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충청도 여행...

청주답사 2> 용두사지 철당간 - 철당간기 명문을 읽으면서...1111

 

 

 

 

엉뚱하게, 혹은 약간은 선정적으로 이야기를 시작했지만 간만에 청주에 왔다는 생각이 든다.

이유 중 하나는 국보 당간지주를 보고 싶었던데다, 이곳 용화사에 일곱구의 석불이 있다는 말도 있었지만

무언가 새로운 것, 혹은 평범한 것들에 특별하게 부여된 일상적 의미(?)를 찾고자 나섰던 길이다.

특별하지 못한 일상에 평범하지 않은 자극을 찾는 것 중 내게 가장 유력한 것은 문화재 답사여행이기도 하고,

호기심이 발동해 만든 자연스런 여정을 찾기에 나는 스스로를 너무 각박하고 답답한 상황으로 몰아가고 있고,

그것으로부터 벗어날 수 있는 내게 가장 친숙한 방법은 예전처럼 무심하게 바라보고 길게 생각하는 것이니까.

 

 

청주... 언제 가보았을까? 아니, 언제 와보았지?

대학 다닐 때였으니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노고산동 하숙집에 같이 머물던 동기들이 팔도출신이었고,

1학년 초 여름방학 때 대구 찍고, 부산 돌아, 제주 거쳐, 광주 우리집까지 들르는 팔도유람 길에

청주출신 친구네 집에 하루 유숙한 게 기억의 전부다.

 

 

플라타너스 길과 작지만 정갈하다는 느낌?

그 느낌은 변하지 않았지만, 청주를 둘러싸고 있는 지역이 청원이었음을 아직 몰랐다.

경부고속도로 탈 때마다 익숙한데다, 청원이면 내가 교통사고도 냈던 곳인데 말이다...

살짝 살짝 무의식적으로 피해 다니던 곳이 청주였음에 무지를 한탄하며 엉뚱한 발견에 목적을 잃어버렸다.

이곳 청주를 관통하는 개천의 이름이 무심천이어서 그럴까?

북적북적한 도심 한복판, 숱한 사람들의 행렬속에서 처연히 혹은 고고히 서있는 용두사지 당간을 본다.

 

 

 

 

 

<국보 41호,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당간지주 4.2m, 철당간 12.7m, 각각의 철통은 높이 0.63m, 지름 0.4m로 이루어져 있고, 10개는 상실, 현재 20개만 남아있다... >

 

 

충청도... 충주와 청주의 앞 글짜를 따다가 만든 도 이름이다.

경상도도 그렇고, 전라도도 그렇고, 강원도도 그렇고, 지금 북한땅의 평안도나 함경도도 마찬가지.

문제는 전라도란 이름을 만들었던, 전주와 나주는 각각 전라남도와 전라북도의 한가운데 있지만

경주와 상주는 경상북도에, 충주와 청주는 충청북도에 몰려 있어 조금 헷갈리기도 하다.

게다가 청주는 충청북도 도청 소재지임에도 불구하고 광역시가 아닌데다, 청원권과 분리돼 있어 더 그렇다.

 

<중부지방 지도... 국토지리에 대한 포괄적 시야를 갖추려 인용했는데 맘같지 않다...ㅋㅋ>

 

 

 

존재감의 문제일까?

충주가 한 지역의 중심이 되었던 것은 경상도와 경기도를 잇는 길목에 위치해 있기 때문이다.

소백산맥의 어떤 경로(죽령, 조령, 이화령)를 통하든 서울로 올라가려면 이곳 충주를 거치게 되어 있다.

그리고 남한강 큰 물줄기가 있어 공물을 배로 실어 나르려면 충주는 육로나 수로가 형성된 교통의 요지다.

청주에도 도시를 관통하는 강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물길로만 본다면 무심천은 그런 용도로 부적합한데다

이 강줄기는 한양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신탄진을 통해 공주로 흘러가는 금강의 상류에 해당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청주가 조선시대에 교통의 요지로 성장할 수 있었던 것은 서남쪽으로 뻗어있는 곡창지,

즉 부안/정읍에서 시작해 김제/전주, 군산/익산을 거쳐 논산으로 올라오는 육로는 청주를 통한다는 점이다.

 

 

 

<청주 동헌... 이곳에 주차하고, 한참 걸어갔다... 네비양을 탓하며...^^> 

 

 

 

 

일제 강점기때 신의주에서 부산까지 이어지는 철도가 만들어지면서 한밭이라 불리던 대전이 급성장하기 전,

충주와 청주는 분명 경상도와 전라도를 조선의 수도 한양으로 이어주는 길목에 존재하고 있었고

그것으로 한 지역의 행정과 문물을 관장하는 중심지 역할을 했으나 지금은 과거의 영화에서 잊혀지고 있다.

총량불변의 법칙? 교류와 충돌과 집산이 없으면 퇴보하는 것일까? 아니면 지금 변화를 따르지 못하는걸까?

 

생각해보면 우리나라에 존재하던 중세나 고대국가를 생각하면 그 수도는 결코 넓게 틔인 곳들이 아니었다.

경주도 그렇고, 부여, 공주도 그렇고, 심지어 개성도...(오히려 서울과 평양이 예외라면 예외지)

권력은 각박한 곳에서 태어나 지키기 쉬운 막힌 곳에 있고, 경제는 물길과 육로로 터진 곳이 필요했을까?

아무튼 청주가 나의 뇌리에 깊이 각인되지 못한 것은 그 존재감만큼의 역할이 현존하지 않다는 말이다.

 

 

 

 

 

 

<청주 안심사... 맛배지붕이면서 포작이 측면에도 만들어진 특이한 구조의 대웅전과 국보로 지정된 탱화가 있는 곳... 마음까지 안심되지는 않았다...^^>

 

 

내친김에 이번에 둘러본 안심사 등은 미루더라도 청주 당간지주에 대해서는 몇가지 언급해 볼까?

시대정신에서 벗어나고, 경제적 중심에서 벗어났다는 것이 존재감의 모든 걸 좌우하는 건 아니겠지만,

청주는, 무심천 위에 뜬 배의 형상으로 읽는 풍수가 예전부터 있어 주성(舟城)으로 불리웠는데

그 청주 중심에 돛대 역할을 한다는 게 청주 용두사지의 철당간이고, 그것이 이것의 존재감일거 같다.

아마도 속리산 등 소백산맥으로부터 밀려드는 홍수를 방지하고자 하는 염원을 담았을지도 모를 말이다.

아무튼 이 당간지주와 철당간은 962년, 고려 광종대에 만들어졌다는 명문이 있어 국보로 지정되었다.

 

 

 

 

 

명문은 지금도 또렷하게 남아있어 어리숙한(글짜가 보인다고 읽고 해석할 수 있겠어?) 상상도 할 수 있고,

석재의 지주와 철재 당이 어떻게 결구되었는지도 아주 확실하게 남아있어 간구 등의 변화를 읽을 수 있다.

한두가지 재미있는 것은 고려시대에 만들어졌음에도 불구하고 당간지주는 신라시대의 유행을 따른 게 아니라

보다 먼 과거의 백제시대, 즉 전라도지역의 미륵사지 양식을 따라 측면에 돌출된 선문을 살렸다는 점이다.

 

 

<미륵사지 당간지주... 백제의 미감과 전라/충청지역의 지역적 정서를 가장 잘 나타낸 당간지주... 신라시대, 경상도 지역의 당간지주는 이것과 완전히 다르고, 경북과 강원도의 당간지주는 이 두지역과 또 다르다... 아무튼 나는 이 미륵사지가 우리나라 모든 당간지주의 최초이며 원형의 형태를 갖추고 있다고 생각한다...>

 

 

시대 변천과 국가의 흥망성쇠보다, 민초들이 따랐던 것은 지역적 친근성과 원형에 대한 회귀본능 때문일까?

청주 용두사지 당간지주는 신라시대 경상도지역에 만들어진 불국사/삼랑사지/숙수사지/해인사 등의 당간지주

특성이 아니라, 무량사/법주사 등과 함께 전라 충정지역 당간지주는 미륵사지 유형을 모본으로 만들어진다.

 

 

 

 

 

 

 

<담양 읍내리 당간지주... 조선시대 만들어졌지만, 측면의 문형을 보면 미륵사지 양식을 그대로 계승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돌당간에 철당간을 이어붙인 모습이며, 상륜부 용개가 온전히 보전되어 있다...> 

 

 

또 하나, 나는 내게 익숙한 것들의 미감에 쉽게 반응하고 고착되지 않은 것들은 불편해 한다는 점이다.

지금까지 나에게 당간지주의 미감은 말 그대로 당간지주만을 고려했을 뿐, 완성된 형태를 보는 눈은 없다.

이곳 청주 용두사지 외에도 공주 갑사와 안성 칠장사, 담양 읍내리와 속리산 법주사에는 당간지주와 당이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음을 확인할 수 있지만, 나는 그것을 바라보면서 어떠한 미감도 느끼지 못하고 있다.

물론 당이 없는 깃대만을 가지고 완결과 완성을 논하기 어렵지만 왜 미감은 배제한체 기능만으로 바라볼까?

 

 

 

<갑사 철당간...>

<칠장사 철당간... 조선중기에 만들어졌으며, 이곳 안내문에는 용두사, 칠장사, 갑사에만 원형이 보존되어 있다고 하지만,  나주와 통도사에도 석당간이 그대로 남아있다... 그리고 미륵사지는 석당간 부재들이 발굴되어 있다...> 

<통도사 석당간... 석당간이기 때문에 당간지주에는 간공과 간구가 만들어져 있다...>

<법주사 당간지주... 청주와 가까운 이곳 당간지주도 측면에 선 문양이 그대로 새겨져 있다...> 

 

 

어차피 탑이나 불상이나 석등, 승탑과 부도비 모두가 목적과 기능이 있음에도 미학적 관점을 유지면서,

심지어 주요 기능을 상실한 당간지주에서도 늘씬함과 둔중함, 세련됨과 소박함, 우아함 등을 논하면서

정작 완결적 모습의 당간을 보면서는 기능과 기술을 넘어선 그 어떤 느낌도 피력하지 못함을 발견한다.

당간 위에 펄럭이는 당과, 가람배치와 어울린 유기적 형상을 보지 못한 한계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어쩌면 내 자신이 당간지주와 당간이 어울릴 수 있는 미덕과 비례, 조화에 대해 무지하기 때문인지 모르겠다.

누군가 말한 것에 대해서는 쉽게 추종하고 비판하면서, 정작 내 자신이 앞서 잣대를 제시할 수 없다면??

내 깊이와 수준의 문제겠지만, 아무튼 나는 당간지주와 당간이 함께 있는 모습을 낯설게 바라만 보고 있다.

 

 

 

 

 

<용두사 당간... 자세히보면 당간지주가 만들어진 최초의 지반은 지금의 땅보다 낮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하나 더, 속리산을 비롯한 소백산맥에 삼면으로 둘러싸인 청주는 잦은 홍수에 노출되었던 거 같다.

그래서 무심천 상류에 대청댐도 만들어졌겠지만...

그렇다면 상당한 침식 혹은 퇴적의 흔적이 있어야 하는데 용두사지 당간을 보면 생각보다 적음을 알 수 있다.

언젠가 다른 글에서도 말했지만, 대지는 오랜 세월동안 풍화와 침식으로 인해 퇴적층으로 덮이게 된다.

그래서 선사시대 유적도 땅속에서 발굴되며, 상당수 석조유물과 당간지주가 땅에 묻힌체 보존되기도 한다.

 

 

 

<서울 종로구 탑골공원 내에 보존되어 있는 보물3호 대원각사비... 우리에게 익숙한 재야의 종, 보신각종의 기원이 바로 원각사종이었고, 이곳에 있는 탑이 국보2호 원각사지 십층석탑이다... 청주 용두사지처럼 최초 조성된 기반(GL)을 살려 보존하고 있는데, 청주 용두사지와 똑같이 3단의 석재만큼 외부와 고처차이가 나지만, 이곳은 현재 지표면과 고저차이를 그대로 드러낸 것이고, 용두사지는 외부에 1단만큼 차이가 있다...> 

 

 

서울만 예를 들어도 종로 탑골 공원에 있는 보물3호 대원각사비도 약 1m 정도 깊이에 묻혀 있었음을 보면,

약 550년 동안 그만큼의 퇴적층이 쌓였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이곳은 대략 4~50cm 정도 깊이가 바닥이다.

즉 청주는 1,050년 동안 그만큼 높아졌는데, 서울은 그 반 정도의 기간 동안 두배나 많이 쌓였다는 말...

아마도 청주에 홍수가 적었기 때문이 아니라, 한강 하류인 서울에 퇴적이 훨씬 빠르고 많았다는 말일게다.

살짝 파여진체 962년 당시의 바닥을 드러낸 용두사지 철당간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 이 대지 아래에는 얼마나 많은 문명의 흔적과 사람들의 향기가 서려있을까 하고...

들어가지 말라고 쳐 놓은 저 낮은 안전난간을 훌쩍 뛰어넘으면 나는 1,050년 전으로 가볼 수 있을까 하고...

 

 

 

 

 

 

 

아예 962년으로 되돌아가 전 학림학생 김원이 짓고 손석이 새겼다는 용두사 철당간기를 읽어 볼까?

 

 

 

 

 

“ 일찍이 듣건대 당간이 만들어진 바는 불문을 꾸미는 옥 같은 표지이며,

번개의 유래는 법당을 장엄하는 신령스런 깃발이라 하였다.

그 모양은 학이 푸른창공을 날아오르고, 용이 푸른하늘을 뛰쳐 오르는 것과 같다.

세운 사람은 크게 신심을 일으키고 바라보는 사람은 반드시 충정의 정성을 기울일 것이니

진실로 마귀를 항복받는 쇠지팡이요, 도적을 물리치는 무지개 깃발임을 알겠다.

 

 

근래에...

우연히 병에 걸려 문득 부처와 하늘에 약속하기를,

우러러 철당간을 삼가 만들기를 빌고, 엎드려 훌륭한 사찰을 장엄할 것을 맹세하였다.

그러나 세월은 멈추기 어렵고 죽음에 빠지기는 쉬워 그 사이에 몇 년이 늦어지고 때는 쉽게 멀어졌다.

이때...

이쪽에서 끊어진 인연을 이어 마침내 30단 철통을 주조하게 하고 이어 60척 당주를 세웠다.

 

 

구름을 뚫고 해를 받들어, 안개를 관통하여 공중에 기대었으니,

어떤 사다리로도 용개에 오르기 어렵고, 옥 굴리는 소리가 나는 줄은 감녕의 비단처럼 길고 높다.

(甘(감)寧(령)錦(금)纜(람)永(영)敞(창)璅(소)繩(승)可(가)謂(위)의 일반적인 해석은 ;

‘감녕(오나라 사람)의 비단 밧줄로도 옥돌줄을 감당하기 어렵겠다’인데 이건 아닌 것 같다^^)

죽은 이를 받드는 마음이 깊고, 망한 이를 일으키는 정이 간절하여,

금강의 썩지 않음을 심고 옥찰의 무궁함을 영위한다.

 

 

나는 아교처럼 완고한 사람으로 어리석고 천박한데

문득 나에게 권유함을 입게 되어 겨우 짧은 글을 나타낸다.

당간이 처음 서서 하늘 가운데에 미치니 공교롭게 물건의 모양을 이루어 불법을 장엄하도다.

형제간의 두 집이 합쳐 선업을 닦아 주조하고 세우니 영겁토록 무궁하리라 ”

 

 

 

 

 

 

 

기막힌 말들이다.

우리가 알고 있는 당간의 의미와 역할, 그리고 시주의 염원이 담겨져 있다.

그리고 천년전 그들은 바람에 나부끼는 당간의 아름다움을 노래하면서

그것(!)을 찬양한 이의 부족함을 양해하는 겸손을 숨기지도 않았다.

이것이 천년전 이땅에 문화와 문명을 이루고 살았던 이들의 숨결이며 의식이고 처세가 아니었을까?

 

 

 

<석재 당간지주와 철재 당간의 결구...> 

 

 

<용두사지 당간지주는 좌우의 두께가 다르다...>

 

 

당간지주와 철당간을 보면서 인문의 변천과 대지의 역사와 사찰속에서 나부끼는 당간을 상상하고 있다.

단순하면서도 합리적으로 결구된 석재 당간지주와 철재의 당간...

한쪽의 마모와 훼손이 있어 양쪽 당간지주의 두께가 똑같지 않아 조금은 안타깝고,

조선말, 일제 강점기를 거치면서 약 10척 정도의 철당간이 사라졌다는 말에 온전하지 못함이 아쉽고,

하늘 높은 마천루들은 아니지만 철당간보다 충분히 높아진 현대의 건물들에 가냘프게 느껴짐이 안쓰럽지만,

이 용두사지 철당간이 국보로 지정된 것은 철당간에 새겨진 명문의 휘귀성만은 아니지 않을까 반문해본다.

 

 

 

 

 

 

 

 

철당간이 없었다면 이 당간지주는 훨씬 세련되고 우아하면서도 늘씬한 자태로 평가받았을지 모른다.

담양 읍내리처럼 당간의 상륜부가 온전히 살아있었다면 우리는 훨씬 많은 것들 상상할 수도 있었을 것이다.

갑사처럼 후미진 곳이지만 가람 구성의 하나로 살아있었다면 우리는 공간의 이정표를 떠올렸을 수도 있고,

칠장사처럼 절집과 뚝떨어져 있지만 길거리에 초라히 남아있었다면 또 그렇게 이야기를 만들었을 것이고,

숱한 명작들 속에서 외면받지만 당당히 자신의 기능을 잃지 않는 법주사였다면 또 그렇게 묻혔을지 모르고...

그러나 어디 당간지주와 당간의 미감과 느낌이 그 존재의 모든 것이라 누가 말할 수 있을까?

 

 

<법주사와 용두사지 철당간의 정경... 온전한 공간속에서 제 역할을 하는 것과 변화된 공간속에서 자신의 역할을 잃어버린 것의 차이가 이런 낯섬을 만드는 것일까?> 

<그래도 용두사지 철당간은 사람들이 의식하건 의식하지 못하건 그들의 일상생활속에 존재하고 있다...>

 

 

청주시내 한복판이어선지 많은 사람들이 머물고, 또 만나고, 흩어지고, 지나치는 모습들을 보면서,

광장 한켠의 용두사지 철당간은 그들의 이정표가 되고 약속장소가 되어 그 존재감을 잃지 않음을 느낀다.

또한 나의 어리숙한 느낌이나 감상과 다르게 이것을 만든 이들이 새긴 천년의 염원에 가슴을 열어 본다.

나와 저들이 의식하건 외면하건, 나의 기억이 바래건, 우리의 존재가 사그라져 역사속 바람에 지워지더라도

이 철당간은 지금처럼 또 다른 천년의 세월 동안 우리의 후세들과 함께 역사를 증언할 것이다.

철당간에 새겨진 문자가 있어서가 아니라,

지금 이순간의 바람과 빛과, 그리고 지금 이곳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말소리와 땀내음속에 풍화되면서.

 

 

 

 

 

아름다운, 정말 멋지게 한세상을 살아간 사람들을 만나 하늘을 한 번 더 볼 수 있다는 거...

용두사지 철당간을 만났을 때 가질 수 있는 답사여행의 즐거움이 그런 거일 거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