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석불좌상 조성 시기 이해를 위한 몇가지 메모...
지금까지 나는 광배가 있는 석불좌상들에 대해 정리하면서,
우리나라 광배의 역사와 변천, 그리고 인도와 중국, 고대 일본 등의 광배를 살펴보았다.
그리고 우리나라 불상 광배의 효시는, 550년 백제 위덕왕에 의해서 그 기틀과 기본 유형이 만들어졌고,
690년대 황복사지를 기준으로 경덕왕대에 신라 특유의 광배 형태가 변화 발전, 정착했지만,
고려, 조선에 이르러 더 이상 발전을 보이지 못하고 지속적으로 퇴화 단순화 됨을 사진으로 읽어봤다.
그러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화려한 광배를 갖춘 석불좌상들은 어떤 것들이고,
이들이 만들어진 시기를 언제로 추정하고 있는지 간단히 살펴보고,
내가 왜 이렇게 광배와 연화대좌를 갖춘 석불좌상에 대해 집착하는지, 그 이유도 함께 밝히고자 한다.
그러고나서 광배는 없지만 좌대를 갖춘 석불좌상에 대한 이야기로 넘어갈 예정이고...
<복습한다는 의미에서 다시...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 좌상... 매우 아름다운 광배를 갖추고 있음에 틀림없다...>
먼저 863년, 제작연도가 분명한 것으로 보이는 동화사 비로암 석조비로자나불을 기준으로 보면
아름다운 곡선과 신라 특유의 호리병형 거신광을 갖춘 부석사 보존 석조비로자나불은
동화사 비로암과 비슷하거나 약간 늦은 시기에 만든 것으로 추정함을 밝힌바 있다.
그러면 연화대좌에 귀꽃이 없는 청룡사 석조여래좌상과 고은사 석조여래좌상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또한 연화대좌 중 하대석 복련 부분을 상실한 원주박물관의 석불좌상은 또 언제 만들어졌으며,
내가 가장 화려한 광배를 갖추었다고 생각하는 국립중앙박물관의 석조비로자나불 조성시기는 언제였을까?
<경주 영지 석불/문화재청... 이렇게 좋은 불상을 나는 보지 않았다... 국보나 보물이 아니라는 이유 때문에...ㅎㅎ 보면 볼수록 정감이 넘치는 모습이다... 근엄하지 않은 다소곳한 자태도 좋고, 앙련의 조각도 매우 뛰어나다는 생각이든다... 그리고 광배에서 격조도 느껴지고... 꼭 보고 싶다... 근데, 언제 만들어진 것일까?^^>
사실 불교미술이나, 불교미술사의 전문가도 아니면서 1,000년도 지난 일들에 대해,
결코 큰 차이가 아닐 수 있는 100년의 시기를 구분한다는 건 무의미 할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백제, 고구려 멸망 이후 삼국을 통합한 신라의 역사는 크게 세 시기로 나뉠 수 있고,
각 시기마다 시대가 요구하고, 당대를 살았던 사람들이 추구했던 가치는 달랐다는 점이 하나이고,
<부석사 자인당 보존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얼굴이나 전반적인 이미지가 조금은 쇠약하다는 느낌이지만, 광배만 바라본다면 정말 세련된 곡선을 갖추고 있다는 생각이 절로 든다...>
또 하나는 비로자나불과 석불좌상은 예전 신라의 영역이던 경상도 지방과 그 인근에만 파급될 뿐인데,
이 말은 역으로 신라에서 추구했던 기본가치들이 과연 백제와 고구려의 영역이었던 전라/충청지역과
지금의 이북 지역에는 충실히 정착하고 전통이 될 없었다는 한계를 가진 게 하는 의문이 두 번째고,
세 번째, 연화대좌와 광배를 갖춘 석불좌상은 우리나라만의 독창적인 양식이 아닐까 생각하는데,
그런 정도의 비중과 가치를 가진 유물에 대한 이해를 통해 역사적 변화와 흐름을 추적하는 건,
답사여행을 통해 문사철의 향기를 섭렵하고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최소한의 예의가 아닐까 싶어서다...^^
7-1. 통일신라의 시대적 구분...
하나씩 살펴보면, 통일신라는 태종무열왕(654년)부터 원성왕대(785년)까지를 1기로 보고,
다시 원성왕부터 문성왕대(857년)까지를 2기로 보고, 이후 멸망(935년)까지를 3기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내물왕 12대 후손인 원성왕의 등장은 진흥왕부터 이어져오던 진골계의 몰락으로 인한 지배계급의 변화를,
그리고 문성왕 등장은 구백제 지역에 근거지를 둔 장보고 집단 축출로 인한 국제적 역량손실을 의미하는데
후기 신라역사에서 이 두가지 사건은 나라의 흥망을 좌우하는 결정적 사건에 틀림없다.
먼저 신라의 최전성기라 할 수 있는 경덕왕대를 중심으로 한 1기를 살펴보면 ;
당나라 몰락의 직접적 계기(753년 907만호 인구가, 764년 193만호로 당나라 인구 축소)가 된
안사의 난(안록산의 난, 천보의 난, 755년)으로 인해 당나라의 신라 통제정책은 결정적으로 약화되는데,
668년 고구려 멸망과 함께 설치되었다가 676년 나당전쟁이 끝난 이후에도 만주지역으로 옮겨져 유지되던
안동도호부가 폐쇄된 게 754년이었고,
<역사부도에서... 890만호에서 293만호로 변했다는 자료도 있지만, 극심한 변동이 있었음이 확실하다... 추정해본다면, 안사의 난 동안 반란으로 인한 살상외에도 극심한 처형과 상상할 수 없는 학살이 있었거나, 아니면 당나라의 국경이 거의 1/5 수준으로 축소되었음을 상상해 볼 수 있다... 나는 후자의 입장인데 760년대 당나라는 고구려, 백제가 멸망하기 이전, 신라까지 합친 인구수와 비슷했다는 점과, 당태종과 측천무후 이후 150년만에 당나라는 이미 붕괴되고 있었음을 유추해볼 수 있다...>
또한 백제멸망 이후 끊임없이 신라를 괴롭히던(오죽했으면 만파식적과 문무왕의 해저왕릉이 생겼겠는가?)
일본의 후지와라 가문이 최후로 신라정벌 계획을 포기한 시점이 759년이었다는 점을 감안하면,
국제적으로 한반도에 대한 지배권을 확실히 장악하고 대내 발전에 주력할 수 있었던 시점이 바로
750년대 경덕왕 시기였다.
이렇게 정복전쟁으로 인한 영토확장과 인구의 증가, 그리고 대외적으로 안정된 국제정세가 뒷받침 되고,
원효와 의상을 통해 구축된 통치철학을 심화시키려는 노력의 일환으로 당대 세계 최고의 선진국이었던 당나라 뿐만 아니라, 불교의 성지이며 발상지인 인도까지 유학승까지 파견(혜초의 왕오천축국전이 쓰여진 시점이 727년)하는게 자유스러웠다면(이미 100년전 의상은 유학(?)을 떠나지만, 원효는 유학을 포기해도 될만큼의 자생성이 있었다), 이시기 신라는 모든면이 평화롭고 안정된 기반을 갖춘체 내실을 다질 수 있는 조건을 갖춘 셈이다.
<불국사... 보고 또 봐도 좋은... 내가 경덕왕을 좋아하는 이유 중 하나다...^^>
게다가 400년대 초반 눌지왕에서부터 시작한 왕통의 신성화는, 자신들이 부처의 피를 이어받았다는 의미에서 성골과 진골(선덕여왕부터)이라 호칭하게 되었고, 이들이 통치한다는 의미의 불국토를 완성하고자 했던 300여년의 오랜 꿈을 현세에 구현할 수 있는 모든 조건을 갖추고, 당대 최고 수준의 대승불교철학을 완결할 수 있었기에 경덕왕은 스스로 전륜성왕을 자처하며, 그 상징으로 불국사나 석굴암 같은 불교건축을 통해 신라 문화의 절정기를 열 수 있었다. 그래서 당시의 예술적 가치는 부드럽고 우아한 곡선과 비례와 조화를 중시한 균질미, 그리고 단순함과 화려함을 융합할 수 있었고, 그시기에 만들어진 불상들 역시 모든 걸 포용할만한 당당한 권위에 너그러운 포용력과 절제된 자신감을 표현할 수 있었다.
<석굴암 본존불... 내부에 들어가지 못했으니 사진만으로라도...^^>
석굴암을 통해 대승불교의 정점을 구현한 것 외에도, 신라 특유의 독창적 형태의 삼층석탑이 석가탑을 통해 완성된 시점도 이때였고, 인도와 중앙아시아, 중국, 일본에서는 볼 수 없는 광배와 연화대좌를 갖춘 석불좌상들이 본격적으로 만들어진 시점도 이때였으니,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석조예술은 찬란한 전성기를 맞이하게 된다.
<석가탑... 보고 또 봐도 좋은...ㅎㅎㅎ 보고 있으면, 자연스레 미소가 만들어지는 탑이다...>
또한 화엄종의 본존불로 생각하는 비로자나불이 본격적으로 확산되는 시점도 이 때였고, 600년대 전후 등장한 미륵보살 사상이 650년대부터 미륵불 사상으로 승화되면서 진표율사에 의해 구백제 지역에 정착한 시점도 바로 이때였으니, 사상적으로도 다양하고 풍성한 진흥이 이루어져 통불교적 다불전 시대가 가능할 수 있어, 바로 경덕왕대 신라는, 신라 문화예술의 정점일 뿐만 아니라 한국철학이 사상적으로 고착되고 문화적 심성으로 정착했던 시대로 주저없이 꼽을 수 있다.
<예천 청룡사 석조여래좌상... 직접 보지 못했지만, 매우 아름답다는 생각이 든다...>
넘치면 과할 수밖에 없는 게 정치이고 권력일까? 38세의 젊은 나이에 경덕왕이 요절하면서
중앙집권적 신라의 통치체계는 사원경제 집중과 귀족세력이 발호하면서 약화되기 시작한다.
그리고 이것을 주도했던 그룹이 바로 내물왕계 원성왕이었고, 이때 2기가 시작된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경덕왕계의 몰락과 원성왕의 등장은 진골왕통의 몰락뿐만 아니라 신라의 발전동력 상실과 직결됐다.
<세중 돌박물관 석불좌상... 이렇게 좋은 불상은 왜 보지 못했을까? 내가 다니는 게 늘 수박 겉핧기간?>
불행 중 다행이라면 이런 경덕왕대를 전후한 화려한 문화가 짧게 끝나지 않을 수 있었던 이유는,
진흥왕계 진골왕통을 몰아내고 새로운 왕조개창을 표방한 원성왕도 경덕왕 못지않게 대외적 과시를 좋아했다는 점이다. 왕통은 바꾸었지만 경덕왕을 멘토 혹은 경쟁상대로 삼았을지 모를 원성왕은 그의 능에서도 충분히 살필 수 있듯이 개방적이고 호탕한 성격을 가졌을지도 모를 일이다. 그러나 답습과 재현에는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고, 국제관계의 안정은 귀족적인 화려함과 디테일에 대한 집착으로 귀결 됐을지도 모른다(고려의 불화와 청자가 만들어지던 시점, 조선에서 예학논쟁이 극심해지던 시점과 비교해보라)
<괘릉... 원성왕릉으로 추정되지? 아마 원성왕은 저런 이미지를 추구했을지도 모른다...>
또한 남성적이었던 백제 불상이, 미륵보살 사상을 통해 중성화 혹은 여성화(선덕여왕시대) 되어가다가, 훨씬 권위적이고 남성적인 모습으로 확실하게 변화하는 시점이 이 시기가 아닐까 생각되는데, 보편적 가치의 이상화가 현실적이고 세속적인 모습으로 재편되니 원성왕대부터 추구한 이미지는 원융과 포용이 아닌 개척과 변혁의 모습이 아니었을까 생각된다. 즉 경덕왕대까지 만들어지던 1기 신라의 이상적 완성은 새로운 변화를 추구해야만했다. 그러나 그것은 다양한 실험과 과감한 도전이 아닌 답습과 모방의 한계를 벗어나지 못했다.
<고운사 석조여래좌상... 이것도 못본게 아쉽다...ㅠㅠ 신라의 독창적인 광배가 매우 화려하다... 그러나 석불에 비해 너무 크고, 불상의 이미지는 중성성을 떠나 훨씬 경직된 남성적인 이미지로 변했다...>
또한 진골왕통의 몰락은 신분질서에 대한 사회통합이념의 실종을 의미하는 것이며, 이것은 중앙집권체제의 약화로 직결될 수밖에 없었다. 자연이 통일신라 3기에는, 대토지와 대규모 사병을 소유한 지방호족과 귀족들이 본격적으로 정치전면에 나설 수 있는 명분이 만들어지고, 그 혼란기에 전격적으로 부상한 세력이 장보고 선단의 서해해상권 장악인데, 한편으로는 중앙집권적 통치질서의 붕괴를 의미하기도 하지만, 이것은 당나라의 약화와 함께 격변기의 다양한 사상을 흡수하고 선진문물과 일본의 문화까지 섭렵할 수 있었던 계기가 되었고, 결국 신라인들은 선종이란 훨씬 급진적이고 진보적인 사상까지 접할 수 있었다. 이런 이유로 신라는 에밀레종으로 유명한 성덕왕에서부터 장보고가 몰락하는 문성왕대까지 150여년 전성기를 맞이할 수 있었다.
<청량사 석조여래좌상... 내가 본 곳들은 가급적 내 사진만 사용했는데, 광배나 세부적인 디테일이 잘 살아있어 스크랩했다... 920년대... 고운사와도 많이 비교되지?>
그리고 그 몰락의 끝에 등장하는 것이 후삼국시대이며, 더 이상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는 평화롭고 원만할 수 없었을 것이다. 어쩌면 평화와 안정을 위해 그들은 무력을 추구했고, 권력에 집착했으며, 완성과 도전이 아닌 새로운 변혁과 혁명을 추구했을지 모른다. 과거의 영화에 집착하며 디테일에 치중할 수밖에 없었던 시대환경은, 한편에서는 지나치게 화려해지고, 또 한편에서는 지나치게 단순해질 수밖에 없었고, 그 양극화의 정점에 후삼국시대가 위치하기에 그들이 만든 불상과 얼굴은 더 이상 중성적이거나 여성적이어서는 안 됐을 것이다.
<관촉사... 고려 광종이면 940년대다... 불과 3~40년후 고려는 고려만의 불상을 만들기 시작했다... 저렇게 우람하고 권위적이면서도 무서운 눈(?)을 가진...^^>
패기와 무력을 앞세운 남성적 권위... 그 가치는 신라가 멸망하고 고려에 의해 한반도 질서가 재정립되는 900년대 불교예술에 그대로 투영될 수밖에 없었다. 1기의 완성, 2기의 도전, 그리고 3기의 변혁은 그렇게 그들이 표현하고자 하는 이상적인 모습과 형태의 변화를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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