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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여행...

무량사1> 변하는 것과 변하지 않는 것...1004

 

 

 

 

<무량사 전경 : 극락전 - 오층석탑 - 석등>

 

 

<천왕문을 들어서면서... 오래된 사진이다... 그때는 이런 구도로 사진을 찍었었나? ^^>

 

 

 

1.

 

적지않은 기다림이었지?

10년이면 변한다는 강산이지만,

내 기억속에 존재하는 시간과 공간은 언제나 정지되어 있다.

십오년전 멈춰버린 시간에 무엇인가를 찾고자 다시 만수산 무량사를 찾았다.

 

 

 

이 곳이, 이런들 어떠리 저런들 어떠리, 만수산 드렁칡이 어쩌고 저쩌고 하던 그 만수산일까?

태종 이방원이 포은 정몽주에게 읊었다는 <하여가(何如歌)>를 생각해 본다 ;

此亦何如彼亦何如(차역하여피역하여)

城隍堂後垣頹落亦何如(성황당후원퇴락역하여)

我輩若此爲不死亦何如(아배약차위불사역하여)

이런들 어떠하며 저런들 어떠하리

만수산 드렁 칡이 얽혀진들 어떠하리

우리도 이같이 하여 백년까지 누리리라

 

이런들 저런들... 성황당 후원이 퇴락하면 어떠리, 우리들도 그처럼 어울려 죽지 않으면 어떠리

사실, 한역된 시를 아무리 읽어봐도 만수산 드렁칡은 나오지 않지만,

사냥 나갔다가 다쳐누운 병상의 이방원이, 문병 온 정몽주에게 읊었던 노래가 그렇다하니 믿을 수밖에...

아무튼 이에 답하여 정몽주는 한시로 답하는 그게 단심가(丹心歌)다.

 

此身死了死了一百番更死了(차신사료사료일백번갱사료)

白骨爲塵土魂魄有無也(백골위진토혼백유무야)

鄕主一片丹心寧有改理歟(향주일편단심영유개리여)

이 몸이 죽고 죽어 일백 번 고쳐죽어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

임 향한 일편단심이야 가실 줄이 있으랴

 

(이럴 때 궁금하다. 600년전, 고려말 조선초 사람들이 사용하던 말을 우리들은 알아들을 수 있을까?

또 정몽주처럼 한시를 읊었다면 오늘날 우리들은 과연 알아먹을 수 있었을까?

그때의 한문 발음은 중국과 똑같았을까? 아니면 고려식, 혹은 조선식의 독자적 발음이었을까?

아무튼 내가 볼 때, 이방원은 音(음-구어체 한글)으로 물었고, 정몽주는 訓(훈-한문)으로 답했다...^^)

 

<무량사 들어가는 길... 일주문을 지나, 천왕문을 지나 극락전까지... 애초부터 무량사 들어가는 길은 이렇게 직각으로 꺽이고 꺽였을까? 글세~~~ 썩 호감이 가지 않는 동선이었다...>

 

 

무엇인가를 염원하고 지키고자 하는 이들...

선동할 수 있고, 주장할 수 있고, 그리고 거부하고, 선택할 수 있는 이들...

내가 바라보고 서 있는 만수산이, 이방원이 지칭한 만수산인지 잘 모르겠지만,

참 부럽고 멋진 대화다. 은유와 기개, 포용과 결단이 공존하는 수 높은 대화...

왠지 여기에서는 당당한 의지, 혹은 신념과 격조 있은 여유를 가져야만 할 것 같은 기분...

 

 

 

 

2.

 

일주문에서부터 천천히 올라가면서 세월의 변화를 추적해볼까?

<15년전, 만수산 무량사 일주문 사진이다... 세월이 흘러 그때 심어놓았던 나무들이 아래 사진만큼 컸고, 지붕도 보수되고, 주변도 많이 정비되었다... 하루 하루 커갔던 나무들과 주변에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보이지 않은, 눈에 띄지 않은 변화였겠지만, 농축된 세월만큼, 건너 뛴 시간만큼 변화를 느낄 수 있다... 하여가와 단심가를 끄집어내어 세월을 이야기해보는 게 그런 이유다...>

 

 

 

주위의  나무들도 많이 자라나 외롭고 처연하게 보였던 일주문이 많이 작아진 느낌.

무너지고 뜯어져 아무도 돌보지 않을 것 같이 초라했던 일주문이 새단장을 했지만,

벗겨진 세월만큼 산뜻하지 못하고, 고풍스럽고 운치 있던 차분함을 살리지 못했다.

극락전도 수년전 중수했다는데, 탑은 불상은, 그 느낌들은 그대로 변하지 않았을까?

주위의 나무들이 자라나 작아진 광명문만큼 만수산 무량사는 그렇게 변해 있었지?!

 

만수산자락을 스치고 내려오는 개울물(만수천) 소리에 물오른 새순들은 싱그럽고

십수년만에 다시 들어서는 무량사 경내는 너무 많은 손을 타서인지 조금은 떠 있는 기분...

 

 

 

천왕문을 들어서며 만나는 사천왕상의 채색도 너무 붉다.

문화재 관리와 사랑이 꼭 화려한 색과 투입되는 돈만큼 결실을 맺는 건 아닐텐데

아무래도 우리는 <변하지 않아야 할 무엇>보다, <변하는 모습>을 먼저 찾게 된다.

현재의 우리들은 <바뀐 것>을 익숙하게 받아드리고, <변해야만 한다>는 강박관념을 가지지 않았을까?

 

<무량사 천왕문의 사천왕들... 붉은 색이 강조되었다...> 

 

 

3.

 

천왕문을 들어서기 전, 담장옆의 당간지주는 예전의 기억과 다른 생소한 느낌으로 다가온다.

처음 보았던 순박하지만 몽땅했던 느낌보다는 적절한 비례와 두툼한 안정감이 새롭다.

<15년전에 찍었던 무량사 당간지주... 그때는 이렇게 몽땅하고 수수하게만 보였는데...> 

 

 

뭔가 변했지? 바뀐 것이라고는 하단 기단부를 완전히 노출시켰을 뿐인데 이렇게 느낌이 달라질까?

그 작은 차이-보이는 높이가 조금 올라갔다-가 이렇게 느낌을 다르게 만들 수 있나?

무엇이든 <한계치 = 임계점(critical point)>라는 게 있다.

작은 차이라도, 일정한 한계를 넘어서면 질적으로 달라지고, 다르게 보여지는...

 

<무량사 당간지주 / 도유형문화재 57호... 달라진 것이라곤, 기단판석이 완전히 노출되었다는 점뿐인데 이렇게 느낌이 다르다... 작은 차이가 미감과 느낌에서는 크게 다가왔다...>

 

 

그래서 그런지 도유형 문화재라는 관리등급도 낯설게만 보인다.

처음엔 당연히 보물급이라 생각했는데, 몇 년지나 알고 보니 도유형문화재...

시,도 유형문화재와 보물, 국보의 등급 구분을 정확히 이해하진 못하겠지만,

이제는 완전히 보물급으로 보인다...^^

 

 

 

옛 백제지역의 당간지주는 측면에 길이방향으로 돌출된 문양을 고유의 특성으로 갖고 있고,

무량사 당간지주 역시, 늘씬한 비례와 담백한 세련됨을 잃었지만 전통의 문양은 변함이 없다.

석탑뿐만 아니라 석등과 석당간지주에서도 최초의 원형을 간직하고 있는 곳은 <미륵사지>인데,

이때 만들어진 교본은 아주 먼 후대의 조선시대, 전남지역의 담양 읍내리 당간지주까지 이어진다.

 

<미륵사지 당간지주 / 보물 236호... 우리나라 당간지주의 시원과 다름없는 작품이다... 정면과 측면(혹은 외면)에 돌출된 선이 있고, 특히 측면 가운데 돌출된 선은 후대 신라까지 모든 당간지주로 이어진다... 고려시대에 들어 측면(외면)의 돌출선은 백제지역에만 남는 특성이 되고, 경상도/강원도 등에서는 많이 퇴화된다...>

 

 

조금 더 살펴보면, 신라지역의 원형인 <불국사 당간지주>는 경주와 경남지역 일대에 표준이 되었고,

경북과 강원도 지역, 그리고 고려, 조선시대에서는 돌출문양과 가공이 거세된 형식만을 갖추게 된다.

그래서 미륵사지나 금산사, 보원사지 당간지주는 군더더기 없는 최소의 장식에 날씬한 비례를 갖췄고,

불국사, 삼랑사지, 해인사 당간지주는 유려한 곡선을 도입하여 화려하면서도 세련된 미감을 갖췄고,

홍천 희망리, 상주 복룡동, 영양 현동 당간지주는 아무런 장식도 없는데다 굵고 투박한 느낌을 준다.

보고 누려야할 대중들의 정서적 요구였을까? 아니면 만든 이들의 기술적, 재정적 한계 때문일까?

 

<삼랑사 당간지주 / 보물 127호 / 3.7m / 경주... 내가 너무 늦은 시간에 도착해 그렇지, 실제 장식들을 보면 상당히 섬세하고  잘 다듬어져있다... 불국사에서 보이는 가운데 허리부분이 오목하게 들어간 특징이 잘 나타나 있다...>

 

 

만든 이들과 보고 누리는 이들에게 개방된 통로와 소통의 네트워크가 있었다면 그들은 고민했을 것이다.

최고의 지향과 천박함의 지양, 형식의 전통과 내용의 변화, 모방과 창조, 그리고 자연의 입지와 정서 등...

그런 평가와 과시속에서 그들이 공유하는 심성과 미적가치는 지역정서의 토대가 되고 결정이 되어

한 공간의 랜드마크가 되고, 한 시대를 풍미하는 표본이 되고, 역사의 기록이 되어 우리의 자산이 되었다.

 

 

<전통과 계승, 그리고 변화와 개선> 이 양날의 칼은 예술과 정서, 혹은 사상의 균형추가 되기도 하지만,

지역의 문화 DNA는 그렇게 전통이 되고, 표준이 되어 시대를 초월하여 <지역의 정체성>으로 남는다.

무량사 당간지주는 경과된 시간만큼 양식적으로 퇴화되었지만, 지역의 특징과 전통을 그대로 살렸다.

 

 

 

 

<무량사 전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