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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축 - 風,造,關...

공간 19> 백제 (3) - 사비성 시대와 겸익의 율종...1107

 

 

 

 

백제의 사찰건축과 가람배치에 대하여...

 

   첫째, 백제는 왜 목탑을 만들다말고, 석탑을 만들었을까?

   둘째, 사비성시대 백제의 1금당 1탑식 가람배치와 사찰건축

   셋째, 일본의 사찰건축과 가람배치

 

 

첫째, 백제는 왜 목탑을 만들다말고, 석탑을 만들었을까?

   1-1) 아비지와 아사달...

   1-2) 4~500년대 백제와 중국 (위진)남북조의 역사...

   1-3) 백제의 불교유적들은 중국 남북조시대 제, 양나라의 영향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1-4) 해상왕국 백제의 특성과 활동범위...

   1-5) 사비성 시대의 준비와 겸익의 귀국...

   1-6) 겸익이 경험했던 500년대 인도와 중국의 불교사상의 변화...

   1-7) 백제 불교의 특징과 정림사지 오층석탑의 완성...

 

 

 

 

 

1-5) 사비성 시대의 준비와 겸익의 귀국...

 

앞서 이야기했지만, 선진사상의 본국 문화를 직수입하고 관련 서적을 직접 번역하여 소화한다는 것은 모방과 답습과는 또 다른 차원의 발전을 의미한다. 당장 우리나라의 지식인층과 지배층을 보더라도, 일제 강점기 때는 일본 유학생 출신들이, 미군정기 때는 영어를 할 줄 아는 미국 유학생 출신들이 토착 세력과 결합하면서 학계와 관계와 정계를 지배했다. 그리고 한국적 xxxx을 사용할 때쯤(1970년대) 서구사상의 본류라 할 수 있는 유럽사상이 직수입되면서 갈등을 부추기는데 이때(1980년대) 유행한 게 마르크시즘이었다.

 

그리고 DJ와 노무현 대통령이 집권한 시기(2000년대전후)부터 탄력을 받은 유럽식 복지국가 논쟁은, 현재(2010년대) 우리 정치지형을 흔들 정도로 뜨거운 핵심 카테고리로 등장하게 되었다.(어느 시대든 정치경제를 주도하는 사상의 본류를 본다는 것은, 진보냐 보수냐의 선택의 문제가 아니라 사회발전의 역사와 방향을 가늠할 수 있는 폭과 깊이를 주체적으로 감당할 수 있는가 없는가의 문제인데, 현재의 우리는 진보와 보수 혹은 수구와 개혁이라는 흑백론으로만 재단하는 게 문제다)

 

 

백제 시대에도 그랬을 것이다. 처음 한성에 자리 잡을 때는 주변 강국인 고구려와 타협한 토착세력에 눌려 지내다가, 근초고왕(346년) 이후 부여의 정통성을 주장하는 왕족과 요서출신 세력이 부각되면서 한반도에 있던 토착귀족들과 대립하고, 다시 고구려에 의해 한성에서 쫓겨나 웅진으로 천도할 때(475년), 중국 남북조나 고구려, 신라 등과 연대하거나 대립하는 이들로 분화되면서 중원과 한반도와 일본으로 분산되어 있는 백제의 정체성 확립에 고심했을 것이다.

 

부여의 정통성을 계승했다는 고구려의 천문사상에 대응하여 아예 백제라는 이름대신 남부여로 국호도 바꿔볼까 고민하고 있는데(538년), 뿌리도 없는(?) 신라왕들은 한반도에서 영토를 확장하기 위해 부처와 한 핏줄이라는 선민사상까지 들먹이며 절대왕권을 주장하는 지경에(신라의 성골 개념은 이때 만들어진다) 이르렀는데 백제가 가만히 있어서는 안 된다는 초조함...

 

이때 고구려나 중국을 통해 걸러진 지식인이 아니라 불교의 본고장 인도에서 직접 공부하고 귀국한 겸익이 등장한다(530년). 성왕과 백제의 왕실에게 겸익은 그 당시 백제가 이해할 수 있는 불교의 정수를 가지고 들어왔을 것이라고 판단했을지도 모른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인도에서 귀국한 겸익이 뛰어난 사람이었을 수도 있지만, 인도에서 귀국한 겸익을 중용할 수 있는 사회적 분위기가 마련돼 있었다는 점과, 백제 지배층들은 그를 선택했다는 점이다.

 

 

앙숙과도 같은 고구려와 대립하면서, 중원에 진출하여 5호16국과 남북조시대 문물을 접하면서 백제는 그들만의 정체성 확립에 몰두했다. 여기에 고구려의 천하사방의 중심이라는 천문사상과 중국의 도교적 우주론 및 유교적인 천명론에 밀리지 않을 천하관을, 당시 선진사상이었던 불교에 접맥해야할 필요성에 직면했다. 막강한 해상왕국으로서 풍부한 인적 물적 자원을 동원할 수 있었고, 고구려 신라와 대치하는 한반도를 벗어나 토착세력만 통제하면 안정된 후방기지가 될 수 있는 일본이라는 영역(문제가 생겼을때 일본에서 귀국한 왕자들이 왕위를 계승할 정도)도 확보하고 있었다. 그리고 인도에서 귀국한 겸익도 있었다.

 

백제는 중국 남북조와 고구려 등과 적절히 타협하면서 안정만 추구하려는 구 귀족세력을 일신하고 백제만의 색깔을 만들기 위해 전체적인 판을 다시 짜고, 한반도에 새롭게 강국으로 부상하는 신라와 관계까지를 고려하여 축소된 본국 체계를 전면적으로 재정비하게 되는데 그 결과가 바로 사비성 천도가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웅진시대가 백제의 하드웨어를 복원하는 시기였다면, 사비성 시대는 백제의 소프트웨어가 완성 되어가는 시대였을 것이다.

 

 

 

 

1-6) 겸익이 경험했던 500년대 인도와 중국의 불교사상의 변화...

 

그래도 고구려보다 자료가 많다고 백제는 썰이 길어졌다...^^ 이제 이글의 주제인 왜 목탑을 만들다말고 석탑을 만들었는가로 돌아가야겠지? 보는 사람들은 지루했겠지만, 쓰는 나는 어려우면서도(무척) 재밌었는데...ㅋㅋ  이제 그 문제를 풀기 위해 500년대 백제에게 필요한 사상은 무엇이었는지, 어떤 불교가 필요했는지 이해할 필요가 있다. 웅진시대를 거쳐 사비성 시대를 열면서 백제는 많은 변화를 맞이하게 된다. 590년대 수나라에 의해 통일되기 전까지 중국은 혼란을 거듭하고 있었지만, 그 혼란으로 인해 상대적으로 넓은 활동영역을 통해 유입된 부가 있어 백제는 최고의 전성기를 맞이한다. 그리고 그 힘이 있어 백제는 불교를 재해석하고 새로운 체계로 정립해 나간다.

 

3~400년대 불교는 도교나 유교와 결정적으로 다른 <내세관>을 가지고 있었다. 또한 도교와 유교는 믿어야할 <신>이 없지만 부처는 신과 동격이다. 부처는 신도 아니고, 죽어서 극락가자는 게 불교의 목적이 아닐텐데 세상이 하도 어수선하니 백성들은 불교에 의지하려고만 한다.

 

게다가 지금까지 배워온 도교의 우주론은, 듣기는 좋지만 미래를 위해 뭘 해야 할지 말하지 않는다. 유교의 천명론도 체계는 있는데 힘 쎈 놈 앞에서는 무기력하기만 하다. 경쟁상대인 고구려에서는 불교를 유교식 체계로 이해하려고만 하니 너무 학술적이고, 혼란기 중국에서는 새로운 나라가 만들어지면 권력을 과시하기 위해 하늘 높은 탑과 거대한 불상만 조성하다가 망하기 일쑤고, 이제는 신라왕들까지 나서서 부처를 자처하니 얼마나 황당했을까? 백제만의 천하관을 불교사상과 통일시키려면 뭔가 확고하고 강력한 계기가 필요했던 시기가 아니었을까? 이때 성왕은 겸익이 인도에서 불경을 가지고 돌아왔다는 말을 듣는다.

 

 

겸익이 다녀온 500년대 인도는 어떤 상태였을까? 흉노 혹은 훈족이 휩쓸고 간 자리, 이란계 유목민들에 의해 인도북부에 세워진 <아프탈>이라는 나라의 침탈로 굽타 왕조는 본격적으로 분열되기 시작했던 시점이고(이 영향으로 굽타왕조는 더 이상 기사회생하지 못하고 600년대 이후 바르다나, 발라비, 수드라, 칼루키아, 팔라바 왕조 등 5국(그래서 혜초가 5천축국이라고 불렀겠지?)으로 분열된다), 또한 200년대 용수의 <중관파>를 거쳐 300년대 <유식유가행파>가 득세하면서 소승불교라 할 수 있는 부파불교 시대가 막을 내리고 대승불교로 전환되던 시점이고, 굽타왕조의 몰락을 가속시킨 <힌두교>가 남쪽으로부터 세력을 확장하던 시점이다.

 

중국적으로 이해된 기복적 성격이 강한 대승불교에 익숙한 겸익에게, 소승불교 전통이 강고한 인도 불교와, 외부 침탈과 힌두교 공세 속에 불교왕국이 분열되고 몰락해가는 상황은 충격적이지 않았을까? 이런 격변기를 7년 동안 지켜본 겸익은 깨달음이 있었는지, 아니면 위기감 때문인지, 그도 아니면 성왕의 호출 때문인지 인도 승려 배달다삼장과 함께 귀국한다.

 

 

견문을 넓히려는 사람은 자신이 보는 것만 고집하지 않을 것이다. 현대사상을 공부하러 유럽에 간 사람이 미국 사상사를 도외시 하지 않는 것처럼, 겸익도 인도에서 머물렀지만, 당대 중국 남북조의 불교흐름에 정통했을 것이다. 그러면 당시 중국의 사상적 지형은 어땠을까? 유학에 반발하지만, 유교에 토대를 두고 도교의 허무주의 사상을 흡수한 <현학적 유심론>이 판을 치던 시대다. 죽림7현처럼 고결하고 초속적인 것을 주장하며 자연을 숭상하여, 극단적으로는 “ 군주가 없으면 만물이 안정되고, 신하가 없으면 만사가 다스려 진다 ”고까지 주장... 당시 중국 사상계를 주도했던 <현학적 허무(虛無)>는 <불교의 공무(空無)>와 긴밀히 교응하면서 요순을 비난하고 주공과 공자를 깔보던 시대로 천하의 혼란과 분란을 수수방관했다.

 

이런 흐름이 있어 정신없이 왕조가 만들어졌다가 사라지는 5호16국과 위진 남북조 시대는 용인될 수 있었고, 아이러니칼하게 그런 <무군(無君)사상> 때문에 중국 각지의 경제적 문화적 차등은 급속히 해소되고, 불교의 윤회설과 천당지옥설 등이 날개를 얻을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 거세게 일기 시작한 것은 내세의 도솔촌으로 가고 싶어 하는 미륵상생과, 현세에 불국토가 이루어지기를 바라는 미륵하생, 즉 <미륵사상>이 득세하는데 그때가 북위 시대였고 동성왕 시대였다.(운강석굴에 미륵반가상이 만들어지기 시작한 게 490 ~ 496년이다)

 

 

한반도 정세의 변화, 인도 굽타왕조의 몰락, 그리고 요동치는 중원... 겸익은 돌아오자마자 <교단>을 형성한다. 학술적 의미가 아닌 전업 승려들을 조직적으로 통합한 교단. 그리고 <계율>을 확립한다. 보여주는 불교, 소유하는 불교가 아닌 승려와 불자들이 지켜야 계율이 정립된 불교. 여기에 <예의와 의식>을 중시한 종파가 만들어지니 그것이 <백제의 율종>이다.(재미있는 것은 중국 율종을 개창한 도선도, 현장이 인도에서 가져온 불경들을 번역했던 승려다. 겸익이 가져온 불경들을 백제가 번역한지 100여년 후인 624년 일이지만)

 

그러면 과연 겸익이 한 일은 율종을 개창하고 일본으로 전수한 역할로 끝날까? 만일 그랬다면 내가 이렇게 길~~~게 쓰지도 않았을 것이다.^^ 겸익이 율종을 개창할 때 백제는, 대승불교의 토대가 착실히 축적될 여유가 있어 <불과 보살>이 위계를 갖추게 되고, 부처의 현신인 불상이 이제는 내세와 현세를 관장한다는 <미륵사상>이 등장하고, 그리고 백제의 사찰건축은 <1탑 1금당식의 7당 가람배치> 양식을 완성하는 시기였다는 점을 말하고 싶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