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제부턴가 ‘시간’의 의미를 강조하게 됐다.
‘공간’만큼 다양한 변화가 없이 한 방향의 직진성(시간은 앞으로만 간다!)만 갖추고 있고,
‘관계’만큼 복잡한 네트워크가 없이 단순하게 앞뒤로만 해석(시간엔 좌우가 없다!)되기 때문일까?
어쩌면 공간보다 변화무쌍한 카테고리를 갖춰 해부 불가능하고,
관계보다 다양다기한 통로가 열려있어 접근 불가한 영역이 ‘시간’일텐데,
언제부턴가 공간과 관계에 천착할수록 시간의 비중이 커감을 부정할 수 없게 되었다.
<사진은 가끔 시간을 멈추게 한다...>
여전히 내게는 유효한 변하지 않는 가치, 혹은 절대불변의 진리라는 개념이 희석되고 잊혀지고 있지만
아무래도 공간과 관계란 카테고리를 통해 가치를 쫓으려면 ‘시점’이 부각되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허허로운 공간이 꽉 차게 느껴질 수 있는 것도 시간의 유혹이고,
서먹서먹한 관계가 감미롭게 변할 수 있는 것도 시간의 매력일터...
호불호, 시시비비, 선후경중의 변화도 결국은 시간의 농간일까?
아니면 시간은 ‘타이밍’이란 영역에서 공간과 관계에 무량한 관점과 깊이로 살아나기 때문일까??
결국 타이밍은 공간과 관계에 생명력을 불어넣고 변화를 도모하는 시간의 결빙이자 완성태인지도 모르겠다.
<서 있는 곳이 다르면 마음가짐도 달라지고...>
십수년만에 논산 관촉사에 머물며 다시 바라보는 은진미륵과 석등, 그리고 경내...
얼마전 천흥사지 당간지주를 보며, 시간나면 다시 느껴보리라 생각했던 관촉사에 들러
예전 생각하고 봤던 느낌과 사뭇 달라진 감상에 무엇이 변했는가 스스로 물으며 시간과 타이밍을 생각했다.
이층 전각이 하나 더 들어서있고, 진입하는 길에 유쾌하지 않은 돌계단이 늘었을 뿐인데
나는 오늘에서야 달라진 느낌의 은진미륵을 바라보고, 멀리 황산벌을 응시하게 되었다.
그리고 이미 해부 돼버린 석등과 석탑을 확인차원에서 설명하지만, 또
그럼으로 인해 편해지고 스산하지만 너그럽게 다가오는 느낌의 변화에 이제야 마음이 열림을 느낀다.
<관촉사를 다시 찾은 건 관촉사와 화엄사 석등을 다시 비교해보고픈 맘이 컸었다... 핀이 맞지 않아서 아쉽다...>
내가, 내 관점과 준비와 수준에서 채울만큼 채웠기에 보이는 변화일 수도 있고,
내가 알만큼 알았다고 자족했기에 다시금 깨지고 틀이 넓어진 것일 수도 있겠지만,
어쩌면 과거의 욕망과 목표에 가려졌던 것들이 이제야 벗겨지고 드러난 건 아닐까?
내 마음의 장막이 걷어진 건지, 무대의 장막이 걷어진 건지 어리석은 말장난을 하고 싶진 않지만,
변하지 않은 공간과 유물들에서 또 다시 변하게 될 내 마음을 지금 기록하는 이유까지 회의하면서도,
지금 남겨 놓지 않으면 그 흔적마저 추억할 수 없음을 경험했기에, 이 타이밍에 나는 연연해하고 있다.
관촉사를 만든 이들 스스로 생각했을 한계와 완성의 경계를 느끼려는 의도와 함께
또 다시 이만한 시간이 흐른 다음의 나를 돌이켜보기 위해서 말이다...
<관촉사 석등... 지붕돌의 낙수면을 얼마나 과장되게 파냈는지, 눈만 쌓이는 것이 아니라 물도 고인다... 그럼에도 천년을 버텨왔다는 게...^^>
<석등 앙련... 크다고 해서 디테일이 떨어지지 않는다... 층급받침이나 괴임, 하나하나도 격식에 맞고 꼼꼼하게 마무리했다... 그리고 관촉사 석등 뿐만 아니라, 고려시대 석탑과 석등의 지붕돌 전각을 보면 정확하게 직선이다... 그런데도 우리 눈에 곡선처럼 보이는 이유는, 끝부분(귀꽃의 존재와 무관하게)의 반전이 과장되어 있기 때문이다...>
<원형 간주석 사이의 장식돌... 생각해보면 꽃반지처럼 얇은 장식돌이, 석등의 전체 무게를 모두 감당하고 있음을 확인하게 된다... 아마도 가장 강도가 강한 석재를 사용했을터... 경이롭다...^^ 저 모양과 비슷한 꽃반지를 만들어보려 했는데 아직 못 만들었다...^^>
2.
오래됐지?
음~~~ 그때 미륵모텔이라는 있지 않았어? 이 근처에서 봤던 거 같은데??
미륵모텔... 그럼 석가모텔도 있고, 천당모텔, 예수모텔까지... 이름 붙이기 나름인가? ㅎㅎ
모텔이 들어서기엔 빈약한 상권이지만 모텔 이름이 주는 엉뚱함이 또 다른 상상을 불러온다.
디테일한 기억은 색시에 의존하고 전반적인 흐름은 내가 주도하는 역할분담 때문도 있지만,
생소한 모텔이름까지 기억하는 색시에 한번 놀라고, 그 독특한 이름에도 무관심한 나에 한번 더 놀라고...
색시는 모텔의 이름이 중요했고, 나는 갔는가 안 갔는가가 중요했을까?^^
<햇살이... 알아주면 잘 놀고...^^>
주차장과 일주문을 무시하고 차는 곧장 경내로 향했다. 출입금지 팻말을 살짝 비켜서...
왜 그랬냐고? 시간 때문이라 변명하면 용서 되려나?
언제부턴가 길을 나서면 아이들이 아우성친다. “ 아빠 우리 곧바로 집으로 갈꺼지?? ”
제발 집에서 쉬자는 아이들의 원성에도 불구하고 행선은 늘 갈지자를 그리기 마련...
모처럼 먼 길 나섰는데 중간 행선지가 생길 수밖에 없고, 나는 그걸 참지 못하고...
결국 골짜기에 숨어있는 보석을 찾진 못하더라도 되도록 접근하기 쉬운 이름있는 곳을 택함에도 불구하고
아이들에게 충분한 만족과 편의를 제공하지 못하고 있다. 핸들은 내 손에 있고 난 아직 욕심이 많다.
<똘똘이... 봐 주면 잘 놀고...^^ 근데 카메라를 들면 자매가 다르다... 햇살이는 아끼고 아껴 몇 장을 찍고, 똘똘이는 제자리에서 연속 셔터를 수없이 누른다...>
물론 시동이 꺼지는 순간까지 계속되는 원성도, 약간의 억지와 회유가 보태지면 잊혀지기 마련이다.
신뢰없는 타협이고 생존방식이겠지만, 이미 강제와 체념이 곁든 최면에 익숙한 아이들이라 구김은 없다.
늘 다음엔~ 다음엔~ 반복되는 약속과 다짐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굳은 항거와 몸부림도 어쩔 수 없지.
사실 내가 바라는 것도 거기까지다. 애들이 관촉사를 역사적으로 미술사적 관점에서 담을 것도 아니고,
불상과 탑과 석등, 그리고 가람배치에서 무엇을 느끼기엔 세월의 무게가 너무 좁지 않을까?
다만 함께 있었고, 작으나마 호기심이라도 생겼으면 하는 욕심에 우리 가족의 행선은 크게 변하지 않았다.
<저렇게 단정하고 고운 머리결을 가졌는지 처음... 예전엔 눈 만 봤던가?^^>
크지?! 카메라 들고 설치는 아빠는 뒷전이고 일단 풀어진 아이들은 자신들의 시간을 즐긴다.
햇살이 똘똘이의 티격태격은 반복되고, 자신들의 호기심이 채워지는 순간 지루해하는 것도 매 한가지...
고려가 어떻고, 광종이 어떻고, 당시 상황속에서 석불, 석등, 탑은 어땠다는 말은 온전히 색시의 관심일뿐.
그러나 가끔 무관심한 아이들의 시선을 통해 나는 늘 새로운 자극을 받는다.
은진미륵을 보며 햇살이 똘똘이에게 물었다. “무서워?”, “ ... ... ”
산신각에 올라서면서 다시 묻는다. “무섭지?”, “아니?”
다 돌아보고 다시 물었다. “남자 같아? 여자 같아?”, “아줌마 같아...”
<바라보는 시선과 높이가 다르면 느낌도 달라지나? 올려다 봤을 때와 눈높이를 맞출 때... 이렇게 다르다...>
생각해보면 나 역시 지금까지 고려불상에 대해, 괴기스러움, 지방호족, 완성도가 떨어지는...
그런 평가와 규정과 상황설명에 익숙해 있지만, 아무런 선입견 없이 그들을 바라보고 느끼질 못했다.
그런데 천진난만한 아이들의 시선만큼 자연스럽고 객관적인 느낌과 언어에는 가식이 깃들 이유가 없다.
허례허식으로 과장할 필요가 없고, 누구의 눈치도 상관없으며, 지식과 말주변도 의미없다. 느낌이 있을뿐...
그런 아이들의 시선에 이 은진미륵은 괴기스러운 광종의 얼굴이 아니라, 친근한 아줌마의 느낌이었다는 말.
90년대 중반에는 불상, 특히 얼굴에 필이 꽂혀 그것만 봤었고, 오늘은 석등까지 느껴보려 했었는데
산신각 오르는 계단에 서서, 주변의 논산평야와 함께 바라보이는 은진미륵은 전혀 색달랐다.
남자가 아니라 여성으로 보였던 것이다. 그것도 친숙한 아줌마의 얼굴로...
<무엇이 경배하게 만들까?... 크기일까? 느낌일까? 마음의 자세일까?>
3.
광종은 채근했을 것이다. 신라는 항복했지만 후백제는 정복의 대상, 그들은 언제든 칼을 빼들 수 있다.
그래서 논산 위쪽에 개태사를 먼저 세우고 석불 3기를 조성했지만 더 큰 위용과 권위를 과시하고 싶었겠지.
게다가 이곳은 백제 멸망시, 계백장군의 5천 기마병에 5만의 김유신이 난전을 거듭했던 황산벌이 아닌가.
차령산맥 이남의 옛 백제인들에게는 가혹했겠지만, 그들의 기를 꺾지 않고서 고려의 안정은 요원한 것.
오죽했으면 백제멸망 100년이 지나 전륜성왕을 자처했던 경덕왕은 진표율사를 통해 금산사를 도모했겠는가?
거대한 목탑과 웅장한 전작들로 위용을 떨치던 금산사만큼은 아니더라도 고려의 힘을 보여줄 필요가 있었지.
300년간 신라의 백성이었으면서도 끝내 백제의 뿌리를 잊지 못해, 신라가 위축되자마자 견훤을 중심으로
후백제의 깃발에 모인 토착민들... 그 반골들을 제압하고 다시는 고려에 저항하지 못하게 하는 힘을 말이다.
<뒷모습은 처음 본 듯... 저런 모습의 귓 볼을 어디서 봤지? 역시 개태사(↓)였다...>
그래서 누구도 감당하지 못했던 거대한 석불을 세우기로 결정하여 벌판을 굽어보는 이곳에 터를 정하고,
바위속에서 부처가 불쑥 현신하듯 평평하게 다듬어진 바닥에 솟아오른 바위를 이용, 몸체를 새겼을 것이다.
그런데 4~5m가 넘는 하반신은 세웠지만 그 위로 수인과 상호를 어떻게 인양할지 무척 많이 고민했겠지.
게다가 병풍처럼 뒤를 받치는 암벽보다는 더 높은 불상으로 서야만 폼이 날텐데 세울 방도가 없다.
이때, 늘 그렇듯 인간의 스케일을 벗어난 건축에는 신인이 나타나고 하늘의 계시가 덧붙여지기 마련...
금강산에 있던 혜명대사가 고심을 거듭하는데, 아이들이 모래사장에서 노는 걸 보고 답을 찾았단다.
결국 30여리 떨어진 곳에서 거대한 바위를 굴려와 하반신 위로 상반신과 얼굴, 그리고 보관을 얹었다.
어떻게? 원하는 만큼 모래를 쌓은 것이었다. 흙을 채워 바위를 올리고 또 모래를 채워 바위를 올리고...
<생각보다 선이 유려하지?! >
<하반신은 처음부터 이곳에 있었던 바위로... 상반신은 12~14km 떨어진 곳에서... 그래도 잘 어울렸다...>
<이렇게 보면 후덕한 사모님 같지 않나?^^>
결국 지금 병풍처럼 보이는 반야산 끝자락의 바위산 일대는 흙과 모래로 꽉 채워졌을 것이다.
그런데 흙을 채워 조각을 해가면서 부처님을 세우다보니 주변 돌산보다 얼굴이 너무 낮게 조성됐다.
다시 하반신과 상반신, 그리고 얼굴을 조각해서 만들 수는 없는 법...
그리고 넓이 3.3m의 이단으로 만들 보관을 허공에서 조각할 수도 없어 미리 만들어 놨는데...
짓궂은 아이들이 바로 옆 산에 올라 나무나 돌멩이를 던져 보관을 깨뜨릴지도 모르는데, 방법이 없을까?
상호, 즉 얼굴에서 보관까지 연결되는 부위를 길게 조성하는 방법 외엔 길이 없지 않는가...
온갖 공력을 다해 매끄럽게 다듬은 얼굴까지와는 달리 보관까지 연결되는 부위는 거칠게 다듬었다.
나발의 변형으로 봐도 좋고, 보관 밑에 착용하는 두건이나 갓이 높아졌다고 치면 용서되지 않을까?
<처음엔 이 부분이 맘에 들지 않았는데 이젠 혼자서 이해하기로 했다... 그리고 중간에 자국이 남은 곳에 풍탁같은 청동장식이 있었다면 전혀 어색하지 않고 오히려 화려하게 보였을지도 모른다...>
<이 석단은 처음부터 만들어져 있었을까?>
<절리면이라 해야 하나 뭐라 해야 하나... 사람들이 흔적을 남기는 방식은 여러가지다... 석불을 조각한 사람은 이름이 남지 않았을지 모르지만, 석불을 본 사람은 저렇게 이름을 남겼다... 당신은 마음에 남겼는가?^^>
그렇게 이곳에 세워진 관음보살은 아무도 예상하지 못한 형식으로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발과 구멍이 뻥 뚫린 귓볼은 개태사 석불들과 똑 같은 양식이었지만, 보관은 새로운 양식이다.
뒤쪽 바위 중간 중간에 많은 이름들이 새겨져 있다. 후일 밧줄을 타고 내려와 새겼을 수도 있지만
임시로 돋아둔 흙을 제거하면서 당대 이 불상을 만들었던 사람들이 호기롭게 새겼을 수도 있다.
석등과 탑도 처음부터 기획했겠지만 세워야할 불상의 크기를 가늠하기 힘들어 그들은 고심했을 것이고
결국 석등과 탑은 석불을 만들고 남은 부재로 깎기로 결정하고 뒤로 미뤄놨을지도 모르겠다.
바위를 끌어올릴 경사를 감안하면 석등과 석탑은 마지막에 위치를 조정했어야 하니까.
그런 이유로 968년 시작한 불사는 1007년까지 40여년이 걸릴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관촉사 오층석탑... 물론 4층만 남아있다...>
<기단부 판석이 넓고 흐트러져서 그렇지, 전체적인 모습은 단정하면서도 여린 모습이다...>
<배례석... 용도에 대한 설이 많지만, 나는 향로를 놓았던 곳이라는데 한표 던지기로 했다... 돋을 새김된 배례석 중 매우 활기차다고 생각한다... 여린 석탑에 자신만만한 배례석... 그렇게 관촉사는 조화를 이뤄간다...>
이렇게 반야산 서쪽 끝자락, 황산벌에서 이어진 논산평야 경계에 관촉사 관음보살이 들어섰다.
그렇지만 그 보살은 멀리 황산벌을 보지 않고 남쪽으로 시선을 고정했다.
소백산맥 너머 옛 신라인들이 두려운 게 아니라, 차령산맥을 넘을지 모를 옛 백제인을 경계하려고.
또 후백제를 세운 견훤이 만들었을지 모를 화엄사 각황전 앞의 석등만큼 큰 고려의 석등도 만들었다.
아예 백제, 신라인들이 만들던 팔각형 창을 흉내내기 싫어 독특한 이단의 사각 화사창으로 기획했다.
앉아서 세상을 관조했던 불상은 더 이상 뽄 딸 의미가 없었다. 언제든 뛰쳐나갈 입상이 필요했다.
그렇게 빛이 된 관촉사는 유행이 되었고, 충주 미륵사지를 비롯 많은 보관을 쓴 입상들이 만들어졌다.
지금의 경기도에서부터 충청도를 비롯, 전라도에 이르기까지 대부분 보살입상들은 그곳에 서있다.
<관촉사는 이런 가람배치의 모본이었을 거 같다... 주변 자연경관과 어우러저 인공이 최소화된 모습이기도...>
<이후 충주 미륵사지를 비롯, 안성 태평리, 부여 대조사, 안성 대농리, 안성 국사암, 충주 원평리, 안양 등등 많은 입상들이 만들어지고...>
<이런 유형 중, 관촉사의 이미지를 인조 석축처럼 조성하여 가장 완성도가 높은 곳이 충주 미륵사지라면, 안성 태평리는 가장 최후에 나타나는 양식이 아닐까 싶다...>
4.
오늘서야 제대로 보이는 거 같은데?
크다~ 특이하다~ 이것저것 많다...가 아니라 의외로 느낌이 좋다.
그리고 애들 말처럼 아무리 봐도 이 불상은 왕이나 장수가 아니라 아줌마 같아...
그래서 그런가 참 편안하네?!!
모처럼 가본 관촉사... 특별한 느낌이 없다 생각했던 관촉사의 느낌이 전혀 달랐다.
뭔가 경험해보지 못한 은은한 기운이 다가오는 듯 했다.
넘침도 부족함도 없지 않나?
생동감 넘치고 활달한 기운은 아니지만, 스산하거나 휑한 느낌도 전혀 없고...
한쪽 어깨가 비어 자칫 휑해질 수도 있는데 현재의 배치가 전혀 어색하지도 않고
만만한 크기가 아님에도 불구하고 주변 야산이나 돌산에 어우러진 리듬도 자연스럽고...
처음엔 저 상호 위의 거친 마감이 낯설었는데 특별히 모나거나 거추장스럽게 보이지도 않고.
차분하면서도 너그럽고, 밋밋하면서도 당당하고... 정말 뚝심 있는 아줌마 같기도 하고 말이야...^^
<오늘은 자애로운 미소도 보인다...^^>
산신각 오르는 계단에서 희뿌연 논산평야를 가로질러 멀리 황산벌을 찾아본다.
이런 조망은 어디서 느꼈지?
경주 남산 보리사나 경주 낭산 황복사지, 그리고 구미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에서 바라보던 모습 아닐까?
조금 낮기는 하지만 익산 연동리 석불좌상에서 바라다보는 조망이 지금의 느낌과 더 가깝지 않을까?
풍요의 터전을 지키면서도 그 기반을 자신의 행복으로 소유하지 못했던 많은 사람들의 염원을 담은 모습...
<경주 남산 보리사에서... 평화로운... 볕이 좋아서 였을까? >
<경주 낭산 황복사지... 마냥 편하지만은 않았던... 긴강감보다는 허허롭다는 느낌이 먼저일까?>
<선산 죽장동... 비슷한 높이, 비슷한 느낌... 평야는 풍요의 상징이기도 하지만, 전쟁의 흔적이 가장 오래 가는 곳일지도 모르겠다...>
고려시대, 계속되는 반정과 외침 속에서도 황실은 끊임없이 경기도, 충청도, 전라도에 관음보살을 세웠다.
불행하게도 그 불상을 바라보는 민초들은 그들을 끊임없이 미륵불과 미륵보살로 불렀다는 점이고...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촉사 석불입상은 차분하고 넉넉하게 그리고 수더분한 인상으로 나를 맞아줬다.
지금 나는 여전히 관촉사 관음보살을 은진미륵이라 부르며 그 어색한 몸짓을 편안하게 받아들이고 있다.
느낌이 아니라, 기운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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