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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 風,造,關...

공간 14> 고구려 사찰건축과 가람배치에 대하여(2)...110707

 

 

 

고구려 사찰건축과 가람배치에 대하여...

 

 

사족1> 고구려의 근거지 만주지역의 역사적 배경...

사족2> 만주지역의 보편성과 고구려의 특수성...

첫째, 회랑의 존재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초기 사찰건축과 가람배치 ;

둘째, 탑의 시원 ; 탑은 어떻게, 왜 만들어졌을까?

셋째, 고구려의 3금당 1탑식 가람 배치와 변천, 왜 금당이라고 부를까?

넷째, 고구려 3금당 1탑식 가람배치에서 읽어보는 오성좌 사상, 천문사상...

다섯째, 고구려 천문사상의 전파 - 백제, 일본, 신라, 그리고 조선...

 

 

 

 

조금 긴 사족을 붙이기는 했지만, 이러한 고구려의 형성과 만주일대의 복합성이 만들어낸 특수성을 읽는다면 고구려 사찰의 가람배치를 이해하는 것은 단순해질지 모른다.

 

 

첫째, 회랑의 존재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초기 사찰건축과 가람배치 ;

 

중국에 본격적으로 불교를 받아들 곳은 한(漢)나라의 정통성을 고집하는 이들에게는 이민족이었던 북방의 오랑캐들이었다. 그리고 후한(後漢) 시대부터 불교는 민간신앙의 하나로 자리를 잡고 있었기 때문에 5호16국의 여러 왕실에서는 한족을 달래고 왕권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적극적으로 수용하였다. 처음 우리나라에 들어온 천주교 전파과정처럼, 이미 200여년 민간신앙으로 정착하고 있던 불교는 개인 기복적 차원에서 소지가 가능한 작은 불상(십자가처럼)만 존재했지만, 왕실과 귀족들이 주도하면서부터 상징적 차원의 궁궐형식(행정체계와 군사적 목적의 궁궐에서 탈피하여 방어 기능을 갖추지 않은 단순한 형식)의 사찰이 궁궐주변 또는 궁궐내부, 그리고 귀족의 사유지나 도심 번화가에 자리 잡았을 것이다.

 

 

<불국사의 회랑... 여기서 회랑은 대지의 경계가 아니라, 영역의 경계였다...> 

<불국사 회랑과 전경... 회랑 구조의 개방감보다 회랑이 구역하는 공간의 집중성과 폐쇄성을 먼저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리고 불국사가 만들어질 때는 회랑의 상징적 목적보다, 사용상 기능의 효율이 더 강조되었을 때일 것이다... >

 

 

 

즉 초기의 사찰은 불특정 대중들이 자유롭게 왕래하던 개방된 공간이 아니라 왕실과 귀족의 사유지에 만들어진 전유물이었을 것이고, 회랑의 존재도 그런 차원에서 이해할 수 있다. 소수림왕대의 고구려도 크게 틀리지 않아 이미 불교는 민간신앙으로 자리 잡고 있었을 것이고, 여기에 중국식의 유교적 제례건축과 사합원 형식의 북방 주거건축 문화가 융합되어 회랑으로 둘러쌓인 폐쇄적인 내부 공간이 형성되고, 위계적 질서와 체계를 갖춘 기념성에 치중한 사찰건축이 만들어지는 것은 쉽게 이해된다.(회랑은 사찰을 건축하기 위해 만들어진 게 아니라, 회랑의 상징을 불교가 끌어들인 것이다. 기능이 상징을 압도하면서 사찰에서는 회랑이 차츰 사라지지만, 억불숭유로 점철된 조선의 처음이자 마지막 왕궁, 경복궁에서도 회랑의 상징적 존재이유는 살아나게 된다)

 

 

<명,청대 북경 주거건축인 사합원 조감도... 명,청대라고 하지만 주거건축의 전통은 수천년 동안 쉽게 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의미와, 고구려의 사찰건축도 기본 토대는 이런 주거건축과 궁궐건축이 융합된 결과물임을 설명하기 위해 참고로 올린다...>

 

<경복궁 회랑...>

 

<창경궁 전경... 한국의 문화유산에서 스크랩...>

 

 

또한 초기였기 때문에 사찰에 기거하는 승려가 많지 않고, 행사위주의 강설이 많았던 당시 불교의 성격과, 신분차별도 엄격한 상황에서 왕실과 귀족들이 사찰을 점유했다면, 사찰은 승려들이 거주하는 목적보다 새롭게 유행하는 불교를 이해하기 위한 네크워크 공간의 목적과 기능에 충실한 건축이었을 가능성이 크다. 여기에 불상의 의미도 체계화 되지 못했다면,

고구려의 사찰은 초기 가람배치의 공통적 특징인, 외부 경계는 회랑으로 구획되고(사찰 대지의 경계가 아니라, 궁궐이나 귀족들이 소유한 영지(장원?)내부에서의 영역 구분),

승원영역이 취약하고(중심인물과 이를 보좌하는 승려 정도만 기거할 수 있는 좁은 공간),

불상 안치 목적을 벗어나지 못해 금당은 크지 않지만(초기 금당은 가로대비 세로가 깊지 않고, 불상은 금당의 가운데에 위치해 있었다),

행사와 강설을 위한 강당이 맨 뒤쪽에 넓게 자리 잡고(그래서 중문에서 탑이나 금당과의 거리보다, 금당이나 탑에서 강당까지의 공간이 훨씬 넓고, 강당이 금당보다 훨씬 크다),

탑이 사찰의 상징이자 중심역할을 하지 않았을까(이때 탑은 폐쇄된 사찰 내부공간의 중심이 아니라, 사찰 외부에서 보이는 상징적 의미) 생각된다.

이러한 가람배치의 초기형태는 682년 감은사 가람배치까지 이어지게 된다.

 

 

<정릉사지 가람배치도... 같은 정릉사터 배치도지만 앞글과 다른 그림이다... 맨위 승원은 작고, 가장 넓은 건축물이 강당이다...>

 

<감은사지 가람배치도... 1금당 2탑으로 가람배치 형식은 다르지만 여기까지를 초창기 사찰건축과 가람배치라고 생각하는 이유는 아직 금당의 명칭이 불분명하고, 금당보다 두배 이상 넓고 큰 강당건축의 존재때문이다... 또한 금당을 자세히보면 "중문"처럼 가로가 세로보다 아주 긴 직사각형임을 알 수 있다... 즉 이때까지 금당에는 많은 사람이 들어갈 수 있는 공간이 없었고, 불상을 모시는 목적에 충실했음을 알 수 있다... >

 

 

 

 

둘째, 탑의 시원 ; 탑은 어떻게, 왜 만들어졌을까?

 

(탑을 죽어라 좋아하는 나로서는 초기의 사찰건축과 가람배치를 이해하기 위해 꼭 집고 넘어가고 싶었던 주제다. 과연 불교가 수입되면서 탑이 만들어졌을까? 아니면 또 다른 비밀(?)이 있었을까? 이것에 대한 메모다...^^)

 

상식적으로 알고 있듯이 인도의 스투파(stupa)는 무덤의 형태이지 중국이나 우리나라, 일본 같은 탑파의 형태가 아니다. 그리고 인도에서의 기념비는 탑의 형태가 아니라 로마시대에 세워진 열주의 형태를 갖췄을 뿐이고 동양 삼국(한,중,일)의 탑 건축 형태는 없다!!! 그런데 왜 불교가 중국을 통해 고구려에 전래되었을 때 목탑이 그렇게 많이 지어질 수 있었을까? 단적으로 말하면, 중국과 고구려 전통의 건축양식을 불교가 석가모니 사리탑의 상징성으로 해석하여 재구성하면서 탑이라고 명명하였다고 생각한다.

 

 

<포로임페리얼리에 있는 로마시대 열주... 인도와 로마, 중국 등의 기념비는 이처럼 비같은 열주형식이었고, 이집트 오벨리스크도 중층건축물 형식이 아닌 비석 형식이었다... 한마디로 우리에게는 익숙하지 않은 기념탑이다...>

 

 

 

주나라가 있었다고는 하나 최초로 중국을 통일한 제국은 진나라고, 영토를 확장시킨 것은 한나라다. 때문에 위, 진, 노, 제, 연 등이 존재했던 북방 중국과 고조선과 부여의 복식, 건축 등의 양식은 하나로 융합될 수 있었고, 그것을 기반으로 세워진 나라가 고구려다. 때문에 탑이 예전부터 있었는가는 한나라의 유적과 고구려의 유적을 통해 유추할 수 있는데, 그것은 기록과 그림, 그리고 고분에서 출토된 벽화나 제기의 흔적들이다. 더군다나 기록과 그림이 보존되는 것은 한계가 많지만 제식(祭式)은 새로운 문물이 들어온다고 해서 함부로 바뀔 성질의 것도 아니며, 한 대에 이르러 중국과 만주지역에는 제례(祭禮)를 체계화시킨 유교가 통치한 나라다.

 

 

<한대 묘사건축 명기... 무덤에서 출토된 이런 부속물은 그 시대의 전통과 문화를 보여주는 가장 확실한 고고학적 유물이다... 도교의 사원이든, 유교 사원이든 또는 궁의 제각이든 신성한 의식을 위한 공간의 상징에 "탑"이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부자들의 전유물이든, 궁궐의 수비용이든, 제사를 위한 신성한 공간이든, 불교가 도입되기 이전부터 탑이란 건축물은 존재했다는 것이다...>

 

<한대 망루건축 명기... 위 묘사건축물 명기와 주거건축물 명기를 보면 이미 한나라시대에 다층의 전각은 일반적으로 존재했음을 알 수 있다...>

 

 

 

즉 한나라 시대의 유구를 통해 당대 건축의 특징을 살펴볼 수 있는데, 먼저 고구려 고분벽화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고구려에는 고상식 건축과 마루가 존재했다는 점과, 중국 각지의 무덤발굴에서 확인할 수 있듯이 제례를 위해 만들어진 다층전각의 존재를 알 수 있다. 그리고 300년대 중후반이 지나면 구마라습에 의한 구역불교가 체계를 잡은 시점, 즉 불교 교리에 입각한 수미단 등 불국토는 수직적 위계를 형상화한 체계를 갖출 수 있었다.

 

 

 <고려 불화의 탑과 한나라 시대의 망루 명기... 망루가 됐든, 묘사건축물이 됐든, 주거건축물이든 이미 존재했던 건축형식에 불교식 해석이 가미되어 다층전각 건축은 사찰건축의 가장 주요한 부분인 탑이 되었다...>

 

 

 

정리해보면 한나라 시대에 이미 이 지역에는 망루건축이 다양한 목적(궁궐을 위한 방어적 목적이든, 도교적 의미의 수양의 목적이든, 귀족의 권위를 상징하는 마천루든)에 의해 만들어지고 있었고, 또한 유교의 제례공간에는 탑 형태의 묘사(廟祠)건축이 특수한 목적으로 만들어지고 있었다. 또한 만주지역의 일반 살림집에서도 중층의 누상건축은 이미 적용되고 있었던 시점이다. 여기에 급격히 유입된 불교의 불국토 사상이 융합되면서 예전부터 가장 신성시하고 귀하게 여겼던 다층전각의 건축물을 사리탑을 상징하는 중심건축물로 수용하면서, 탑이란 이름을 붙이게 되었다는 말이다.

 

 <일본 법륭사 오중탑... 600년대, 이 시기의 탑은 불상을 모시기 위한 전각이 아니라 부처의 사리가 모셔진 부처의 무덤이라는 상징이었다...>

<요나라 불궁사 석가탑 단면도... 우리의 고려시대에 해당하는 900년대부터 1100년대 만들어진 석가탑이다... 사리탑의 의미보다 유형화된 부처상이 필요해진 만큼, 예불이 건축 내부로 들어온 만큼, 불교교리와 사상에 대한 다양한 이해가 체계화된 만큼 탑은 다양한 불상에 위계를 세우게 된다... 즉 이때에는 이미 탑이 불상을 끌어들여 일반 전각같은 기능으로 변했음을 알 수 있다... 요나라(스스로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하던 거란) 건축물이지만, 중국 특유의 풍만하고 기름진 미감의 탑이었음을 느낄 수 있다... 위 일본과 아래 우리나라의 탑, 체감률, 처마의 곡선, 상륜부의 비례 등 다양한 차이가 있지만, 가장 큰 차이는 처마의 깊이다... >

 <조선 법주사 팔상전... 1600년대 만들어졌다... 임진왜란 이후 파괴된 사찰들을 복원하면서 많은 건축물들은 재원의 부족과 목재품귀로 인해 규모는 축소되고 예술적 완성도는 떨어지게 된다... 일례로 화엄사 각황전도 3층 전각이 2층으로 줄어들게 되었고 규모도 축소되었다고 한다... 법주사의 팔상전도 내가 충분히 알지 못하지만, 신라 경덕왕대 진표율사에 의했든, 고려시대에 중창된 시기든 이 자리에는 팔상전보다 훨씬 크고 높은 목탑이 있었을지도 모른다... 아무튼 일본과 중국과 우리의 미감비교도 해볼겸, 시대별로 하나씩 골라서 올린다...>

 

 

 

그러면 인도의 스투파는 그대로 폐기 되었을까? 아니다. 석가모니의 무덤은 목탑건축의 맨 꼭대기에 복발(노반위에 사발을 엎어놓은 모양)형식으로 남게 되고, 그 위에 앙화와 보륜 등 장식은 인도 스투파의 형식은 축소된 크기에서 형식만 차용되게 된 것이 아닐지...

 

 

<인도 스투파...>

 

 

 

결국 부와 권력, 제식의 상징인 다층전각은 이미 존재하고 있었고, 그 위에 외래종교인 불교의 사리탑이 얹어지면서 탑은 사찰건축의 중심이 되었고, 이 형식은 구산선문이 유행할때까지 오랜 세월 가람배치의 전형이 되었다고 나는 생각한다.

 

 

 

<노반 위의 복발... 이 작은 모형을 인도의 산치탑이 축소된 상징이라고 말한다면 웃길까? 나는 사실이라고 생각하고 있으며, 이것은 거의 정설이라고 믿고 있다...^^>

<석가탑 부분>

 

 

 

부처가 자각과 해탈의 모본, 멘토가 아니라 복을 주고 화를 위로하는 신(神)으로 해석되었을 때, 부처의 진신사리가 간직된 탑은 불국토를 상징하는 사찰의 중심이었던 것이다. 나의 결론은, 탑이란 불교가 들어오면서 만들어진 것이 아니라, 이미 존재했던 건축을 불교가 재해석하여 수용한 것이라는 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