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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여행...

성주사지 2> 생초보자와 함께 한 답사여행 - 성주사지 가람배치에 대하여...1202

 

 

 

 

 

 

6.

 

 

사실 성주사지에 들어와 어디에 어떻게 눈을 둘까 고민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뭔가 산만하다는 점이다.

멀쑥해 보이는 오층탑이나 크지 않은 삼층탑은 이 넓은 터를 확 휘어잡기엔 어딘지 모르게 작아 보인다.

또 직지사처럼 각각의 영역에 나뉘어 있다면 모를까, 오층탑과 삼층탑 3기가 가까이 몰려 있는데다,

폐사지이니만큼 건물 하나 없는데 만평 넓은 공간에 탑 4기만 달랑 보이니 얼마나 당혹스럽겠는가...

게다가 전저후고의 안정감이라도 있으면 좋겠는데 성주사지는 오층탑이 앞에 서고, 삼층탑이 뒤에 있는데다,

전면에 일탑일금당 배치를 해 놓고서, 강당지 앞에 또다시 삼층탑을 3기나 몰아놓은 독특한 유일 구조다.

 

 

 

 

 

무심코 넘어가지만, 우리들에게 친숙한 불국사나 마곡사, 무량사 등등의 배치를 보면 확인할 수 있듯이,

금당영역에 들어설 때, 탑의 노반과 금당 처마 높이가 일치되는 비례가 조화롭고 안정적인 공간경영이며,

불국사 무설전 앞이나 부여 능사 강당영역처럼 강당지 앞 공간은 사찰행사를 위해 비워놓는 게 일반적이다.

 

 

<도갑사... 오층탑에 비해 최근 조성된 대웅보전이 크다... 하지만 이쯤 자리에서 보면 안정적이 된다...>

<직지사... 이곳도 대웅전 건축과 삼층석탑이 제짝은 아니지만, 대체적으로 원칙을 지켰다... 이 비례로보면 역시 최근에 보완한 상륜부가 조금 무겁게 느껴진다...>

<불국사... 역시 탑과 건축이 제짝은 아니지만, 비교적 원칙에 충실한 짜임새다... 아쉬운 것은 극락전도 그렇지만 대웅전을 진입하는 동선이 청운교 백운교를 올라 자하문을 통해 진입하는 게 아니라 측면으로 잡혀있다는 점이지만, 자하문 바로 밑에서 보면 그 비례와 짜임새를 확인할 수 있다...>

 

<무량사... 또한 탑과 건축의 짜임새가 높이를 채우지 않고서도 안정감과 완성도를 갖춘 사례가 무량사가 아닐까 싶다... 둔중하고 장중한 탑이 있어 목조건축은 훨씬 경쾌하고 시원하게 보인다... 즉 구성과 공간경영은 하나하나의 완성도 뿐만 아니라, 이처럼 상호간의 조응과 조화가 우리들에게 정서적 친밀도를 결정하게 된다...>

 

 

역으로 금당에 비해 탑이 지나치게 큰 석남사나, 익숙치않은 백제식 가람인 법륭사나 부여 능사 재현단지,

그리고 어디서나 경험하듯이, 익숙한 공간이라도 탑을 바라보는 시선이 틀어질 때 낯섬과 불편함을 느낀다.

 

 

<석남사... 이 정도 규모의 삼층탑이라면 대웅전은 이층전각이었거나 훨씬 높았어야 한다...>

<석남사... 이 시선과 구도를 보면 석남사는 처음부터 이쪽을 배경으로 가람배치가 있었을지도 모르고...>

 

<마곡사... 석남사와 대비해도 확연히 드러나지만, 오층탑의 높이는 대광보전 처마 높이와 비슷하면서 탑의 가늘고 긴 볼륨과 무관하게 안정적인 구도를 보여준다...>

<마곡사... 그러나 마곡사 진입부에서 바라보는 안정감도 시선을 틀어보면 어딘지 불안정하고 낯설어질 수밖에 없다... 주 동선과 기획자가 의도한 배치와 짜임새의 포인트가 어디였는지는 공간구성과 경영에서 중요할 수밖에 없다...>

 

<또한 똑같은 배경임에도 불구하고 이처럼 동선에 따라 시선이 달라지면 건축구성의 완성도도 깨진다... 뒤편의 대웅보전은 존재감을 상실하게 되고, 장중한 대광보전에 눌려 오층석탑은 가늘고 길게만 느껴진다... 이 공간을 기획했던 이가 포인트로 잡았던 지점... 그곳을 찾아보는 게 건축답사여행의 묘미중 하나다...>

 

 

즉 우리에게 호감을 주고 우리 마음을 붙잡는 흡입력을 주는 가람배치와 건축의 짜임새의 황금비율은,

공간경영의 성패에 결정적인 영향력을 준다는 말이다. 우리들이 의식하든 의식하지 못하든...

(편안하고 친밀한 느낌을 주면, 지루하지도 않고 자꾸 찾게 된다. 결국 황금비란 자연스러운 수학인 것이다)

 

 

<불국사 건축 도해... 조금 더 범위를 넓히면 탑과 금당의 높이뿐만 아니라, 이처럼 금당앞 마당의 넓이와 깊이, 그리고 금당의 높이까지 수학적으로 구성되어 있음을 분석할 수 있다... 자연속에 숨어있는 황금비와 관련된 수학공식은 이처럼 자연스럽고 편안한 건축에서 확인되며, 또 그것이 잘 지켜진 공간구성이 우리를 즐겁게 만들어 준다... 우리가 의식하든 알지 못하든...>

<수덕사... 이렇게 사찰건축의 주공간인 금당영역에 어떤 기물을 얼마만한 크기와 높이로 세우는 게 좋을지 고민하면서 최근에 가장 많이 실험된 곳이 수덕사가 아닐까 싶다... 내가 처음봤던 90년대 대웅전 앞에는 최근에 조성된 석등이 놓여 있었다...>

<수덕사... 대웅전 앞의 요사채를 철저하고 금당앞 주공간에 손을 대기 시작한 90년대 후반, 대웅전 앞에는 다시 작은 삼층탑이 세워졌다... 썩 어울리는 그림이 아니었다...>

<수덕사... 그러더니 90년대 후반 금당 아래 마당에 느닷없이 삼층탑이 새로 세워졌다... 당신은 좋은가? 나는 안 좋다...^^>

 

 

이런 상식으로 성주사지 오층탑 높이로 추정해보면 연화대좌가 있는 금당 높이는 상당할 수밖에 없고,

그에 비해 강당과 금당은 너무 가깝고 협소한데다, 그 공간까지 탑으로 채워져 있다는 점이 낯설게 느껴진다.

 

 

<이런 비례를 감안해보면, 오층탑 뒤의 금당은 저 멀리 보이는 교회의 첨탑보다 훨씬 높아야만 한다...>

 

 

즉 우리들이 성주사지에 들어서면서 당혹스러울 수밖에 없는 첫 번째 이유는

탑이 많아서가 아니라, 우리를 편하게 해주는 배치가 아니라는 게 문제일지 모르겠다.

전성기 불전 80칸, 고사 50칸 등 천여칸 건물들이 살아 있었다면 모를까, 뭔가 모르게 산만하고 낯설다.

 

 

<문제는 정사각형의 좁은 금당 기단부에 그처럼 높은 금당이 존재하려면, 그건 금당이었다기 보다, 목탑이었을 가능성이 있지 않을까? 내 고민의 출발점이었다...>

 

 

 

 

 

7.

 

 

왜 그럴까? 혹시 가람배치가 시대가 변하면서 변형/수정되는 과정에 어정쩡한 모습으로 절충되었기 때문은 아닐까? 그럼 최초 배치는 어땠을까? 현재 성주사 조감도에서 확연히 드러나는 정사각형 금당과 연화대좌 주변의 주춧돌에 주목할 필요가 있는데, 이를 근거로 가람배치를 그려보려면 이곳은 오합사란 이름으로 599년 경, 백제인들에 의해 세워졌단 사실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부여 능사와 법륭사를 참고할 해야만 한다.

 

 

<조감도... 9번 금당영역을 보면 4면으로 오를 수 있는 계단이 있고, 정사각형의 금당 한가운데 연화대좌가 있고, 그 주변으로 4개의 주춧돌이 있다... 백제시대 주불상은 금당이나 불전의 한가운데에 놓여 있었고... 그렇다면 백제시대 성주사에는 목탑이 있었지 않았을까??^^>

<성주사, 즉 오합사가 만들어진 가장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법륭사 가람배치도... 사진 중앙의 분홍빛이 금당영역이다... 같은 백제식 일탑일금당 구조였다 하더라도 그 배치는 달랐다... 그리고 산문을 들어서서 실제 금당영역을 한꺼번에 살필 수 있는 지점은 목탑과 금당 전면이 아닌, 탑과 금당이 강당과 만나는 공간이었다... 그쪽 마당이 훨씬 넓다... 당연히 당시 사찰에서의 야외행사는 그 마당에서 벌어졌을 것이다...>

 

 

또한, 현재 성주사 주변은 성주천을 따라 길이 트여 있을 뿐 사방이 산으로 둘러져 있다는 점인데,

산세의 크고 작음, 높고 낮음, 거침과 원만함을 떠나면 법주사나 대흥사 등과 비슷한 여건도 고려해야 한다.

 

 

<어딘지 모르게 어수선한 법주사 가람배치도... 산문에서 진입하는 방향이 아닌 미륵불 중심으로 그려져서 그렇게 보일 수밖에 없다... 목탑 옆의 현재 범종각이 매우 작게 그려져 있고, 산문에서 오층탑, 대웅보전이 일직선 축으로 배치된 것처럼 그려져 있으나, 실제는 조금 다르다...>

<법주사에 들어서면 넓은 마당에 띄엄띄엄 놓인 건축배치에서 어수선한 느낌을 받게 된다... 아무튼, 넓은 마당임에도 불구하고 법주사는 어느쪽에서 봐도 주변 산세를 적극적으로 차용하여 분지에 안겨 있는 느낌을 받는다...>

<이곳이 어디냐고? 여기도 법주사다... 속리산의 크고 웅장한 산세를 담지 못했지만, 성주사지도 성주산, 숭암산의 주변 산세에 푹 파묻힌 구조로 생각할 수 있다... 즉 천여칸이 꽉차있던 성주사 어디에서도 이처럼 주변산세와 어울어진 건축배치가 있었을 것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이상을 근거로 신라의 성주사를 백제의 오합사로 바꾸면 가람배치는 완전히 달라질지 모른다.

두가지 배치가 나오는데, 하나는 같은 시기 만들어진 법륭사나 훨씬 후대지만 비슷한 배치의 법주사처럼

산문에 들어서 왼편에 목탑, 오른편에 금당, 뒤쪽에 강당이 배치되는 삼각구도를 상상해 볼 수 있고,

또 하나는 부여 능사처럼 전면에 목탑, 바로 뒤 금당, 그리고 뚝 떨어진 곳에 강당이 배치된 경우다.

 

 

<법륭사 강당에서 바라본 금당과 오중탑... 실제 남문에서 바라보면 좌우가 바뀌게 되지?>

<법주사 오층탑과 범종각... 법륭사의 좌우를 바꾸면 비슷해지지 않을까?^^ 이 사진속에 석등이 3기가 보이는데 처음부터의 배치였는지는 논란이 많을 듯 싶다... 일본 법륭사에는 금당과 오중탑, 그리고 강당의 삼각구도 가운데쯤에 청동등이 있고, 법주사에서보면 지금의 사천왕석등이 있는 자리쯤이 될 거 같다... 진표율사가 만들 때 법주사에는 오층탑자리에 더 높은 목탑이 서 있고, 범종각 자리에는 훨씬 크고 높은 금당이, 그리고 대웅보전 자리에는 강당이 있지 않았을까? 상상이다...^^>

 

 

내 생각엔 금당 오른편 삼천불전 자리와 왼편 주춧돌의 배치를 보면 후자였을 가능성이 크다고 생각되는데

그렇게 되면 현재 강당지 뒤편의 미발굴지에 넓은 마당을 둔 진짜 강당지가 있지 않았을까 추정된다.

 

 

<아마 오합사의 일탑일금당에 강당을 만든다면 부여 능사 가람배치와 비슷하지 않았을까? 전면이 높고 후면 강당이 가장 낮은... 그리고 산문과 탑, 탑과 금당보다, 금당과 강당의 영역이 넓은 그런 배치 말이다...>

 

 

 

즉 지금 보이는 오층석탑과 삼층석탑을 기준으로 가람을 배치하는 것이 아니라, 최초의 흔적과 목탑이 있었다 전제하고 가람을 배치하면 성주사지의 공간적 완성도는 지금 우리의 그림과 완전히 달라질 수 있다는 것이다.

다만, 백제식 가람에 익숙하지 않은 우리로서는 법륭사도 그렇지만, 미륵사나 마곡사, 능사 그리고 신라시대의 대표적 평지가람인 법주사나 금산사, 보림사 등의 휑한 구조에서 불안정한 느낌을 가질 수밖에 없다.

 

 

<보림사... 직교축의 가람배치다... 역시 금산사와 비슷한 평지형 가람배치다... 최초의 전각들이 모두 사라져 추측하기 힘들지만, 애초의 구조를 갖추고 있었다면 지금보다 훨씬 짜임새 있고 다양한 공간들을 가지고 있었을 거 같다...>

 

 

 

아무튼, 250여년이 흘러 백제식 오합사를 신라인들은 그들 미감에 맞게 성주사로 중개창했을 것이고,

백제 멸망 이후 불탔을지 모를 목탑자리에 금당을 짓고, 그 앞에 오층탑을 새롭게 조성했을 수도 있다.

그리고 행랑 800칸 외에도 水閣(수각)이 7칸이나 있는 대사찰로 변모하면서 기존의 가람배치는 전면적으로 수정되었을지도 모른다. 결국 백제와 신라의 가람배치가 상충되고 조율되면서 석물들의 배치가 일정한 룰을 벗어나게 되었다. 문제는 그 절충이 완전한 재해석이 아니었다는 점일 것이다.

 

 

<저 산세의 흐름처럼 아담한 석등, 홀쭉한 오층탑 뒤로는 하늘로 치솟은 목탑이 있지 않았을까??^^>

 

 

 

통도사와 화엄사, 법주사가 극명한 예인데, 세곳 모두 석탑과 석등 등은 어지럽게 배치되어 있다. 그러나 기존 가람을 완전히 재해석하여 조선시대의 대표적 가람으로 재조정된 통도사와 화엄사는 공간경영에서 성공하지만, 법주사는 어정쩡한 형태로 기본 건축물만 재구성하게 된다. 신라식도 조선식도 아닌 불완전한 형태로...

 

 

<통도사... 대웅전으로 진입하는 방향에서 보아도 벌써 3기의 석등이 보인다(우리나라에서 가장 많은 석등을 보유한 절이 통도사일 거다)... 조선의 인조이후 통도사는 완전히 병렬식으로 재구성되지만, 하나의 사찰에 하나 정도 석등이 있는 배치를 생각한다면, 통도사의 배치는 결코 일반적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통도사를 다녀온 분들이 그곳의 공간을 어지럽다고 생각하지은 않을 듯...>

<화엄사 역시 조선의 인조 이후에 본격적으로 재구성 된다... 본래 이 방향이 화엄사의 중심 구도이고 시선이 된다...>

<그러나 크고 높은 걸 좋아하는 현대의 우리들은 대웅전보다 각황전을 중심으로 화엄사를 생각한다... 만약 그런 의도라면 지금의 시선이 가장 안정적으로 보는 지점이 될 것이다... 화엄사가 즐겁고 좋은 이유는 이처럼 다양한 시선과 동선을 가지면서 무난하고 편안하게 어울리는데 있을 것이다...>

 

 

우리의 상식이 깨지는 순간, 우리들이 얻고 싶은 정서적 안정감이나 편안함은 사라질 수밖에 없는 것이고,

성주사지가 많은 보물을 지니고 있으면서도 충분히 친근하고 소중하게 대접받지 못하는 이유가 아닐까 싶다.

 

 

<불국사 극락전 영역... 탑이 없어도, 석등이 크지 않아도 이 영역은 바로 옆 대웅전과 달리 매우 차분하고 안정된 구도로 배치되어 있다... 불국사의 묘미는 이처럼 다양한 느낌의 공간을 다채롭게 꾸몄다는 것이고, 한바퀴를 빙 둘러봐도 하나 하나가 짜임새를 갖추면서 전체적으로도 부산하거나 어지럽지 않다는데 있다... 그래서 나는 김대성을 천재라고 생각한다...^^>

 

 

 

백과장, 저기 혼자 달랑 서 있는 불상도 보고 와...

잠시나마 오층탑과 연화대좌, 금당지를 바라보며 목탑도 세워보고 금당도 세워보는 중이다.

무엇이 얼마만한 크기와 높이로 세워져 이곳을 장엄하고 있었을까?

 

 

 

 

오층탑을 바라보는 불상과 그 불상을 감싸고 세워진 금당이 있었다면 성주사지는 어떤 느낌이었을까?

보수적이고 폐쇄적이지만 원칙과 보편적 룰에 익숙했던 신라인들이었으니 나를 실망시키지 않았겠지만,

익숙하지 않은 지금 배치는, 기존 백제 오합사에 신라의 성주사를 절충한 결과가 아닐까 하는 의심이다.

 

 

<법륭사 서원 진입로... 수각... 신라시대 성주사에는 수원 화성의 화홍문같은 수각이 일곱채나 있었다면, 지금같은 축소된 규모가 아닌 훨씬 넓은 영역에 성주사는 존재했을 것이다... 무염국사의 제자가 2천명이었다면 그들을 공양했던 신도들은 훨씬 많았을테고, 수각은 지금의 성주천을 건너게끔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성주천 위의 수각을 넘어, 산문에 다가설때 느낌은 이와 비슷했을지도 모른다... 물론 같은 백제식 평지가람이지만, 법륭사는 도심 평야에 존재했고, 성주사=오합사는 뒤로 산을 배경으로 했다는 점이 틀리겠지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