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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여행...

청주답사 1> 노무현 전대통령을 닮은 불상이 있는 용화사...1111

 

 

 

 

헉~~~

이게 누구신가?

이름은 <유마거사>인데, 얼굴이 너무 익숙하다.

누구지? 영락없는 <노무현> 전대통령아닌가?

그래~ 분명히 노전대통령 얼굴이다.

 

 

<용화사 미륵전의 유마거사상... 이 사진만보면 누굴 완벽하게 닮았다는 생각이... 문화재청 자료를 보면 그렇게 보이지 않는데, 유독 내 사진은 노전대통령을 닮았다...^^>

 

 

 

세상 시름 혼자서 다 안고 있다고 생각하는 고집스럽게 이마를 가른 깊은 주름살,

바람처럼 시작해 세상의 중심에 오르듯 가늘게 시작해 두툼하게 솟은 콧봉을 가진 긴 코,

그리고 머릿속에 있는 것을 내뱉지 못하면 참지 못할 정도의 얕은 턱에 톡 튀어난 입술...

알듯 모를듯 느긋하지만, 항상 뭔가가 톡톡 쏟아질 것 같은 야릇한 미소...

참 신기한 일이다. 얼굴 닮은 것도 재밌지만 그 양반 특유의 표정을 닮은 불상이라니.

 

 

<미륵전 내 좌측에 있는 유마거사와 미륵보살상... 우측에도 두기의 석불이 더 있다...>

 

 

 

 

 

 

 

이 불상이 언제 만들어졌을까?

닳고 닳은 콘크리트 덩어리처럼 부슬부실한 표피를 보면 시멘트로 대충 발라놓은 것 같지만,

기록에 의하면 1902년 고종의 후궁인 엄비 꿈에 나타난 일곱 구의 석불을 안치하기 위해

지금의 자리를 마련하고, 미륵부처가 성불하고 설법했다는 용화수를 차용, 용화사라 이름 짓고

청주 서북방 개천가의 일곱 석불들을 안치했다고 하니 결코 근대에 만들어진 석불은 아니란 말.

 

 

 

 

 

그리고 용화사에 모셔놓은 일곱 석불은 한 곳에서 발견된 곳이 아니라 하고,

인근에서 발견된 청동반자 명문 판독결과 라말려초에 창건돼, 고려말에 부흥했다는 사뇌사가 있었고,

또한 근처가 고려시대 인쇄문화의 본거지였던 흥덕사지를 비롯 많은 절터들이 있었다고 하니

조금 멀리 잡으면 고려시대에 만들어진 불상들 중 하나가 아닐까 추정되고 있다니 꽤 긴 연륜의 불상이다.

아마도 오랜 세월 풍파에 노출되어 홍수에 떠내려 다니다가 모래뻘에 방치되면서 훼손된 게 아닌가 싶고,

신라말기부터 고려시대까지 긴긴 세월동안 근처의 이곳저곳에서 띄엄띄엄 만들어진 결과가 아닐까 싶다.

 

 

 

 

<용화사 삼불전 내부... 왼쪽부터 약사여래, 미륵불, 석가모니불이다...> 

 

 

 

 

 

민심은 칠구의 불상 모두를 미륵불로 불렀으나, 현재 삼불전, 미륵전에 나누어 안치된 불상들은

각각 미륵불, 석가모니불, 약사여래불, 유마거사상, 미륵보살상 등으로 구별하여 부르고 있다.

삼불전 미륵불과 석가모니불이 5.5m의 거불이고, 약사여래불도 3.2m로 상당히 크기로 조성되었는데

좁은 이마, 도톰한 볼과 턱에 시무외인/여원인을 지은 미륵불 가슴에는 卍(만)자가 새겨져 있고,

4~5세기 미투라 불상처럼 U자형 옷주름이 새겨진 석가모니불은 유려하고 부드러운 굴곡을 가진 맵시지만

순박하면서 후덕한 아줌마 같은 얼굴의 미륵불과 달리 훨씬 딱딱하고 굳은 중년 아저씨 표정을 가졌다.

 

 

<좌측의 약사여래불... 사진이 희미한 것은 이해하시기 바람...쩝> 

<중앙의 미륵불... 가슴에 卍자가 새겨져 있는데 앞뒤가 다르지? 왜 그랬을까???> 

<우측의 석가모니불...>

 

광배 뒷면에 마애불이 선각된 만복사지 석불과 달리 3m가 넘는 나한상이 양각되었다 하는데 보질 못했고,

약사여래불은 미륵불 등에 비해서는 작은 규모인데 오른손엔 보병을 왼손엔 약합 같은 걸 들었다.

 

중성적이면서 부드러운 곡선을 가진 석가모니불이 덜하지만, 대체로 좁은 어깨에 상당히 크고 통통하며,

미륵불상이 워낙 후덕한 인상이지만 모두 무뚝뚝하고 건장한 남성적 이미지의 얼굴이라는 공통점이 있고,

모두 목에 삼도가 너무나 굵고 분명하게 각인되어 있어 가뜩이나 움추린 어깨가 더 경직되게 보인다.

 

 

<논산 개태사 석불입상... 장신구와 법의, 대좌 등이 재밌다... 유독 크게 강조된 손과 발을 볼 것...>

 

 

 

또한 태조왕건이 조성한 개태사 입상들만큼 권투장갑이나 스키장갑을 낀듯 무식하게 커다란 손은 아니지만,

각각의 불상들에 조각된 수인은 상당히 과감하면서도 공을 들여 크고 두툼하게 표현된 공통점도 있다.

얼굴 표현에 대비해 옷주름은 상당히 사실적으로 표현되었으면서 모두가 다른 형식의 법의를 착용했는데,

가만보면 여러벌을 겹쳐 입은 것처럼 요란스럽고 장식적인데 얼굴보다 유난히 공을 들인 흔적이다.

 

 

<아래 감산사 아미타여래와 비교하면 완전히 다르다는 걸 확인할 수 있지만, 비슷한 유형으로 생각됐다... 다만 허벅지에서의 주름은 완전히 다른데, 감산사는 인도 미투라 불상의 유형을 그대로 따랐다...>

 

 

 

 

 

 

 

 

용화사 석가모니불에서는 신라시대 조성된 국보82호 감산사 아미타여래입상과 비슷한 격식이 남았고,

미륵불과 약사여래불의 법의는, 논산 개태사나 훨씬 후대일 걸로 생각되는 부여의 대조사, 인근 충주의

원평리 입상 등에서 보이는 단순하다 못해 도식적인 선형으로 처리된 것에 비해 훨씬 복잡하여

법의만으로 본다면 이 불상들이 조성된 시기는 고려초보다 신라말기가 아닐까 조심스레 추측해 본다.

 

 

 

<부여 대조사와 충주 원평리 석불살입상... 둘다 관촉사처럼 보관을 쓰고 있는데 법의를 비교하는 것도 재밌다...>

 

물론 그 때였다면 당연히 비로자나불이 있어야 하는데, 혹시라도 유실되지 않았을까 아쉽게 생각되며,

지방분권이 촉진된 상황과 라말려초, 려말선초 등 격변기에 민중들이 추존했던 것이 미륵불 사상이었음을

감안한다면 민초들에게 이 불상은 형식과 수인을 떠나 무조건 미륵불로 불리웠을 거라 이해해 본다.

 

사실 좌대를 빼고 입상만으로 이 높이면 상당한 크기인데다, 이렇게 한곳에 한꺼번에 조성된 예가 드물고,

과연 그만한 크기와 높이에 걸맞는 비례를 갖췄는가가 내가 용화사를 보고 싶었던 직접적 이유였다.

게다가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석불입상은 결코 많지 않은 숫자와 분포를 가지고 있고, 앞서 말한

개태사, 대조사, 원평리, 만복사지 외에 꼽을만한 입상은 충주 미륵사지, 관촉사, 서산 안국사, 안성 미륵당과

아양동, 국사암, 상하리 등에 불과하며 그 외 담양 등의 민불형식과 화순 운주사 등을 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런면에서 본다면 녹녹치 않은 정성과 공력이 투여된 이곳 용화사 석불입상군은 축소평가되고 있는거 같다.

 

 

 

 

<미륵전 유마거사상... 석굴암의 유마거사상과 비교해보면???>

 

 

다시 현재 미륵전에 안치된 유마거사상을 보면서, 여전히 재밌고 신기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불상이란 시대의 정신이고, 예술의 정수일진데, 또 그런 의미에서 최고의 석공들이 닮고 싶은 얼굴,

즉 이상적인 얼굴을 모본으로 만들었을텐데 노전대통령을 닮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는 게 말이다.

어쩌면 이 지역, 청주의 석공들에겐 그런 얼굴을 닮은 불상이 호기로웠거나 하나쯤 필요했을 수도 있다면,

이 곳, 어느 시대엔 노전대통령을 닮은 얼굴이 시대를 선도하고 주도하는 상이었는지도 모른다는 생각과,

노전대통령의 인연과 무관하게, 불상이 닮은 게 아니라 노전대통령이 불상을 닮았다는 게 맞다 생각된다.

 

또 하나는 과거엔 무엇으로 불리웠던 이 불상이 유마거사상이라는 점이다.

유마거사가 누군가? 우리가 익숙하게 들어 알고 있는 미륵/관음보살, 문수/보현보살, 일광/월광보살 등등

위계상 부처의 아랫단계에 있으면서 석가모니를 따르던 모든 보살들이 지혜를 두려워했다는 거사가 아닌가 !

뭇 중생들을 해탈의 길로 안내하는 보살들을 뛰어넘어 부처와 맞짱을 뜰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그였고,

그런 이유로 유마거사의 존재는, 십대제자가 중시된 소승불교와 보살의 역할이 강조된 초기 대승불교가

중생들도 깨달음을 통해 역할구분없이 모두 부처가 될 수 있다는 대승불교의 완성으로 표상되는 존재다.

노전대통령을 닮은 이 불상의 이름이 유마거사상이라 불리우는 아이러니를 생각하며 웃는 이유다.

 

 

 

<미륵전 내부의 또다른 좌상... 법의도 다르지만 손을 표현하는게 얼마나 과감한지...>

 

 

 

 

그러고보면 나는 불상을 바라보고 이해하고 선별하는데 하나의 편견을 가지지 않나 반성해 본다.

왜냐하면 지금까지 나는 불상의 얼굴과 전체적인 조화와 비례를 통해 완성도를 평가하고 논했었다.

즉 내가 닮고 싶은, 지금 이순간 느끼고 싶은 감상만을 위주로 불상의 고하와 품격의 유무를 말했었다.

그러나 그것이 시대와 민중들의 다양한 요구와 취향을 감안한 열린마음, 통섭의 자세를 반영했었을까?

내가 바라는 이상향이 그 누군가에게는 혐오일 수도 있고 용도폐기된 과거의 유형일 수도 있지 않을까?

 

 

<미륵전 내부의 입상... 형상을 보면 아미타여래불이라 생각되는데, 삼불전 미륵불과 같이 오른손은 시무외인을, 왼손은 여원인을 지었다... 백제의 미소라 불리는 서산마애불과 같이 두려워하지 말라는 뜻...>

 

 

 

이해하는 것과 선택하는 것은 다르고, 인생이란 취사선택의 협소한 갈림길의 연속이 만든 짧은 신기루고,

나의 경험과 지식이 짜낸 선택은 결코 시대의 상식과 한계를 뛰어넘지 못할 것이 분명하지만,

애써 나의 기준을 타인을 강제할 수단으로 만들어도 안 되지만, 스스로 좁혀놓을 이유도 없음을 느낀다.

한곳, 한지역에 그렇게 뛰어나지 않은 다양한 불상들이 한꺼번에 모여 있음을 보면서 드는 생각들이고,

하나하나가 국보가 아니고 보물이 아니라는 이유로 지금까지 외면(?)해왔던 내 게으름의 반성이 그것이다.

 

<삼불전 내부...> 

<미륵전 내부... 너무 흔들렸다...ㅠㅠ>

 

 

동시대의 여부와 무관하게 하나의 불상은 다른 유형들의 모본이 되었을 것이고, 그렇게 용화사 불상들은

짧은 시간, 혹은 긴 세월을 통해 완성되어 천년의 길고 긴 시간이 흘러 결국 한곳에 모이기 되었다.

어쩌면 과거 한때, 이 지역의 풍요와 정신의 정수를 대변했겠지만 지금은 묵묵히 세월을 묵도하고 있다.

석굴암 본존불처럼 이상적인 얼굴과 정연한 비례를 갖추고 있지 않지만 들인 공력과 정성은 탄탄하다.

그런 정신과 민중들의 염원이 한곳에 모여 다양한 얼굴과 자태로 시대와 지역을 대변하는 게 용화사의

일곱 석불입상군이 아닐까 싶다. 운주사완 또 다르게 다양함이 함께 모여서 만든 새로운 경험이다.

 

 

 

 

 

 

 

사족>

* 지금은 삼불전과 미륵전에 각각 3구와 4구가 나뉘어 안치되었는데,

과거처럼 한꺼번에 있었으면 더 좋았겠다는 생각.

* 90년대 지어진 삼불전은 근래 지어진 이층전각치고는 장중하게 잘 지어진 전각이라는 느낌.

근래 신축된 이층전각중 월출산 도갑사의 대웅보전도 괜찮았는데, 그곳은 일층이 더 높았어야 했다?

 

 

<용화사 삼불전... 워낙 규모가 크고 종무소 등과 가까이 있어 정면을 찍지 못했는데 아래(↓) 도갑사 대웅보전보다 느낌이 좋았다...^^> 

 

 

 

* 용화사는 절집으로서 완성도와 안정감에서는 그리 추천할만하지 못하다.

공간속에 건축이 있고, 건축에 유물이 있는 것이 아니라, 불사와 유물을 위해 주객이 전도된 느낌 때문.

게다가 홍수방지를 위해 천변도로를 높이면서 공간적 완성도가 깨졌고,

도심에 존재하는 사찰의 한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불사가 돈으로만 이루어진다는 느낌...

 

 

* 절에 가서 불상 사진을 못 찍게 하는 것은 여전히 불만이다.

루브르 박물관, 대영 박물관, 우리나라 중앙박물관도 다 사진을 찍게 허용하고 있다.

그들이 막는 것은 후레쉬를 터뜨려 유물에 손상을 주는 것과 사진촬영으로 관람에 지장을 초래하는 경우.

요즘 사진기 들고 다니는 사람들도 이정도 기준은 모두 준수하고 있지 않을까?

무턱대고, 예전부터 그래왔으니 여전히 그래야 한다는 권위주의적 사고는 너무 답답하고 안타까운 일이다.

 

 

* 삼불전 석가모니불의 뒷면도 충분히 관람할 수 있게 노출되면 더 좋겠다는 생각...

지금 사찰에서 전각내부의 불상은 조선후기의 패턴으로 만들어져 있지만,

수미단 위에 대좌를 올리고 그 위에 불상이 있는 것도 어색하고,

불상이 꼭 벽에 의지해 앞모습만 노출되는 것도 불과 몇백년 동안 형성된 관습일 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