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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 風,造,關...

공간 13> 고구려 사찰건축과 가람배치에 대하여(1)...110702

 

 

 

고구려 사찰건축과 가람배치에 대하여...

 

 

 

사족1> 고구려의 근거지 만주지역의 역사적 배경...

사족2> 만주지역의 보편성과 고구려의 특수성...

첫째, 회랑의 존재를 통해 유추해 볼 수 있는 초기 사찰건축과 가람배치 ;

둘째, 탑의 시원 ; 탑은 어떻게, 왜 만들어졌을까?

셋째, 고구려의 3금당 1탑식 가람 배치와 변천, 왜 금당이라고 부를까?

넷째, 고구려 3금당 1탑식 가람배치에서 읽어보는 오성좌 사상, 천문사상...

다섯째, 고구려 천문사상의 전파 - 백제, 일본, 신라, 그리고 조선...

 

 

 

제목은 거창하게 붙였지만, 사실 우리는 고구려의 사찰건축과 가람배치에 대해 알 길이 없다.

물론 사찰건축의 역사 메모에서 소개한대로 300년대 후반부터 초문사, 청암리 등의 사찰이 있었고,

정릉사, 청암리, 상오리 절터에 8각 목탑과 요동성에 칠층 목조의 육왕탑, 그리고 평양 영탑사에 팔각 칠층석탑이 있었다는 말 외에, 남아있는 유구로는 평양의 정릉사지, 청암리 금강사터 등 발굴 조사를 통해 3금당 1탑식으로 조성되었다는 것 밖에 아는 게 없다.

 

 

게다가 분단의 장벽 때문에 우리가 직접 접할 수 없고, 발해의 멸망과 함께 우리의 기억에서 사라져버린

만주일대의 역사가 중국 역사로 편입되었다고 믿는 순간 우리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음도 사실이다.

그러나 700년이 넘는 백제의 역사에 대해서도 불확실한데(전성기의 백제는 강병이 100만... 백제멸망 200년후 최치원의 기록을 보면서도 우리는 백제의 실체를 모른다) 그보다 더 오랜 세월 동북아시아 일대를 호령하며 중국의 여러 제국들과 자웅을 겨뤘던 고구려의 역사에 대해 모른다는 것도 안타까운 일이지만, 길게는 천년, 짧게는 수백년의 시간 흘렀음에도 발해/요/금/청나라 등이 스스로 고구려의 후예임을 자부하며 고려와 조선을 부모국, 형제국이라 불렀던 사실을, 우리들 스스로가 외면하고 방기했다는 것은 더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물론 만주가 탐난다거나(^^) 과거 고구려의 영화를 안타깝게 생각해서나, 우리 관심의 부족, 그리고 달랑 정릉사지 가람배치도 한 장을 들고서 고구려 사찰건축에 대해 말하기가 답답함을 토로하기 위해서 이런 말을 끄집어낸 것은 아니다. 우리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깊이 고구려의 역사와 문화는 중국의 문물과 직접 연관이 있고, 또 가람배치도 한 장만으로도 우리는 많은 말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엉뚱하게 시작하는 것이다. 아무튼 이 가람배치도 한 장을 들고서 쓸데없을지 모를 상상을 시작해본다.

 

 

<평양 정릉사지 가람배치도... 이 한장에 대해서만 말하는 게 너무 단순하다싶어 고구려에 대해, 만주지역에 대해 말해보려고 한다...^^>

 

 

 

우리들은 이 정릉사지 가람배치도를 보면서 3금당 1탑식, 오성좌와 천문사상에 기초해 만들어졌다는 말과,

392년 광개토대왕이 9개의 절을 신축했다는 평양은 당시 고구려의 수도가 아니었다는 사실만 알고 있다.

백제의 1금당1탑식, 신라의 1금당2탑식... 아무런 설명없이 이것만 외운다는 건 너무 가볍지 않을까?

나는 이 가람배치를 보면서 몇가지를 생각했는데 첫째는, 회랑이 있었다는 점, 둘째는 목탑이 많았다는 점,

그리고 세 번째는 고구려의 오성좌와 천문사상은 무엇이었을까 하는 점에 대해 의문을 갖게 되었고,

이런 문제들에 대한 조금은 깊이 있는 접근이 필요하지 않을까 생각하게 되었다.

 

 

 

 

사족 1> 고구려의 근거지 만주지역의 역사적 배경...

 

그러려면 먼저 고구려 탄생과정을 통해 만주지역과 고구려의 특징과 속성에 대한 기본적 이해가 필요하다.

우리를 동이족이라 부르든, 예맥족이라 부르든 요하를 중심으로 한반도에 이르는 이 부족들의 흥망성쇠는 황하 중상류와 양자강 중상류 사이에 근거한 한족의 흥망성쇠와 부침을 같이 한다.(한나라 멸망후 삼국정립, 당나라 멸망후 신라의 멸망, 원나라 멸망후 고려의 멸망, 청나라 멸망후 조선의 몰락)

한나라에 의해 고조선이 멸망하고 그 중심지에는 한사군이 설치된다. 고구려 멸망후 30여년 후에 발해가 건국되듯이, 고조선이 멸망한 이후(B.C108년) 몇 십년이 지나 고구려가 건국되는데, 그 중심이 현도군의 고구려현이다.(그래서 국호가 고구려가 되었을까??^^ 아무튼 당시 중국은 군현제였다)

 

 

 <한사군 배치도... 맨 오른쪽이 예전 교과서에 나온 지도인데, 우리나라 역사학자중 이병도씨에 의해 고착화된다... 그리고 현재 중국은 이 지도를 가지고 만리장성이 오늘날 북한의 평양까지 연결되어 있었다고 주장하기 시작했다... 아무튼 고고학적 유물과 과거의 기록은 현대의 필요에 의해서 자의적으로 해석되기 쉬운데, 가운데 지도도 그중 하나가 아닐까 싶다... 개인적으로는 맨 왼쪽 지도중 진번군이 있었던 곳에 대방군이 있었다고 생각하고, 그위 현재 평양 일대는 낙랑군이 아니라 낙랑국이 있었다고 생각한다... 중국 역사를 보면 제,연,진,조,송 등등의 나라는 춘추전국시대와 5호16국 시대에도 존재했던 것을 추론하면 같은 낙랑이란 이름을 썼다고해도 그 실체는 다를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나라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고구려는 국가의 정체성과 왕권의 정당성 확보를 위해 부여와 경쟁하고 한사군과 대립하게 되는데, 그 과정에서 흡수한 것이 천손(天孫;하늘의 자손)사상과 하백(河伯=강의 신)의 자손이라는 부여식으로 해석된 예맥(고조선)의 신화와 사상이고(그래서 고구려의 시조는 단군이 아니라 부여의 시조인 동명왕이며, 고구려의 시조 주몽도 동명왕의 전설을 그대로 차용하게 된다), 한사군에 이식된 한나라의 문명과 유교적 통치체계, 그리고 도교적 의식은 고구려의 바탕이 되었다는 점이다.

 

 

고구려에 의해 한나라가 멸망한 것은 아니지만 한나라의 멸망이 고구려 성장의 계기가 된 것은 부정할 수 없는데, 한나라의 멸망 이후에도 쇠약해지지만 존속하고 있던 한사군(초기 낙랑,현도,진번,임둔)은 낙랑과 대방으로 체제가 재편되면서도 위(삼국지에 등장하는 조조의 나라)나라로 복속되는 등 한족의 전통적 통치체계(유교와 도교)를 고수하였다는 점과 이들은 백제와 통혼 등을 통해 끊임없이 고구려를 견제했다는 점은 고구려의 국가 정체성을 정립에 매우 결정적 요건이었음도 간과해서는 안 된다.(광개토대왕대에 이루어진 고구려의 대외팽창도 과거 고조선/부여의 영역에 확실한 맹주로 부각되기 위해 위/진/연과 대립하면서 백제의 요서/산둥지방 공략에 그칠뿐, 요/금/청나라처럼 정복국가의 면모를 갖추고 중원 진출을 도모했던 것은 아니었다)

 

 

이처럼 고구려의 성장과정에서 내가 읽고 싶은 것은 고구려의 태동 이후에도 한사군은 미천왕과 근초고왕 등의 공격으로 해체될 때까지 400여년 존속했다는 점과(근래의 일이지만, 36년에 불과한 일제 식민지 기간 동안 우리나라가 얼마나 달라졌는가를 생각하면, 한사군 설치 400여년의 세월은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장구한 세월이었다), 부여 역시 동시기 후연의 모용황에게 참패하는 등 시련을 겪지만 광개토왕의 공격적인 영토확장에도 불구하고 494년까지 700여년 존속한 왕국이라는 점이다.(고구려 뿐만 아니라 백제와 만주지역의 정신적 지주는 부여였지 고조선이 아니었다. 고조선은 고려 이후부터 민족의 정체성을 위해 의도적으로 부활하여 오늘날 우리에게 이르지만, 고조선의 역사와 신화는 이미 한나라에 의해 중국에 흡수되었다고 할 정도로 망각된 상태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고구려는 태동에서부터 한사군과 부여의 모든 것을 흡수하면서 성장하고 발전한 나라로, 중국적인 특징과 예맥의 전통이 복합된 문화를 간직했다는 사실이다.

 

 

 

 

 

사족 2> 만주지역의 보편성과 고구려의 특수성...

 

한걸음 더 나아가 이러한 특성은 고구려만의 독자성일까? 아니면 또 다른 문제일까? 나는 개인적으로 위에서 말한 백제, 신라와 차별성을 갖춘 고구려의 특징은 고구려만의 독자성이 아니라 통칭 <만주>라고 이름 붙여진 이 지역의 보편성이 아닐까 생각한다.

 

 

                                    <홍산 문화권 지도...>

 

요하일대, 만주지역의 홍산문화는 황하문명(B.C2500년경)의 본류라는 황하상류의 양사오문화권(채도/화이족)과 양자강중류의 룽산문화권(흑도/묘족)보다 2~3000년전에 만들어진 동북아시아의 최초 문명(B.C6000이면 메소포타미아 문명과 비슷한 시기다)이다.

 

<현재 중국역사학계는 홍산문화를 중국역사의 일부로 이미 편입시켰고, 이에 대한 반발로 일부 재야역사학계에서는 동이족의 문화였음을 강조하고 있다... 맨 밑에 그려지는 고인돌 문화권과 비파형, 세형동검 문화권의 지도와 비교해보면 그 차이에 대해 많은 생각을 할 수 있다...>

 

 

아직도 우리가 알고 있는 옥황상제의 개념(옥을 신성시하는)이나 용과 봉황을 중시한 사신(四神/용,봉,호랑이,거북이)사상(우리나라 국가의 문장이 봉황이고, 중국은 전통적으로 용을 신성시했다는데 홍산문화권에서는 옥으로 만든 두가지 유물이 동시에 존재한다), 그리고 사직단(땅의 신, 곡식의 신을 모신 곳으로 피라미드형 묘까지 갖춰서 이루어졌다) 등이 홍산문화의 유산들이다.

 

 

<홍산문화권중 우하량 지역 발굴에서 드러난 옥 장신구들... 수년전 전시회에서 많은 반향을 일으켰던 중국황실의 옥으로 만든 제복과 고려의 태조 왕건의 옥상에서 나타나듯이 이곳에서 옥은 가장 존귀함을 상징하는 신물이었다... 그래서 옥황상제라는 개념도 생기게 된 것이고... 우리는 아직도 특별한 의미를 모른체 옥황상제를 하늘나라의 최고 신으로 생각하고 있다...> 

 

 

<홍산문화권중 우하량 적석총 발굴 유적지... 이미 중국과 조선말기까지 이어진 사직단의 최초 유구로 평가받는 곳이다... 피라미드 형태의 총이 있고, 제례를 지내던 원형의 단이 함께 존재한다...>

 

 

<같은 유적지 발굴품... 거북이는 옥쇄로도 쓰였고, 사신중 北현무의 상징이기도 했다... 그리고 이미 이때 옥 장신구는 단순한 곡옥만이 아니라 수준 높은 공예적 문양과 가공기술로 만들어졌다... 해서 옥만을 다루는 장인들을 국가에서 직접 관리할 수준의 체계가 있었다고 주장되고 있다...>

 

 

 

수천년 동안 이지역의 패자였던 고조선이 붕괴된 이후 부여, 고구려, 발해, 요, 금, 청 등이 이 지역에서 발호한 왕조들인데, 내 생각에 이 지역의 특성이 완결된 시대가 고구려였던 것 같다. 청동기 시대까지 독자성을 유지하던 만주지역은(비파형 동검과 고인돌은 이지역의 특성이다) 고조선이 멸망한 기원전 2세기부터 기원후 4세기까지 한사군과 부여를 통해 신화와 문물, 신앙 등이 융합되는데, 그것을 완결한 나라가 고구려이고 백제가 부분적으로 계승하게 된다. 때문에 고유의 천손, 천문, 사신사상 등은 한족(이것도 한나라 정통성 때문에 생겼다는 생각)의 유교, 도교와 융합하게 되고, 백제와 고구려의 멸망 이후에도 발해를 거쳐 요,금을 이어 청나라의 정체성으로까지 이어졌다고 판단하고 있다.

 

 

<한나라 장안성 예제건축도... 중국적 건축문화와 유교 사상이 만들어낸 건축물... 이것을 아래의 수/당대의 건축물과 현재 평양과 비교해보면... 나는 매우 유사하게 느낀다...^^>

<수나라 장안성의 대흥성내 흥경국 조감도... 한나라와 비교하면 최소 4~500년이 지났지만 기본 골격은 유지되고 있다...>

<오늘날 평양 김일성 광장 전경/이데일리 구글어스에서 스크랩... 가끔 TV에서 보는 장면이지만, 우리의 광화문 광장이나 청와대와는 너무 다른 모습에서 이질적이라 생각했었다... 그러나 위 수나라 시대 장안성의 흥경국 조감도를 보면 유사함을 느낄 수 있다... 북한이 중국의 문물을 무비판적으로 모방하거나 수용한 것이 아니라, 이런 형식은 이미 옛 고구려 시대부터 공유하고 있던 건축양식은 아니었을까?>

 

 

 

때문에 고구려의 신앙과 사상 등 문화는 고유의 독자성과 완결된 체계(중국에서는 4서6경 등을 거론하며 고구려를 변방의 지방정부쯤으로 격하시키려 하고 있지만, 일례로 강대국 고구려가 수/당의 100만 대병과 전쟁하기 위한 고구려만의 독자적인 기본 병법과 책략이 없을 수 없다며, 육도삼략 중 삼략서를 고구려의 책략서로 간주하는 이도 있다)를 갖추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중국의 복식, 주거 등 문물에서 상당히 유사했다고 생각된다. 고구려가 불교를 받아들인 것도 대립관계에 있던 백제를 견제하기 위한 외교정책의 일환이기도 하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후연을 멸망시킨 전진과 유대관계가 강하기도 했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 아니었을까?

 

고구려는 그만큼 우리가 알고 있는 것보다 훨씬 중국과 유사했고, 이후 천수백년이 지나면서 형성되는 한족 중심의 중화사상의 1/3의 지분을 가지고 있다고도 말할 수 있다. 결국 신라나 백제에 익숙한 우리들에게 고구려의 문화와 문물은 낯설거나 이국적으로 느껴지지만, 그것은 고구려가 중국적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중국이 고구려의 전통들을 적극적으로 흡수하여 자신의 것으로 만들었기 때문이라 생각한다. 고구려는 부여라는 뿌리에서 나뉘어졌지만 해양국가로 성장한 백제와 많은 차별성이 있었고, 오히려 신라가 성장하는데 커다란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고구려가 중국의 문물과 구별하기 힘들 정도로 유사하다고 해서 근본뿌리부터 같다는 것은 틀린 말이다. 문화권 분류에서 가장 주요한 지표로 사용되는 무덤과 살림집을 보면 분명한 차별성을 드러내는데, 고인돌 분포나 비파형 동검에서 알 수 있듯이 고구려와 중국은 뿌리부터가 완전히 달랐다. 또한, 고구려의 전통문물이었던 온돌-온돌이 있어 고구려와 한반도는 좌식문화권을 형성하게 된다-은 중국에 정착한 게 아니라 한반도를 중심-백제와 한뿌리나 다름없던 일본에서도 온돌문화는 정착하지 못한다-으로해서만 남게 된다)

 

 

 <왼쪽은 고인돌과 비파형 동검 분포도고, 오른쪽 사진은 고인돌 분포도다... 고조선의 강역, 오늘날 만주지역으로 불리는 곳은 석기시대부터 지금까지 고유한 독자성과 통일성을 가졌음을 짐작케한다... 이런 역사적 동질성이 있어 근대 일본은 중국을 분할하면서 만주국을 만들도록 종용할 수 있지 않았을까? 그리고 이런 동질성에도 불구하고 고구려는 우리 생각보다 훨씬 중국 문화에 직접적으로 노출되어 있었고, 그것은 사대성이나 문화적 후진성 때문이 아니라, 중국문물을 흡수할 수 있는 자신감과 독자적 사상체계가 있었음을 반증하는 것이라 생각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