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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 - 心,想,和...

불대좌1> 자리가 사람을 만들까, 사람이 자리를...090417

 

 

 

1.


사람이 자리를 만들까, 아니면 자리가 사람을 만들까?

후후... 21세기에 살면서 20세기 식 질문인가?

사람마다 서로 다른 크기와 깊이와 수준 등을 가늠하는 <유일한 잣대>를 공유하지 않는 한

사람과 자리의 문제는 우리의 의지나 능력, 혹은 이해와 일치할 수 없는 문제임이 분명하다.


어떤 때에는 사람이 자신에 걸 맞는 자리를 쉽게 찾아가거나 새롭게 만들어가기도 하지만,

어느 시대, 어떤 곳에서는 자리에 사람 맞추기 급급하거나 몸부림 쳐야할 때도 있다.

자신의 그릇에 맞지 않는 자리에 연연해 모두를 불행에 빠뜨리기도 하고,

여기서는 무기력했던 사람이, 저 자리에서는 물 만난 고기처럼 모두를 즐겁게 해주는 경우도 있다.


사람이 자신의 그릇과 의도에 어울리는 자리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모두에게 행복의 조건이 되지만,

우리 모두를 만족시켜줄만한, 자신이 원하고 타인과 사회가 함께 용인하는 자리를 갖춘다는 것은

정말 우리의 소박하거나 웅대한 의지와 무관하게, 늘 부조화와 불공평의 저울에 노출된 게 진실이다.

보이지 않는 손과 절묘한 타이밍에 대한 소망에도 불구하고, 자리에 대한 만족도는 흡족하지 못하다.

만약, 사람의 자질과 자리의 용도가 모두를 만족시킬 수 있는 사회가 존재한다면???

그것은 불가능할 거라는 것을, 우리는 충분히! 깊이 있게! 의심할 여지없이! 몸으로 느끼고 있다.

 

 

<원주박물관 불대좌... 가만 생각해보면 이만큼 정성스럽고, 균형잡힌 비례에, 화려한 장식에도 어수선하지 않게 보이는 불대좌도 드물다는 생각이 든다... 우리들은 과연 어떤 자리를 생각하고, 그 자리에서 무엇을 누리려고 하는 걸까?> 

 

<보령 성주사지 불상... 가볍고 처연하게 보이는 이 불상은 자리가 없어서 그렇게 보이지만은 않을 것이다... 시멘트로 대충 대충 땜방한 조잡한 마음이 불쌍한 마음으로 나타났을지도 모르지만, 이 불상의 자리가 이 곳이 아니었고, 또 그를 떠받쳤을 자리가 정성스러웠다면, 이 불상을 이렇게 하자보수하지도 않았을 것일지도 모른다...> 

 

<경주 신선암 마애불... 모든 자리가 항상 어떤 격식과 기준에 의해서 만들어진 것만은 아닐지도 모른다... 이처럼 산 정상에서 떠다니는 구름을 바라보듯, 그가 바라보는 것을 자리로 만드는 구름같은 반석이 있을지도 모르지...> 

 

<서산 강댕이 불상... 만들어진 자리가 어떠한 곳을 향하는 것만이 아닐지도 모른다... 이처럼 오랜 습관으로 관습으로 하나 하나의 염원과 소망들이 돌맹이가 되고, 그 돌맹이가 돌무지가 되어 의도하지 않은 자리를 만들고, 불편할지도 모르는 자리를 강요할지도 모르고...> 


 

<목아박물관... 아니면 훤한 얼굴에 요염한 자태, 오수를 즐기듯 느긋한 소요와 차분한 마음을 가지고서도 어떤 자리와 위치를 탐하지 않고, 이처럼 맨땅에 가만히 앉아있고 싶은 것이 우리들의 또 다른 마음일지도 모르고... 아무튼, 자리란 어떤 형상, 어떤 장소, 어떤 의도와 무관하게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우리들의 마음을 규정하고, 우리들의 시선을 차단하고, 또는 우리들의 선망을 표현하기도 한다...> 

 

 

 


아무튼, 20대에는 자신에게 맞는 자리를 찾으려 노력하고,

40대에는 자신과 자리의 눈높이를 맞추고,

60대에는 자리에 자신을 맞추는 게 순조로운 사회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우리사회 20대 전후의 사람들은 자리에 자신을 맞추기 위해 몸부림을 치는 시기 같고,

사회생활에 적응하기 시작한 30대는 자신의 크기와 자리 높이의 부조화로 갈등하는 시기 같고,

조금씩 세상을 알만한 나이인 40대가 되면, 사람은 체념(포기)된체 자리가 사람을 규정하는 거 같고,

이제 자신에 대해 알만한 나이인 50대는, 자리를 지키기에 연연할 수밖에 없는 거 같고,

세상과 자신의 눈높이를 맞출만한 60대가 넘으면, 자리와 사람이 따로 노는 사회가 아닐까 싶다.


가끔 사람 혹은 자리에 대한 착시와 오해와 환상으로 자리와 사람과 나를 힘들게 만드는 게 현실이지만,

사람과 자리의 조화가, 고저와 경중 / 선후에 무관하게 존중되는 사회는

정말 건강하고 생동감 넘치며, 화기애애할 것 같다.

그러나 모든 일이 그렇듯 세상은 결코 합리적이거나 보편적이거나 객관적이지 않다.

다만, 우리는 스스로 보편적, 객관적인 잣대를 만들어 자신을 합리화 시키는데 익숙할 뿐이지...

그리고 분명한 것은 우리와 그 시대를 관통하는 합리화의 잣대는 늘 변하는 생물(生物)이라는 점이다.


뭐, 또 이렇게 나가면 한참이니 이쯤에서 각설하고 본론으로 들어가 본다...^^


 

<경주 보리사 석불... 이처럼 얼굴은 기억하지만 그 자리를 기억하지 못하는 불상도 있고...> 

 

<여주 고달사 불대좌... 이처럼 불상은 오간곳 없지만, 서서히 사람을 빨아들일만한 정중함과 단정함속에서도 카리스마를 느끼게 하는 불대좌도 있다...> 

 

<횡성 상동리 불상... 그리고 이처럼 자리와 얼굴이 어딘지 부자연스럽고 조화롭지 못한 모습을 우리는 흔히 볼 수도 있다... 물론 얼굴만 따로 놓고 보거나, 대좌만 따로 놓고 평한다면 우리는 호불호와 경중을 논할 수도 있지만, 어째든 중요한 것은 자리에 걸맞는 얼굴과, 마음과 일치하는 자리가 바라보는 이들을 편하게 할거라는 점이다...>  


 




2.

 

다소 엉뚱한 화두로 시작해 봤다.

급한 서류 접수를 끝내고 간만에 막국수 먹으러 가는 길에 부처님 오신날 연등행사 안내를 보면서

부처님, 혹은 부처님들은 어떤 자리에 앉아 계실까 문득 궁금해진다.

그 양반들은, 자신의 이름에 걸맞는 수준과 깊이와 크기에 합당한 자리에 앉아 계실까?

최고(最高), 최고(最古), 최상(最上)의 부처님은 누구인가를 묻기는 어렵지만

그 <이름>이 앉을만한 자리 중에 내 맘에 꼭 드는 자리는 어떤 것일가가 궁금했기 때문이다.

 

 

<충주 청룡사(보각국사 정혜원융탑 가는 길에 있는...) 이렇게 여럿이 함께 있어 모두가 장엄되는 자리도 있을 것이고...> 

 

<남해 보리암 해수관음... 이처럼 혼자서도, 정교하고 화사하게 장식되지 않고서도 그 의미와 의도를 분명히 하는 대좌도 있다...> 

 

<양지 세중박물관... 물론 시대를 내려올수록, 현재에 집착할수록 높아지고 화려해지기만을 바라는 게 인지상정일지도 모르지만...> 


 

곰곰 생각해보면 나의 불상에 대한 접근은 얼굴에 대한 관심이었다.

40대가 되면 자신의 얼굴에 책임을 져야한다는 어렸을적 잠언이 무게로 다가오던 30대에

시대와 지역, 그리고 사상을 반영하는 얼굴은 어떤 느낌일까 한참 찾아다녔던 적이 있다.

그래서 닮고 싶은 얼굴, 좋아하는 얼굴, 보고 싶은 얼굴 등으로 구별을 해보았지만,

정작, 그 얼굴들이 어떤 자리에 앉아 있었는지, 그 자리는 좋았는지 나쁜지를 보질 않았다.

 

 

<경주박물관 삼화령 애기부처 본존불... 이렇게 여유롭고 평화스러운 모습만큼 천진한, 꼭 그만큼만 필요한 자리를 만들고 임할 수 있는 것도 지혜고 복일지도 모른다...> 

 

<문경 봉암사... 그리고 화려함이란 역시 주변이 받쳐줘야만 어설프지도 부담스럽지도 낯설지도 않을 것 같다...> 

 

<충주 각연사 철불... 그리고 철은 철과 함께, 나무는 나무와 함께 자리와 얼굴과 마음이 어울려야 제 맛이 날지도 모르고...> 

 

<용인 호암박물관... 그리고 이처럼 장난스러운 표정과 손놀림에 딱 맞는 그런 자리가 가장 자연스럽고 편안한 모습으로 오래 기억되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사람이 자리를 만들기도 하고, 자리가 사람을 만들 수도 있다는 말을 믿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정작 내가 찾고 싶어 하는 얼굴은 어떤 자리에 있는지 주의깊게 살펴본 적이 없었다는 말이 된다.

40의 절반을 넘어선 이제, 정작 닮고 싶은 얼굴은 엄두도 못내고 자리타령만 하고 있는 셈이다...^^

물론, 내가 봐왔던 부처님들의 얼굴과 그 양반들이 앉아있는 좌대는 아무런 관련이 없을지 모른다.

단지, 염원과 정성의 결정을 얼굴에 담으려 했다면 그 자리도 결코 소홀하지 않았을테고,

특히 얼굴없는 불상들을 보면, 아쉽지만 좌대에 깃든 정성으로 얼굴을 그려볼 수도 있지 않을까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