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충청도 여행...

영동 영국사> 작고 앙증맞은 유물들이 만든, 넓고 깊은 공간...1303

 

 

 

 

 

1.

 

 

세월의 묵은 때를 벗지 못했을 때,

이 돌들은 마냥 작고 초라하게 보였을지 모른다.

깊은 산속, 양지 바른 너른 터에 오롯이 원형을 간직하고 있을 뿐,

왜소하고 낮게 자신만의 형태에 만족하고 말았을지 모른다.

여기저기 흩어져 함께 읽히지 못했을 때,

이 유물들은 움추러드는 마음의 가벼운 초상화로 남았을지도 모른다.

영동 천태산 영국사의 석조 유물들 이야기다.

 

 

<영국사 승탑... 작고 앙증맞게 생긴 이 승탑은, 북에서 내려온 천태산의 작은 봉우리에 앉아 남, 동, 서쪽의 모든 빛을 받는 양지바른 곳을 바라보고 있다... 자태가 완벽하진 않지만, 자리한 그 곳은 탐이 난다...^^>

 

 

 

 

불과 얼마전까지 이들은 검푸른 이끼속에 숨은 회색빛 화강암으로만 보였겠지.

시간의 흔적을 털어내고 부드러운 아이보리 속살을 드러낼 때까지...

무언가 얻으려고 비치려고 읽으려고 다가설 때까지 이들은 시대의 흔적에 불과했겠지.

자극 받으려는 그 마음까지 잊어버리고 이유없이 그들을 바라보기 전까지는...

가까이서 하나의 공간을 장엄하기 위해 모여 있었다면 그들은 시간의 부산물에 다름없었겠지.

발품을 팔고 찾는 수고로움 속에서 내 마음의 삼각 꼭지점을 찍기 전까지는...

그들은 작게 만들어서, 이제야 때를 벗고, 따로 떨어져 있어 하나로 완성됐다.

 

 

<영국사 삼층석탑... 눈높이를 맞추면 여린 소녀처럼 보이지만, 이렇게 조금이라도 내려보려 올라서면 헌원한 장부의 본색도 갖추고 있어, 묘하게 재미를 느끼게 하는 탑이다... 가냘픈 몸돌들은 눈에 거슬리지만, 의젓하게 버티고 있는 지붕돌들이 유난히 맘에 든다...>

 

 

 

삼층석탑이 두기, 승탑과 부도비, 4기 모두가 보물이란다.

영국사 서남쪽 200m 떨어진 곳에 있는 보물 532호, 아담한 고려시대 팔각원당형 승탑과

영국사 대웅전 앞에 있는 보물 533호, 단정하고 여린 신라말기 삼층석탑,

그 중간쯤, 1180년에 우락부락 기형적으로 세운 원각국사 부도비가 보물 534호고,

주차장 앞, 수령이 최소 5백년에서 천년 정도 된 천연기념물 223호, 거대한 은행나무 앞을 지나

삼단폭포을 내려다보며 영국사 남동쪽으로 500여m를 올라가면 보물 535호 망탑봉 삼층석탑이 있다.

 

 

<망탑봉 삼층석탑... 다양한 시각마다 변화하는데 요기조기 뜯어볼 구석들이 많은 탑이다... 너른 터와 탁 트인 조망을 갖췄으면서도 군림하려거나 뽐내지 않은 겸손이 오히려 맘에 든다... 요 탑이 이렇게 맘에 드는 건, 생김새보다 주변에 어우러지면서도 나대지 않으려는 차분함이 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한기도 아닌 보물 4점이나 있는데도 굳이 이곳으로의 여정을 서두르지 않았다.

대각국사 의천이 중창하면서, 절이름은 국청사로, 산이름은 지륵산에서 천태산으로 바꾸었고,

1360년쯤 홍건적의 난을 피해 공민왕 다년간 이후 영국사란 이름으로 개칭했으며,

충북의 설악이라 자랑할만큼 높지 않지만 암릉과 계곡이 어우러진 풍광을 간직하고 있는 곳...

이 정도면 자연경관과 문화유적이 어우러져 쏠쏠하면서 꽉 찬 이야기가 만들어질만 한 곳인데

지금까지 발걸음을 재촉하지 않았던 건 작아 보였기 때문, 극적이지 않게 느껴졌기 때문이리라.

 

 

<영국사와 은행나무... 만약 내가 이 절에 들어선게 아침이었거나 정오쯤이었다면 나의 눈맛은 훨씬 시원했을 것이다... 이미 해가 저무는 시간의 역광은 빛을 빼앗아 버리기 때문이다... 그런 눈맛은 다음으로 미룰 수밖에...>

 

 

 

답사여행을 시작한 첫 걸음은 감동스러워야 했다. 우리들 첫 꿈이 그러하듯이...

장중하고, 울림이 크고, 완벽하며, 유명하고, 사춘기의 어린 시절처럼 화려하지 않으면 차지 않았다.

차츰 하나하나가 채워지면서 허전해지는 마음이 더 커지고, 예와 술의 궁극을 지녀야만 했다.

돌을 다듬는 석공의 손길이 느껴지고, 그 석공이 존재했던 시대가 느껴지고,

그리고 그 시대가 원하던 사상과 문화와 현실이 내 손과 내 눈과 내 맘을 통해 해석되길 원했다.

그랬으니 영국사의 보물이 몇 개였든, 예전엔 그게 내 욕구를 채울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것들은 너무 아담했고, 나를 매혹할만큼 충분히 매력적이지 않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국사 동종... 대웅전이 만들어질 때쯤 같이 조성된 게 아닌가 싶다... 범어와 횡선이 같이 있는 걸 보면 1600년대 전후일지 모르겠는데, 용뉴를 보면 1700년대 이후의 제작품일지도 모르겠다...>

<영국사 석조... 양지바른 동향으로 자리를 잡은 곳이지만, 영국사 주변은 상당히 습한 곳이라는 생각이 든다... 물론 배수가 잘 되어 이만큼 남아있겠지만, 영국사는 전란이나 화마보다는 물 때문에 많은 변화가 있었지 않았을까 생각해 봤다... 습하면 음기가 강하다는 말일까? 그럼 여성들이 더 좋아할까? 남성들이 더 좋아할까?^^>

 

 

 

 

 

 

2.

 

 

이제 이런저런 이유로 비켜가고 스쳐가던 대전을 지나 영동땅 소백산맥 옆자락에 묻힌 영국사를 찾았다.

특별한 기대없이, 대전/옥천/영동 지방을 유람삼아, 산에도 오르면서 한시름 놓고 싶은 마음에.

속리산 아래 보은군도 그렇지만, 옥천/영동/금산군은 천태산을 중심으로 삼각을 이루며 산속에 자리잡았다.

그 속에서도 영동군 영국사를 찾아가는 길은 충분히 깊고 깊은 오지에 해당될 수 있는 지역이었다.

일제강점기, 대전이란 교통 요충지가 개발되기 전, 공주보다 황악산을 넘어 김천이 생활권에 가까웠겠지.

무얼 먹고 살았을까? 무얼 보고 살았을까? 저 산너머 들판과 바다는 이곳에 사는 그들에겐 傳說이었을까?

 

 

<천태산 주변 지도... 너무 작게 나와 쉽게 가늠되지 않지만, 지도를 키워보면 백두대간 소백산맥에서 금남정맥이 나뉘는 곳이 상당히 두텁게 산악지역으로 이뤄짐을 읽을 수 있다... 그 가운데 천태산이 있고, 시계방향으로 옥천 - 영동 - 무주 - 금산이 자리하고 있다...> 

<영국사 대웅전... 조선 중후기라는데 나는 1700년대 초중반 건축으로 보고 있다... 팔작지붕은 지붕이 가벼워 보일수록, 맛배지붕은 지붕이 무거워 보일수록 맛이 살아나는 거 아닌가?... 그래서 대웅전 처마가 좌우양쪽으로 조금더(최소 30cm) 펼쳐졌으면 좋았으리란 생각을 해 본다... 정면에서는 균형잡혀 보이지만, 전체적 느낌은 아쉬웠다...>

 

 

 

백제와 신라가 만나고, 고려와 후백제가 만나 격전을 치뤘겠지만, 아무래도 전장의 중심이 되기엔 좁은 곳.

그래서 그런지 이곳은 문화충돌을 통해 교류와 회전이 빈번히 일어나기 힘들었던 곳이란 생각이 든다.

게다가 산속분지의 자연환경의 한계는 이곳에 머무는 이들에게 충분한 풍요와 안식도 주지 못했을 터.

그래서 역사도 정치도 경제도 이 지역들은 피해가며, 느긋한 시간을 벗삼은 이들에게만 짧은 문을 열었겠다.

그 잘잘한 풍경들이 모여 비경으로 구전되고, 순간순간의 웃음이 환희로 노래되어지니

그게 머물면서도 머문 이유를 답할 필요가 없는 고향의 향수를 만들고 시인을 만들어 낸 게 아닐까?

“ 향수 ”의 시인, 정지용이 옥천사람 이란다.

 

 

넓은 벌 동쪽 끝으로/ 옛이야기 지줄대는 실개천이 회돌아 나가고/

얼룩백이 황소가/ 해설피 금빛 게으른 울음을 우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질화로에 재가 식어지면/ 뷔인 밭에 밤바람 소리 말을 달리고/

엷은 조름에 겨운 늙으신 아버지가/ 짚벼개를 돋아 고이시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흙에서 자란 내 마음/ 파아란 하늘 빛이 그립어/

함부로 쏜 활살을 찾으려/ 풀섶 이슬에 함추름 휘적시든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傳說바다에 춤추는 밤물결 같은/ 검은 귀밑머리 날리는 어린 누의와/

사철 발벗은 안해가/ 따가운 해ㅅ살을 등에 지고 이삭 줏던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하늘에는 석근 별/ 알 수도 없는 모래성으로 발을 옮기고/

서리 까마귀 우지짖고 지나가는 초라한 집웅/ 흐릿한 불빛에 돌아 앉어 도란도란거리는 곳/

그곳이 참하 꿈엔들 잊힐리야.

 

읊조리는 것만으로 아득한 풍경...

눈을 감고 듣는 것만으로도 눈물이 뚝뚝 떨어질 것 같은 정경...

누구나 저마다의 감성과 추억으로 그리고 상상하며 꿈꾸다 깨어나도 지워지지 않는 그곳...

금강이 휘돌아 나가는 옥천과 영동이 그런 곳이다.

 

 

꼭 그만큼만 열린, 그래서 갇혀 있는 곳이 이 지방이고 영국사에서 느끼는 기운이 아닐까?

오늘 조심스레 탐미했던 석탑과 승탑, 하나하나의 유적들이 그렇다.

작아서 훼손될 필요가 없고, 좋지만 가져 갈 이유가 없고, 아쉬워 다시 만들기엔 어딘가 아까운...

영국사 오르는 길, 깊고 깊은 곳에 차를 끌고 가면서 그 지형과 공간에 유물들을 짜맞추는 건 아니지만

완성도가 떨어지는 것도, 신선한 변형이 없는 것도 아니면서 자극적이지 않는 그들의 형태가 편안했다.

그래서 지금까지 온전히 남아 있을게야... 그러니 누군가가 손을 댔어도 철저히 파괴할 필요가 없었겠지...

이념에 의한 훼손도, 전장속의 파괴도, 자본의 탐욕도 피해가며 용케 원형을 유지한 그들이 대견한가?

작고 굽은 나무들이 산을 지킨다는 아이러니가 유물들에도 해당했을 거란 생각이 공간의 한계로 이어졌다.

 

 

<영국사 경내... 가람배치를 느끼기엔 너무 허전하고, 영국사가 자리를 잡으려면 빈 공간에 건물을 채울 것이 아니라, 조금 더 넓게 산재된 건축을 유기적으로 연결하는 게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삼각형도 그려봤지만...^^>

 

 

 

 

 

 

3.

 

 

그래도 하나하나가 건실하다.

영국사 대웅전 앞을 지키고 있는 삼층석탑...

높이 3.2m 크기의 작은 석탑인데다 일층 몸돌이 지나치게 얇아, 여리고 가볍게 보인다.

그러나 지붕돌 하나하나는 탄탄하고 정연한 신라의 기운을 충실히 계승했다.

탑신을 받치는 기단부의 판석은 청량사 판석처럼 조금씩 귀솟음을 두어 경쾌함과 발람함도 살렸다.

상층 기단부 면석을 꽉 채운 안상을 다듬은 솜씨나 몸돌 기둥을 모각한 솜씨는 섬세하면서도 세련됐다.

아마도 노반이 살아있고, 아직도 보관하고 있다는 상륜부가 온전히 세워진다면 탑의 미감은 달랐을 것이다.

가늘고 엷음 속에서도 흐트러지지 않는 단정함과 굳건한 힘을 뽐내고 있으니 약하지만은 않게 보인다.

 

 

 

 

<영국사 삼층석탑 부분... 기단부 판석을 자세히보면 모서리 부분이 버선코 처럼 살짝 들려 있음을 느끼게 된다... 석공의 눈썰미와 장단이 흥겹게 느껴질 정도로... 이 탑을 복원하면서 이쪽 면석이 정면을 향했으면 어땠을까 생각해 봤다... 그럼 더 안정적으로 보였을텐데...>

<만약 이 탑에 노반을 다시 살리고, 상륜부가 제대로 복원된다면 어땠을까? 노반은 없지만 상륜부 부재들은 제대로 남아있다는데 말이다... 전혀 다른 미감에 많은 사랑을 받지 않았을까??>

 

 

 

영국사 남쪽, 경내를 벗어나 조그마한 언덕빼기에 남쪽을 향했는지, 동쪽을 향하는지 모를 영국사 승탑...

이건 지금까지 내가 봐온 승탑 중에 가장 아담하고 작은 부도탑이 아닐까 싶은데, 높이가 1.8m다.

어지간히 건장한 청년들의 늘씬하거나 다부진 몸매를 생각하고 싶지만, 이건 작고 귀엽게만 느껴진다.

물론 승탑의 중심이라 할 몸돌이 너무 작고 아담해 그런 느낌이 더더욱 부각될 수밖에 없지만,

돌 하나하나를 다듬은 능숙함과 섬세함, 그리고 정연한 기풍은 결코 영국사 삼층석탑에 떨어지지 않는다.

작지만 부족하지 않고, 낮지만 꽉찬 느낌. 세상에 저런 크기로 이렇게 편안한 느낌을 주는 게 가능할까?

아담하고 깜찍한 크기임에도 불구하고, 역시 단정함과 위축되지 않는 기운이 있어 결코 가볍지만은 않다.

 

 

 

<승탑 상부... 지붕돌 낙수면의 경사가 크고, 충분히 넓지 못하다... 물론 그건 너무 얇게 만들어진 몸돌 때문이겠지... 이 승탑의 전체적인 미감은 자연스럽게 위쪽에 의해 좌우될 수밖에 없다... 아쉬운 점...>

<승탑 하부... 이쪽만 본다면 전혀 나무랄데 없이 균형과 비례를 잘 맞추고 있음을 느끼게 된다... 들어간 공력도 만만치 않게 느껴지고...>

<영국사 승탑... 저 상륜부가 제 짝일까 잠시 고민했지만, 그래도 전반적으로 균형과 비례도 잘 잡혀 있다...>

 

 

 

다시 영국사 동남쪽, 경내를 완전히 벗어나 망탑봉이란 작은 봉우리 꼭대기에 조심스레 서 있는 삼층석탑.

그렇지만 그 탑이 서 있는 곳은 좁지 않은 망탑봉 암릉 위에서 사방을 조망할 수 있는 제법 너른 터다.

시원하다 말하기엔 완전히 트여 있지 않고, 낮다고 말하기엔 충분히 하늘과 맞닿은 곳,

고래 얼굴의 커다란 바위를 하층 기단부 삼아, 영국사에 오르내리는 길목을 지키는 등대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이 탑역시 높이 3m 정도의 여리고 가는, 그리고 삼단 몸돌이 완전히 사다리꼴을 갖춘 작은 석탑이다.

후우~ 이만한 정성과 공력인데도 이렇게 원시적인 형상의 사다리꼴 석탑으로 만들 생각은 누가했을까?

가느다란 몸매에 굳센 기운과 당당함은 없어도 그 너른 공간을 호위하는데 넘치지도 부족하지도 않다.

 

 

 

 

<망탑봉 삼층석탑...자연석에 역시 자연스럽게 기단부를 파내고 삼층석탑을 조성했다... 재밌는 모습... 귀여운가?^^>

 

<바람... 이 묘한 매력의 형상과 주변이 어우러지니 바람이 만들어진다... 한동안 머물렀다...^^>

 

 

 

 

4.

 

 

그러고보니 영국사 승탑과 망탑봉 석탑은 너무 떨어져 있다.

게다가 영국사 경내의 삼층석탑도 본래 절 뒤쪽에 쓰러져 있던 것을 100여m 옮겨 세웠다하니

갑자기 머릿속에서는 커다란 삼각형이 하나 그려진다.

깊고 좁고 높은 곳... 하나하나를 작게 만들어 커다란 공간을 포획하는 곳... 그 장치들이 아니었을까?

망탑봉 삼층석탑은 도리천에 오르는 이정표가 되고, 도리천에 들어서면 영국사 삼층석탑이 보인다.

다시 영국사를 나서며 자신을 돌이켜볼때쯤 영국사 승탑이 보인다면 가장 완전한 구도가 되지 않을까?

고만고만한 크기에, 검푸른 돌이끼를 걷어낸 석질까지 비슷하게 보여 의도적이지 않았나 하는 생각도 든다.

 

 

<현재의 석탑을 내 맘대로 옮겨 봤다... 물론 100m 란 기록이 있기는 하지만 너무 억지춘향처럼 보이는가?>

<먼저 대웅전 뒤편에 이런 석단이 남아 있는 걸 보면, 현재 대웅전이 제 위치만은 아니었으리라 생각한다... 나는 여전히 물... 물난리에 의한 파괴와 변화가 있었으리라 추측하는데, 아무튼 현재의 영역과 과거의 경계는 완전히 달랐다고 생각된다...>

<또 지도에서 보면 현재 영국사 북쪽으로 절집이 올라가기 쉽지 않겠다는 생각을 할 수 있는데, 그 부분이 이 사진의 오른쪽 민가들이 있는 곳이다... 결코 불가능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게 내 생각...^^ 물론 그곳은 현재의 영국사보다 더 낮은 곳... 만약 물줄기가 있었다면 먼저 훼손되기 쉬울거라는 이야기... 그래서 영국사 삼층석탑은 무너져 있었던 것이 아닐까?>

 

 

 

물론 나는 이 세 개(부도비를 포함하면 4기)의 석물이 동시대에 한꺼번에 조성되었다고 생각하지는 않는다.

처음에 영국사 삼층석탑이 세워지고, 다시 승탑이 만들어지고, 마지막에 망탑봉 석탑이 세워진 게 아닐까?

영국사 삼층석탑은 양식적인 면에서 아무리 늦게 잡아도 신라말 고려초에 해당하는 900년대 초반이다.

그렇다면 조성시기가 분명한 부도비를 빼고, 영국사 승탑과 망탑봉 석탑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먼저 안내문처럼 영국사 승탑이 1180년경 원국국사 부도비와 같이 만들어졌다는 생각에 나는 반대한다.

 

 

 

<영국사 원각국사비... 국사란 칭호를 논하다면 아쉬움이 많은 귀부와 이수다...>

<원각국사비 위쪽에는 석종형과 원형 승탑이 넓직한 공간들을 차지하고 있다...>

 

 

 

첫 번째 이유는 이렇게 세련된 승탑을 만든이가 원각국사 부도 귀부와 이수를 그렇게 만들 수는 없는 법.

(사실 원각국사 부도비가 보물로 지정될 수 있었던 건, 공예적 예술성과 완성도가 높아서라기보다

비문의 사료적 가치가 크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게다가 1180년대 전후에 만들어진 거돈사 원공국사, 법천사 지광국사, 대각암 승탑과 전혀 관련이 없다.

오히려 양식적으로는 울산 망해사지 승탑과 동화사에 있는 대구 도학동 승탑과 비슷하지 않나 생각되는데,

하층 기단부를 복련 없이 층급받침으로 깎아 마무리하고, 중대석에 안상이 새겨진 점들을 고려하면

가장 초기 부도의 원형이나 다름없는 염거화상 승탑의 양식을 가장 충실히 계승했다고 생각된다.

또한 영국사 석탑과 승탑의 안상을 새긴 수법이 비슷하고, 기단부에 비해 지나치게 좁은 몸돌을 고려하면

영국사 승탑의 조성시기는 원각국사 부도비와 비슷한 게 아니라, 석탑과 동시기에 조성되었을 수도 있다.

 

<염거화상 승탑... 지붕돌의 낙수면 경사와 넓이, 그리고 몸돌의 볼륨의 차이 때문에 다르게 보이지만, 영국사 승탑은 다른 승탑들에 비해 가장 비슷한 양식을 갖추고 있다...>

<저기 상대석 앙련과 가장 비슷한 걸 찾아보니, 관룡사 약사적 석불좌상이 조금 유사했던 듯... 이것도 억지겠지?^^>

 

 

 

 

그렇다면 망탑봉 삼층석탑 조성시기는 어떻게 될까?

먼저 영국사 삼층석탑과 망탑봉 삼층석탑은 양식상의 차이와 완성도에서 차이가 나는 건 분명하다.

지붕돌을 깎아낸 솜씨나 몸돌을 다듬고 판석을 올린 걸 보면, 영국사가 수준도 높고 시기적으로 이르다.

또한 얇게 깎은 문비를 비교하면 영국사 석탑은 기준에 충실하다면, 망탑봉 몸돌은 단순하지만 장식적이다.

특히 완성도를 결정하는 건 지붕돌 층급받침의 정연함과 낙수면과 층급받침이 만나는 전각, 모서리인데

영국사 석탑 지붕돌이 엄정하면서도 경쾌함과 탄탄함을 가졌다면, 망탑봉 석탑 지붕돌은 상당히 형식적이다.

그렇다고 1100년대 고려 특유의 과장된 곡선과 얇아진 지붕돌, 두꺼워진 기단부 판석이 아닌 걸보면

아무리 늦게 잡아도 1000년대를 넘지 않는다고 생각되고, 결국 승탑과 그리 오래 떨어진 시기는 아닐듯.

 

 

<지붕돌들에 조금만 더 정연한 기운이 스며들었다면 훨씬 인상적이었을 거라는 생각이 많이 들었다...>

<물론 이것만으로도 충분히 만족스럽기도 하지만...>

 

 

 

 

 

5.

 

 

사실 내가 주목한 것은 이 망탑봉 삼층석탑이었다.

하나는 삼층석탑 중 유일하게 1, 2, 3층 몸돌이 모두 사다리꼴로 다듬어져 만들어진 형태라는 점이고,

또 하나는 석탑이 자리한 위치 때문이었는데, 탑이 그곳에 있어 이 영국사가 완성됐다고 보기 때문이다.

공민왕에 의해 영국사로 불리고, 대각국사 의천에 의해 국청사로 불리기 전에도 다른 이름이 있을 것...

천태종 개창조 의천이 산이름까지 천태산으로 바꿨다면, 현재 천태종 총본산인 단양 소백산 구인사만큼

이곳 지륵산 절도 의미가 있었을 터... (그러고보면 이 영국사도 구인사만큼 깊고 높게 올라간 절이다)

그때는 일주문, 천왕문, 불이문 등 산사가 갖춰야할 삼문의 구조도 모두 갖추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불경에도 조예가 깊었을 용의자X는 신들의 세상이나 다름없는 도리천을 완성하기 위한 장치를 고심했겠지.

 

 

<망탑봉 삼층석탑 주변... 공기돌 같은 바위도 있고, 상어나 고래 같은 흔들바위도 있고... 좁지 않은 곳이 있어 편안했던 곳...>

 

 

영국사에 머물던 용의자X는 영국사와 승탑의 위치에 조응한 곳을 찾아 많은 발품을 팔았을 것이다.

천태산으로 오르는 더 높은 곳을 찾기도 했을 것이고, 아래쪽 삼단폭포와 진주폭포에도 가봤을 것이다.

그리고 선택한 곳이 바로 이곳 망탑봉... 제법 너른터에 탄탄한 바위지형과 시원한 조망도 갖췄다.

멀리서 탑이 보여 망탑봉이 되었는지, 탑이 망을 보고 있기에 망탑봉이 되었는지 모르지만,

분명한 것은 이 탑에 오르면 천태산으로 오르고 내리는 모든 사람들에게 이정표가 될 수 있다는 점...

게다가 주변에 나무가 없었다면 천태산을 비롯해 영국사까지 한번에 조망할 수 있는 장점이 있다.

 

 

 

 

 

그러나 이 탑이 중심이 될 수는 없다. 어디까지나 영국사 경계를 드러내는 등대 역할로 만족해야 한다.

게다가 이곳은 과시와 군림을 위해 조성된 원찰이 아닌, 수도와 은둔... 즉 수양의 공간이 아닌가.

세속으로부터 충분히 떨어져 드나들기 쉽지 않고, 호연지기를 취하기엔 충분히 높지 않고 감춰진 곳이다.

시대의 여력이 받춰주지 못해 장중한 무엇을 만들지 못한 것도 있지만, 이곳은 낮고 작은 게 어울린다.

경계없는 공간에 삼각형으로 마음의 선을 그었지만, 혼자의 마음을 꽉 채울만큼 좁은 공간도 아니다.

좁지 않은 영역, 충분히 힘들게 올라 온 공간에 거대한, 웅장한, 위압적인 무엇을 세울 필요는 이미 없다.

어쩌면 용의자X는 꼭 그만큼의 크기와 만족의 상태에서 영국사 영역을 완성시키니 그게 망탑봉 석탑이다.

 

 

 

<난 이 기단석을 이루는 바위를 보면서 새끼 고래를 생각했든데, 안내문을 보니 엉뚱하게 다른 바위였다...^^>

<바로 흔들바위의 주인공... 고래라고 하는데 상어 같지 않나? 오른쪽을 보면 가오리 같고...^^> 

 

 

 

짧은 거리임에도 헥헥거리며 망탑봉에 올라서서 이곳에 탑을 세운 용의자X를 그려봤다.

그가 세우고 채우고 완성하고자 했던 영국사란 무슨 의미였을까? 그의 삶, 그의 생각, 그의 꿈이었을까?

드러나지 않은, 크지 않은 흔적, 그러나 누구나 접해본다면 쉽게 잊을 수 없는 작지 않은 존재...

그가 들을 수 있었던 가장 오래된 과거와 그가 상상할 수 있는 가장 먼 미래의 사람들을 생각했을까?

아니면 그가 겪었던 가장 복잡다단한 관계와 평탄했거나 기복이 심한 경험들을 녹여내야 했을까?

웃으면서 돌을 깎았을까? 들뜬 마음을 달래면서 돌을 쪼았을까? 아니면 모든 걸 잊기 위해 돌을 갈았을까?

결코 극적이지 않은, 결코 완벽하지 않은, 결코 세련되지 않은 그런 석탑이 완성되고, 영국사도 완성됐다.

 

 

 

 

 

 

 

6.

 

 

생각해보면 탑의 상승감을 살린다고 삼단의 몸돌을 사다리꼴로 다듬은 사람은 아무도 없다.

이전에도 없었고, 현재까지 없으며,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리고 굳이 사다리꼴로 만들지 않아도, 밑에서 올려보고 멀리서 바라보면 자연스럽게 사다리꼴이 된다.

이걸 몰랐을까? 내 생각에 용의자X는 이미 충분히 알았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왜냐하면, 그는 몸돌들은 사다리꼴로 만들었지만, 지붕돌의 체감과 비례는 정상적으로 쌓아 올렸다.

만약 그가 사다리꼴로 좁아진 몸돌의 넓이와 부피에 맞춰 지붕돌을 지금보다 좁고 작게 만들었다면???

아마도 황당한 모습이 되고 말았을 것이다... 상상하기 싫을 정도로 망가진...

그런 모든 걸 감안하면, 기형적인 석탑이 이곳에만은 잘 어울리는 석탑이 되었다면 대단한 반전이다.

 

 

<완벽한 사다리꼴이지? 어느 누가 이런 상상을 했을 수 있을까? 정림사탑 종이접기 시리즈에 탑신을 이렇게 사다리꼴로 제작한 게 있는데, 그렇다면 이런 상상은 가장 원시적이며 초보적이라는 이야기... 그리고 내가 놀란 건, 그런 원시적이고 초보적인 상상을 실제로 만들어낸 이가 정말 존경스럽게 보였다는 점... 우리는 그래서 못하는 거 아닌가 하는...ㅎㅎㅎ>

 

 

 

 

자연석 기반을 다듬어 기단부를 만들고 그위로 하나씩 쌓아올린 탑은 영국사란 도리천의 이정표가 됐다.

보일듯 말듯, 있는듯 없는듯, 인위적으로 가공한듯 그렇지 않은듯 그렇게 그 자리의 주인이 된 것이다.

넓은 터에 비하면 너무 작게, 높은 곳에 비하면 너무 낮게, 천태산을 생각하면 너무 아담하게 말이다.

그러면서도 도장을 찍은 듯 의연하고, 하늘과 산에 어울려 초라하지 않고, 멀리서 바라봐도 흔들리지 않게,

깊고 깊은 곳, 쉽게 눈에 틔지 않은 곳임에도 정성스럽고 주변과 조화롭게 서있는게 대견하기까지 하다.

 

 

 

 

 

 

 

 

 

살다보면 극적이고 화려하고 나를 위축시키는 것들에 먼저 반응하는 게 우리들 심사일지도 모르겠다.

조금더 극적이었으면, 조금더 확연하게 드러났으면, 나를 잊을만큼 장중해버렸으면 하는 마음들...

어쩌면 영국사 망탑봉 삼층석탑은 그런 의도들에서 조금씩 하나씩 벗어났기에 자연스럽고 편안하다.

조금은 부족한듯, 조금은 아쉬운듯, 충분히 만족스럽거나 공감하기도 어렵지만 거부하기도 쉽지 않은...

그렇게 생각하면 이곳에 있는 영국사 삼층석탑이나 승탑 역시 그런 느낌을 벗어나지 않는다.

아쉬운만큼 차분하게, 아담함만큼 단아하게, 소담스러운만큼 의젓하게 그렇게 세월을 비켜서 있다.

 

 

<내가 찾아간 시간이 문제였지, 모든 유물들이 볕과 바람에 온전히 노출되어 있다는 점이 맘에 들었다... 예전 자료들을 보니 작년이나 재작년쯤 말끔히 때를 벗은 거 같은데, 그래서 더 친숙하게 느껴졌다면 내가 이상한가?... 때가 세월의 연륜을 느끼게도 만들지만, 이렇게 시원하게 때를 벗어버리면 오히려 돌 건강에 훨씬 좋을 거라는 게 내 생각이다... 다시 천년을 버틸 수 있을테니까...^^> 

 

 

 

 

 

너무 작고 깜찍한 이들이 한꺼번에 느껴질 때, 영국사의 기운은 살아 움직이기 시작하는지도 모르겠다.

그런 크기와 그런 모습들이 어쩌면 천태산을 더 깊고 높게, 그리고 우리들 자신을 편안하게 만드는 건지도.

그래서 그들은 천태산과 우리들 마음과 조화를 이루면서 완성되어가는 게 아닐까 생각된다.

부족한만큼 채워야할 무엇이 생성되고, 아쉬운만큼 감싸줘야할 무엇이 형성되고, 나를 돌아보게 만드는...

뿔뿔히 흩어져 너른 공간에 점처럼 하나씩 숨어있는 작은 보석들...

그 모든 걸 하나로 묶어 영국사를 느끼고, 영동지방을 생각하며, 천태산 주변에 마음을 열어본다.

향수란 시도 그렇게 만들어졌으리라. 존재란 것도 그렇게 남는 것이리라. 문화란 것도 그렇게 완성될 거고...

가장 앙증맞은 크기와 깜찍한 포스에 잠시나마 바람을 접할 수 있다면, 영국사는 부족함이 없는 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