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량사 극락전 마당을 벗어나면서... 100417
무량사의 가람배치와 이층전각, 그리고 처마선을 붙들고 너무 많은 시간을 지체했다.
조선식 가람배치와 백제식, 신라식 가람배치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고,
조선중기를 결정했던 인조대에 건축된 이층전각들의 미감에 대해서도 비교해보고,
그리고 탑과 건축의 처마를 붙들고 한동안 그림 그려본다고 낑낑대기도 했다.
이제 내려서야할 시간...
너무 허허롭고 무위한 바람이어선지, 더 많은 말들로 무량사 앞마당을 채우려했던 모양이다.
<생각해보니 만수산 무량사 위치를 소개한 지도가 없어 추가한다 / Daum지도에서 스캔... 부여 서쪽 끝이고, 서해안고속도로 대천 IC나 새로난 고속도로의 부여 IC에서 진출입이 쉽다... 만수산 동쪽자락에는 보령 성주사지가 있고, 공주-부여-보령을 묶어서 서산이나 수덕사로 연결해도 좋은 코스가 된다...^^>
내가 너무 극락전과 오층탑 위주로, 그리고 넓은 마당위주로 무량사를 소개했는지도 모르겠다.
석등도 라말려초에 만들어진 보물이지만 미감이나 자태에서 나를 만족시켜 주지 못해 피했고,
<석등 / 보물 233호 / 10세기 / 3m... 작지 않은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오층석탑과 극락전에 묻혀 눈에 띄지 않는다...^^ 신라말~고려초, 오층석탑과 함께 만들어진 것으로 생각된다... 국보로 지정된 팔각 간주석 형태의 석등이 몇기 있지만(부석사(17호), 보림사(44호)), 썩 맘에 들지않고, 이런 형태가 미감을 갖추기는 결코 쉽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도 한다...^^ 간주선 하부의 복련과 앙련이 너무 두텁고 좁아 날씬함이 없고, 두툼한 지붕돌에 비해 화사석이 너무 작다... 개인적으로 좋아하는 팔각 간주석 형태 석등으로는 법주사 사천왕 석등을 최고로 치고, 경주박물관에 있는 경주읍내 석등과 중앙박물관의 나주 서문리 석등을 좋아한다... 앙증맞은 형태로는 백장암 석등이 있고, 지금은 파손되어 일부만 남아있지만 원원사지 석등은 어떤 모습이었을까가 제일 궁금하다...^^>
보물로 지정된 탱화를 비롯해 다양한 부도군 등 무량사는 차분히 찾아볼만한 것들이 적지 않다.
인조11년 1633년 만들어진 범종과 5m가 넘는 소조(진흙으로 만든)아미타삼존불도 볼만하고,
개인적인 호불호로 비켜났지만, 생육신의 한사람으로 최초의 한문소설 금오신화를 쓴 매월당 김시습이
이곳저곳 방황하다 말년에 자리를 잡고 시를 읊다가 일생을 마친 곳이 무량사이기도 하다.
<김시습 영정...>
한 두가지, 너무 길어질까봐 앞에서는 건너뛰었지만 입이 근질거려 꼭 지적해놓고 싶은 점들이 있다.
보물급으로 등재되지 못해 조금 억울하게 보이는 것이 동양최대라 자랑되는 소조아미타삼존불인데
엄밀히, 진흙으로 만든(!) 불상중 크다는 의미여서 머쓱하지만 우리나라 최대 좌불임은 분명하다는 거.
근데 법주사, 귀신사, 송광사의 소조삼존불이 늦게나마 보물로 지정되었는데 무량사는 왜 빠졌을까?^^
크기로나 규모로나 결코 빠지지 않는 거 같은데 차이가 무엇일까?
<무량사 극락전 내부의 소조삼존불... 법주사, 완주 송광사, 김제 귀신사 등 이 시기에 만들어진 삼존불들과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다...>
또 하나 재밌는 것은 이런 커다란 불상과 웅장한 건축물들이 중창된 곳에는 지역적 공통점이 있다.
진표율사가 만든 법주사와 금산사는 통일신라 중기에 미륵신앙의 중심지로 자리 잡았던 곳이고,
마곡사, 무량사, 귀신사, 완주 송광사, 화엄사 역시 백제세력권에 미륵신앙이 끊이지 않았던 곳이다.
왜 인조의 불사는 서울과 경기, 경주/상주/안동 지역에서는 이루어지지 않았을까? 아니면 못했을까?
1640년대 통도사 대적광전이 독특한 모습으로 중창되지만, 이층이상의 전각은 이쪽 지역에 없다 !
하나 더, 그 당시, 고려의 중심지이자 옛 고구려의 땅인 북한쪽에는 이층전각이 지어졌을까?
그리고 반복되는 이야기이지만, 나는 조선식 가람배치나 건축공간, 그리고 선의 미학을 좋아하지 않는다.
무위자연 - 도교의 느낌에서는 현실에 안주하며, 공허한 체념을 털어내지 못해 무기력해 보이고,
제천행도 - 유교의 느낌에서는 극단적으로 닫힌 관념으로, 현재와 현실을 재단하는 허위의식이 처량하고,
극락왕생 - 불교의 느낌에서는 공유하지 못한 미래에, 조직도 비판도 없어 힘겨워 보이기 때문이다.
<극락전의 공포구조... 이렇게 혀처럼 내민 부재를 고건축에서는 "살미"라고 부른다... 그리고 세부적으로 들어가면, 맨 아래쪽을 초제공, 두번째는 이제공, 세번째는 삼제공... 그리고 삼제공을 넘어서 그 위쪽에는 끝부분의 혀가 아래를 내려오는데 그것을 익공, 그리고 익공 위에 끝부분이 사진처럼 둥그렇게 말린 부재를 운공이라 부른다... 나도 거의 기억하지 못하거나, 또는 기억하지 않지만, 포작구조를 볼때, 이 [살미]와, 사각형의 접시-대접처럼 생긴 [소로], 그 소로를 받치고 있는 [첨자]만 알면 대충 해결된다...^^ 뭐 이걸 설명하려 했던 건 아니고, 반복되는 구성이 멋있어서 올린 것이니...^^>
한국적인 것이 세계적인 것이고, 우리 것이 좋은 것(!)임은 분명하지만,
그것은 조선이란 틀로 채워지지 않는 것이고, 만족할 수도 없다는 게 내 생각이다.
고려도 있고, 신라도 있고, 발해도 있고, 백제와 고구려, 부여와 고조선도 있는데 말이다.
절름발이 근대와 관념속에 닫혀버린 중세에 우리의 고전과 원형, 잠재력은 재해석 되고 발견되어야 한다.
여전히 조선에 대한 오해에서 내가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게 크지만, 아직은 부족한 듯 싶다.
끝없는 상념들이 꼬리에 꼬리를 물지만, 역시 내 머릿속에 잔존하는 규준은 크게 변하지 않은 듯하다.
다시 마당으로 돌아가, 극락전 뒤쪽 산신각(?) 가는 길에 아담한 맛배지붕 건축물이 하나 서있다.
담백한 맛, 정갈한 느낌에 세련된 비례... 준수한 미감의 건축이 있어 눈 맛이 즐겁다.
나도 건축하는 사람이지만 이런 건축들을 보면 기분이 좋아진다.
극락전 보수하다가 남은 자재로 지었는지, 여차저차 서비스로 지어졌는지 모르겠지만(?^^)
이 건축을 손수 만들었던 사람이나, 감독했던 사람에게 득의의 웃음을 선사할만한 작품이다.
만들었던 사람이나, 그곳에 머무는 사람이나, 나처럼 바라보는 사람을 모두 만족시킬 수 있는 건축...
그것은 어느 공간, 어느 시간에서도 축복받을 일이고, 부러운 일이기도 하다... 상큼하다...^^
우화궁 앞, 기와불사를 받는 곳에 모아 놓은 정성스런 조각으로 새겨진 석재들...
어디에 어떻게 쓰였는지 모를 부재들에 남아있는 정성과 염원에 살짝 경의를 표하고,
그렇게 극락보전과 오층탑, 그리고 무량사 넓은 마당을 벗어난다.
짧은 머뭄, 여러 장의 사진, 그리고 복잡한 상념과 쓸데없이 긴 글이 내 여행의 특징이기는 하지만,
무량사는 아무래도 탑보다는 건축이 중심이 되고, 그리고 공간을 놓치기에는 생각할 역사가 많았다.
십오년전에는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조선중기의 변화에 대해 생각할 수 있어서 좋았고,
십오년전에 참으로 멋지게 보였던 극락보전의 맵시와 미감을 여러건축과 비교할 수 있어 즐거웠고,
덕분에 지붕의 처마선을 생각하면서 한중일의 지붕과 서양건축까지 정리해볼 수 있어 복잡했다...^^
<이런 그림 몇장 그리다가 혼났다...ㅠㅠ 그냥 스케치해서 사진으로 올렸으면 됐을 걸, 틈틈히 그린다고 이틀을 소진했으니...ㅠㅠ 동서양 지붕-서양건축에는 처마가 없다!!!는 걸 설명하려고 그렸는데...ㅋㅋ 그외에 탑 지붕돌과 지붕처마의 비교, 한중일 고건축의 처마선 비교 등등이 몇장 더 있는데 다음글에나 소개할 예정임...ㅎㅎ>
언제쯤일지 모르지만, 다음에 무량사에 머문다면 어떤 생각을 나는 할 수 있을까?
얼마나 차고, 또 무엇이 비워질까?
멋들어진 극락보전과 근사하게 어울린 오층탑을 다시 생각해본다.
무량사 넓은 마당처럼 비워지고, 석탑처럼 부드럽고, 극락보전처럼 시원하게 채워질 수 있을까?
다음엔 느티나무 그늘아래서 지나가는 물소리와 투명한 하늘, 허허로운 바람을 맞이해보고 싶다.
그리고 마지막, 이방원이 하여가를 부른 만수산이 부여가 아니라 개성의 만수산이었음을 고백하며
몇 년이 지나 이곳에 머물 때, 나는 하여가를 부를지, 단심가를 부를지 궁금해진다.
<무량사 깨어진 석부재... 매우 정성스럽고 섬세한 문양이 새겨져 있다...
단심가 때문에 깨어졌을까? 하여가가 깨뜨렸을까? 아니면 그것들과 무관하게 깨어졌을까??
나는 내 관념의 관성을 이렇게 확실히 깨뜨렸을까? 아니면 깨어졌는데도 인정하지 않고 있는 것일까???
아무도 묻지 않고, 관심도 없지만, 내게는 여전히 중요하다...^^
참고로 이방원의 하여가와 정몽주의 단심가의 중간쯤...
조금 더 현실적(?)이거나 중간자적 입장의 문답시가 있어 소개한다...
굴원 (전국시대 초나라 사람으로 진나라와의 연합을 반대하다 유배를 거듭하다 추방당한 사람)
新沐者必彈冠 新浴者必振衣 <신목자필탄(퉁기다)관 신욕자필진(털다)의>
머리를 감은 사람은 반드시 갓의 먼지를 떤 다음 갓을 쓰는 법이며
몸을 씻은 사람은 반드시 옷의 먼지를 떤 다음 옷을 입는 법이다.
어부 (유배를 떠나는 굴원이 강을 건널때 뱃사공)
滄浪之水淸兮 可以濯吾纓 <창랑지수청혜(어조사) 가이탁(씻다)오영(갓끈)>
滄浪之水濁兮 可以濯吾足 <창랑지수탁혜 가이탁오족>
창랑의 물이 맑으면 갓끈을 씻고, 창랑의 물이 흐리면 발을 씻는다
굴원이 정몽주와 비슷한 성향의 사람이라면, 어부는 현실을 살아가는 사람이다...
만약 정몽주가 선죽교를 건너기 전에 어부같은 사람을 만났다면 어떤 선택을 했을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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