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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 - 心,想,和...

석불좌상 2> 광배가 있는 석불좌상들의 종류와 시대적 구분(1)...1112

 

 

 

2. 광배가 있는 석불좌상들 - 화불을 중심으로...

 

 

 

 

 

 

그간 답사여행을 통해 석불좌상에 대해 적지 않은 수를 봤다고 생각했는데

막상 찾아보니 결코 많은 숫자도 아닌듯 싶다. 대략 2/3 정도를 봤을까?

춘천박물관에서 본 원주출토 비로자나불좌상 좌대의 복련과 앙련, 그리고 중대석과 기단부를 보면서

그간 봐왔던 석불좌상들의 공통점과 차이점이 비교되기 시작하니 여간 복잡한 게 아니다.

 

 

수인을 보면서 석가여래인지, 비로자나불인지는 분명하게 구분이 되지만(대부분이 두가지 유형이다),

앙련과 복련의 마감상태를 시대적으로 분류하기도 쉽지 않았다.

물론 기록이 남아있는 석조 불좌상들을 기준으로 시대를 분류한다 하더라도 한계가 있는데다,

그간 내 답사여행 습성이 작은 부분들을 꼼꼼하게 보지 못했던 불찰도 있기 때문이다.

해서, 좌대를 통해 석조 좌불상들을 접근하는 것에 앞서 우선 광배를 통해 생각을 정리해보고자 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출토지 불명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광배와 석불, 그리고 좌대의 삼박자가 온전히 남아있는 몇 안되는 유물이면서, 가장 아름다운 광배를 가진 석불좌상이기도 하다... 미지정> 

 

 

 

석불좌상은 크게 3부분으로 나뉜다.

하나는 석불이고, 또 하나는 좌대, 그리고 광배다.

이 3부분이 완벽하게 남아있다면 정말 운이 좋다고 말할 수밖에 없다.

숱한 전란과 보존능력의 상실 혹은 외면과 방치가 가장 큰 문제였겠지만,

불교에 배타적이었던 조선 성리학이 통치철학으로 정착된 1530년대 이후 관념적 집착으로 점철된 200년간 이땅에 남아있던 불교유물들은 문화혁명시대 홍위병에 의해 자해된 파괴만큼 철저히 유린됐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 마지막 파괴와 약탈이 무분별하게 자행된 일제강점기까지 감당해야했으니 오죽했을까?

 

 

<공주박물관 야외전시장의 석조여래좌상과 광배 등... 코가 온전한 부처도 드물지만, 머리가 잘려나간 석불들은 그 수효를 헤아릴 수 없을 정도다... 예기치 못한 천재지변과 전란으로 인한 것들도 많지만, 의도적으로 파괴된 불상이 많으면 많았지 적지 않을 듯... 첨언한다면 잘못 보수하거나 엉뚱하게 보수하여 전체적인 이미지까지 바뀐 것보다는, 차라리 이 불좌상처럼 깨어진 상태로 훗날을 기대하는 것이 더 좋을지도 모르겠다...>

 

 

 

아마도 살아남으려면 땅속에 묻히거나 깊고 먼곳에 처박혀 완전히 잊혀진(석굴암 같이) 경우,

지속적인 관심을 받을 정도로 유명하여 함부로 훼손하기에는 뒷감당이 어려워 보존할 수밖에 없는 경우,

또는 아예 관심밖에 있어 영향력이 극히 미비하여 방치했던 경우 등을 벗어나는 게 얼마나 있을까?

게다가 얇은 석재에 석불에 기대고 좌대에 고정될 수 없던 광배의 구조적 취약성은 그 보존자체가 경이롭다. 수백에서 천년의 자태를 잃지 않고 우리와 인연을 맺은 유물들은 그자체가 기적이 아닐런지...

 

 

<경주박물관 장항리 석불입상... 자세히보면 광배에 조각된 화불들이 얼마나 세련되게 잘 만들어졌는지 알 수 있다... 장항리 쌍탑중 하나가 도굴꾼들에 의해 도괴될때 같이 파괴되었는지, 산사태로 인해 파괴되었는지 안타깝기만... 얼굴은 재차 보수되어 분위기가 많이 달라졌다...>

 

 

 

 

아무튼, 내가 봤던 석불좌상에 광배가 남아있는 것을 우선 찾아본다.

경주남산 미륵곡 석조여래좌상(보물136호,보리사),

산청 내원사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1021호),

국립중앙박물관 소재 석조비로자나불(출토불명)과 석조약사여래좌상(경주 남산 삼릉계곡 6사지 발굴),

팔공산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244호),

부석사 자인당내 석조비로자불좌상 2구(보물220호),

괴산 각연사 석조비로자불좌상(보물433호), 경북대 박물관 석조비로자불좌상(보물355호),

합천 청량사 석조여래좌상(보물265호), 청도 운문사 석조여래좌상(보물317호) 등 11기와,

 

 

<홍천 물걸리터 석불좌상과 대좌, 광배... 보물급의 수작들이 이처럼 한곳에 몰려 있다는 게 참 신기하다... 이처럼 한번에 여러기를 한꺼번에 볼 수 있는 곳은 국립중앙박물관 등 박물관외에, 부석사 자인당, 원주박물관에 3기씩이 있고, 청암사 수도암과 예천 청룡사에 2기씩이 있다... 내가 석불좌상의 시기를 구분해보고자 처음 마음먹었던 곳이 바로 홍천 물걸리였다...^^>

 

 

 

석불좌상은 없지만 좌대와 함께 광배를 갖추고 있는

홍천 물걸리 석조대좌(보물543호), 홍천물걸리 석조대좌 및 광배(보물544호) 2기, 그리고

보물급이지만 제 대접을 받지못하는 원주박물관 내부, 좌대 기단부를 상실한 원주 봉산동 출토 석불좌상과

고려시대 만들어진 도갑사 석조여래좌상(보물89호) 등 총 15기가 있다.

 

 

<보물666호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최근 몇년전에 보수가 되었는데, 얼굴도 비슷한 시대로 바뀐 것 같고, 깨어진 광배를 복원했다는데 높은 점수를 주고 싶은 불좌상이다... 얼른 가봐야 하는데...Daum 이지미 스크랩>

 

 

 

그리고 내가 보지 못한 것 중, 신라시대 만들어진 보물급으로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보물666호, 삼릉계곡 6사지, 보수 전에 보았으니 못본거나 마찬가지...)

예천 청룡사 석조여래좌상(보물424호), 의성 고운사 석조여래좌상(보물246호)

성주 금봉리 석조비로자나불좌상(보물1121호) 등 4기와 의성 만장사 석조여래좌상,

고려시대 만들어진 유형문화재급으로 진주 평거동 신만사 석조여래좌상, 원주 용운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경주 감산사 대적광전 석조비로자나불좌상 3기가 더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시대를 구분할 때 제일 어려웠던 장곡사 상대웅전의 석불대좌... 그 아름다운 모습만큼 분명한 특징도 가지고 있지만, 수미좌를 가장 세련되게 형상화한 이런 연화대좌는 이전에도 이후로도 만들어지지 않았다... 귀꽃은 고달사지의 전원감국사 부도 지붕돌에 솟아있는 귀꽃과 비슷하다는 느낌이다...>

 

 

 

 

이를 시대적으로 구분해보기 위해서는 먼저 광배의 모양뿐만 아니라 석불의 복식과 수인,

그리고 좌대 중대석의 형상 및 앙련과 복련을 종합적으로 고려해야 하는데, 이게 쉽지는 않다...^^

 

<내원사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 최완수씨는 860년대 전후에 만들어진 것으로 설명하고 있지만, 나는 기록을 믿기로 결정했다...^^ 비로자나불 조성시기가 100년이 앞당겨져서 그만큼 역사가 풍부해지고 우리의 상상연한이 길어진다는 것도 나쁘지 않은 일이지만, 766년이면 충분히 만들어질 수 있는, 만들어졌어야 할 시기라는 점과 특히 복련의 형태가 불국사와 석굴암을 만들던 경덕왕 시대와 가장 유사하기 때문이다...> 

<닳고 닳아진 저 얼굴을보면, 정말 참하면서도 온화한 표정으로 웃고 있는 듯 하다... 음미할수록 좋은 얼굴...> 

<복련... 불국사 석가탑과 비교해볼까? 아니면 같은 시기 금산사 석조대좌와 비교해볼까?> 

 

<석가탑 팔방연화대좌... 석가탑이 언제 만들어졌는지는 분명하고... 다른 복련들과 비교하면 금방 차이가...> 

<금산사 석련대(석조연화대좌)... 정반대의 근거를 제시해볼까? 문화재청 자료나 금산사측 안내문에 따르면 이 석련대 제작 시대는 통일신라인데, 고려초인 10세기까지 제작년도가 내려간다... 그런데 최완수씨는 금산사 창건주인 진표율사가 활동했던 신라 경덕왕대  776년에 미륵불상이 만들어질때 이 석련대도 함께 만들어졌다고 추정하고 있다... 반면 문화재청은 복련을 평가하면서 선림원지부도(886년) 보다 늦고, 고달사지 사각대좌보다는 이른 10세기 중엽으로 제작시기를 추정하고 있다... 나는 최완수씨 입장에 동의하는데, 그 근거는 선림원지부도의 복련은 오히려 동화사(863년)와 비슷하고, 앙련과 복련에서 법주사 석조 등 여러 유물과 비슷하게 보기 때문이다...>

 

 

먼저 기록을 통해 접근하면, 산청 내원사에 안치되어 있는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좌상>에서 발견된

영태 2년명 납석제 호(국보233호)를 근거로, 이 불좌상이 766년에 조성되었다고 추정할 수 있는데,

이게 사실이라면 불국사 비로전의 청동비로자나불과 함께 비로자나불의 초기작이며, 석조로는 최초가 되고, 중대석과 기단부, 복련과 앙련의 기준이 될 수 있는데, 아쉽게 앙련은 많이 훼손되어 있다. 운반과정에서 훼손된 부분들이 안타깝기는 하지만 차분하고 정연한 자태와 우아한 선들이 살아있는 매우 뛰어난 석불좌상이라 생각된다.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정말 준수한 모습에 아름다운 광배를 갖춘 수작중 하나다... 90년대 보았을 때는 하얀 회분칠에 빨간 안료로 도포되어 그 맛을 몰랐는데, 최근에서야 그 벗겨진 모습을 보고 반했다...^^>

 

 

 

<독특한 중대석... 석불대좌는 부도와 달리 사자가 조각되어 있다...>

<앙련... 원주박물관 야외 우측에 있는 게 훨씬 좋은가? 비슷한 문양으론 각연사 외에 홍천 물걸리 544호와 부석사 자인당 가운데 석조여래좌상, 그리고 경북대 박물관 석조비로자나불의 앙련이 비슷하다...>

 

<복련... 쌍엽이지만 넓고 단조롭다... 그리고 가운데 아무런 장식이 없고...>

 

 

 

하나 더 기록이 남아있는 것으로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는데 조성년도가 863년이다.

좌대 상대석 앙련은 2겹으로 내부에 2단의 조각이, 복련은 쌍엽문양에 둘다 비교적 크게 조각되어있고,

중대석은 구름문양으로 이루어져, 886년 만들어진 선림원지, 고달사지 전원감국사, 경북대 부도 등이

 

 

<선림원지 부도... 이것도 추정이지만 886년이라는 예상가능한 기록이 있는 유물이다... 중대석때문에 인용했는데 앙련과 복련을 비교하는 것도 재미있다...>

<경북대 박물관 보물135호 부도... 고달사의 두 부도와 선림원지, 그리고 경북대의 이 부도는 중대석이 동일한 양식으로 만들어졌다... 선림원지가 886년이고 원종대사부도가 977년인데, 이 부도는 언제쯤일까?> 

 

 

생각나는데, 부도 중대석에는 용이 조각된 것과 달리 사자들이 조각되어있다는 특징이 분명한 연화대좌다.

삼도표현 때문인지 두터워지고 짧아진 목 때문에 약간 긴장되게 보이지만, 내원사 석남암지 석불좌상과 달리 풍만하고 통통한 양감이 우선 눈에 띠지만, 전반적으로 매우 균형잡히고 조화로운 비례를 갖춘 좋은 불상이라 생각된다. 특히 세련된 곡선에 충분한 크기를 갖춘 광배가 매우 아름다운데, 자세히보면 불꽃모양의 2단 광배의 신상부분에 좌우 2구씩, 두광부위에 좌우 2구씩, 그리고 중앙에 3존불 등 총11구의 화불이 광배의 경계선에 조성된 특징도 갖고 있다.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광배에 새겨진 화불은 또 다른 양식이라 할 수 있지 않을까?>

 

 

또 하나 고려할 점은 귀꽃인데, 870년 만들어진 보림사 석등 복련에 귀꽃이 완성된 형태로 솟아올랐고,

고복형 석등이 최초로 만들어진 <무등산 개선사지 석등>이 868년 만들어졌음을 감안하면

 

 

<개선사지 석등의 앙련... 868년경에 만들어진 것으로 고복형으로는 최초가 되고, 석등에 귀꽃이 만들어진 역시 최초의 예다...>

<개선사지 석등 복련의 귀꽃... 최초인만큼 복련의 귀꽃의 가장 초기형태를 확인할 수 있는 유적이기도 하다...>

<보림사 석등과 삼층쌍탑... 이 유물들이 국보로 지정된 가장 큰 이유중 하나가 제작연도가 확실히 기재된 기록이 있다는 점이다... 870년... 그때 석등의 복련에는 귀꽃이 완벽한 모습을 갖추고 있고, 앙련의 형태도 확실히 알 수 있어,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석등, 부도(승탑), 좌대 등의 기준이 되고 있다...>

 

 

석불좌상 좌대 중, 복련에 귀꽃이 솟아오른 연화대좌들은 860년 이후부터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고,

마지막 고려할 것이 석불의 비례와 복식의 격식, 그리고 조각의 수준과 시대적 보편성이 아닐까 싶다.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화불이 새겨진 광배, 앙련, 중대석까지 동화사와 가장 유사한 형태다...>

 

 

 

 

 

 

먼저 제작년대 추정이 가능한 동화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처럼, 광배에 화불이 있는 석불좌상을 골라보면

<각연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이 있는데, 중대석 구름문양과 사자조각은 퇴화해 시기적으로 떨어지지만,

광배 좌우로 3구, 중앙에 3존불 등 9구의 화불이 조각되어 있어 동화사 비로암 석불좌상과 가장 유사하다.

 

 

<성주 금봉리 석조비로자나불... Daum 이미지에서 스크랩... 동화사/각연사와 앙련도 비슷하고 중대석의 이미지도 비슷하지만, 불상이 왜소해지고 광배의 화불도 비례와 배치에서 자연스럽지 못하게 보인다... 그러나 원만한 얼굴과 조화로운 신체비례는 전성기의 모습을 충분히 갖추고 있다... 물론 직접 보고 다시 평해야겠지만...^^>

 

 

그리고 내가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성주 금봉리 석조비로자나불>은 같은 구름문양이지만 각연사보다 형식적이고, 광배 좌우로 1구, 중앙에 1구 등 3구의 화불만 조각된 것으로 보면 시기적으로 동화사보다 늦지 않을까 생각되는데, 또 한편 통통한 얼굴에 조화로운 신체의 비례, 그리고 앙련과 복련의 양식이 동화사나 각연사와 큰 차이가 없는 걸로보면 비슷한 시기에 조성된 게 아닐까 생각된다.

 

 

<부석사 자인당 내부 3기의 석불좌상... 좌우 2기의 비로자나불은 보물로 지정되어 있지만, 가장 화려한 좌대를 갖춘 가운데 석조여래좌상은 미지정이다... 석조여래는 내원사나 원주박물관과 비슷한 볼륨인데...>

<우측 서편 비로자나불... 광배가 깨어진 게 아쉽기는 하지만 세부조각은 확인할 수 있다...>

<좌측 동쪽 비로자나불... 여기 광배의 화불 구성은 확연히 보인다... 동화사와 비교해 보시길...>

<두기 모두 복련의 끝이 깨어진 걸로 보면, 귀꽃이 있었다고 추정할 수 있을 거 같은데...>

 

 

그리고 <부석사 자인당내 2구의 비로자나불좌상>은 좌대는 비슷하지만 광배의 화불 배치는 완전히 다른데,

왼쪽편 석불은 광배 좌우로 3구, 중앙에 3존불 등 총 9화불이 완전히 격식에 맞추어 조각되어 있는데 반해

오른편 서쪽 석불은 9구의 화불이 광배 좌우와 중앙에 각각 3존불 형태로 균형을 맞추어 조각돼 있다.

비례와 균형 등 모든면에서 뛰어나 전성기의 수작이라할만한 이 석불좌상들은 석불과 좌대 양식이 비슷해,

동시대 같은 곳에서 같은 그룹의 사람들이 광배만 일부러 다르게 제작한 게 아닐까 생각해 본다.

 

<오른편 동쪽의 비로자나불... 실내가 어두워서 그렇지, 자세히볼수록 매우 잘 만들어진 석불로 보인다...>

 

 

그리고 석불의 양감은 동화사 보다는 내원사 석남암지 출토 비로자나불과 비슷하고,  두광은 연화문에 이중원형을 채택하고, 화불이 두광과 신광 선밖에 배치되어 차이점을 나타내는데(이런 특징은 백제의 광배에서 나타나는 점들이다), 연화좌대 복련에 깨어진 부분이 귀꽃의 흔적이 아닐까 생각되고, 조금 더 후대의 것으로 보이는 홍천 물걸리 광배에도 연화문이 있어 전체적으로 동화사보다 약간 늦은 시기에 만들어진 게 아닐까 추측해 본다.

 

 

 

 

<홍천 물걸리 544호 광배 및 대좌... 좌대의 앙련과 귀꽃이 있는 복련, 그리고 광배의 화불을 볼 수 있다...>

<광배, 화불의 구성이 같은 9불이면서도 전혀 다르다...>

 

 

그리고 같은 9구의 화불이 조성된 광배가 있으니, <홍천 물걸리> 맨좌측에 있는 보물544호가 그 다음시기로, 광배 좌우로 4구, 중앙에 1구의 화불이 새겨져 있어 이 연화대좌에서는 3존불 형식을 찾을 수 없다.

이 연화대좌가 동화사 비로암 석불좌상보다 시기적으로 늦다고 생각하는 이유는 좌대 복련의 귀꽃 때문이고, 비슷한 이유와 좁아진 하체, 그리고 어깨에 비해 커진 두상으로 인해 약간 움추린 모습으로 보이는 <경북대 박물관> 내부에 보존되어 있는 석조비로자나불도 대략 30년 정도 시차를 보이지 않을까 생각한다. 또한 이 광배에는 좌우로 2구, 중앙에 1구 등 총 5구의 화불만 조각되어 있고 광배의 모양도 단순하게 처리, 2단의 호리병 같이 생긴 전성기의 광배가 훨씬 퇴화된 듯한 배모양이다.

 

 

<경북대 박물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광배에는 화불이 있고, 옷주름은 많이 단순화 되었고, 앙련은 조금씩 퇴화된 듯 보이고, 복련에 초기형태의 귀꽃이 솟았고, 중대석에는 입상의 공양상이, 기단부에는 사자문양이 안상내에 새겨져 있음을 볼 수 있다...> 

<동화사, 각연사 광배와 가장 큰 차이점은 신광과 두광을 구분하는 이단의 호리병 같은 불꽃문양이 거의 없어지고, 단순한 배모양에 홈으로 2단을 구분했다는 점이다... 분명한 것은 앙련과 복련의 귀꽃을 보면 이것이 동화사 등보다 반세대(15년 정도) 후대에 만들어졌다고 봐도 틀리지 않을 것이라는 점이다...> 

 

<두상의 육계가 뚜렷한 차별없이 밋밋해진 것을 느낄 수 있는데, 부석사 자인당 내부 두기의 비로자나불도 이와 비슷하다... 얼굴에 비해 두광이 너무 커졌고, 또한 두광에 비해 광배는 좁고 작다... 그리고 전체적으로 화불이 석불과 광배에 비해 커서 세련되고 조화로운 비례를 갖추지는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