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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 - 心,想,和...

석불좌상 9> 광배와 좌대를 갖춘 석불좌상이 소백산맥을 넘지 못한 이유...1201

 

 

 

 

 

 

8. 광배와 좌대를 갖춘 석불좌상이 소백산맥을 넘지 못한 이유...

 

 

 

 

석불좌상에 대한 생각을 정리하기 시작하면서 오히려 부족함을 많이 느꼈다.

탑만이 아니라 건축이나 가람배치, 부도, 부도비, 석등, 당간지주 등을 비롯해

석불이나 불상도 어지간히 봤다는 오만이 이렇게 하나하나 정리하면서 깨져감이 바람직하기도 하지만,

질적인 면도 그렇지만 특히나 봤다는 양에서는 터무니없이 부족하다는데 한편 부끄럽기도 했다.

 

 

또한 탑이나 불상은 왜? 시대가 흐를수록 발전하고 완벽해지는 게 아니라, 갈수록 퇴화되고 단절되는지?

신라의 고유양식이라 할 수 있는 광배와 좌대를 갖춘 석불좌상은 왜 소백산맥을 넘지 못했는지?

내가 당연하다 생각했던 것들과 분포지역의 지리적 한계를 설정했던 근거를 확인할 필요가 있었다.

하나 덧붙이면 순전히 개인적 생각이지만, 탑과 마찬가지로 불상 역시 경주에서 멀어질수록 신라식의

완성도와 미감이 현격히 떨어지는데 그게 사실인지, 사실이라면 이유가 무엇인지도 이 기회에 정리하고 싶었다.

 

 

<경북대박물관 월파원... 석불좌상과 앙련 상대석은 하부의 좌대와 하나의 조각이었을까? 왜 시대가 흐를수록 이미지와 완성도는 떨어지는 걸까?>

 

 

마침, 예천과 의성 일대에 몇 구의 석불좌상이 몰려 있고, 그곳이 경주에서 안동을 잇는 곳이라 생각한 찰라

답사여행을 떠날 기회가 주어졌고, 나는 과감하게 땡땡이를 기획해야만 했다...^^

더군다나 내 눈으로 확인하지 않고도 이런 글을 계속 끌고 갈 수 있을까 답답했던 게 큰 이유기도 했지만.

아무튼 이번 기회에 복잡하게 꼬인 심사도 풀어볼 겸, 백문이 불여일견도 느껴볼 겸 나서기로 작정했다.

 

 

 

<의성 만장사 석조여래좌상... 참 기분 좋았던 불상이었다... 주지스님도...^^ 만장사는 다음에 따로 글을 만들어 보고 싶다...>

 

 

시간은 없고 보고 싶은 건 많은데, 사실 어디서 무얼 볼 것인가에 대한 계획도 없이 무작정 나선 날...

엄밀히 말하면, 보기 위해 나선 게 아니라, 나섰기 때문에 봤다는 게 맞을지도 모르는 그런 선택이었다.

모든 약속을 오전으로 땡겨 놨는데도 역시 탐색을 위한 식사와 결정없는 좌담은 늘어질 수밖에 없는 일.

결국 또다른 약속을 핑계로 서둘렀지만 세상사 내 계획대로 짜임새 있게 돌아가는 일이 얼마나 있겠는가?!

출발도 늦고, 준비도 없었으니 예천-의성-군위를 하루 일정으로 소화하기엔 애초 무리가 많았다.

 

 

 

<의성 고운사... 앞서 소개했지만 이번에 내 손으로 직접...^^>

 

 

더군다나 예천 청룡사나 의성 만장사는 한국문화유적답사회가 엮은 <답사여행의 길잡이>에도 나오지 않은

관심있는 사람들에 의해서만 소개된 곳들이니, 길도 순탄치 않고 비교적 깊은 곳에 뚝뚝 떨어진 곳들이다.

또 사람이 그리워 지나가는 객들과 이야기 나누고 싶은 스님들과 어울려 차한잔까지 나눌 수 있었으니

한편으론 바쁜 일정이 더 조급해질 수밖에 없었지만, 그런 이유로 차분히 이것저것 주워들을 수도 있었다.

석불좌상들 중에 이렇게 귀한 유물들을 볼 수 있음을 감사하게 생각하며 석불좌상에 대한 글을 이어간다.

 

 

 

 

 

<예천 청룡사의 석조여래좌상과 비로자나불좌상... 주변 여건이 안타깝고 코가 완전히 닳아버린게 너무 아쉽지만 전성기 경주의 손길이 묻어있는 광배와 불상이 매우 뛰어난 작품이라 생각된다...> 

 

 

 

그러면 안동에서 대구로 내려가는 길.. 이 지역에 많은 신라의 유적과 유물들이 만들어진 이유는 무엇일까?

단적으로 말하면 ; 오늘날 우리나라의 모든 길과 택지, 그리고 사람이 활동하는 곳들이 서울을 향하듯,

7~800년대 신라의 모든 길과 사람이 활동하는 곳들은 중국 교역이 용이한 서북쪽을 향하게 되고,

당시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에서도 한강으로 향하는 길목에 모든 문물과 문화가 집대성될 수밖에 없었겠지.

결국 경주에서 팔공산을 거쳐 속리산, 월악산, 소백산을 넘으려면 군위-상주-의성-안동-예천-영주 등을 지나야만 했고, 바로 그런 곳들에는 전성기 신라의 가장 고급스럽고 중앙에 의해 가공된 유물들이 만들어질 수밖에 없었다.

 

 

 

<600년대 신라의 발전경로를 이렇게 표현해도 틀리지 않을까? 이 지역이 7~8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만들어진 신라 삼층석탑과 석불좌상들이 전파되고 보존되고 있는 지역들이기도 하다...>

 

 

또 이렇게 균질한 수준의 탑이나 불상들이 공급되는 시기는 언제였고, 지리적으로는 어디까지였을까?

신라 역사를 보면 간단히 알수 있지만, 신라는 6개부족의 연합체로 시작했고, 6두품 체제로 인해 멸망한다.

성장하는 과정 중 차츰 왕권이 강화되고, 왕즉불 즉 부처의 혈통을 자처하는 성골과 진골까지 등장하면서

약간의 변화가 있었지만, 그들의 시작은 경주였고, 결국 경주를 벗어나지 못한체 명멸한 게 신라왕통이다.

그런이유로 삼국전쟁 전에는 지방호족과 귀족의 자제를 화랑도에 편입시켜 그들을 볼모로 지방을 통제했고,

경주를 위한, 경주에 의한, 경주의 신라는 정치경제만이 아니라 불교와 모든 걸 직접 통제해야만 했다.

그 과정에서 정착되는게 석탑이나 불상, 건축 하나하나가 경주에서 만들어져 지방으로 보내지는 구조였다.

 

 

 

<경주박물관 석조여래좌상... 복식과 좌대를 유심히 살펴볼 필요가 있다... 특히 조각이 없는 중대석과, 상련과 복련의 특징 등에 대해...>

 

 

때문에 전성기 신라시대 만들어지는 탑이나 불상 등은 지역적 특수성보다 중앙의 보편성이 짙게 깔려있다.

한마디로 만든 사람과 자재가 똑같으니 신라의 중앙집권 통치역량이 미치는 지역의 탑이나 불상은 똑같다.

삼국전쟁 이전의 신라영역 중 가야는 정복지에 불과했고, 북으로 상주와 안동까지만 신라에 동화된 지역이었다(삼국 전쟁의 영웅 김유신은 가야의 왕족출신이지만, 당시 신라의 변방인 봉화지역-부석사가 있는 영주에서도 동북쪽으로 올라가야 한다-까지 쫓겨 났다가 이곳에서 확고하게 세력을 만들어 중앙=경주에 진출한 경우다) 

이것이 외연적으로 확장된 때가 경덕왕 집권시기이니, 그때서야 본격적으로 소백산맥을 넘어서게 된다.

그때 만들어진 게, 옛 백제 지역의 지리산 화엄사고, 김제의 금산사, 그리고 청주의 법주사 등등이었으니,

결국 경덕왕 몰락과 함께 더 이상 경주에서 만들어진 탑이나 불상은 타지역으로 전파되지 못했다.

 

 

 

 

<부석사 자인당 석조여래좌상... 가장 아름다운 좌대 중 하나라고 꼽고 있다...^^ 복잡해진 앙련이나 화려한 중대석의 공양상, 그리고 복스럽게 튀어나온 안상속 사장상과 귀꽃이 없는 복련 등을 보면 대략 850년대 전후의 작품이 아닐까?>

 

<평택 심복사 비로자나불좌상... 직접 보질 못해 스크랩했다... 좌대를 감춘 것은 잘못 보존하고 있다는 말이 아닐까 싶은데, 아무튼 옷주름이 약간 도식화 된 걸 보면 부석사보다는 훨씬 후대가 아닐까싶고, 소백산맥을 넘어온 석불좌상 중 아주 온전한 형태를 갖춘 작품이다...> 

 

 

이번 석불좌상만 봐도 나의 추론이 크게 틀리지 않고, 오히려 더더욱 확고한 사실로 다가오는데,

좌대와 광배를 갖춘 석불좌상의 분포는 신라가 발전해 나가는 방향과, 그 경로를 결코 벗어나지 않는다.

한마디로 백제나 고구려 지역의 텃세가 심하거나 그 지역의 정서가 맞지 않아서 만들어지지 않았다거나,

전통적인 신라 영역을 벗어난 곳의 지방 호족이나 귀족들의 수준과 경제력이 따라주지 않았던 것이 아니라,

경주의 왕실을 통해 보호받고 그들의 허락 하에 만들어질 수 있었던 정치적 갈등과 양적 한계도 있었지만,

신라가 정복한 옛 백제와 고구려 지역까지 경주의 문물이 전파되기에는 충분한 시간과 조건이 부족했다.

 

 

 

<경덕왕대 혹은 신라 전성기의 주요 경로... 이제서야 신라는 정치군사적뿐만 아니라 문화와 정신까지 소백산맥을 넘었다고 해도 될까? 그리고 왜구로부터 어지간한 자신감이 생긴 이후에야 울산 창원 등으로 진출하지만 신라인들은 부산까지 충분히 개발하지는 않았다... 요즘의 고속도로망과 비교해보며 생각하는 것도 재밌는 상상...^^>

 

 

가뜩이나 전쟁이 끝난 80여년이 지나서야 소백산맥을 막 넘어섰는데, 경덕왕대 이후 역성혁명을 일으킨

원성왕은 선덕여왕으로 끝난 성골과, 경덕왕의 아들 혜공왕으로 끝난 진골로부터 새로운 명분이 필요했고,

이미 만만치 않은 세력으로 등장한 경주에 입성하지 않은 지방호족들로부터 신라의 정통성도 지켜야했다.

개인적, 이때부터 신라는 왕실과 호족의 타협이 이루어지면서 중앙집권체제가 약화됐다고 생각한다.

더군다나 정복지에 불과한 소백산맥 넘어 백성들에게 중요한 것은 생활이었지 균질의 불교양식이 아니었을터, 원성왕은 탑과 석불 등을 통한 과시가 사치로 보일 것을 우려했는지 백골제 등부터 보완해야만 했을거 같다.

 

 

 

 

<울산 간월사 석조여래좌상... 탑에 정신이 팔려 충분히 관찰하지 못한게 아쉽다...> 

<의성 관덕리 석불좌상... 뛰어난 삼층석탑이 있는 그곳 보호각 내에 있다... 열쇠로 꼭꼭 잠겨서 문틈으로만 엿볼 수 있었다...>

<봉정사에서 찍은 것으로 기억나는데, 자료에는 안성사라는 곳에서 이전해왔다는 설명이 있다... 전체적인 균형과 얼굴의 이미지는 준수해보이는데, 복식은 많이 후대로 내려온 느낌...>

 

 

때문에 경주의 가공장을 통해 집단적이고 체계적이며 일정한 수준을 담보한 탑과 석불등의 제작과 가공은,

이제 명분만 있으면 지방호족들이나 왕실의 친인척등을 통해 지방에서 자체적으로 이루어진게 아닌가 싶다.

물론 그 기간은 일시에 일어난 게 아니라  2대 60여년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이고 이런 타협마저 붕괴된

결정적인 사건이 바로, 청해진에 근거를 둔 장보고 선단의 등장이후부터 급격히 해체된 게 아닌가 싶다.

왜냐하면 장보고선단 등장은 선진적이고 고급스러운 문화가 경주를 통해 분배되는 구조를 붕괴시켰는데,

종교사상과 선진문물을 직접 보급할수있는 장보고상단은 경제적 군사적 토대까지 완벽히 갖췄기 때문이다.

 

 

<축서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호분이라고 하나? 석불에 저렇게 치장한 게 결코 좋아보이지 않는다... 동화사 비로암도 그렇고 청량사도 그렇지만, 어설픈 칠을 벗겨낸 맨살의 석불좌상들... 얼마나 보기 좋은가...^^>

<동국대학교 박물관의 법주사 출토 석가여래좌상... 직접 보질 못해 스크랩했는데, 광배가 없는 석불좌상들을 함께 모아 보겠다는 의도이니 이해해주시기 바람...^^>

<공주박물관의 석조여래좌상... 이 불상도 소백산맥을 넘어온 불상 중 좌대까지 갖춘 몇 안 되는 작품 중 하나다... 연약해진 몸매가 매우 여성스럽게 느껴졌던 불상...>

 

 

실제로 신라 멸망과 직결되는 구산선문 중 최소 7~8곳이 장보고선단을 통해 당나라에 다녀온 유학승이었고,

830년대 신라의 중앙집권 체제는 이미 제 역할을 할 수 없을 정도로 충분히 균열되고 나약해져 있었다.

때문에 경주에서 제작되어 지방으로 보급되던 시스템은 마비될 수밖에 없었고 더이상 만들어질수도 없었다

그리고 역으로, 이 시기 새롭게 유행한 부도탑(승탑)과 부도비는 경주와 상주지방(이 두 지역의 앞자를 따서 이름 붙인 게 경상도다)에 침투될 수도 없었다.

 

 

 

 

<장보고 선단의 주요 활동 경로... 그리고 붉은 색으로 표시한 부분이 장보고 선단과 관련된 구산선문의 위치들이다... 신라말기의 구산선문은 하나를 제외하면 모두 소백산맥을 넘지 못했다... 또한 구산선문이 중흥한 곳에서 후백제와 후고구려는 발호하게 된다...>

 

 

이러한 역사적 근거와 지리적 거리, 그리고 지역적 정서는 석불좌상이나 여타 불교유적에서도 나타난다.

천문사상과 천손사상을 가졌던 고구려인이나, 그의 방계이면서도 국제적 유연성을 가진 백제와 달리

자생적이면서 그런 이유로 배타적이었던 신라인들은 불교마저도 체계적이고 이성적으로 받아들인다.

그런 분석력과 종합력이 있어 전쟁후 신라의 불교를 우리는 <통불교적> <학해불교>라 부르지 않는가.

문제는 중앙집권이 안정적이고 경주를 통한 시스템이 유지되었을 때와 그렇지 않을 때의 현격한 차이다.

 

 

 

<청암사 수도암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석굴암 본존불 다음으로 큰 불좌상이다... 조명이 너무 어두운 게 너무 아쉽고, 그걸 핑계로 좌대를 충분히 보질 못했다는 게 아쉬웠던...> 

<위 아래 두작품은 서울 간송미술관 야외에 전시된 석불좌상 들이다... 어디에서 출토된 것인지 알지 못하지만, 아래쪽은 고려시대 작품 같고, 위쪽은 좌대와 불좌상이 한짝이었을까 의문스럽다... 경주에서 멀어지고, 신라에서 멀어지면 이렇게 변할 수밖에 없었을까?> 

 

 

 

경덕왕을 전후한 700년대, 신라인들은 불교를 가장 이성적이며 체계적이고 궁극적으로 표현할 줄 알았다.

수학적으로 철저하게 계산된 건축적 감각이 있었고, 교리와 이념을 입체적이며 다양하게 구성할줄도 알았다.

그래서 그들이 표현한 불상의 얼굴은 그들이 그리고 싶었던 가장 이상적인 상호가 될 수 있었고,

그들이 만든 탑은 치밀하고 세심하면서도 조화와 비례, 그리고 흐트러짐 없는 정연함을 놓칠 수 없었다.

또한 이런 불상과 탑을 경주에서 만들어 지방에 보급했으니 모든 건 규격화되고 공장생산처럼 일정했다.

 

 

 

 

<홍천 물걸리, 광배가 없는 비로자나불좌상과 여래좌상... 소백산맥을 넘어 각각 4구씩, 이처럼 대대적으로 석불좌상이 만들어진 곳은 원주와 홍천 두곳뿐이다...>

 

<조금 떨어졌지만 강릉에도 석불좌상이 몇구가 있다... 강릉의 보광리와, 삼척 시립박물관에 보존된 고천리 석불좌상이 그것... 역시 스크랩이다...>

 

 

그런데 원성왕이후 장보고 등장까지 60여년간 이런 체계는 무너졌고, 사상을 표현하는 주체도 달라진다.

더 이상 경주는 탑과 석불을 만들어 공급할 수 있는 여력이 없었고, 그 공백은 지방의 호족들에게 넘어간다.

이제 공장형 생산은 중단되고 지방호족들의 취향과 지역마다 내재된 전통이 탑과 불상을 변화시키게 된다.

더 이상 석공과 목공 등은 왕실에서 통제할 수 없었고, 기술자 교육의 시스템도 지방으로 흩어진다.

기술의 전승과 다양한 실험을 통한 발전은 단절되고, 남는 것은 변화가 아니라 재현과 모방뿐이었다.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애초부터 석불좌상은 이렇게 산 위에서 세상을 내려보기 위해 야외에 만들어졌던 것들이 아닐까? 좌대는 800년대 후반을 넘어섰을지 모르지만, 불좌상은 전성기 신라의 모든 기풍을 충실히 전승하고 있는 아주 좋은, 내가 좋아하는 불상 중 하나다...^^>

 

 

 

게다가 장보고등장이후 보급된 선종은 화엄종을 무너뜨리며 과거의 부처가 아닌 현실의 선각자를 찬양한다.

탑이 가람배치의 중심이었다가 석조불상으로 바뀌더니, 이제는 부도탑(승탑)이 이념의 구현체가 된것이다.

이제는 장중한 탑도, 이상적인 얼굴의 부처도 필요 없고, 승탑의 장엄이 중시되기 시작한 것이다.

어쩌면 세가지를 모두 만들어야 하는 과도기에 각각 발휘할 수 있는 공력이 분산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에

800년대를 넘어서서, 특히 850년대를 넘어서면 전성기의 탑과 불상의 미감은 더 이상 맛볼 수 없게 된다.

 

 

 

 

<창녕 관룡사 약사전 석불좌상... 좌대의 조각은 용선대와 완전히 다르지만, 양감은 비슷하다... 고려초기의 작품이다...>

<관룡사 약사전 좌대와 비슷한 느낌을 가진 거제 오량리 신광사 석조여래좌상... 스크랩이다...>

<정림사지 석불좌상... 수인을 찬찬히보면 비로자나불이 아니었을까 싶다... 그런데 불상의 얼굴과 불상의 몸, 그리고 좌대가 과연 한짝이었을까 의구심이 드는 석불이다... 좌대는 매우 부드럽고 유려한 곡선으로 정성스럽게 잘 만들어져 있다...>

 

 

정리한다면, 신라의 내제된 특성과 시대의 변화가 맞물려 경주의 석탑과 석불은 소백산맥을 넘지 못했고,

신라식 석탑과 석불의 완성도는 시간이 지날수록 경주에서 멀어질수록 떨어질 수밖에 없었다.

역으로 소백산맥 바깥쪽에 뿌리를 내려가는 미륵불사상과 새롭게 유입된 선종도 소백산맥을 넘지 못했다.

그들은 여전히 정림사탑을 모본으로 한 오층석탑만 끊임없이 재현하고 있었고, 새롭게 부도(승)탑을 만들었다. 신라의 태생적인 배타성 혹은 폐쇄성이었을까? 아니면 신라의 지역적 사상적 한계였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