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연히 만난 보물과의 대화...
2. 천흥사지 오층석탑을 통해 살펴 본, 라말려초 석탑의 변화에 대해...
3. 선종의 등장과 함께 무너지는 탑의 상징성과 변화의 모색...
4. 국보 천흥사지 동종...
5. 빼어난 천흥사지 당간지주...
6. 재구성해 본 1010년대 - 고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다양한 모색...
7. 천흥사지 당간지주가 내게 했던 말...
1. 우연히 만난 보물과의 대화...
건축 - 탑 - 불상으로 이어지던 답사여행에 이력이 붙으면서
가람배치의 역사나 좋아하는 탑과 불상, 그리고 닮고 싶은 느낌 등 나름 주제를 갖게 됐다.
그런 와중에 승탑이나 석등, 당간지주, 종 등등에 대한 감식평을 정리하면서
사물에 대한 관찰과 유물을 보는 눈, 문화재를 느끼는 안목도 키우려 노력하다보니
이제는 이런저런 핑계로 우선순위에서 밀렸거나 인연이 없었던 유적들에 대한 욕심이 커감을 느낀다.
<천흥사지 당간지주, 보물 99호, 3m... 오늘서야 이 당간지주를 볼 수 있었다... 행운이라는 말이 맞겠지?>
처음 답사여행을 시작하면서 국보와 보물로 지정된 문화재들을 먼저 찾았던 건,
유한한 시간 속에서 택한 효율성과 게으름을 포장할 변명으로 적당했기 때문도 있지만,
문화재를 보는 대중적 시각을 갖추기 위한 최소의 정성과 인내, 그리고 겸손을 배우기 위함이었고,
유홍준씨나 유명 답사여행가들이 추천해준 유적들을 그 다음으로 찾았던 건, 그들의 글과 사진을 통해
해당 분야 전문가들이 유물에 접근하는 시선, 오랜 경험 속에서 묵은 안목들이 유적에 투사되는 방법,
그리고 문화재 및 시대상 등 보편적인 쟁점들이 어떻게 독자적인 잣대로 해독되는가를 읽기 위함이었다.
즉 이미 검증된 국보나 보물을 가급적 많이 봄으로써 무엇이 보편적이고 대중적 감식안인가를 훈련하고,
다시 전문가들의 시선을 통해 어떻게 나만의 심미안을 갖출 것인가를 탐색하는 방식이었다.
물론 이런 방식에는 당연한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으니, 답사를 떠나는 현재의 내 상태와 수준이,
유물이 만들어지던 그때 상황과 얼마나 일체감을 형성하며 괴리를 극복할 것인가 하는 문제가 그것인데,
그건 내 애정이 얼마동안 지속적이고 내 관심이 균질할 것인가의 문제였기에 시간(양)이 필요했다고 봤다.
결국 나의 답사여행은 유물과 교감을 통해 그 것(!)을 이해하고 나와 대화를 넓히는 시간이었다.
그래서 건축, 조각, 회화에 갖춰진 형, 색, 선, 질감, 명암 등 조형물의 요소를 관찰하고,
통일과 변화, 비례와 균형, 그리고 율동 등 조형의 원리를 전문가들의 시선을 통해 느끼는데서 출발했지만
보다 중요했던 건, 문화유적이 있는 공간과 만들어진 시대, 그리고 만든 사람들과 교감할 수 있는가였고,
궁극의 완성이란 현재의 나를 이해하고, 훈련된 심미안을 통해 나의 지평을 넓힐 수 있는가에 있었다.
느낌이 올 때 애착이 생겼고, 교감이 생길 때 평온했으며, 일체감을 느낄 때 한없이 행복했다.
그러나 생각해보면, 느낌의 강도는 유물의 품격과 무관하고,
유적의 규모가 교감의 만족도를 넓히는 것도 아니며,
문화유물의 완성도에 의해 일체감의 깊이가 결정되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작은 소품에서 우주를 느낄 수도 있고, 거대한 건축물에서 초라함을 느낄 수도 있다는 말이다.
결국 유적을 규정하는 시간과 공간이 나와 만나는 타이밍에 의해 답사여행의 맛과 멋이 결정되고,
나의 의지가 창의 크기를 결정하고, 나의 평상심이 깊이를 결정하고, 타이밍이 향과 색을 규정한다.
<천흥사지 오층석탑, 보물 354호, 5.4m... 고려초기 석탑의 특징을 모두 갖추고 있는 석탑이다...>
오늘, 우선순위에서 밀렸던던 천안 천흥사지 당간지주를 보면서 참 많은 생각을 할 수 있었다.
생각지도 못한 보물을 찾았다는 기쁨을 얻었고, 짧게 쪼개진 그 시대가 어렴풋이 보여 괜시리 즐거웠고,
미진했던 석탑이나 석등, 동종, 당간지주의 시대별 흐름, 특히 고려시대의 변화를 읽어 의미도 있었다.
물론 아직 공간이나 사람, 특히 현재 이 시대 사람과 바로 내 주변을 보는 안목이 부족하다는 것도 알고,
많이 보고 느끼며 나이를 먹을수록 작아지고 좁아지는 나를 보며 차원 다른 한계를 만나 즐거웠지만,
이런 게 진짜 답사여행이고 삶의 여정인가 되물어보고 있으니 여간 흥분되고 기쁘지 않을 수 없다.
오늘은 잠시, 사진으로 재구성되는 천흥사지와 오층석탑, 그리고 당간지주에 대한 이야기를 풀어보면서,
몰랐던 고려를 이해하고, 문화유적을 통해 시대가 요구하는 정신이 무엇이었는지 느껴보려 한다.
2. 천흥사지 오층석탑을 통해 살펴 본, 라말려초 석탑의 변화에 대해...
엊그제 동탄일로 평택엘 들렀다가 뭐라도 보고싶다~는 생각에 천안 천흥사지를 둘러보기로 했다.
도 경계를 넘어 충남에 들었지만 생각보다 멀지 않은 곳, 가는 길은 잠깐이었지만 제법 길게 머물렀다.
눈 대신 쏟아지는 비와 조금 과장하면 억척스런 바람까지~ 편하지 않은 날씨.
바람은 차갑고, 비는 스산하고... 많이 풀렸다지만 왠지 겨울비는 마음을 움츠리게 만든다.
봉선홍경사 갈기비를 눈인사로 대신하고 답사여행 길잡이를 도우미 삼아 곧장 천흥사지로 향했다.
<천안 봉선 홍경사 갈기비, 국보 7호, 1026년... 우리나라 귀부 중 가장 역동적인 모습을 갖추고 있는... 얼마전부터 바뀐 문화재 공식명칭을 사용하려고 한다... 그전까지는 봉선흥경사 비갈이라고 불렸지?>
온통 과수원... 연립주택을 지나 동쪽으로 방죽이 보이고 그 뒤가 성거산이라 생각할 즈음
길 옆 덩그러이 놓인 오층석탑을 본다. 전형적인 고려 초기 탑이다.
언젠가 다른 블로그에서 한번쯤 챙겨 볼만한 탑과 당간지주로 꼽아 놨던 곳인데
천흥사지를 생각해보니 국립중앙박물관 3층 가운데쯤에 있는 동종도 이곳 출토였다는 게 기억난다.
鐘(종)에 대해 정리하면서 체크했던 게 국보였다는 점... 어떤 연유로 국보로 지정되었지?
흠~~~ 떨어져 있지만 국보급 유물이 이곳에 있었다니 천흥사에 대한 기대가 부풀어진다.
<천흥사지 동종, 국보 280호, 국립중앙박물관... 용뉴는 변했지만 신라시대 종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아름다운 종...>
천흥사 동종 제작연대가 1010년이니 탑이나 당간지주 역시 동 시대의 산물일터...
국보 종과 보물 탑, 당간지주... 고려 태조가 만들었던 절이라는데 상당한 정성이 깃들였음을 알게 되고,
연대를 보면서 혼미했던 고려시대와 동종, 석탑 등의 시대별 순서가 정돈되는 느낌을 받는다.
먼저 탑부터 살펴보면서 고려시대의 특징과 천흥사탑 전후 석탑들을 재구성해볼까?
얇아지고 좁아진 지붕돌과 낙수면의 과장된 곡선, 그리고 두꺼워진 기단부 판석과 통통해진 몸돌...
일층 괴임이 변하지 않은 것만 빼면 5.3m의 장대한 크기로 고려시대 탑의 특징들이 잘 살아있다.
그래~ 역시 나는 고려시대 탑의 깊은 맛을 모르거나, 나의 미감과 맞지 않음을 충분히 인정하고 있다.
정연하고 균질하고, 장중하거나 우아하거나... 그 멋지던 신라탑의 양식은 왜 사라질 수밖에 없었지?
몸집은 기름지고, 날개는 좁아지고, 기단부는 엉성해지고, 일층몸돌은 장대해지고, 조화도 비례도 깨지고...
그래도 형식적으론 신라시대 전통을 쫓았을 뿐, 일관된 맛을 풍길줄 아니 나름의 원칙이 살아있고,
디테일에 함몰되지 않았으니 조잡하지 않고, 규모를 갖췄으면서도 흐트러지지 않았으니 어색하지 않다.
무엇보다 하층 기단부 안상과 세부 마감을 보면 노련함까지 살아있어 상당한 공력이 투여됐음도 느껴진다.
<천흥사지 오층석탑 기단부... 기단부 하단에는 안상이 새겨져 있고, 마감이 매우 정교하고 정성스럽다...>
이런 모습, 이런 느낌의 탑을 어디서 봤지?
얇실해진 지붕돌은 하남 춘궁동 동사지 삼층탑과 보령 성주사지 삼층탑들과 비슷하다는 느낌을 받았고,
기단부에 비해 넓고 크고 높아진 일층몸돌을 보면 성주사지 오층탑이나 상주 상오리 칠층탑이,
기형적으로 두꺼워진 기단부 판석은 남계원 칠층탑이나 안성 봉업사지, 충주 미륵사지 오층탑이 생각난다.
그래도 전체적인 이미지를 보면서 이탑과 제일 비슷한 유형을 꼽으라면 정산 서정리 구층탑이 아닐까싶다.
모두 탑신 아래 굄돌이나 기단부 판석에서 신라시대 전통이 변해가거나 고려의 특징을 보여주는 양식이다.
그렇다면 가장 두드러진 고려탑의 특징인 일층몸돌 아래 굄돌의 이해할 수 없는 과장도 정리되지 않을까?
<하남 동사지 삼층석탑과 오층석탑, 보물 13호, 12호... 각각 고려시대 특징들이 잘 살아있는 석탑이다... 삼층석탑의 얇아진 지붕돌과 불쑥 솟은 일층몸돌이 한눈에 들어오는...>
<청양 서정리 구층석탑, 보물 18호... 구층석탑으로 6m면 천흥사지 오층탑보다 볼륨(양감)이 작다고 할 수 있겠지? 이탑의 하단 기단부에도 안상이 새겨져 있다... 제일 비슷한 미감이 아닐런지...>
3. 선종의 등장과 함께 무너지는 탑의 상징성과 변화의 모색...
불상이 사람을 닮은 부처와 보살의 형상이라면, 탑은 부처의 진신사리를 담았던 석가모니의 무덤이었다.
즉 길거리의 돌맹이, 지나가는 개도 깨달음을 얻어 부처가 될 수 있다고 믿는 불교에서
최초의 부처라 할 수 있는 석가모니는 불탑에만 담겨 있으니, 진정한 부처의 현신은 불상이 아니라 탑이다.
그런 이유로 인도에서도, 석가모니 진신사리가 담긴 무덤은 항상 탑파형식으로 불탑이 같이 조성되었고,
불상이 인간의 형상을 갖춘 것은, 석가모니 사후 5백여년이 지나 대승불교 등장과 경전이 정리된 이후다.
<정림사지 오층석탑, 국보9호, 8.3m... 500년대 가람배치에서는 석탑보다 목탑이 중심을 이루었고 그 대표적인 곳이 미륵사지와 황룡사지 등이다... 석탑이 가람배치의 중심이 된 최초 사례가 정림사지가 아닐런지... 지금까지 올리지 않았던 사진으로 대신한다...>
즉 무불상 시대를 벗어나 석가모니 형상의 부처상이나 일반 대중들을 위한 불상이 필요하려면,
참선 수행만이 깨달음을 얻을 수 있다는 소승불교의 한계를 벗어나 삼라만상 관계의 문제가 정립되고,
역사와 공간의 한계를 벗어난 부처와 보살 등의 행적이 경전을 통해 인간의 모습으로 형상화되고
불교를 모르는 사람에게도 공감을 주어야만 한다. 즉 대승불교는 이상적인 격을 갖춘 모범을 필요로 했다.
그리고 소승-대승불교의 한계를 넘어서 계율과 권위를 갖춘 금강승불교에서 부처는 신으로 군림하고.
이런 전통과 시대적 흐름이 가람배치에도 반영되는데, 소승불교가 강한 인도는 탑원과 승원에 만족했지만,
대승불교가 유입된 중국부터 금당이 강조됐고, 금강승불교에서 가람은 공동체를 형성한 성처럼 만들어진다.
때문에 대승불교에서도 초기 가람은 탑을 중심으로 배치했었지, 부처나 금당을 중심으로 기획되지 않았다.
<석굴암 본존불, 국보 24호... 석굴암 내부의 구조와 배치는 대승불교의 완벽한 사상적 구현이었다... 이 사진도 처음 올리는 듯... 흑백으로 찍었었는지, 흑백으로 스캔했는지 가물가물...^^>
우리의 경우 대승불교가 전래된 이후 불교가 전파되기 시작, 5~600년대 이후부터 교종이 뿌리를 내렸고,
화엄종 등 교종이 주도하던 신라시대에도 불상보다 탑이 요체였으니 거대한 목탑과 장중한 탑이 조성됐지만,
800년대 들어 해탈 즉 깨달음을 얻으면 모두가 부처가 될 수 있다는 선종이 보급되면서 변화가 생긴다.
즉 석가모니를 상징하는 탑보다, 깨달음을 얻은 선승의 사리를 담은 승탑이 불교의 정화를 상징하면서,
선승의 사리를 담은 승탑과 또 다른 부처의 생애를 기록한 부도비 조성은 탑과 불상조성만큼 중요했다.
결국 신라말 고려초 가람배치의 중심은 탑, 승탑과 부도비, 그리고 불상으로 나뉠 수밖에 없었다.
<지리산 쌍계사... 쌍계사를 보신 분들은 독특한 가람배치가 매우 낯설 수 있다... 대웅전 바로 밑에 있는 것은 석탑이 아니라 선승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이기 때문이다... 최치원의 사산비명 중 하나인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탑비(국보47호)'가 만들어진 시대가 887년이니 선종이 정착한 9세기 후반에는 가람배치에서도 다양한 실험이 진행되고 있었다고 봐야하지 않을까 하는 게 내 생각이다... 97년 사진으로 흑백이다...>
<여주 고달사지 원종국사 탑비, 보물 6호... 쌍계사와 함께 부도탑비가 가람배치의 중심으로 등장한 대표적인 곳이 고달사지가 아닐까 싶다... 한가운데 배치 됐으니까 의심의 여지가 없지?... 특히 원종국사 탑비를 떠받치는 토단의 주위를 보면 2단으로 기단부를 형성하고 테두리는 몰딩식으로 매우 정성스럽게 장엄했음을 확인 할 수 있다... 법천사지는 승탑(지광국사 현묘탑) 기단부가 그렇게 조성되어 있지?>
탑의 절대적 권위가 깨지면서, 탑을 만들던 기존의 양식도 하나씩 재해석되고 재구성될 수밖에 없다.
그런 다양한 모색 중 가장 큰 변화는 탑의 크기, 특히 탑의 몸체가 급속하게 작아진다는 점이라 생각된다.
생각해보라, 750년대 석가탑은 1층 몸돌의 넓이가 1.6m, 1층 지붕돌까지만 해도 높이가 2.2m 정도였는데
900년대 탑들은 인간적 규격을 갖춰간다고 보일 정도로 기단부와 상륜부를 빼면 3m를 넘지 않게 바뀐다.
또 진신사리를 넣지 못한 탑에도 불경과 불상, 불탑 등을 넣어 신성시하며 경외감을 느끼도록 장엄했는데
이젠 사리함을 넣을 수 있는 기능과 목적만 갖추면, 탑은 완벽한 비례를 갖춘 경배대상이 아니어도 좋았다.
<서산 보원사지 오층석탑, 보물 104호, 9m... 인간적 스케일을 말해 놓고 이렇게 큰 탑 사진을 올리니 조금 이상하기는 하다...ㅎㅎ 그래서 나는 이 탑을 900년 전후의 탑으로 생각한다...^^ 아무튼 일층몸돌 아래에 2단으로 조각되던 '괴임'이 이렇게 '굄돌'로 바뀐 초기 형태가 아닐까 싶어 올려본다...>
탑의 양감 즉 볼륨이 바뀐만큼 다음에 따라오는 게 기단부의 변화다. 목조건축 번안의 전통도 사라지고
부처의 현신이란 상징성도 약화된만큼, 기단부는 단층이 될 수도 있고 비례와 상관없이 높게 만들기도 하고.
이때부터 사리함을 담은 몸체와 그걸 받치는 기단부는 기능과 목적만큼 차츰 분리된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보령 성주사지 삼층석탑... 중앙탑과 서탑이 각각 보물 20호와 47호로 지정되어 있고 높이가 4m다... 신라말 고려초 탑들의 표준 크기가 아닐까 싶다... 역시 일층몸돌 아래 굄돌이 장식적으로 강조되어 있다... 역시 900년대 전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인다...>
<성주사지 삼층석탑 굄돌 부분... 자세히보면 얼마나 정교하고 세련되게 만들어졌는지 확인할 수 있다... 장곡사 석불대좌의 선보다 훨씬 섬세하고 치밀한지... 감탄만...>
<보령 성주사지 오층석탑, 보물 19호... 삼층석탑과 거의 같은 양식으로 굄돌이 별도 부재로 끼워져 있다...>
기단부와 탑의 몸체를 구분하기 위해 그 사이 굄돌이 과장되고 별도의 부재로까지 만들어지는 것이다.
이 시기가 대략 신라말 고려초인 800년대 후반부터 900년대 중반까지가 아닐까 싶은데 승탑의 전성기였다.
즉 승탑이나 석등의 기단부와 몸체를 구획하는 상대석이 꼭 필요해진 것처럼 탑이 그 형식을 차용한 것이다.
<춘천 칠층석탑, 보물 77호... 일층몸돌 아래 굄돌을 자세히보면 앙련이 조각된 걸 확인할 수 있다... 석등의 상대석, 사리를 담은 승탑의 상대석이 연화대좌를 상징하는 것처럼, 이젠 석탑 기단부 위에 연화대좌를 중첩해서 끼워놓고, 그 위에 탑을 세웠다는 말이 맞을까?^^ 이 탑의 몸체에도 사리함이 들어가 있다면, 이 굄돌도 연화대좌의 역할을 했을 수 있다...>
성주사지 탑들처럼 일층탑신 괴임이 장식적으로 강조되거나, 월정사 구층탑처럼 아예 별도로 만들어 끼워지고
일부에서는 춘천 칠층탑이나 관촉사 오층탑처럼 앙련이 조각된 연화대좌가 굄돌의 역할을 대신하게 되고,
이만한 여력을 갖추지 못한 곳에서는 굄돌과 기단부 상대 갑석을 하나로 묶어 두텁게 만든 게 아닐까?
그리고 그런 유형이 장식적으로 극대화된 게 강릉 신복사지 탑이나 서울 홍제동 사현사탑 등이 아닐까?
석공들이 매너리즘에 빠지고, 시대가 흘러 양식적으로 퇴화한 미술사적 흐름도 있었겠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탑을 이해하는 방식이 달라지고, 탑에 담고자하는 의도가 변하면서 탑의 양식이 바뀌는??
<서울 홍제동 오층석탑, 보물 166호... 이 사현사탑에는 각층마다 굄돌이 강조되어 있다... 신복사탑도 그렇지?>
후후~~ 상상은 역시 재밌다. 탑의 크기와 굄돌 부재 하나만으로 사상과 시대의 변화를 쫓고 있으니 말이다.
물론 고려시대 탑의 가장 큰 특징은 삼층탑들이 오층이나 구층, 또는 칠층 등으로 다양화 된다는 점인데,
이점은 언젠가 말했듯이 신라의 멸망과 함께 삼원귀일이 갖는 종교적 시대적 가치의 변화도 있었지만,
한편으론 발해의 멸망과 함께 유입된 유민과 후백제 백성을 포용하기 위한 고려의 고육지책일 수 있고,
오층이나 구층탑은 소백산맥을 벗어나 백제, 고구려의 전통이 강한 지역에 집중적으로 세워진다
신라의 양식과 흔적을 지우고자 하는 권력의지와 당시의 시대적 욕구가 중요하지 않았을까?
천흥사지 오층석탑을 보면서 1000년대 고려인들의 다양한 실험과 모색은 왜 필요했을까 생각, 또 생각해본다.
<천흥사지 오층석탑... 어느 쪽이 정면일까? 이점도 큰 수수께끼였다...>
4. 국보 천흥사지 동종...
바람은 거세지고 사진이라도 몇장 더 찍고 싶은 욕심에 자꾸 우산을 놓쳐 차가운 빗줄기에 노출된다.
왼쪽으로 살짝 비틀고, 오른쪽으로 살짝 비틀어도 석탑의 맛이 살아나지 않는다.
정면도 그렇고 위로 아래로도 마찬가지... 오직 45도 각도의 사각에서나 간신히 안정감을 찾는 정도...
탑을 뒤로 한체 당간지주를 찾기 위해 마을을 한바퀴 돌고, 개울을 건넜는데도 찾을 수가 없다. 어디갔지?
과수원 위로 거대한 성벽처럼 우람하게 치솟은 저수지 방죽을 보며 잠시 요동성, 안시성 성벽을 생각하며,
107개의 개단인가? 멀리 높은 곳에서 천흥사지를 내려다보며 읽기 위해 천흥리 저수지 방죽에 올라,
높지 않지만(579m) 천안시가 동쪽으로 진천, 청주와 경계를 이루는 성거산을 잠시 바라본다.
<이 영역이 모두 천흥사지였다... 왼편에 당간지주가, 오른쪽에 오층석탑이 서있었다... 멀리 저수지 방죽이 보이고, 그 뒤로 보이는 게 성거산이다... 예전 고구려의 성벽이 저런 느낌이 아니었을까?^^>
고려시대의 탑들은 왜 변했을까? 당간지주는 어디 있을까? 그리고 동종은 왜 신라풍으로 남았을까?
아직 탄탄한 내실을 갖춘 것 같지도 않고, 우아한 느낌도 없으며, 장중한 포용력도 느껴지지 않은 고려탑들.
고려가 개창한지 100년이 지났고, 신라가 멸망한지 80여년이 지났고, 무인정권이 들어서기 160년 전인데
중후함과 장대함을 과시하기 위한 다층석탑들은 왜 만들어졌을까? 도대체 1010년대에 무슨 일이 있었을까?
과거 왕조와 다른 방식과 형식의 탑을 만들면서 당대 권력과 종교 지도자들이 과시하고픈 건 무엇이었을까?
신라와 후백제, 그리고 발해유민의 위안과 포용? 불교를 앞세운 지방호족이나 중앙귀족들의 과시욕?
결국 신라 삼층탑이 사라지고 새로운 유형이 창출된 것은 기술이나 미감의 문제가 아니라 시대의 문제겠지?!
<천흥사지 동종, 국립중앙박물관... 이 동종이 천흥사지에 있었다면 종각은 어디였을까?>
그러고보니 국보로 지정된 천흥사 동종에 대해 말할 필요가 있겠다. 결국 이번 답사는 시간(!)여행인가?
얼마전부터 우리나라 종의 역사와 변화에 대해 정리를 시작했지만, 아직 마무리를 하지 못했었다.
왜냐하면 우리나라 종의 기원은 신라에 있는 게 아니라 백제에 있다고 확신했는데, 아직 우리나라에 남은
백제의 종을 직접 보질 못했으니까... 단지 일본에서는 어렴풋하게나마 봤기에 뒤로 미뤘었다. 하지만
신라 종 형태가 언제부터 변해 고려 특유의 양식을 갖추는가가 궁금했는데 천흥사지 동종으로 해결됐다.
<사진 몇장으로 종의 변화를 추적해 볼까? 이 종은 804년 만들어졌던 선림원지 동종이다... 625때 불에 파손된 것을 복원하여 춘천박물관에 전시해 놓고 있다... 위 아래 천흥사지 동종과 비교해 보시길...>
<이렇게 보면 훨씬 잘 비교가 되겠다... 몇십년 후 고려의 종은 이렇게 바뀐다... 대부분...>
<장군 부부가 시주한 동종으로 '을사'명 동종으로도 불린다... '청녕 4년'이 새겨진 동종보다 사진이 선명해서 대신 올리는데, 종의 천판과 종의 몸체를 구획하는 상대위로 왕관모양이 덧붙여져 있다... 일부에서는 음통을 만파식적으로 보고, 물결 모양을 바다의 파도를 형상화한 것이라고 말하기도 하는데, 나도 찬성한다...^^ 을사년은 1185년 또는 1245년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시대 동종과 비교해 고려종의 특징은 용뉴가 달라지고, 만파식적이라 불리는 음통이 달라지고,
그리고 종의 몸통과 천판의 경계라 할 수 있는 상대 위로 왕관 형식의 물결 모양이 첨가된다는 점이다.
그런 점에서 보면 천흥사지 동종은 신라의 전통이 살아있는 거의 마지막 단계의 고려시대 동종이다.
그럼 탑은 변했는데, 종은 변하지 않았다?! 그리고 이것은 시대의 문제가 아니라 기술의 문제인가?
그렇지만 결국 천흥사 동종이 만들어진 48후인 제작된 <‘청녕 4년’이 새겨진 동종>을 보면
이후 고려시대의 동종 형태는 완전히 바뀐다. 왜 변화했을까? 결국 변할 수밖에 없었을까?
천흥사지에 대해 충분히 알 수는 없지만, 1010년대 무슨 일들이 있어 고려인들의 미감은 달라졌을까?
<남양주 봉선사 동종, 보물 397호, 1469년... 신라종을 모태로 한 한국의 종이 처음 바뀐 건 고려초기다... 그리고 원나라 간섭기에 중국종의 양식이 유입되어 중대한 변화가 생기는데, 이 동종에서처럼 선문양이 새겨지고, 용뉴에서 음통이 사라지고 쌍룡으로 바뀌는 등 급격한 변화를 맞이 한다... 이런 유형은 임진왜란 때까지 지속된다...>
<담양 용흥사 동종, 보물 1555호, 1644년... 임진왜란 이후 조선의 종은 다시 변화한다... 중국종의 영향에서 벗어나 신라종의 전통을 하나씩 찾아간다... 용뉴도 변하고 음통도 다시 생기고, 선문양은 사라지고... 종도 시대에 따라 문양과 양식, 그리고 형이 변해 간다는 게 참 신기하기도 하고 재밌기도 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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