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자꾸 자꾸 남쪽으로 내려간다.
현장과 멀어지고, 멀어지는 만큼 해는 짧아지지만 그렇다고 마음까지 바빠지지는 않는다.
단양에서 영월로 향하는 길...
멀리 청태산과 계방산에서 시작한 물줄기가 주천강과 평창강이 되어 영월 서면에서 만나 서강이 되고,
오대산과 태백산에서 시작한 물줄기가 정선 아우라지에서 만나 영월로 흘러가면 동강이 된다.
서강과 동강이 영월에서 만나 태화산을 비켜 소백산 줄기를 타고 단양을 거쳐 흐르고
나는 그 물길을 거슬러 올라가고 있다.
멀리, 멀리서, 계곡 사이사이, 산을 휘감고 들판을 가로지르는 도도한 물줄기를 본다.
길은 눈에 담고, 시간은 마음에 담고?
속도를 낼 수 없는 좁은 길을 달리고 달리면서 저 도도하게 흐르는 물줄기의 사연에 귀를 연다.
첩첩의 산자락에 호연한 기상이 넘치는지, 골골 물줄기에 처연한 바람이 부는지...
물은 낮은 곳으로 향하면서 산을 피해 흘러가는데, 거꾸로 생각하면 산이 물을 못 넘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때때로 주춤주춤 거리면서 하늘도 보고, 산도 보고, 그렇게 물을 건넜다 비켰다 얼마를 갔을까?
소백산 북쪽 자락, 구인사와 온달산성에 다다라서야 보이는 향산리 삼층석탑을 찾는 길이다.
<단양 향산리 삼층석탑...>
2.
같은 물줄기 주변이라지만 충주 탑평리 칠층탑처럼 극적으로 물가로 나오지도 않았고,
의성 사자산 관덕리 삼층석탑처럼 아늑한 깊은 골짜기에 숨어들지도 않았다.
그리 넓지 않은 터에, 그리 크지 않는 삼층석탑 한기가 농가들과 어울려 자리 잡고 있다.
<향산리 삼층탑과 함께 한적하게 자리잡은 농가들... 가을걷이가 끝나고 고추를 말리고 있다...>
지금 들어선 모든 민가들은 아마 향산리의 절터였을 것이다.
세월이 흐르면서 절터에 남아있던 전각들이 하나둘씩 사라지고 이제는 생활의 공간으로 바뀌게 된 건
아무래도 이 탑이 자리한 곳이, 충분히 양지바르고 편안한 곳이었기 때문이 아닐까?
수양의 공간이 삶의 터전으로, 탈세의 공간이 세속의 노동으로 채워지는 곳...
어떤 목적으로 공간을 닦았는지 지금은 모호하지만, 여전히 살아있는 공간에 향산리탑이 서 있다.
하단 기단부가 높고, 지붕돌의 층급받침이 4단으로 줄어들었으니 10세기 초반 전후에 만들었을까?
하단 기단부가 높고 지붕돌이 좁은 면을 생각하면 지리산 자락 실상사 쌍탑이 생각나지만
높이와 지붕돌 반전에서 큰 연관성을 따지기는 힘들고,
역시 높은 하단의 기단부를 생각하면서 주변의 탑을 골라보면 원주의 거돈사지 삼층석탑이 생각나지만,
급격한 체감률을 가지고 우아함과 의젓함이 동시에 살아있는 거돈사탑을 따르기도 무리고,
어쩌면 더 멀리 있는 부산 금정산의 범어사 삼층석탑과 여러모로 닮았다는 생각이 든다.
<부산 범어사 삼층석탑... 상층 기단부에 안상이 새겨져 있고, 지붕돌이 몸돌에 비해 넓지만 비슷한 볼륨이다...>
일층 몸돌에 정성스럽게 문비를 새기고, 기단부와 각층 몸돌이 시작하는 부분에 찬찬한 괴임부위를 보면
이 탑을 조각한 이가 결코 허투루 대충대충 만든 것이 아님을 확인시켜주어 즐겁다.
<향산리 삼층탑을 하나하나 뜯어보면 어느 한곳도 대충, 적당히 만든 곳이 없다...>
그러나 전체적으로 몸돌에 비해 지붕돌이 좁고, 체감률을 지나치게 안정적으로 좁혀
상승감과 경쾌함을 충분히 살리지 못했다.
하긴 현재의 공간을 가만히 그려보면 탑이 지나치게 높여야할 이유가 없고,
현재의 볼륨이 오히려 적당하다는 생각이 드는데, 그럼에도 지붕돌이 조금 넓었으면 하는 아쉬움이 크다.
소박하면서도 찬찬한 느낌에 어딘지 손대고 싶은 가벼운 느낌의 삼층석탑이다.
<하층 기단부를 낮추고, 상층 기단부를 조금 넓혔으면 미감이 달라질까? 하긴 그렇게 되면 일층 몸돌의 크기도 달라져야하고, 지붕돌들은 지금보다 훨씬 넓어져야 비례가 맞다... 물론 탑신을 그대로 두고 기단부만 그렇게 바꾸면 벽송사 등에서 볼 수 있는 조선식 삼층탑이 될거고, 탑신을 키우면 탑의 느낌은 완전히 달라질거고... 아무튼 그렇다는 생각...^^>
3.
요즘 하루하루가 가시밭길이다.
맞춰지지 않는 의미 없는 숫자놀음에 머리도 복잡한데다
연일 터지는 일들은 마음까지 심란하게 만들고...
앞도 옆도 뒤도 보이지 않는 답답함만이 자꾸 나를 작고 좁고 가볍게 만든다.
이럴땐 그걸 깰 수 있는 유무형의 힘을 찾았는데, 오늘은 아무 생각 없이
보지 않았음, 언제간 보아야 함을 전제로 비교적 가까운 곳을 택했다.
어디론가 나서야 한다는 응축이 쌓일 만큼 쌓여서 터지기 직전의 선택이 아닌,
오래된 습관이 주는 익숙함에 시간과 마음을 맡기면서 나선 길...
향산리 삼층석탑에서 꽉 채워진 벅참을 느끼지 못하고 나를 자극하는 신선함을 느끼지 못하는 건,
아무래도 지금의 텅 빈 마음이 그 무엇으로도 채워지지 않음을 습관적으로 알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참 건방진 이야기지?
더 이상 보고, 듣고, 느낄 게 없을 정도로 내가 채워져 있거나,
나의 견식에 그만한 양과 질이 나를 다스리는 내공으로 쌓여 있음을 인정하기 어려운데,
지금의 선택과 투여된 시간에서 나의 호기심을 동하게 만드는 게 없다고 단언 한다는 게...
어쩌면 너무 부족해서, 너무 게을러서, 또는 욕심을 채울만한 능력이 없음을 고백하는 건 아닐까?
4.
이미 기울기 시작한 햇볕을 더 이상 안타까워하지 않은 체 구인사로 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산 너머가 구인사인데 예까지 와서 건너뛰기에는 너무 무심하잖은가.
주차비를 내면서 주차를 시키고, 미련하게 거기에서부터 한걸음한걸음 산을 오른다.
내가 왜 이렇게 걸어야 하는지, 나의 배터리는 이미 충분히 방전되었음을 알면서도 그냥 걷는다.
계곡 양편으로 도대체 편안함이나 극적인 느낌도 없고, 필요와 기능에 의해서만 채워진 전각들까지.
<구인사 전경... 이 전각들에 사람들이 모두 채워지면 5만4천여명이 동시에 들어갈 수 있다고?? ^^ 비탈진 계곡 양편에 자리잡은 구인사는 우리가 일반적으로 생각할 수 있는 가람배치와는 전혀 다른 느낌이다... 왜 이런 곳을 보면 중국이 생각날까? 실제 중국에도 이런 사찰건축은 없는 거 같은데...^^>
구인사...
참 불편한 절이다. 그리 친절하지도 않고, 천태종 본산이라는 막연한 유명세로만 기억되는 곳.
무엇을 채우고 비워야 한다는 생각이 없음은 뒤틀리고 비틀어진 마음이 내뱉는 하소연임이 분명하지만
수차례의 방문에도 불구하고 구인사는 여전히 내게 즐겁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걷고 또 걷는다. 고갈된 다리의 밑바닥 포도당을 다 짜내 숱한 계단을 터벅터벅...
그래 예까지 왔는데 대조사전만큼은 보고 가야지 하는 열망 때문에...
<이미 충분히 늦은 시간... 그나마 떨어지는 서쪽을 향해 열려있는 곳에 작은 빛이 남아있었다... 예전에는 한눈에 이런 조망을 볼 수 없었는데, 대조사전 터를 닦으면서 생긴 광명전 때문에 이런 좋은 조망권이 생겼다... 계곡의 답답함을 씻는데 충분한 높이를 가지고 있다...>
고행도 나를 버티는 힘과 나를 비워가는 여흥이 남아있어야 즐거울까?
7층 높이의 계단을 외면하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누른다.
나도 구인사처럼 목적과 기능만 있고, 공간이 담아야할 감상과 시간으로 짜여지는 감흥을 포기했다.
그리고, 구인사 맨 윗자리, 독수리가 날아가려는 풍수지리상의 명당에 자리잡은 대조사전을 본다.
다행이다. 실망하지 않아서...^^
<구인사 대조사전... 늦은 시간이라 셔터 속도가 너무 느렸다... 조금씩 흔들렸지?^^>
참 좋다...
익숙하다.
그리고 참 잘 만들었다는 생각...^^
장대한 규모를 상쇄하는 경쾌한 처마의 들림,
일본의 백제식 건축처럼 수직적 긴장감이 배제된 부드러운 곡선에 화려함을 살려냈다.
누가 만들었지? 신응수 대목장이지?!
<좌우의 금강역사상이 5m 높이 통돌로 만든 걸 감안한다면 대조사전의 높이를 짐작할 수 있겠지? 27m로 금산사 미륵전과 비슷하다...>
생각해보면 내가 보고 다녔던 대부분의 고건축에는 우리나라의 3대 대목장의 숨결이 함께 어려있다.
구한말 경복궁 중건을 주도했던 홍순모 대목장에게서 궁궐건축의 일을 배운 신응수 대목장과,
일제 강점기 사찰건축의 중창을 도맡았던 김덕희의 맥을 이은 최기영, 전흥수 대목장이 그들이다.
이 세분중 가장 먼저 인간문화재가 된 신응수 대목장은 현재 중창중인 경복궁과 무량수전을 보면되고,
가장 나이가 많으신 전흥수 대목장은 수덕사, 법주사, 월정사와 고건축박물관을 생각하면 연상되고,
비교적 젊은 최기영 대목장의 손길은 창경궁과 송광사를 비롯, 부여의 백제 능사와 경주 월정교를
생각해보면, 작을지 클지 모를 그분들의 스타일과 미감을 읽을 수 있지 않을까?
<금산사 미륵전... 비슷한 높이와 크기를 가진 건물... 포작과 출목의 수만큼 대조사전은 처마를 밖으로 넓게 뺐고, 미륵전은 그렇지 못했다... 구조가 미감을 규제했다고 할까? 아니면 미감이 구조를 선택했을까? 특히 3층의 미륵전 편액을 보면 잔뜩 웅크린 어깨위로 투구를 눌러 쓰고 금방이라도 튀어나올 것 같은 장수의 눈망울이 생각난다...^^>
아무튼 비슷한 규모와 높이를 가진 금산사 미륵전과 비교하면 신응수 대목장의 미감은 충분히 드러난다.
금산사 미륵전은 투구를 눌러쓰고 적진을 향해 눈을 부라리며 어깨를 잔뜩 웅크린 위풍당당한 모습이라면,
구인사 대조사전은 화사하고 경쾌한 날개짓으로 하늘로 비상하려는 상승감을 화려함으로 덧칠하였다.
<대조사전을 보면 왜 세자비가 생각날까?^^ 중전이나 황후를 생각하면 노련한 중후함과 우아함을 생각해야할 듯 싶은데, 대조사전은 화려하면서 경쾌한 모습이 왕후보다는 훨씬 젊다는 느낌과, 그 젊음이 주는 당당함도 숨기지 않은 것 같아 세자비 같은 모습이라 규정해본다...^^>
세자비와 장군의 비교일까? 중후함과 우아함으로 대조사전을 칭하기에는 너무 경쾌하고 젊다는 느낌이고,
비슷한 처마 곡선을 가지면서도 각층 본체에 비해 최대한 처마를 빼어낸 대조사전은 날렵함도 갖고 있다.
대조사전은 전반적인 느낌에서 왠지 하앙식 구조의 깊은 처마를 가진 일본의 백제식 고건축도 생각나고,
용마루와 내림마루가 절제되고 긴장감 넘치는 직선으로 처리되었다면 전혀 새로울 수도 있었겠지만
각층 체감은 법주사 팔상전와 비슷하다 싶게 안정적이어서 강직함과 긴장감을 살리지 않았다.
<이번에 복원된 광화문... 갈라진 현판을 신응수 대목장은 자비로라도 다시 만들겠다고 말했지? 아무튼 현재의 광화문 처마 곡선과 전체적인 느낌을 통해 그의 미감을 느낄 수 있다고 생각된다...>
광화문과 대조사전을 보면서 신응수 대목장의 미감을 뜯어본다.
건축 전반에서 단단한 짜임새와 날카로움을 숨기지 않지만, 지나치게 부드럽고 안정성만 추구하고 있다.
그의 미감일까? 아니면 조선후기의 미감일까? 그도 아니면 현재 우리사회가 추구하는 미감일까?
특히 광화문에서 느끼는 부드러움과 유순함은 왠지 열정과 긴장감이 풀어진체 화려함만 추구하는 것 같은데
그것이 지금의 우리사회를 완성된 안정된 것으로 보고 그에 맞는 형식적 미학에 치우쳐 있기 때문은 아닐까?
변화를 위한 열망, 결집을 위한 단호함, 미래를 뚫으려는 긴장감... 대조사전은 그런 미감이 전혀 없다.
<대조사전 공간 한쪽으로는 다양한 이름의 관음보살이 부조로 조각되어 있다...>
<꽉꽉 채워진 공포구조를 보면 정교함과 치밀함에 엄청난 내공의 힘을 느끼게 된다...>
5.
충분히 늦은 시간, 구인사에서는 그래도 공양과는 인연이 있나 보다.
2000년대 들어와서 몇 번 들렀음에도 대조사전은 보지 못했지만, 꼬박 꼬박 공양은 하고 나서니 말이다.
걷는 내내, 먹는 동안, 그리고 구불구불 길어진 시간과 거리만큼 머릿속을 채우는 물음이 있다.
사람들은 무엇으로 살까? 지금 같은 상황에서 사람들은 무슨 힘으로 버텨내는가?
아무 것도 보이지 않는 캄캄한 밤하늘만큼 꽉 막힌 현실에서 나는 무슨 힘으로 살까?
<대조사전 앞, 화엄일승법계도를 돌고 있는 보살님... 210자, 54번을 꺾으면 제자린가? 670년 의상대사가 화엄경을 7자 30줄로 요약한 것이다... 해인사 대웅전 앞에도 만들어져 있지?>
어쩌면 잡히지 않는 멀고 높고 큰 꿈보다는 소소하고 작은 일상과 평범함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그리고 그런 작은 웃음과 평범이 모여 나를 버티고 견디게 하는 게 아닐까?
세상을 움직이는 힘은 의외로 간단하다. 그리고 인간사를 꿰뚫는 본질은 변하지도 않았다.
돈과 법과 꿈과 정, 그리고 이를 관통하는 이치겠지.
그러나 그것에는 快(쾌)와 美(미)와 安(안)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즐길 수 있는 선택과, 맛있고 멋있는 아름다움과, 그리고 편안하고 평화로운 여운...
시간이 나서 목적을 정한게 아니라, 시간을 만들기 위해서 길을 나선 오늘...
물론 그렇게 만들어진 시간에는 또 다른 회피나 포기와 묵언의 이해와 양해가 있어서 가능하겠지.
일의 성취, 가족의 평화, 인연의 설레임, 취미향의 자극들은 어쩌면 지극히 평범한 것들...
향산리 삼층석탑과 구인사 대조사전이 나를 비우고 채워주는 매개가 아니었음도 분명하다.
다만 그 시간과 공간의 변화에서 내가 바라보는 하늘과 물과 산,
내가 느끼는 바람과 빛과 향, 그리고 이 순간에 상상하는 잘잘한 설레임과 기대와 성취를 찾아본다.
잠깐의 일탈이 주는 휴식과 그것을 포장하는 나의 감미로운 상상속에 작은 웃음을 찾아본다.
그렇게 해서 나눌 수 있다면, 그렇게 해서 만들어진 것들 때문에 나눌 수 있다면
그것이 나를 버티게 하는 힘이 아닐까?
글을 쓰고, 사진을 찍고, 이야기하고...
여전히 나는 의심 혹은 호기심, 노스텔지어, 그리고 여행을 그 방편으로 생각하고 있을까?
일상을 채우는 방법중 하나로, 여행은 여전히 나에게는 편안하고 익숙한 중독이 아닐까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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