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우연히 만난 보물과의 대화...
2. 천흥사지 오층석탑을 통해 살펴 본, 라말려초 석탑의 변화에 대해...
3. 선종의 등장과 함께 무너지는 탑의 상징성과 변화의 모색...
4. 국보 천흥사지 동종...
5. 빼어난 천흥사지 당간지주...
6. 재구성해 본 1010년대 - 고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다양한 모색...
7. 천흥사지 당간지주가 내게 했던 말...
5. 빼어난 천흥사지 당간지주...
열심히 안내하는 네비양을 쫓아가지만 쉽사리 당간지주가 보이질 않는다.
물론 내가 천흥사지로 들어가는 길이 아니라, 나오는 길목에서 당간지주를 찾았으니 더 복잡하기도 했고,
옛날 있던 절간 한가운데 마을이 들어섰고, 그 집들 사이에 당간지주가 숨어 있었기 때문도 있지만,
실제 문제는 다른데 있었다. 천흥사지는 생각보다 넓었고, 탑보다 높은 곳에 당간지주가 서 있었다.
결국 현재 길은 천흥사지 측면에서 들어서게 되어있고, 당간지주 길이 막힌 산을 향해 서 있었기 때문이다.
탑보다 남쪽, 절로 들어가는 어디쯤에 당간지주가 있을 거라는 선입견이 나를 엉뚱한 곳만 찾게 만들었다.
호오~ 어떻게 이런 가람배치가 가능했을까? 북쪽 높은 곳에 당간지주가 있고 남쪽 낮은데 탑이 있다?!
게다가 지금 서 있는 당간지주의 위치를 보면 비탈진 곳에 서 있으니 혹시 옮겨 진 것은 아닐까??
<천흥사지 당간지주, 보물 99호, 3m... 동네를 이리저리 비잉 돌아서야 찾았다...^^ 탑보다 먼저 당간지주를 봤다면 이 방향이었겠지만, 나는 위에서 내려오면서 봤으니 어려울 수밖에...ㅉ>
물론 나는 당간지주까지 다 보고 천흥사지를 벗어나면서 천흥사지의 가람배치를 상상할 수 있었다.
그렇지만 그런 나의 호기는 천흥사지 당간지주를 보면서 모든 걸 잊어버린 다음의 일이다.
생각해보라. 비바람은 계속인데 지도와 네비양을 원망하고 궁시렁거리며 여기저기를 찾고 있는데,
갑자기 눈이 동그레질만큼 빼어난 자태의 멋진 보물을 만났을 때 얼마나 가슴이 뛰고 즐거웠겠는가를...
어디서 이런 보물이 나왔는지 눈을 의심스럽게 만드는 위풍당당하면서도 장중하게 서있는 당간지주...
이건 사진으로 봤던 것과는 정말 차원이 다른 보물 중의 보물이 아닌가?!
왜 이렇게 꼭꼭 숨겨져 있었을까? 왜 이렇게 알려지지 않았을까? 왜 이렇게 충분히 대접받지 못했지?
<이리보고 저리봐도 어쩜 저렇게 잘 생겼는지... 준수하다? 우람하다? 당당하다? 첫 느낌이 뭐였는지 한참 생각했다...^^>
우산도 포기하고 멀리 세워두었던 차도 다시 가져오고, 사진도 찍다가 차에 들어가 구경하다가...
그렇게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천흥사지 당간지주를 바라보고 또 바라보며 풀리지 않았던 많은 생각을 한다.
3m 크기면 절대 작지 않다. 게다가 여느 당간지주와 달리 지주의 굵기가 튼실하고 우람한 느낌까지 든다.
여기에 당간지주를 다듬은 솜씨는 극성의 공력을 갖춰 엄중하면서도 정교하게 마무리 되어 있다.
당간지주 상단에 살짝 들어간 솜씨도 세련됐거니와, 측면의 선문양은 옛 백제지역의 전통까지 살아있다.
너무 좋다... 당당하다... 정말 멋지다... 당간지주를 보면서 이렇게 욕심나게 한눈에 쏙 들어온게 없었는데.
나는 가장 우아하고 세련된 당간지주로 미륵사지 것을 꼽는다. 백제와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것으로.
또 가장 화려하고 역시 세련된 신라의 당간지주를 꼽는다면 쌍으로 남아있는 불국사의 당간지주를 꼽고,
<미륵사지 당간지주, 보물 236호, 4m... 모든 문화유적 답사기에 이 당간지주는 신라 중기에 만들어진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나는 여전히 백제를 고집하고 있다...ㅎㅎㅎ 물론 생각해보면 탑을 만든 시기(600년대 초)와 당간지주를 만든 시대는 다를 수 있고, 또 700년대 이후 미륵사지를 보수하면서 당간지주가 수정되었을 가능성도 다분하다... 그러나 중수를 하거나 대체하더라도 기존의 모습은 쉽게 바뀌는 것이 아니고, 해당 지역의 고유한 양식 역시 아무런 이유없이 바뀌지 않은 게 역사의 진실이기도 하다... 미륵사지 당간지주는 신라-고려-조선에 이어지기까지 시대와 관계없이 옛 백제지역에 조성된 당간지주의 원형이기에 나는 더더욱 백제시대 것이라 생각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석등도 만든 곳이 바로 미륵사지를 만든 백제인들인데, 이런 당간지주를 만들지 못했다는 학설에 나는 동의하지 못한다... >
<불국사 당간지주, 미지정... 기단부는 상실 됐지만, 나는 불국사가 만들어지던 750년대 석가탑 등과 같은 시기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하고 있다... 신라시대를 대표하는 가장 빼어난 당간지주 중 하나...>
그 다음으론 서산 보원사지와 경주 삼랑사지를, 날씬함에서는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를 친다.
또 가장 우람하고 장중한 당간지주를 찾으라면 굴산사지를, 고려시대 것으로는 법천사지를 꼽았다.
<서산 보원사지 당간지주, 보물 103호, 4.2m... 아마 가장 늘씬한 당간지주로 꼽을만 할 것 같다... 조금 아쉽다면 두 당간지주 사이가 너무 벌어져 있다는 점... 그러나 날렵하면서 유약하지 않고, 정교함은 떨어지나 세련됨도 잃지 않았다...>
<영주 숙수사지 당간지주, 보물 59호... 아마 상승감만 따진다면 누구에게도 뒤지지 않는다고 생각되는 당간지주... 지대석을 잃은데다 관리의 부주의 때문인지 모르지만 위로 갈수록 사이가 벌어지는 등 정상적인 모습이 아닌 게 아쉽다... 신라시대의 특징을 잘 갖추고 있고, 거친 표면까지도 정겹게 보이는 당간지주다...>
그런데 오늘 이점을 수정해야 할 것 같다. 이 천흥사지 당간지주야 말로 고려시대를 대표하는 것이고,
미륵사지나 불국사, 굴산사지와 더불어 우리나라 당간지주를 대표하는 것으로 꼽겠다고 말이다.
혹시 지금의 내가 충분치 못한 경험과 일천한 지식, 그리고 현재의 기분에 취해 선택했다하더라도
내 스스로 그걸 뒤집을만한 느낌을 갖기 전까지 천흥사지 당간지주는 보물로 각인될 거 같다.
<강릉 굴산사지 당간지주, 보물 86호, 5.4m... 850년경 범일국사가 굴산사를 창건하면서 만들어진 걸로 추정되는 당간지주로 현존하는 당간지주 중 가장 크다... 최소한의 가공으로 최대의 힘을 드러낸 야성미, 혹은 자연미로 사랑받는 당간지주다...>
<원주 법천사지 당간지주, 강원도 문화재 20호, 3.9m... 지광국사 현묘탑이 만들어지기 전(1085년)에 조성된 게 아닐까 싶은데, 경상도 북부와 강원도 당간지주의 특징이 잘 살아있다... 아무런 장식이 없는 단순함과 간결함에 묵직함이 살아있다...>
당간지주에서 미감과 완성도, 비례와 균형, 율동과 살아있는 느낌을 받는다는 건 정말 쉽지 않다.
너무 단순하기 때문에, 잘해야 상승감 밖에 느끼지 못하는 선으로 이뤄졌고 볼륨을 기대하기 힘듬 때문이다.
그러나 천흥사지 당간지주는 단순함 속에 장중함이 있고, 당당함 속에 기품이 서려있으며, 또한 빼어나다.
물론 완벽한 것은 아니다. 조금만 더 높았으면, 조금만 더 위로 솟았으면 하는 아쉬움도 없지 않은데다,
당간지주보다 넓고 큰 기대석 때문에 상승감이 감쇄되고, 땅에서 노출된 두툼한 지대석도 눈에 거슬린다.
<천흥사지 당간지주의 상승감이 충분히 살지 못하는 이유는, 당간지주보다 더 우람하고 큰 기대석 때문이 아닌가 생각해본다... 게다가 돌출된 지대석까지 두툼해 낮지 않은 높이에도 불구하고 상승감이 살지 못했다...>
<당간지주 상부... 끝부분을 저렇게 마무리한 유일한 경우지? 철당간과의 결구시 부재의 돌출을 상쇄하기 위한 흔적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왜 이런 변화가 필요했는지 아래(↓) 용두사지 당간을 참고하여 생각해보시길... 기술적 문제를 미적으로 승화시킨 고심의 결과?^^>
<청주 용두사지 당간 부분... 어느쪽이 더 안정적이면서 미려한지는 개개인의 미감 차이일까? 그렇지만 50여년 늦게 만든 천흥사지에서 이런 '법고창신'의 흔적을 본다는 건 기분 좋은 일이 아닐까?^^>
<천흥사지 당간지주 부분... 부재 하나 하나에 깃든 정성과 공력은 결코 만만한 게 아니다... 그리고 특이했던 건 기대석 상부를 탑의 지붕돌에 내림마루를 새기듯(정혜사지 십삼층석탑에서도 보이지만...) 우동을 양각했다는 점... 결국 그 두께만큼 저 넓은 지대석을 모두 파냈다는 말이다...^^>
<지대석도 마찬가지... 안상의 문양도 일정하며서도 세련되게 처리했다...>
<그리고 기대석과 지대석은 워낙 규모가 있어선지 여러개의 돌로 붙여 만들었다... 한편 생각하면 그것 때문에 일체감이 떨어지고 시선이 분산되기도 하지만, 역으로 저렇게 몇개의 부재로 나뉘어 있었기 때문에 지각의 변동이나 외부 충격을 흡수할 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현대에도 일정 크기가 넘는 콘크리트(7~12m)나 철골도 구조적 취약부위는 하나의 부재로 만드는 게 아니라, 일부러 의도적으로 나누어 만드는데, 그런 과학적 지혜를 이 당간지주를 만든 이들은 알았을지도 모르겠다...^^ 실제 대부분 당간지주에서 기대석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경우가 드물다...>
<특히 내가 감탄했던 부분이 이 지대석이다... 세개의 판석을 맛대, 두개로 나눠진 기대석을 받췄다... 그런 이유로 지대석도 두꺼워져야 했고, 아마 이 밑 기초도 판축기법식으로 보강했기에 이렇게 버티는 게 아닌가 생각했다... 천년을 버틴 유물은 그 기초가 탄탄하고, 그 지역에서 생산된 소재로 만든 것들이란 생각을 해 본다...>
기대석은 너무 크고 넓어선지 몇 조각으로 나눠져 일체감이 떨어지고, 탑의 지붕돌처럼 우동이 새겨졌고,
천흥사 오층탑 하층 기단부처럼 안상이 화려하게 수놓아져 있어 오히려 시선을 분산시키는 역할을 한다.
여기에 당간지주가 서 있는 위치가 눈에 거슬리니 남의 집 대문 앞에 보표나 장석처럼 보일 수도 있고,
비탈진 경사면이 곧바로 이어져있고 당간지주를 바라볼 충분한 거리가 없어 주변이 받쳐 주지도 않는다.
그럼에도 그런 주변을 눈에서 모두 지우고 올곧이 당간지주만 생각한다면 어디에 내놓아도 떨어지지 않는다.
6. 재구성해 본 1010년대 - 고려의 정체성 확립을 위한 다양한 모색...
잠시 비를 피해 차에 들어갔다. 1010년... 당시 고려는 어떤 상황이었길래 이런 당간지주를 만들었을까?
930년대 태조왕건이 후삼국을 통일, 960년대 광종은 개국공신이던 호족들을 숙청하고 왕권을 강화하고,
980년대 성종에 이르러 유교정치이념을 국가통치의 기본원리로 확고히 세우며 고려는 자리를 잡는다.
과거를 시행하여 신진관료들이 중앙에 등장하고, 화폐 발행과, 창과 칼을 녹여 호미와 철불을 만들지만,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족, 즉 요나라의 무력에 맞설만큼 강성하고 안정된 상황을 만들지는 못했던 거 같다.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 국보 41호... 1010년을 전후한 대략 100년을 살펴볼까? 먼저 962년 만들어진 용두사지 당간이다... 고려에 의한 통일전쟁이 마무리 되고 민심이 수습되던 시점쯤 되겠지? 아직 발해를 멸망시킨 거란의 침입도 감지되지 않고, 내부수습에 관심이 집중되던 시점... 철당간에 새겨진 명문을 보면, 대내외적으로 위기감을 느낀 왕실과 달리, 지방 호족이나 명문가의 지배층들은 상당히 윤택하고 평화스러운 나날을 보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러니 더더욱 왕권 강화를 위한 칼을 빼들 수밖에 없지 않았을까?... 이 당간지주에는 아무런 기상이 없다... 내 느낌으론...>
990년대 서희의 담판으로 거란과 화친을 맺었지만, 송나라와는 국교를 단절한 상태가 지속된 시점이다.
1010년대... 문란해진 왕실의 근친상간 속에 왕까지 살해되고, 천추태후와 관련 있는 강조의 정변으로
1011년, 2차 거란침입으로 개경이 완전히 불에 타고, 외척을 통해 문벌귀족들이 등장해 가던 시점이다.
<관촉사... 고려초기 가장 대표적인 유물들이 모여 있는 곳이 논산 관촉사인데, 이때가 970년경으로 고려 광종대다... 광종은 무엇을 만들려고 했는지, 당시의 고려는 무엇을 원했는지 그 힘을 느낄 수 있는 곳이 여기다...>
<실제 크기를 가늠하기 위해 흑백사진을 한장 더 첨부한다... 그땐 카메라를 두개씩 가지고 다녔지...^^ 탑 옆에 보이는 안내판이 대략 1.6m 성인들 키높이와 비슷하다... 오층석탑이 4.5m고, 석등이 5.5m, 관음보살(나는 여전히 은진미륵이라 부르지만, 공식명칭은 관음보살이다...)이 19m(눈썹과 눈썹 사이가 1.8m니 우리가 보는 것보다 훨씬 크지?)... 그리고 석탑 앞에 배례석이 놓여 있는데, 그 측면에도 천흥사지처럼 안상이 새겨져 있다...>
<중원 원평리 미륵석불, 충북 문화재 18호... 지방 유형문화재로 지정 되어 있지만, 내 눈에 보물급이다...^^ 개태사 석불은 몇 번 올렸으니 이번엔 원평리 석불로 대신한다... 관촉사와 비슷한 시기로 추정하고 있고, 머리위 보관은 당시에 유행했던 양식이었다고 생각한다(예전에 궁예와 견훤의 영향이라고 말했었지?)... 이렇게 관모양을 쓴 석불은 신라시대때 조성된 팔공산 관봉석조여래좌상을 빼면, 대부분 고려초기 옛 백제지역이던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에 집중적으로 조성되었다...>
<충주 대원사 철불좌상, 보물 98호... 같은 지역에 있는 충주의 단호사 철불좌상(보물 512호)과 거의 유사하다... 이쪽 사진이 조금 더 밝아서 이걸로...^^ 창칼을 녹여 호미와 철불을 만들었다는 바로 그 철불이 이게 아닐런지...ㅋㅋ 아무튼 이때 1m 내외의 철불들이 집중적으로 조성된다... 상호의 생김새와 느낌까지 비슷한...>
결국 당시 고려는 국가체계만 완성했을뿐, 대내 권력이동과 대외적 혼란으로 급격한 변화에 놓여 있었다.
후삼국시대를 풍미하던 무장 지방호족들이 거세됐지만, 과거제와 외척을 통해 새로운 문벌귀족이 등장하고
국제적으로는 거란의 지속적인 침입으로, 내우외환을 이겨나가야 하는 긴장이 지속되던 시점이 그때였다.
어떤 사람들이 필요했을까? 어떤 정신이 시대를 이끌어 갈 수 있었을까? 백성들에게는 무엇이 희망이었을까?
대내외적으로 고려만의 정체성이 확립되어야 할 시점이었다. 고려의 독자성이 각인되어야할 상황이었다.
그것도 스스로 고구려의 후예라 일어선 거란인들에 맞서, 호시탐탐 기회를 노리는 신라의 후예들에 맞설...
또 불과 100년전만 해도 선종영향으로 천년왕조가 무너지고, 이곳엔 백제의 전통까지 살아나지 않았는가.
<그럼 이 시기에 만들어진 석등들을 살펴볼까? 관촉사 석등, 보물 보물 232호, 5.5m... 화엄사 석등 다음으로 큰 석등으로 임실 용암리 석등과 규모가 비슷하다... 갑자기 왜 석등이 이렇게 바뀌었을까? 고려인들이 투박해서? 아니다... 불과 50여년전에 화엄사 석등을 만든 석공의 후예들이 있었고, 화엄사 석등을 봐온 석공들이 있었는데 솜씨가 조악해질리 없는 거 아닌가?? 실제로 꼼꼼히 보면 돌을 다루른 솜씨가 조잡해진 것이 아니라 석등의 양식을 완전히 바꾸면서 우리들에게 생소하게 다가온 것 뿐이다... 이렇게 만든 사각형의 석등은 한동안 새로운 유행처럼 정착하게 된다...>
<개성 현화사 석등, 미지정, 국립중앙박물관... 이 석등이 만들어진 시대가 1020년이니 화엄사 석등이 만들어진 딱 100년후다... 역시 사각형의 화창 형식을 갖추고 있다... 관촉사 석등이 만들어진 50년 후에도 고려인들은 그런 미감을 고집했다는 말이다...>
<충주 미륵사지 석등... 그리고 조금 더 후대에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충주 미륵사지에서도 이 유형은 지속된다... 당시의 그들은 새로운 시도를 할줄 알았고, 그렇게 만든 새로운 전통을 지킬줄도 알았다...>
신라의 흡수, 후백제의 위로, 발해유민의 포용을 통해 내적인 안정과 거란과 대치할 힘이 필요했던 때다.
그런 시점에서 이 당간지주도 만들어지고, 석탑도 만들어지고, 동종도 만들어진 게 아닐까?
혹시 내가 봤던 문화유물들 중 당시 만들어진 것들을 자세히 살펴보면 그런 경향이 확인되지 않을까?
1010년 전후 30년을 보면 970~980년대 조성된 논산 관촉사의 오층탑과 석등, 그리고 은진미륵이 있고,
조금더 앞으로 가면 당간지주로는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이 있고, 석탑에서는 월정사 구층탑이 있다.
그리고 조금만 후대로 내려오면 다양한 유물들이 살아있으니, 1020년 현화사 석등과 1025년 거돈사 유적,
1026년 아까 오는 길에 봤던 봉선 흥경사 갈기비, 1045년엔 서울 홍제동 사현사탑 등이 그것이다.
<월정사 구층석탑, 국보 48호, 15.2m... 이 탑이 조성된 시기가 대략 1007년이니 천흥사지와 가장 가깝다... 다층 다각의 석탑... 수직성이 강조된 이 탑을 고려의 대표적인 미감으로 설명한다는 건 부족함이 많아 보인다... 오히려 거란의 일차 침입 이후, 고구려의 정통성이 고려에 있음을 보여주기 위해 의도적으로 고구려의 전통을 따르지 않았을까 생각한다... 먼저 사각이 아니라 팔각은 고구려를 비롯한 북방의 전통이었고, 고구려의 토탑과 목탑은 팔각에 다층이었으니 구층탑은 그들에게 결코 낯설지 않았었을 듯... 거란의 3차 침입 행선에서 벗어난 곳에 만들어져 있어 이채롭기도 하지만, 이런 유형은 묘향산 일대 등 옛 고구려지역에 많이 만들어졌다...>
전체적으로 묶어보면 극명한 차이가 있다. 여전히 선종이 주도하는 시대인만큼 승탑은 전통을 답습하고,
사물 중 하나인 동종 역시 천흥사까지 큰 변화를 갖지 않지만, 여타분야에서는 큰 변화를 담고 있다.
즉 신라의 전통을 그대로 계승한 것은 천흥사 동종과 거돈사 원공국사 승탑 등 종과 승탑에 국한되고,
비로자나불 대신 미륵불이 득세하면서, 개태사, 관촉사, 충주 미륵사지, 원평리석불, 단호사, 대원사 철불과 관촉사, 월정사, 홍제동 사현사탑 등에서 확인되는 것처럼 고려는 고려만의 탑과 불상을 만들고,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 승탑, 보물 105호, 4.7m... 975년에 만들어진 이 승탑은 신라말 승탑에 비해 크기만 장대해졌을 뿐 전체적인 미감은 오히려 떨어진 느낌이다... 그럼에도 세부 조각을 보면 매우 유려하고 풍만하게 조성되어 있어 잘 어울리지 않는다... 아마 거란의 침입과 왕권강화란 대내외적 변화가 없었다면 고려는 이런 미감으로 고착되었을지도 모를 일...>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 승탑, 보물 190호, 1025년, 국립중앙박물관... 크기는 작아졌지만 전성기 신라의 체감을 다시 복원했음을 보여준다... 물론 기단부의 중대석과 승탑의 몸돌이 비슷한 체감을 갖춰 안정감과 상승감 모두를 놓쳐, 보원사지 법인국사 승탑과 비슷하지만 전체적인 느낌은 달라졌다... 불과 50년만이지만 고려는 변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시간이 흐르면 양식적으로 퇴화된다는 것이 꼭 절대적이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는 승탑...>
선종시대를 휩쓸던 고복형 양식대신, 관촉사, 현화사, 충주 미륵대원 석등처럼 고려만의 석등을 기획하며,
거돈사 원공국사 승묘탑비나 천안 봉선 흥경사 갈기비처럼 고려는 고려만의 귀부와 이수를 만들었다.
1000년 역사의 신라를 전복했지만, 그 영향에서 벗어나 100년도 안 된 고려가 자신만의 색깔을 만드는데
얼마나 급격한 파괴와 의도적인 변화, 그리고 지난한 노력과 다양한 실험들을 동반해야만 했을까?
<서산 보원사지 법인국사 부도비, 보물 106호, 975년... 부도비 역시 부도와 비슷한 경로를 밟는다... 외부 자극없이 고려의 부도비는 신라의 양식에서 세부 디테일이 떨어지고 유약해진다... 즉 전통만 살아있고 변화의 기상도 사라지는...>
<원주 거돈사지 원공국사 부도비, 보물 78호, 1025년... 광종,성종의 집권과 거란의 침입으로 고려는 변할 수밖에 없었고, 불교유적에서도 승탑보다 유형화된 것들에서 훨씬 급격한 변화를 맞이한다... 신라시대와 고려의 초창기 때는 결코 시도하지 않았던 다양한 변화들이 일어나는 것... 귀부의 얼굴은 무엇보다 크게 변한다...>
<천안 봉선 홍경사 갈기비, 국보 7호, 1026년... 가장 역동적이면서도 생동감 넘치는 귀부로 사랑받는 비석받침이다... 활기차게 꿈틀거리며 변화를 모색하는... 그런 기상이 당대의 고려는 필요로 했고, 석공들도 그런 기운을 유형화 시킬 줄 알았다...>
<저 갈기비의 귀부는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고려인들은 저 창살 너머 피안의 목적지에 당도할 수 있었을까?>
그리고 이런 변화와 다양한 모색들이 모아져 1050년대 이후부터 본격적인 고려의 전성기를 열게 되는데,
이때는 천리장성이 완공되고, 80여년만에 송과의 국교가 회복되면서 국제관계도 안정돼 무역이 활발해진다.
그 시대를 반영하는 대표적인 것들이 1080년대의 법천사 지광국사 현묘탑과 현묘탑비 뿐만 아니라, 이후
의천의 등장으로 교종과 선종이 천태종으로 통합되고, 또 한편에서는 고려청자가 본격적으로 만들어진다.
거란의 침입을 막았고, 신라나 후백제도 잊혀졌고, 신진세력도 안정되고, 농상공업이 다시 활성화되는 시점.
이 시기에 들어와서야 고려는 고려만의 정체성과 새로운 문화를 갖춘 왕조로 뿌리를 내린 것이 아닐까?
결국 문화유적과 유물들은 시대를 선도하거나, 혹은 앞선 시대를 반영하면서 역사의 숨결을 담지해왔다.
<원주 법천사지 지광국사 승탑, 국보 101호, 1085년, 경복궁... 모든 변화들이 안정된 시점, 어쩌면 대내외적인 상황을 주도하고 관리할 수 있는 역량을 갖추었기에 고려는 승탑에서도 최초의 원형을 최고의 기술과 공력을 투여해 승탑에서 가장 아름다운 걸작을 만들어낼 수 있었다... 그리고 여기에는 100여년에 걸친 다양한 실험과 모색의 경험이 축적되고 집산되었다... 그러나 그게 끝이었다... 고려는, 한반도의 석공들은 이후 이 보다 뛰어난 석탑도 승탑도 귀부도 만들어내지 못했다... 더이상 그럴 이유가 사라진 걸까?>
<참외모양 정병, 국보 94호, 1120년... 이제 고려는 더이상 불교의 석조유물에 기대지 않았다... 불법이 강조되고 교종을 중심으로 선종을 통합했다가, 이때가 되면 다시 선종을 중심으로 교종을 통합한다... 즉 1100년대 고려는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천태종을 중심으로 통합되고, 다시 선종이 득세하기 위해서는 보조국사 지눌이 등장하기까지 100여년을 더 기다려야 했다... 대신 고려대장경 등 인쇄물이 넘치면서 불교이념과 사상은 형상이 아닌 문자로 중심이 넘어간다... 자연 불화가 유행하고, 귀족들도 일상에 매몰된다... 고려청자는 그런 와중에 탄생한 공예품이 아닐런지...>
그러나 아직 천흥사가 만들어지던 1010년대... 그때까지 고려의 정체성은 확립되거나 완성되지 않았다.
잦은 전란으로 한반도는 더 이상 불국토도 아니었기에 크고 거대한 동종은 만들 여유가 없었다. 다시 뺏겨서 녹이면 창과 칼로 바뀔 동종은 클 이유도 없고 안전하게 운반하기도 힘들기만 했을 뿐이니까...
그리고 어차피 옮기지 못하고 숨기지 못할 석탑은 신라말기에 비해 다시 크고 높아져야만 했을지도 모른다. 되도록 장대하고 당당하게... 석공조직들은 해체되고, 거대한 석재를 구할 여유는 없지만 컸어야했다.
높이는 키우면서 작아진 부재를 해결하려면 층수를 높여야 하지 않았을까? 여기엔 새로운 이유도 필요했을 터. 신라의 기억을 지울 수 있게 삼층탑은 피하고, 고구려와 백제의 오층, 혹은 구층탑의 전통을 복원하면??
결국 남성적이고 무미건조한, 그러면서 중후 장대한 느낌의 불상과 탑, 당간지주들이 만들어진게 아닐까?
그런 모색의 정점에 1010년대가 있고, 충주를 비롯한, 천안, 청주지역 등 소위 중원지방 유물들이 존재한다.
7. 천흥사지 당간지주가 내게 했던 말...
결국 오늘도 나의 답사여행은 공간도 사람도 아닌 시간의 문제로 귀결됐다.
아직 충분히 공간을 보는 눈이 없고, 사람으로 귀결되기엔 철이 덜 들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신라처럼 일관성은 없지만, 복잡하고 다양한 변화를 일으킨 고려초기의 특징을 이해할 수 있었다.
탑, 석불, 동종, 석등, 승탑에 이르기까지 고려만큼 혼란스럽고 급격한 실험이 이루어지던 시대는 없었다.
덕분에 당대의 걸작 천흥사지 동종과 당간지주를 생각하면, 1010년대의 고려를 재구성할 수 있었다.
그 유물들을 보면서 각각의 문화유물들의 변천과 함께 그 시대를 쪼개서나마 읽어보려고 노력했다.
<천흥사지를 보다 잘 이해하기 위해 Daum지도를 첨부한다... 길이란 쉽게 변하지 않는다... 현대의 길은 교각과 터널이 없다면 특별한 이유없이 경로가 잘 바뀌지 않는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천흥사지로 들어서려면 10시 방향, 즉 서북쪽으로 진입할 수밖에 없다... 그런데 당간지주는 탑의 북쪽에 서 있고, 그 길은 막힌 길이거나 샛길에 불과하다... 혹시 당간지주가 원래 위치에서 옮겨진 게 아닌가 추측하는 이유다...>
<천흥리 저수지 방죽에서 바라다 본 천흥사지 가운데를 기준으로 좌측에 오층석탑이 서 있고, 당간지주는 이 사진에서 보이지 않지만 3시 방향에 서 있었다... 포도와 배가 유명한 과수원인 걸 보면, 햇볕은 아주 잘 드는 곳이라는 생각이...>
당간지주를 보고 나오는 길에 어렵게 꼬여있던 예전의 천흥사 가람배치를 혼자서 다시 그려봤다.
현재 당간지주가 누군가에 의해 옮겨지지 않았다면 우리는 전혀 새로운 느낌의 천흥사를 그려볼 수 있다.
옛날 천흥사로 들어서려면 언덕을 넘어 당간지주를 보고, 남쪽 평지에 자리잡은 천흥사를 봤을 것이다.
부석사처럼 당간지주를 보고 계속 산위로 올라가 금당과 탑을 본 다음 산 아래를 보면서 쉬는 게 아니라,
당간지주쯤에서 땀을 훔치며 발아래로 펼쳐진 천흥사를 봤을테니, 생소한 느낌이 들었을지도 모른다.
<현재 유물들의 위치를 인정하고, 당간지주에서 천흥사지로 들어서 탑과 금당을 보려면 천흥천을 지나야 한다... 그러려면 수각이 있었어야 할텐데 그 모습은 어땠을까? 위 사진은 지리산 천은사 진입로고, 아래 사진은 조계산 선암사 진입로다... 하나는 수각이, 또 하나는 홍예교가 만들어져 있다... 상상해본다...^^>
왼쪽 서편으로 계곡물이 흘렀을테니 천흥사 경내로 들어서려면 하천을 지나는 홍예교나 수각도 있었을 터...
게다가 현재의 탑 위치를 고려하면 천흥사 중심 금당은 남향이나 동향이 아닌 북향이었을지도 모른다.
어쩌면 탑 뒤로는 충주 미륵사지처럼 거대한 석불(세중돌박물관에 있는)이 뻘쭉하게 서 있었을 수도 있고,
당시 석탑은 오층이 아니라 얼마전 만들어진 월정사나 후대의 정산 서정리처럼 구층탑이었는지도 모른다.
선덕여왕이 자장율사의 뜻을 이어 구층목탑을 세웠던 것처럼 내우외환을 막기 위해 구층탑을 세웠듯이...
후후~ 사진을 보면서 저수지 방죽에 올라 나만의 천흥사를 다시 구성해보는 것도 답사여행의 여운이다.
<천흥사지를 만들 때면 관촉사가 하나의 시대적 모본이 되었을 터... 그런 여운으로 만들어진 것이 충주 미륵사지가 아닐까 생각해 봤다... 그런 입상 거불이 본격적으로 세워지던 때가 고려시대니까... 이 사진은 양지 세중 돌박물관에 컬렉션된 고려 석불이다... 광주 민속박물관에도 있기는 한데, 지리적으로 이 곳이 가까워서... 탑이 산 밑에 바짝 붙어 서 있는 걸 고려하면, 이런 입상 석불이 세워지지는 않았을까?^^ 여전히 상상은 재밌다...>
그리고 오늘은 무엇보다 천흥사지 당간지주에 필이 꽂혔던 하루... 이런 느낌은 어디서 받았었을까?
이만한 포스를 가진 유물이라면 똑같지는 않더라도 내가 좋아하는 미감이니 몇가지가 더 있지 않을까??
먼저 당간지주 중에는 없다. 불상에서 찾아보라면 하남 동사지 출토 철불이 비슷한 느낌이 아닐까싶고,
석등에서 찾아보라면 경주 읍내리 석등의 우아함보다는 법주사 사천왕 석등의 당당함에 더 가까울 거 같고, 아마 가장 비슷한 느낌과 미감을 꼽으라면 아무래도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이 아닐까 생각해봤다.
비슷한 시대, 비슷한 정신이 만든 고려 초기를 대표하는 석탑과 당간지주로서 말이다.
화려하면서도 중후하고, 탄탄하면서도 장중하고, 준수한 느낌을 갖춘 기세등등한 장수의 포스...
천흥사지 당간지주에 법주사 사천왕 석등, 신복사지 삼층석탑에 하남 동사지 철불... 그럼 완벽해지나?^^
<속리산 법주사 사천왕 석등, 보물 15호, 3.9m... 이 석등이 천흥사지 당간지주보다 크다... 물론 천흥사지에 석등이 있었다면 관촉사나 현화사처럼 사각형의 석등이 세워졌겠지만, 당간지주를 생각하면서 비슷한 느낌을 주는 유물을 찾다보니 생각나서 모아봤다... 그런 기운을 가장 잘 표현한 석등과 석탑과 불상은 어떤 것들이 있었는지...>
<강릉 신복사지 삼층석탑, 보물 87호, 4.6m... 그리고 같은 고려시대이면서 비슷한 시기에 세워진 석탑을 생각하면 단연 신복사지 석탑이 떠 오른다... 이 탑에서 느꼈던 기운을 천흥사지 당간지주에서도 느꼈다면 나만의 감상일까? 중후하면서도 화려하고, 당당하면서도 수려한 느낌... 천흥사지 당간지주와 가장 친밀도가 높은 유물이었다...>
<하남 하사동사지 철조 석가여래 좌상, 보물 332호, 2.9m... 경기도 광주, 춘궁동 동사지 인근에서 발굴된 철조좌상이다... 고려초기에 제작된 철불 중 가장 규모가 크고 안정감과 비례 등이 뛰어난 유물이다... 전후 시기를 통털어도 가장 빼어난 철불로 솜씨가 정교할 뿐더러 법식에도 충실하다... 앞서 올린 하남 춘궁동 동사지 삼층석탑과 오층석탑이 조성된 시기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차분하면서도 강인한 인상으로 정중동의 기상이 내포된 느낌이다... 역시 천흥사지 당간지주와 느낌이 비슷했다...>
그래~ 서로 짝을 이루면 정말 멋지겠다는 생각을 하면서 왠지 내자신이 작아지는 느낌이 드는 건 또 뭘까?
우리는 100년을 채 살지 못하면서 천년의 세월, 거기에 나라와 세계와 우주에 대해 많은 말을 하고 산다.
오늘은 내가 잘 알지 못하는 고려시대를 생각해봤고, 특히 한사람의 생애와 비슷한 100여년을 살펴봤다.
내가 당대를 살았다면 이만한 수준과 기품, 기세를 갖춘 당간지주를 노련하고 세련되게 만들 수 있었을까?
갑자기 당간지주와 그걸 만든 이름모를 이가 위대해보이면서 한없이 작고 초라해지는 나를 느끼게 된다.
나는 무엇을 만들고 있고, 내가 만든 것은 지금 시대의 무엇을 반영하고 있으며, 무엇을 준비하고 있을까?
당간지주를 보고 위축된 것일까? 한 시대를 읽어보면서 그때를 살았던 개개인의 한계를 느꼈기 때문일까?
아니면 이런 멋지고 빼어난 보물도 묻힐 수밖에 없고, 잊혀질 수밖에 없다는 그런 허허로움 때문일까?
<이 당간지주에서 저런 석등과 석탑, 철불의 기운을 느꼈다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그 여운이 참 오래갈 거 같다...>
지나간 시대를 담보하는 유물들...
또 현재를 반영하는 유적...
그리고 미래의 변화를 선도하는 문화유물...
자꾸 볼수록, 많이 생각하고 알아갈수록, 그리고 예전에 보지 못했던 것을 보며 하나씩 채워갈수록
자꾸 넓어지고 깊어지고 길어지는 게 아니라, 좁아지고 작아지고 짧아지는 내 자신이 보이는 건 뭘까...
그게 카타르시스일까? 정화일까? 또는 비움일까? 채움일까? 그도 아니면 위안일까? 자극일까?
하루 앞을 모르면서 천년을 구상하고,
곁에 있는 건 외면하면서 지나간 사람/사물/사상의 향기를 쫓는 내게
천흥사지 당간지주가 말하는 것 같다 ;
그릇의 한계를 인정하고 조금 더 낮아지라고...
딱 천년된 세월동안 닳고 닳아 반들반들 윤기를 내며 말한다 ;
내가 존재하는 이유는 남기기 위해서라고...
그리고 벌써 가물거리는 당간지주가 하얗게 빛을 내며 말한다 ;
있음에도 모르고 잊혀지면 어떠냐고...
허탈해지기도 하고 개운하기도 하고... 이제야 조금 알듯 말듯...
참 벅차고, 묘하며, 뻐근했던 만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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