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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도 여행...

성주사지 3> 왕초보자와 함께 한 답사여행 - 삼층탑과 낭혜화상 부도...1202

 

 

 

 

 

 

 

 

8.

 

 

이건 삼층탑이야... 참 튼실하고 당당해 보이지?

어느 신라 삼층탑들처럼 정연하고 단정한 디테일에, 두툼한 양감과 차분한 이미지...

사진이라도 몇장 남기고 싶은데, 외진 곳의 해는 생각보다 빨리 저물고, 산 그림자는 의외로 짙다.

 

 

<성주사지 삼층석탑들... 비교적 넓은 공간이어서 그런지 오후의 석양빛은 정말 좋다...^^>

 

성주사지 삼층탑들을 볼 때마다 드는 생각이지만, 기단부와 일층 탑신의 괴임돌이 무척 정교하다는 점이다.

가히 명품이라 부를 정도는 아니지만, 이 섬세한 디테일이 살아있어 이들은 보물 대접을 받으리라.

 

 

<성주사 중앙 삼층석탑 일층 괴임돌... 받침돌이라고도 하지?... 직선과 곡선의 절묘한 조합... 저 부드러운 곡선에 꺼뻑 죽을만하다...^^>

<이 괴임돌 양식은 삼층탑 뿐만 아니라 오층석탑에도 동일하게 적용되었다...>

 

 

생각해보면 신라 삼층탑들 중, 탑신과 기단부 괴임돌 디테일이 가장 정교하고 섬세한 게 여기 탑들이다.

이사장 말대로 돌덩이 몇 개쌓아 올려놓은 게 탑이기도 하지만, 미술사학자들은 그 하나하나를 뜯어보며

시대와 양식을 구분하고, 지붕돌, 탑신, 기단부, 괴임(받침) 등의 변화를 통해 조성시기를 파악하기도 한다.

 

 

<고선사 석탑 일층몸돌의 괴임... 감은사탑과 동시기에 만들어진 신라석탑의 전형이자 최초의 형태다... 여기 보이는 하부 곡선과 상부 직선의 형식은 신라의 원칙과 정신이 미치는 한 끝까지 살아 남는다...^^ 그리고 기단부 판석의 정교하고 예리한 마감을 보라... 손을 뻴뻔 했다...ㅋㅋ>

<석가탑 부분... 이층 몸돌과 삼층 몸돌 괴임은 이처럼 직선이 된다... 그 미묘한 디테일이 전반적인 탑의 미감에 미치는 영향력은 얼마나 될까? 또 누가 그것까지 찾아볼까? 하지만 이런 섬세한 구성과 변화가 있어 석가탑은 명품, 명작으로 우리들에게 기억되는 건 아닐런지...>

<미탄사 석탑... 이 괴임은 층급받침이 달라져도 지속적으로 유지된다... 그런데 이 미탄사 삼층탑을 보수하면서 끼워넣은 삼층몸돌의 하부에는 괴임이 선명하지 않다... 그것을 살리려면 삼층몸돌의 넓이와 높이는 조정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고, 그렇다면 탑의 미감도 크게 달라졌을지 모른다...>

 

 

처음 감은사와 고선사탑에서 정형화된 2단(곡선+직선)의 괴임은 석가탑까지 흐트러짐 없이 유지되다가,

800년대부터 신라말기까지 성주사지 탑들처럼 장식적으로 변화, 고려시대부터 신복사탑처럼 강조된다.

이런면에서보면 성주사탑 괴임돌은, 신라와 고려의 과도기 양식이면서도 가장 화려하고 세련된 작품이다.

 

 

<신복사 삼층석탑 부분... 고려시대 석탑의 특징은 고선사, 감은사, 석가탑에서 보이는 괴임이 별도의 부재로 독립하여 훨씬 강조되고 괴임돌(받침돌)로 변화 된다... 이런 경향도 한때였는지, 고려시대를 관통하는 오층석탑에서는 괴임돌의 강조가 사라지고 처마의 곡선이 유난히 강조되거나, 몸돌에 비해 지붕돌이 훨씬 좁아진다... >

<신복사지 삼층석탑... 신라시대 석탑에 비해 훨씬 장식적이고 화려해진 모습... 그러나 그 비례와 전체적인 조화를 잃으면 아주 멀쓱해진다...^^>

<그 대표적인 예가 만복사지 오층탑이 아닐지...>

  

<담양 읍내리 오층석탑... 물론 이렇게 담백하면서도 세련된 비례로 적용된 사례도 있고...^^> 

 

 

 

동일한 양식과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이 탑들은 처음부터 이곳에 이 상태로 있었을까?

성주사의 규모로 볼 때 당연히 있어야 할 부도와 사적비 등이 발견되지 않아, 이 탑들이 그 변형이라는

추정도 있고, 정광/약사/가섭 세 여래의 사리탑이라는 사적기도 있지만, 선뜻 동의하기 어렵다.

 

 

<해의 방향에서도 알 수 있듯이 앞쪽이 서탑이고, 맨 뒤쪽이 동탑이다...>

 

 

먼저 중앙에 있는 탑 석질은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와 비슷하고 문비와 괴임돌이 가장 섬세하면서 화려하고,

 

 

 

<성주사지 중앙 삼층석탑...>

 

<지대석과 하층 기단부, 그리고 상층 기단부에도 몰딩 같은 괴임이 아주 정교하고 정성스럽게 만들어져 있다... 어느 한부분 소홀함도 서툼도 없다...>

<중앙탑 문비... 얼른봐도 기울어져 있지?>

 

 

4기의 탑들 중 유일하게 보물이 아닌 동삼층탑이 부도비와 가장 밀접한 연관이 있었다는 말이 있고,

 

 

 

<성주사지 동삼층석탑... 노반이 없고 서삼층석탑과 마찬가지로 중앙탑과 석질이 완전히 다르다...>

<그리고 서삼층탑과 마찬가지로 전후면에 문비를 새겨 넣었다...>

 

<칼로 무우를 자르듯 정말 반듯반듯하다... 신라인들은 돌을 그렇게 다룰 줄 알았다...>

 

 

동탑과 비슷한 서탑에는 노반에서부터 각층 지붕돌의 전각, 그리고 기단부 판석에까지 풍탁이 달렸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멍들이 일정한 규칙을 가지고 뚫려있어, 조성 당시 모습으로는 가장 화려했을 것이라 생각해본다.

 

 

 

<성주사지 서삼층석탑... 지반 때문인지 보수가 잘 못되었는지 탑들이 동쪽으로 기울었다...> 

 

 

<서삼층석탑의 특징은 아주 많은 풍탁을 달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구멍이 있다는 점...>

 

 

 

백과장, 저 구멍들은 뭐였을까?

본래 뚫려 있던 거에요?

풍탁이 달렸던 흔적일거야...

그건 뭔데요? ... ...

나는 흔들리는 풍탁에서 바람의 소리와 향기를 찾고 있는데, 백과장은 아직까지 풍탁의 개수를 세고 있다.

 

 

<서삼층탑 부분... 각각의 지붕돌에는 좌우 6개, 가운데 1개의 풍탁구멍이 있다...> 

<또한 풍탁구멍은 지붕돌 뿐만 아니라, 노반에도(↑) 기단부 판석(↓)에도 심지어는 괴임돌에도 뚫려 있다... 노반과 괴임돌에는 얼마나 앙증맞은 풍탁들이 달려 있었을까?>  

<이 탑에 바람이 불었다면 어떤 소리가 들렸을까? 아마도 바람소리가 아니라 음악이 연주되었을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세탑 모두 두툼한 몸돌에 비해 지붕돌이 좁고 낮아 경쾌함과 날렵한 상승감은 떨어지고,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보림사 삼층석탑처럼 지붕돌의 낙수면 반전이 지나치게 급격해 가벼운 느낌도 준다.

 

 

<보림사 삼층석탑 부분... 연대차이가 대략 20년 정도 날까? 물론 보림사탑이 먼저다... 지붕돌의 반전이 얇고 낙수면의 경사는 비슷하다... 직선이었던 석가탑과 비교해보면, 경덕왕 이후 120년이 지나면 건축의 처마들도 저처럼 기교를 부리게 되었을까? 조금만 더 꺾어져 올라갔다면 중국의 처마와 비슷한 느낌이 들었을 거 같다...^^>

 

 

각층 우주의 돋음도 낮아 더더욱 밋밋해 보이지만, 이것도 그 당시의 미감이고 유행이었을 터...

천년이 지난 현대의 미감으로 당대 사람들의 유행에 대해 왈가불가하는 게 부적절할지도 모르지만,

모름지기 명품이란 유홍준교수 말대로 바로 어제 만든 것 같은 것들이라는 의미를 한번 더 생각해본다.

 

 

 

 

 

오래됐지만 현대적이고, 단순하지만 디테일이 살아있고, 어떤 상황과 기분에서도 세련되고 우아하다...

희귀하고 유명하며, 공인된 사람이 만든 것들이 명품의 반열에 오를 수밖에 없어 또다시 역사를 따지지만,

명품을 만나는 것은 늘 행복한 일... 이 탑들은 그 반열까지 오르진 못해도 당대를 대표할만함은 분명하다.

 

 

 

 

 

 

 

9.

 

에구, 에구~~~

그렇지 않아도 늦었는데, 벌써 산그림자가 탑에까지 드리워졌다면 낭혜화상 부도비는 더 심해졌을 터...

백과장, 이사장도 기다리는데 얼른 국보보러 가세...

국보에 대한 예의인지, 볼건 다 봐야한다는 욕심인지 몰라도, 이곳에 와서 이 부도비를 건너 뛸 수는 없다.

시간이 흐를수록 나는 설명할 것과 혼자 느낄 것을 구분하고 있지만 여기서도 막막하기는 마찬가지다.

구산선문에 대해 썰을 풀까? 최치원에 대해 이야기할까? 아니면 귀부와 이수에 대해 말해야 할까?

그러나 내가 말하고자 하는 것과, 백과장이 감탄하는 것은 항상 다를 수밖에 없다. 초점이 다르니까...^^

 

 

 

 

 

88세(801~888년)까지 사셨네요?

허걱~~~ 역시...^^

당시로는 오래 사신 거겠지요? 왕들도 3~40을 못 넘겼잖아요?

글세... 왕들이야 워낙 정쟁도 많고 병도 많아, 전쟁으로 죽고, 암살로 죽어 기준이 될 순 없을 거 같고,

당시 평균 연령이 대략 43세인가 되는 거 같은데, 사실 영유아기(10세 이하) 사망률이 높아서 그렇지

실제로는 5~60세까지 살지 않았겠어? 그러니 40불혹, 50지천명, 60이순, 환갑잔치란 말도 생겼을 거고...

 

 

 

 

 

신라 구산선문을 일으킨 발상지가 장흥 보림사고, 그곳에서 발흥한 가지산문이 오늘날 조계종의 뿌리지만,

당시 성주산문의 개창조사 무염국사를 따르는 이는 보림사에 주석한 체징의 3배인 2,000여명이었다고 한다.

 

 

<낭혜화상 백월보광탑비... 무염국사의 부도비가 편할까?> 

 

25년간 머물렀던 당나라에서는 동방대보살로 불리웠고, 신라로 돌아와 이곳에 주석할 때는 성인으로 불리워,

당시 오합사였던 절이름을, 성인(聖人)이 살고(住) 있는 절이라는 의미의 성주사(聖住寺)로 바꿀 정도였고,

그 제자들이 먹을 밥을 짓기 위해 쌀 씻은 물이 성주천 십리를 채워 흘렀다니 그의 위세가 얼만했을까?

그 명성이 컸던 만큼 무염국사의 대낭혜화상백월보광탑비는 신라 부도비중 가장 크고, 비문도 가장 많다.

 

 

<당대 지식인이자 대문호였던 해동공자 최치원이 썼다... 이 부도비와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부도비, 문경 봉암사의 지증대사부도비, 그리고 경주 초월산의 대숭복사비를 사산비문이라고 하는데 이중 3기가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물론 최치원이 써서 국보가 됐다기보다, 신라말기의 사회상과 구산선문에 대한 가장 귀중한 금석문 자료이기 때문이다...> 

<높이 4.55m, 비신높이 2.63m로 신라 부도비 중 가장 크고, 비문도 5천자에 이른다고 한다... 한문은 잘 모르겠고, 비신 끝부분을 세련된 몰딩처럼 처리한 부분을 보면 참 세련됐다는 느낌만...^^ 이수 아래에도 앙련을 새겼는데, 가운데를 중심으로 변화를 준걸보면서 장곡사 좌대의 복련을 생각해 본다...> 

 

 

성주 오석이란 말 들어봤어? ... ... 벼루 만드는 까만 돌말이야... 아~ 네~~

저 비석을 받치고 있는 용머리에 거북 몸뚱이를 귀부라고 하는데 그게 오석이야...

그리고 잘 봐봐? 귀부 머리부터 거북이 발톱이 꽉 쥐고 있는 밑에 판석까지가 바위 한덩어리야...

 

 

<석질이 단단했는지 거북등의 문양들은 깊이 파질 못했지만, 비석받침 주변은 양감을 크게 부각시켰다...> 

 

<이 거북이 발톱이 박힌 지대석부터 머리가지 하나의 바위 덩어리다... 이 귀부조각은 한번에 성공했을까? 아니면 몇번 다시 만들었을까?^^ 아니면 몇명의 석공이 동시에 각각 만들어, 요즘의 나가수처럼 배틀을 해서 하나만 선택했을까? 아무튼 궁금하다...ㅎㅎ>

 

 

어지간해서는 닳아지지 않아 벼루로 만들던 오석을, 그것도 저렇게 큰 바위를 통채로 다듬어

이처럼 매끄럽게 만들었다면 대단한 정성이고 공력이지?

(물론 역동적인 힘에서는 흥경사 비갈에, 세련된 문양은 원랑선사 부도에 못미치지만 이건 이해하기로 하자)

 

 

<아래 흥경사 비갈(↓)과 비교하면 이 부도비가 얼마나 점잖은가 알 수 있다...^^> 

<흥경사 비갈... 정말 역동적이지? 머리를 확 틀어 이빨을 드러낸 모습은 티라노사우르스 같은 느낌도 들고...^^> 

<원랑선사 부도비 귀부... 우아하고 섬세한 문양은 아무래도 이쪽이 가장 아름다울듯...>

 

 

 

그러네요~ 옛날엔 기계도 없었는데 어떻게 저렇게 잘 만들 수 있었을까요?

아, 자네가 맨날 전화 받고 계획서 만들 듯이 저 석공들도 평생을 돌만 만졌을테니 손기술은 훨씬 좋았겠지.

역시 내가 말하고 싶은 것과, 답사 초보자가 감탄하는 것은 다를 수밖에 없나?

나는 무염국사 낭혜화상의 일생과 구선선문에 대해 말하고 싶은데 그는 얼마나 오래 살았는가가 재밌는 거고,

나는 바위덩어리를 깨뜨리고 다듬은 예술적 혼과 성취를 느끼고 싶은데 그는 거북이 크기를 말하고 있다...

 

 

 

 

 

<저 몽글몽글한 문양은 무엇을 뜻했을까? 장미꽃??>

 

 

 

10.

 

벌써 해가 뉘엿뉘엿 저물며 산등성이가 노란 석양빛으로 물들고 있다.

어땠는가?

신발 버릴 일없이 따땃한 차속에 누워서 음악 듣던 이사장은 머리가 개운해졌다고 좋아하고,

차가운 바람이지만 밝은 햇살 쬐며 산과 들을 밟았던 백과장은 궁금한 게 많았다며 재미있어 한다.

그리고 나는 이제껏 생각해보지 않았던 백제의 오합사와 신라의 성주사의 절충을 그려보고 있다.

 

 

 

 

사실 지금까지 나의 답사여행은 거의 대부분이 나홀로 답사였다.

그래서 누군가와 함께 공감하고 이야기를 나눌 수 있다는 것이 얼마나 즐겁고 행복한 일인지 잘 안다.

그런데 오늘은 답사여행의 생초보, 왕초보와 함께 할 수밖에 없었고, 이 여정도 합의된 선택이 아니었다.

들어주려 노력한 백과장에 고맙다 생각하지만(어쩌면 그는 나를 배려하기 위해 끝까지 들었는지도 모른다)

나는 그의 호기심을 충분히 자극하지 못했고, 충분히 즐길 수 있도록 유도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다.

이건 관심이나 호기심의 대상이 달라서라기보다 설명의 포인트를 못 잡는 답사 가이드-내 문제일지 모른다.

 

 

<낭혜화상 부도비 주변의 석재들...  동시대였을 것으로 생각되는데, 다양한 문양의 복련을 볼 수 있다... 석등도 많았을까?>

  

<금당터 올라가는 계단... 부드러운 곡선이다...>

 

 

 

내가 부족했다는 것은, 함께 할 시간에 오히려 내 마음을 충분히 열지 못했기 때문이 아닐까 반성해 본다.

해철이형 산소 가는 길에 틈틈이 들러, 다른 답사처보다 한두번이라도 더 와봤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새롭게 보이는 부분에 느끼는 감상들이 달라지는데 답사 초보자를 만족시키려면 경험도 부족한데다,

그를 배려하기에 지금의 내가 너무 조급하고 각박하기도 하지만,

문제는 그들에 대한 충분한 고려와 목적의식이 없었기 때문이란 생각이 더 많이 든다.

 

 

 

 

그런 의미에서 내 블로그에 놀러와 주시는 분들, 답글까지 달아주시는 분들게 정말 고맙단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나는 아직도 나를 위해 글을 쓰고 있지만, 그분들은 나를 위해 관심을 표명해 주시기 때문이다.

왕초보, 생초보 답사여행자와 함께 한 성주사지에서,

내 글에 관심을 남겨주신 분들이 정말 소중하다는 생각을 하고 있다.

나는 언제 그분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을까?

흠~~~ 돌멩이 몇 개 쌓아올린 탑 위로 쏟아지는 석양빛이 참 곱다.

 

 

<성주사지의 황혼빛은 곱기도 하면서 늘 따사롭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