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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여행...

무량사3> 선(線) 미학의 백미 극락전 - 그 시대적 배경...1007

 

 

 

 

무량사 극락전 1 - 線(선) 미학의 백미...

 

이미 고백했지만, 나는 무량사 극락전의 처마곡선이 우리 기와건축 - 조선건축의 백미라 생각한다.

십오년전 극락전 사진과 비교해보면 일층처마의 곡선이 조금 더 유려해졌고, 더 부드러워졌어도

현재 극락전 모습은, 조선인조대의 목구조가 그대로 남아있어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팽팽하게 당긴 동아줄을 살며시 늘여놓은 상태, 직선은 완전히 사라지고 유려한 곡선만 남아있다.

극적인 선은 사라지고, 긴장감도 사라지고, 과장도 사라지고, 구조에 얽매인 딱딱함도 사라진 선.

무량사 극락전을 바라보면 그런 느긋함과 여유와 무위로운 자연을 바라보는 그런 느낌이다.

 

 

<무량사 극락전...>  

 

 

어렸을 적, 우리 건축의 특징으로 학교에서 숱하게 들었던 말이 있다.

소박하고, 자연스럽고, 또 그래서 자연과의 조화를 중시했다는...

크기와 높이, 면과 색, 비례와 대칭, 수많은 말들이 있지만 가장 특징적인 것은 線(선)이라고...

버선코, 기와지붕의 처마, 한복의 소매와 섶코... 그래서 맵시와 선의 미학이란 말까지 나왔었지.

그중에서 가장 한국적인 기와지붕의 처마선을 대표하는 것이 무량사 극락전이 아닐까 싶다.

 

 

적극적인 처마선으로 시원시원한 경쾌함에 화려함으로 대표되는 것이 부석사의 무량수전이고,

절제되고 긴장된 가운데서도 은근하게 갈무리 된 것이 수덕사 대웅전이라면,

무량사 극락전은 무량수전보다 절제되어 있고, 수덕사 대웅전보다는 부드럽게 마감되어 있다.

 

<부석사 무량수전 / 국보 18호 / 1376년...

지금까지 부석사에 오르면 앞마당에서 앞뒤를 바라보거나, 무량수전을 찍을때면 늘 삼층석탑 옆, 측면 자리만 고수했었다... 대략 17도 정도 틀어진 가람배치를 감안하면 오히려 무량수전의 정면은 이곳을 응시하게 된다... 해서 몇년전부터 부석사에 오르면 이곳을 고집하게 되었다... 처마 곡선과 건물의 비례가 가장 잘 드러난 위치이기 때문이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무량수전은 건물몸체와 지붕의 비례가 많이 깨져서 보인다... 지붕과 건물의 비례가 너무 안정적이어서 긴장감이 없어지고, 어정쩡한 모습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단, 무량수전을 바라보는 위치는 이곳이 아닌, 안양루를 막 올라서서 바라보이는 모습이기에, 그곳에만 머무는 우리들의 시선에는 더할 나위없이 장중하고 넉넉하며 활달하게 보인다... 어쩌면 그런 것이 건축적 장치이고 배려이고 실제적 미감일지도 모르겠다... 석굴암 본존불 얼굴이 평면상 비례에서는 부적절하지만, 우리들의 눈에는 가장 안정적으로 보이듯이 말이다...

참고로 이 부석사 무량수전도 광해군때에 중수되었다... 지금은 빛이 바래 흔적만 남았지만, 현재 다 벗겨진 단청에서 광해군의 손길을 느껴보는 것도 즐거운 일...> 

<수덕사 대웅전 / 국보 49호 / 1308년... 97년 사진이니 지금의 배치와는 또 다른 모습이다... 엄정하고 장중하며 근엄한 맛배지붕의 모든 맛을 가장 잘 살린 건축으로 평가되고 있다...

초기 백제식 가람의 원형이 현재의 모습인지는 모르겠지만, 1990년대 조선식 가람배치를 따랐던 정면의 요사채를 철거하고, 부석사처럼 조망권 위주로 지금처럼 공간구성을 완전히 바꾸었다... 좁은 마당에서 우러러 보았던 장중함은 많이 약화될 수밖에 없지만, 건물의 빼어난 비례와 자태를 드러낸 것에는 만족한다...

무위사 극락보전에서도 느끼지만 처마의 직선마감이 ~~처럼 물결치게 보이는데, 양단부의 반전이 미약하기에 나타나는 현상이라 생각된다...>

 

 

흔히 우아하고 세련된 선의 미학을 백제의 미감으로 꼽지만, 이건 분명 조선의 미감임이 분명하다.

백제의 우아한 선과, 신라의 강직한 선이 고려의 유려함으로 바뀌고, 여기에 조선의 소박함이 배가된...

그래서 나는 무량사 극락전을 조선건축에서 선의 미학의 백미로 꼽는 것이다.

 

<정림사 오층석탑 / 국보 9호 / 8.33m... 공식적인 자료에는 미륵사지 석탑 이후 630년경 만들어진 것으로 소개되고 있지만, 개인적으로 백제 위덕왕대인 554~598년경 만들어진 우리나라 최초의 석탑이라고 생각하고 있다...

백제의 우아한 곡선과 미감을 가장 잘 나타내는 귀중한 유산으로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자세히 보면 정림사지 오층석탑에는 곡선이 없다...^^

기단부는 안쏠림이 적용되었고, 지붕돌에는 양단부(끝)에 지붕처마와 비슷한 적극적인 반전이 있을뿐이다... 이 작은 반전들의 연속적인 조합과 얇은 판석들의 중층적 구성이 정림사탑을 부드럽고 우아한 곡선처럼 보이게 만든다... 

백제미학의 뛰어난 점은 안쏠림과 추녀의 반전, 그리고 적절한 체감 등, 부분적이고 작은 장치들의 반복된 패턴으로 인해 경쾌함과 상승감을 갖추면서도 장중하면서도 우아한 맛을 살려냈다는 데 있을 것이다...

약한 기단부와 넓고 높은 몸체, 그리고 좁은 몸돌과 넓은 지붕돌... 가만 생각하면 불안정한 구조와 가분수의 비례를 통해 정림사탑은 전혀 다른 미감과 다양한 변화를 갖게 되었다... 가까이에서는 장중한 위압감을, 적당한 거리에서는 가벼운 상승감을, 그리고 먼거리에서는 차분한 안정감을 느끼게 되는 것이다... 그런 맛을 느낄 수 있다 생각하여 정림사탑의 미감에서 백제의 우아함을 인용하게 되었다...>

 

<법륭사 오층탑 /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 일본 국보 / 670년경... 건축의 원형으로 탑을 생각하고, 다시 건축을 탑의 원형으로 생각하고...^^ 정림사 오층석탑이 건축으로 바뀐다면 가장 유사한 형태가 바로 법륭사 오층탑이 될 것 같다... 가분수 같은 비례와 몸체에 비해 지나치게 넓으면서 얇은 지붕... 그리고 지붕추녀 끝에서의 미세한 반전까지... 맨 아래층에 덧대어진 겹처마를 없애면(애초에는 없었던 것을 후대에 보강한 것이다) 빈약한 기단부까지 비슷해진다... 팽팽한 긴장감과 장중하면서 우아한 맛까지... 팔상전과 비교해보라... 상륜부까지...>

 

<석가탑 부분 / 국보 21호 / 8.2m / 742년... 두말할 필요가 없는 신라 석조예술의 정수를 담은 명품이다...

석가탑도 정림사탑처럼 자세히 보면 엄정하고 정연한 직선만으로 만들어진 탑이다... 층급받침이든 지붕돌이든 몸돌이든 모두다 직선이다... 그리고 전각과 지붕돌 바로 위가 만나는 부분인 추녀의 반전도 자세히보면 직선이다... 그 작은 직선이 있어 석가탑은 딱딱하지 않고, 답답하지 않은 우아한 맛을 갖추게 되었다... 그 누가 석가탑을 날카로운 직선들의 조합이라고 생각하겠는가...^^

백제의 석공이 만들었다는 설화도 있고, 또 다보탑의 판석을 자세히 보면, 정림사탑의 지붕돌과 똑같아 한사람이 만든 거라고 느낄만큼 백제인들의 기술과 노동이 동원되었음도 사실이라 생각한다... 완벽한 비례와 우아한 미감은 우리나라 석탑예술의 대표이기도 하다...

내가 신라의 미감으로 강직하고 정연한 직선과 안정된 비례를 꼽는 것은 석가탑만이 아니라 감은사탑, 고선사탑 등에서도 흔하게 볼 수 있기 때문이다... 한치의 흐트러짐도 인정하지 않는 각지고 예리한 직선속에 그들의 다부진 힘이 새겨져 있다...>  

<금산사 오층탑 / 보물 25호 / 7.2m / 982년... 개성 남계원 탑에서도 쉽게 느끼지만 고려시대의 석탑들은 지붕돌의 전각이 완전히 곡선이다...

정림사탑, 일본 법륭사탑처럼 팽팽한 직선과 불안정한 배치를 통한 긴장감의 연출에서 만들어진 부드러운 경쾌함도 사라지고, 석가탑, 감은사탑처럼 안정된 체감과 체계적인 구성을 통해 만들어진 담백하면서도 정연한 비례도 사라지고, 고려시대 사람들은 화려하고 느긋한 곡선으로 자신들의 미감을 솔직하게 표현했다...

어쩌면 우리들이 지금 볼 수 있는 대부분의 기와지붕들은 이 금산사 오층탑의 지붕돌의 곡선과 가장 유사할지도 모르겠다... 탑의 판석에서 지붕처마의 곡선을 시대적으로 비교하는 게 엉뚱한 발상이지만, 수덕사 대웅전에서는 정림사탑을, 부석사 무량수전에서는 석가탑을, 무량사 극락전에서는 남계원탑이나 금산사 오층탑을 연결시켜 생각해 보았다...^^>

 

 

 

무량사 극락전 2 - 시대적 배경...

 

그러면 동시대에 만들어진, 특히 몇 개 남지 않은 이층 이상의 전각과 극락전을 비교해 볼까?

오늘날까지 남아있는 다층전각들 중 궁궐건축을 빼면 나머지 건물들은 모두 인조대를 전후해 만들어졌다.

법주사 팔상전과 대웅보전(1620년경), 금산사 미륵전(1630년경), 무량사 극락전(1640년경)

마곡사 대웅보전(1650년경), 그리고 조금 후대의 화엄사 각황전(1700년경)이 그것이다.

 

<법주사 팔상전 / 국보 55호 / 1620년경... 처마의 곡선과 각층 몸체의 비례, 그리고 전반적인 느낌을 생각하시면서 보시길...^^>

 

먼저 가장 기본적인 질문 : 갑자기 왜 이렇게 높고 큰 건축물들을 지어야만 했을까?

정답: 내부에 안치된 불상이 크기 때문?? 빙고~~~^^ 가장 현실적 필요는 불상이 분명하다?!!

극락전에 봉안된 소조아미타삼존불의 앉은 크기가 5m를 전후하니 정말 큰 불상임이 분명하다.

또한 이시기에 만들어진 김제 귀신사와 완주 송광사에도 4m를 넘는 거대한 불상들이 조성되었다.

귀신사 대적광전과 송광사 대웅전은 단층건물이라는 차이가 있을뿐, 타 불당에 비해 규모가 크고,

또 하나 공통점은 법주사 대웅보전처럼 모두가 극락왕생을 기원하는 아미타불이 조성되었다는 점이다.

900년전, 통일신라가 시작하던 시기나 이때나, 전쟁의 후유증에는 아미타불이 최고의 위로였을 것이다.

 

 

<귀신사 대적광전 삼존불 / 보물 1516호 / 1640년경... 

임진왜란이 끝난 이후 대대적인 불사와 재건은 광해군이 시작하였다... 그러나 인조반정 이후, 인조는 그 사업을 더욱 확대하여 전국적으로 확산시켰고, 이시기에 우리가 살펴보는 법주사, 금산사, 무량사, 마곡사, 귀신사, 송광사, 통도사 등등이 중창된다...

또한 이시기에 만들어진 불상들은 삼존불의 특성을 가지고 있는데, 각각 비로자나불/아마티불/석가모니불 등을 주축으로 구성되었고, 각가의 크기가 4m를 넘는 대형 소조불들이다... 법주사, 무량사, 귀신사, 송광사(완주) 모두 4m가 넘는 삼존불로 구성되었다...>

 

 

 

조일전쟁-소위 임진왜란이 끝나고 반정으로 등극한 인조는 전국 각지에 대대적으로 불사를 중창한다.

7년간의 오랜 전쟁의 후유증을 극복하며 국시인 유교를 통해 국정체계를 정비하는 것도 좋았겠지만,

어수선한 민심을 달래고 전몰자를 위로하며, 현재를 잊고 후세를 기원하는데 불교만한 게 없었겠지.

요즘식으로 말하면 경기침체를 벗어나기 위해 재정지출을 통한 인플레이션성장을 도모한 면도 있었을거고.

아이러니한 것은 적극적인 북방외교와 조선의 변화를 꿈꾸었던 개혁군주 광해군을 축출했던 인조가

조선건축사에서는 처음으로 전국적인 불사를 일으키며 가장 규모 있는 기념건축에 매진했다는 점이다.

 

<법주사 대웅보전 / 보물 916호 / 1620년경... 처마의 곡선이 팔상전과 확실히 차이가 나나요? > 

 

 

친명배금사상에서 유교의 전통을 고수하고 정묘-병자호란까지 겪었던 인조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왜국의 침탈에 이은 여진족에 굴욕, 무능력한 왕조를 겪어야만 했던 백성들에게 불사는 무슨 의미일까?

크고 높고 화려한 건축을 통해 만연한 패배주의와 피폐한 민심은 얼마나 극복되고 자부심으로 이어졌을까?

누구를 위해, 무엇을 위해 그랬는지 알 수 없지만, 인조는 불타버린 경복궁을 재건한 게 아니라

전국에 불타버린 명승고적지에, 우리에게는 낯설었던 이층 삼층의 비유교적인 건축불사를 진행한다.

 

<금산사 미륵전 / 국보 62호 /  1630년경... 여기서도 처마의 곡선과 체감을... 그리고 각층 지붕의 두께도 유의하여 보면 화엄사 각황전 등과 많은 차이를 느낄 수 있다...>

 

<귀신사 삼층석탑 / 전북 유형문화재 62호 / 4.5m ... 귀신사는 금산사가 자리한 모악산자락 반대편에 자리잡고 있다... 산 양편에 삼층전각과 삼층석탑이 존재한다... 무엇이 비슷하고, 무엇이 다를까? ^^> 

 

 

정도전-이이에 의해 체계가 확립된 조선시대를 생각하면 크게 초기, 중기, 말기로 나누어 볼 수 있고,

내부적인 이념적 정치체계 확립과 대내외적인 국가정체성 표방이란 두 축으로 변화-기회가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단종-세조의 왕권신권, 연산군-중종대의 사림붕당정치, 정조-세도정치의 개혁과 반목이 있고,

대내외적 국가정체성 확립을 위한 태조-태종, 광해군-인조대, 대원군-개화세력의 대립축이 그것이다.

각각 초/중/말기를 대표하는 이런 갈등과 대립에서 인조반정은 조선후기를 가늠하는 결정적 계기였고,

각 세력간의 이념적 정책적 대결은 우리들 관념에 각인된 조선의 이미지를 고착시킨 근간이 되는데,

이런 시기의 정점에 인조는 법주사, 금산사, 무량사, 마곡사에 온갖 공력을 쏟아부어 불사를 진행한다.

 

<무량사 극락전 / 보물 356호 / 1640년경...> 

 

 

가끔 법주사나 금산사에 머물면서, 그리고 오늘처럼 무량사 앞마당에 서면 이런 생각들이 꼬리를 문다.

마곡사나 화엄사 등등은 단순히 명승고적이었기에, 잘잘한 설화가 아름다워서 중창을 했었을까?

뛰어난 선승들의 노력만으로 이런 불사가 가능했을까? 이 규모를 지역의 경제적 부가 감당할만 했을까?

도대체 거대한 아미타불 앞에서 백성들은 위안을 받고, 높고 웅장한 불당건축을 통해 긍지를 느꼈을까?

 

 

<마곡사 대웅보전(보물 801호 / 1650년경)과 대광보전(보물 802호 / 1788년)...>

 

임진왜란과 정묘/병자호란을 겪었던 백성들에게 조선의 왕조와 지식인들은 무엇을 주려했을까?

생활화된 불교신앙과 관념적으로 변하는 유교의 규범에서, 불사를 통해 유교와 불교의 간극을 좁혔을까?

어쩌면 이 시기의 다양한 모색으로 만들어진 소프트/하드웨어가 조선르네상스의 기반이 된 것은 아닐까?

답이 없는 질문임에도 무량사의 부드러운 바람에서 역사의 향기를 탐색하는 건 역시 상상뿐이다.

 

 

<화엄사 각황전 / 국보 67호 / 1700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