400년대 만들어진 고구려 고분벽화에나 나오는 옥토끼(용화수의 오른쪽에서 달을 상징)와 삼족오(우리가 바라보는 오른쪽에서 해를 상징)가 새겨져 있다... 신화와 풍속, 사상이란 쉽게 없어지는 것이 아니다...>

 

 

 

하나 더 나가면, 고구려의 이런 천문사상은 무속신앙 중 칠성단이나 조선시대 사찰건축에 유입된 칠성각, 삼성각, 옥토끼 설화와 삼족오 등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우리에게 오늘날까지 전승되고 있을뿐만 아니라, 그 기원을 거슬러 올라가면 석기/청동기 시대에 만들어진 고인돌에도 북두칠성이 새겨져 있었을 정도로 고대로부터 존재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결국 고구려에 의해 집대성된 천문사상은 오랜 세월 우리 민족 고유의 전통사상으로 고착되었음을 부인할 수 없다. 당대의 제천의례와 도교적 우주관을 이념적으로 정립하고, 전래의 토템과 무속을 한나라의 신화(중국의 신화에 등장하는 복희와 여와도 고분벽화에 그려져있다)와 묶어서 우리 고유의 습성을 바탕으로 체계적인 사상으로 정립한 고구려는, 부여의 동명신화까지 흡수하여 광개토대왕비 등을 통해 기록하듯이 고구려를 천하사방의 중심이라는 천하(天下)관을 가지게 된 것이다.

 

 

<운주사 칠성바위 표지/논둑길맨발로님 야후 블로그에서 스크랩... 고려 광종대 만들어진 것으로 추측되는 화순 운주사는 천불 천탑이 하늘의 별자리를 상징한다는 설까지 대두되었다... 그 근거가 이 칠성바위의 배치도인데, 돌의 크기는 별의 밝기를 표현하고 있고, 돌이 놓인 배치 각도를 통해 천문관측이 있었던 시기를 추정할 수 있기 때문이란다... 1000년이 지난 요즘 우리들이 바라보는 북두칠성은 위 그림보다 훨씬 국자모양에 가깝다...>

 

 

 

이러한 천하관은 광개토대왕비의 천제지자(天帝之子), 황천지자(皇天之子), 하백여랑(河伯女郞), 모두루묘지의 하백지손(河伯之孫), 일월지자(日月之子)라는 기록을 남기게 되었고, 고구려인만의 천손(天孫)사상으로 정립되게 된다. 천문에 기반한 사상이 있고 없음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강한 응집력과 동질의 정체성을 부여하는데, 원나라의 침공이후 고려시대 일연의 <삼국유사>나 이승휴의 <제왕운기>, 조선의 정통성을 확보하기 위한 <세종실록지리지>, <동국여지승람>뿐만 아니라 조선후기 안정복의 <동사강목>, 일제강점기 신채호 <조선 상고사>등에 의해 복고된 고조선의 단군신화는 민족의 자긍심과 패배주의를 극복하는 주요한 모티브가 되었다.

 

 

<광개토대왕비문 탁본... 맨 위 오른쪽을 읽어보면 모하백여랑이 새겨져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천제지자도 찾아보기 바란다...^^ 직접 가보지도 못했고, 전쟁기념관에 있는 광개토대왕비의 사진을 찍은 기억이 있는데, 색시에게 물어보니 15년전이란다...ㅠㅠ 스캔해둔 게 없어서 탁본을 스크랩해 올린다...ㅉㅉ>

 

 

 

 

 

물론 고구려는 부여의 신화에 머물렀지만, 고려 이후부터 고조선-부여-고구려 정통성에 입각해 단군신화가 완성(우리들 어렸을적 불렀던 노래가, “우리는 단군의 자손이다”였다)되는데 그 기반이 바로 고구려의 천손사상이다. 이 천손사상은 중국의 천명(天命)론이나 천인합일설(天人合一設)과 또 다른 독자성을 가지고 있었고, 그런 체계가 있어 고구려는 강대국으로 존재했을 뿐만 아니라 후대 만주지역에 부흥하는 발해, 요, 금, 청나라의 정신적 지주가 될 수 있었다. 고구려의 천하중심관이 전성기를 맞이할 때는 광개토대왕에서 장수왕에 이르는 400년대였고, 이때 만들어진 대부분의 고분벽화에는 일월과 사신 사방위에 대한 성상이 그려졌던 것이다.

 

 

<강서대묘의 사신도... 고구려 고분벽화중 최고의 수준을 자랑하는 강서대묘... 벽화의 격이 다르지?^^>

 

 

 

고구려의 천문사상과 천손사상에 대해 너무 많은 이야기를 풀었는데, 가람배치와 관련하여 이야기를 마무리한다면 ; 다양한 가람배치에서 3금당 1탑식은 고구려의 독자적 형식이었다고 말하기 어렵지만, 고구려인들은 그런 형태를 오성좌와 천문사상을 기초로 받아들였다로 정리할 수 있다. 그리고 학계에서 고구려의 3금당 1탑식 가람배치를 오성좌와 천문사상에 입각해 이해하는 것도 충분히 납득할 근거가 있는 것이다. 분명한 것은 천문사상 때문에 고구려가 3금당 1탑식을 만들어낸 것이 아니라, 다양한 가람배치중 고구려는 오성좌 사상이나 천문사상에 기초하여 3금당 1탑식을 선택하고 이해한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