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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 - 心,想,和...

석불좌상 3> 광배가 있는 석불좌상들의 종류와 시대적 구분(2)...1112

 

 

 

이후 광배의 모습은 전성기의 세련되고 우아한 형식과 조각의 생동감을 잃어버리고 도식화 되어 간다.

920년대 견훤의 영향아래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합천 청량사 석조여래좌상>은, 건장한 몸매에 어깨까지 들려있어 잔뜩 긴장된 모습이며, 통통한 얼굴에도 불구하고 무뚝뚝하고 어딘지 부자연스럽게 보이는 건 너무 작아진 코 때문이 아닐까 생각되는데, 이런 이미지를 만든 결정적 이유는 광배가 제역할을 못하기 때문이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이 석불은 사각좌대를 갖췄는데, 수미단을 형상화해 <고달사>에서도 이미 만들어졌던 사각대좌는 900년대 중반이후부터 조선에 이르기까지 석불대좌와 부도, 석등의 주류가 된다. 공력의 차이였을까? 미감의 차이였을까? 아니면 석불좌상에 대한 비중의 차이였을까?

 

 

<청량사 석조여래좌상... 광배가 지금보다 컸다면 전반적인 이미지도 많이 달라졌을 거라 생각한다... 중앙에 화불이 1구 새겨져있다...> 

<청량사 석조여래좌상 사각대좌 중대석에 새겨진 비천상... 섬세하고 자태도 좋고...> 

<고달사 사각석불대좌... 연화대좌이면서 수미단을 상징하는 사각형으로 만들어져 있다... 이 대좌는 900년을 전후해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지만, 최초의 대좌는 사각형(방형)이었다... 인도의 경우도 그렇고, 중국의 경우도 그렇고, 우리나라의 경우도 불상의 대좌는 처음부터 사각이었다...>

 

 

 

청량사와 달리 불상과 대좌의 부족한 미감을 광배로 살린 것이 있으니 930년경 만들어진 <청도 운문사 석조여래좌상>이 그것일 것이다. 차분한 표정에 단아한 모습의 이 불상은 780년 <백률사 금동약사여래입상>에서 정착된 2중착의 편견우단을 충실히 재현하고 있지만, 좌대는 충분한 볼륨을 살리지 못했다. 그러나 2중 원광을 변형한 호리병형 광배는 전성기의 세련되고 우아한 곡선으로 제작되어, 두광과 신광은 선으로만 표현하고, 내부는 연화문을 제외하면 여백을 충분히 살린체 주위로 화염문을 새겨, 전체적으로 편안하고 깔끔하게 정리한 점이 좋아 보인다.

 

 

<운문사 석조여래좌상... 시원한 광배가 적당한 크기의 석불을 호위하고 있는 듯한 모습으로 비례나 조화, 조각 면면이 뛰어나다... 아쉽다면 좌대일까? 그것도 중대석이 낮아지면서 안정감을 취해 결코 나빠 보이지 않는다...> 

 

 

 

 

이런 구성을 이어받은 게 <원주 용운사지> 광배일텐데, 석조비로자나불좌상과 제짝일지 온전한 크기일지 모르겠지만, 화려하지도 않고 단순하지 않은 구성으로 조각된 이 광배는, 하대석 복련의 코너에만 귀꽃을 살리는 정성을 담았지만, 안상만 새겨진 사각대좌에 충분히 작아진 불상 등을 고려하면 1000년 전후에 만들어진 게 아닐까 생각하게 된다. 즉 부분부분은 신라 풍을 이어받았지만 이제 석불좌상은 완전히 고려식으로 정착 퇴화된다.

 

 

<원주 용운사지 석조비로자나불과 광배... Daum 이미지에서 스크랩... 왜 이걸 못 봤을까?> 

 

<영주 백룡사 석조여래좌상... 이것도 못봤는데...앙련과 광배를 보면 900년대 중반일지도... Daum이미지 스크랩>

 

 

 

이후 석불좌상에서 연화대좌는 사라지는데 그 마지막 모습이 <영암 도갑사의 석조여래좌상>이 아닐까 싶다. 석불과 광배가 하나의 부재에 환조로 조성된 이 여래좌상의 광배에는, 상단에 3구의 화불이 새겨지지만 신라의 수준을 따르지 못하고, 이미 천태종으로 통합된 고려에서 비로자나불은 오래 전부터 주류에서 비껴나갔음과 함께, 석불좌상에 연화대좌와 광배가 함께 만들어지는 마지막 모습을 확인할 수 있는 것이 도갑사 석조여래좌상이라 생각된다.

 

 

<도갑사 석조여래좌상... 광배는 완전히 선주형이 되었고, 상단에 3구의 화불이 새겨져있다...> 

 

<담양 영은사 석조여래좌상... 영암 도갑사와 가깝지 않지만, 그리 멀지도 않은 곳... 비슷하지? Daum스크랩>

 

 

 

 

 

그렇다면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이전, 광배에 화불이 새겨진 석불좌상은 없었을까?

광배에 화불은 언제부터 새겨지기 시작했을까? 또 광배는 어떤 모습들이 더 있고 가장 화려한 광배는?

그리고 초기 석불좌상 어떤 것들이 있고 언제부터 만들기 시작해서 언제 무슨 이유로 변화할까?

질문은 끝이 없고, 내가 보고 가지고 있는 생각과 자료는 너무 부족하다. 그 상태에서 정리해볼까?

 

 

<경주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 나는 보리사라 부르고 있는데, 신광과 두광의 선중간에 꽃으로 매듭을 엮어 놓은 듯한 모습이 예쁘면서도 특이하다... 아무튼, 내가 본 불상 중 가장 잘 생긴 얼굴...^^>

 

 

 

860년대 이전 만들어진 석불좌상의 광배에도 화불은 있었다.

하나는 국립중앙박물관에 보존되고 있는 <경주 남산 삼릉계 약사여래좌상>이고,

또 하나가 <경주 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나는 지금까지 보리사로 부르고 있다)>이 그것이다.

먼저 약사여래좌상을 보면 신광 좌우로 2구, 두광 좌우로 2구, 그리고 중앙에 1구, 총 5구의 화불이 있고,

석조여래좌상에는 신광 좌우로 4구, 두광 좌우로 2구, 그리고 중앙에 1구, 총 7구의 화불이 새겨져 있다.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약사여래좌상... 국립중앙박물관 보관...> 

<아마 이 얼굴을 기준으로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얼굴도 복원되었겠지? 좌우로 화불이 보인다...> 

<이 불상을 약사여래라 부르는 이유는, 왼손에 들려있는 약합과 중대석에 향로 모양이 새겨져 있기 때문...>

 

 

 

그리고 이 석불좌상들은 적어도 동화사보다 8~90년 이전인 700년대 후반에 만들어졌다고 생각하는데,

먼저 복련이 770년경 만들어진 <석굴암 본존불>과 비슷하고, 앙련은 719년작 <감산사 석조아미타살입상>과 유사하다.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 좌대에 해당하는 앙련과 복련... 이 앙련 모양이 위 대좌 앙련과 비슷하다... 그리고 도피안사 철조비로자나불상의 앙련도 이처럼 앙련에 아무런 장식이 없지만, 끝부분 마감이 완전히 다르다...^^> 

<물론 720년을 전후해 만들어진 모든 앙련들이 위와 같지만은 않다... 같이 만들어진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의 앙련에는 이미 앙련과 복련에 장식적인 조각이 새겨져 있다...>

 

즉 앙련에 아무런 장식이 없고(물론 감산사 미륵보살에는 장식이 있고, 도피안사 앙련도 장식이 없지만),

단엽 가운데 선으로만 구분하였으며, 삼릉곡 약사여래는 석굴암 본존불과 같은 우견편단을,

미륵곡 여래좌상은 2중착의 편견우단에 따른 편삼이 정형화되기 이전의 모습으로 보기 때문이기도 하고,

삼릉곡 약사여래에서는 감산사의 석조아미타불입상 광배와, 미륵곡 여래좌상에서는 남산 배리불(654년), 감산사 미륵보살입상 장식과 유사성을 느끼기 때문이다. 그리고 석불의 전체적인 이미지가 전성기(경덕왕대)의 모습을 하고 있어 780년 전후 제작설이 가장 보편적이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된 감산사 석조아미타불입상... 광배를 처리해 나간 모습이 삼릉곡 약사여래와 비슷하다고 느끼는 건 나만의 착각일까? 그리고 아래 미륵보살입상의 장식과 두광과 신광을 표현한 선 중간의 장식은 후대 미륵곡에서 변형되는 것은 아닐까?> 

<감산사 석조미륵보살입상...>

 

 

 

 

물론 그런 유사성과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두 불상 중 어느 것이 앞서는지 자신할 수 없고,

왜 750년 이전까지 제작시기를 앞당기지 않는가에 대한 이유를 밝혀야 하는데 그것은

석굴암 본존불이 만들어진 이후부터 좌대와 광배를 갖춘 석조불좌상을 만들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결국 나는 왜 그렇게 신라의 경덕왕대(이전 성덕왕(702년)에서 원성왕(785~799년)까지)에

집착하는가 설명해야 하는데, 그건 잠시 미루기로 하고 광배에 화불이 만들어진 또 다른 경우를 먼저 본다.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마모와 훼손이 아쉽기는 하지만 7세기초 혹은 7세기 중엽에 만들어진 불상중 가장 규모도 크고 전반적인 비례와 조화가 탁월한 작품... 석굴암 본존불이 만들어지기 이전, 가장 큰 규모일 것이라 생각되는데... 그리고 이 불상을 선도로 신라는 본격적인 석불좌상을 만들지 않았을까 생각하는데...^^> 

<신광에 해당하는 부분 좌우에 3구씩 6구와, 두광에 훨씬 작은 화불 7구가 돌출 조각되어 있다...> 

 

 

 

770년대 혹은 그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봉화 북지리 마애여래좌상> 후면, 광배에 새겨진 것과,

비슷한 시기 만들어진 경주 토함산 동쪽의 <장항리사지 석불입상> 광배에 새겨져 있는 화불이 그것이다.

 

 

<경주 토함산 장항리사지 석불입상... 경주박물관에 있으며, 화불 하나하나가 매우 아름답게 조각되어 있다...> 

 

 

 

 

화불이란 정토종을 근거로 하고, 신라의 경우 650년을 전후한 원효의 영향이 컸다고 할 수밖에 없으며,

이때부터 조성되기 시작한 조선시대 만들어진 괘불의 그림에까지 지속적으로 각인되어 전승되는데

나의 생각을 뒤집는 두 개의 유물이 있으니, 소위 660년 이전에 조성된 것으로 보이는

<익산 연동리 석조불좌상>과 <청원 비중리의 일광삼존불> 광배에 새겨진 화불이 그것이다.

 

 

<청원 비두리 일광삼존불상... 600년경 삼국의 영토를 기준으로 고구려, 신라 제작설이 나뉘어져 있지만 백제 광배의 특징이 그대로 살아 있어 백제 설이 더 유력하다... Daum이미지 스크랩>

<600년경 일본 나라 법륭사 불상... 광배의 특성을 비교해보면?...>

 

 

 

 

익산 연동리는 확실의 백제의 영토였으니, 정토사상의 영향과 달리 같은 시기 백제 혹은 백제인이 만든 불상중에 화불이 있었는가를 확인하면 백제에서 만들었다는 기존 통설을 쉽게 수용할 수 있지만, 청원의 경우 600년대 초기에 만들어졌다면, 당시 고구려의 영토였다가 600년대 중반부터 신라의 영토가 된 이곳에 무슨 연유로 화불이 만들어졌던 것일까? 물론 이 시기에 대한 이견이 없는 걸로 보면 화불이란, 정토종-정토사상과 긴밀히 연관되어야만 하는 필연성이 없을 수도 있다고 생각하면 편할 것이고, 단지 무슨 연유에서 광배에 화불이 새겨지기 시작했는지 그 이유는 나는 아직 찾지 못하고 있다.

 

 

<익산 연동리 석불좌상... 이어붙인 목에 대한 설화가 유명한 불상이기도 하다... 하나뿐이라는 백제의 석불좌상으로 불리고 있다... 사각대좌를 덮은 복식을 유의해서 볼 것...^^ 문화재청 자료에서 스크랩> 

<이 불상에는 어떤 연유로 화불이 조각되게 되었을까? 이 불상의 화염문과 예산사면석불, 그리고 고구려에서 만든 연가7년명 청동불의 화염문을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다...> 

 

 

 

아무튼, 백제불상 광배에 화불이 새겨진 가장 확실한 기록과 유물이 남아있는 것은, 일본 <나라 법륭사 금당의 석가삼존상> 광배다. 이미 일본여행 법륭사/동대사편에서 소개한 적이 있어 반복하지 않겠지만, 석가삼존상 뒷면에 <지리불사>란 제작자 이름이 각인되어 있고, 그를 <쇼토쿠태자>는 백제인이라 했다는 기록을 보면, 이미 600년대 백제인들은 광배에 화불을 새겼음을 확인할 수 있고, 그 영향들이 익산 연동리와 청원 비중리에서 나타난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리고 백제 멸망 몇년후인 673년 만들어진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을 보면 법륭사 석가삼존상과 거의 똑같은 조각이 새겨져 있는데, 이런 근거들은 백제의 광배는 비단 일본에서만 만들어졌던 게 아니라 당시 백제 영향력에 있던 곳들에서는 일반적인 유형이었고, 한동안 그들은 그들이 생각하는 가장 이상적이고 완성된 형태의 광배를 추종하고 답습했다는 게 내 생각이다. 

 

 

<600년을 전후한 시기, 백제불상의 특징을 가장 완벽하게 보존하고 있는 일본, 나라, 법륭사 금당의 삼존불... 광배의 화불이 선명하고, 이 광배의 신광부분과 익산 연동리를 비교해보는 것도 재밌다... 그리고 포수좌, 혹은 상현좌의 특징도 잘 나타나 있다... 흔히 이 얼굴을 가지고 고구려설과 백제설로 나뉘어 대립하기도 했지만, 불상 뒷면의 기록은 분명 백제인으로 기록되어 있다...>

 

<계유명전씨아미타불비상 조각... 박물관에서 찍은 내사진은 너무 흔들려서 문화재청 자료를 올린다... 법륭사와 비교하면? 그런 이유로 673년 백제 멸망후에 만들어졌지만, 백제인의 작품이라 설명되고 있다... 하나의 나라라는 것은 정치적 경제적 통합성 외에도 문화적인 일관성과 보편성을 가질 수밖에 없는 공동체다... 또한 그 문화적 동질성은 단편적이고 단기간내에 만들어졌다 사라지는 것이 아닌만큼 오랜 회귀성을 갖기도 한다... 그리고 하나 더, 일정수준 이상의 작품들을 만들 수 있느 전문인들은 한정되어 있고, 그들에게 전수되는 기법과 양식은 결코 쉽게 변하지 않는다... 더 뛰어난 후배들에 의해 보다 완숙한 형태의 변형이 이루어지거나, 도저히 앞세대를 따라갈 수 없어 회피하고 퇴화하기 전까지는...>

 

<같은 곳, 백제관음의 광배... 1900년대 초까지는 법륭사 금당내부 뒤쪽으로 삼존불의 호위불로 배치되어 있었으나, 워낙 유명해진 관계로 지금은 대보장전에 따로이 보존되어 있다... 백제 광배의 특징에 대해서는 다음에...> 

 

 

 

첨언한다면 이 두 불좌상을 삼국시대(668년 신라통일이전)에 만들어졌다고 믿는 이유는, 먼저 이 불상들의 광배가 <서산마애불>이나 <백제관음> 등 5~600년대 백제에서 만들어진 불상 광배의 특성을 그대로 계승하고 있고, 또한 좌불상에서 보이는 <포수좌(최완수씨 표현, 혹은 상현좌라고 하는데, 도포가 사각좌대를 커튼식으로 덮은 모양)>를 하고 있기 때문으로 당대에 만들어진 반가사유상들의 복식 주름을 연상하면 쉽게 이해된다.

 

 

 

 

 

 

 

<부여 군수리 석조여래와 백제금동반가사유상... 좌대와 복식을 보면 5호16국, 남북조시대 중국 불상과 유사성, 그런 이유에서 보편성이 그대로 나타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