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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상 - 心,想,和...

석불좌상 8> 석불좌상 조성과 지역분포 이해를 위한 몇가지 메모(2)...1112

 

 

 

 

 

 

 

 

 

7-2. 광배와 연화대좌를 함께 갖춘 석불좌상은 우리나라만의 고유한 형식...

 

 

그러면 다시 주제로 넘어가서 한반도에서만 유일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광배와 연화대좌와 석불좌상의 조합이 만들어진 시점은 언제부터일까? 인도를 벗어나 대좌에 좌불상이 만들어져 유행하던 시기는 대략 600년경이다. 그리고 그 좌대는 대부분 사각 연화대좌, 사자좌(중국은 부도탑의 시원이라 할 수 있는 사리탑(현장법사탑, 669년)도 사각형에서 출발한다)였다.

 

또한 그들이 굳이 광배를 대좌에 만들지 않았던 이유는 인도나 중앙아시아와 중국의 불상과 좌불상들은 대부분 석굴에 만들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한반도의 지질은 석굴을 조성하기에는 너무 열악한 조건이었던 화강암 지대였고, 그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 신라인들이 지혜를 결집한 게 석굴암(751~770년)이라는 인공석굴의 조성이었다. 그리고 전방후원(전면은 사각형, 후면은 원형)의 인공석굴에서 신라인들은 팔각원당형 연화대좌를 정착하게 된다.

 

 

<국립박물관 석조비로자나불 좌상... 사자좌 형식을 계승한 팔각연화대좌에 아름다운 광배, 그리고 준수한 청년의 얼굴을 한 이 불상은 언제 만들어졌을까? 어떤 시대적 배경이 있어 이런 이미지를 추구했고, 어떤 마음들이 이런 불상을 추존했을까 하는 의문에서 이런 고민을 해보았다...^^>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부분... 저 부처가 눈을 조금만 더 크게 떴다면???^^>

<광배 뒷면을 보면 답답하지 않게 여백은 여백대로, 문양은 문양대로, 그리고 그 크기와 깊이와 비례가 조금 더 가감할 필요가 없는, 꼭그만큼만 조각되어 있다...>

 

 

그리고 석굴에 안치되지 않는, 석굴이 필요없는 독립적인 석불좌상들이 만들어지는데, 그 시발점이 석굴암 본존불이 아니었나 생각된다. 어쩌면 석굴암 같은 대규모 석굴을 만들 수 없는 한계가 광배를 갖춘 석불좌상 조성의 계기가 되지 않을까 싶고, 더군다나 부처의 혈통인 성골과 진골이 거주하는 경주 남산은 불국토의 상징으로서 대대적인 석불좌상들은 조성할 수 있는 성지가 되지 않았을까 추측해 본다.

 

 

<경주 남산 삼릉계 석조여래좌상... 남산을 배경으로 찍은 예전 자료가 있는데 다시 찾질 못했다...>

 

 

 

경덕왕대, 전각외부의 불교행사가 주류를 이루던 통불교적 다불전 시대가 정착하고, 태안마애불이나 경주칠불암처럼 석굴을 벗어나 바위에 마애불을 조성하고 목조의 전각으로 덮을 필요없이, 야외에 독립적으로 석불좌상을 만들 수 있는 가장 적합한 공간이 바로 경주남산이 되었고, 그래서 경주 남산 골짜기, 하늘아래 자연을 배경으로 광배와 연화대좌를 갖춘 석불좌상들은 본격적으로 조성된 것은 아닐까? 이 전통은 앞서 말한 원성왕 이후 신라말기를 주도했던 사원경제와 대토지를 소유한 귀족과 지방호족들에 의해 경쟁적으로 전승된다.

 

 

<내원사 보존 석남암사지(석남암수)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운반과정에서 깍인 등부분 때문에 신체의 양감이 충분하게 느껴지지 못함이 아쉽지만, 충분히 남성화되기 이전, 담백하면서도 여유롭고, 단아하면서도 자신있는 표정을 갖추었다... 볼수록 좋은 불상이다...>

 

 

 

이런 이유로 나는 내원사에서 보존하고 있는 석남암사지(석남암수) 석조비로자나불의 조성연대가 766년이라는데 한표를 주는 것이고, 이보다 앞서 만들어진 것이 경주 남산 미륵곡과 삼릉계 석조석가여래좌상이 아닐까 생각하고 있다. 그래서 광배를 갖춘 석불좌상들을 시대적으로 보면 경주남산 석불좌상들이 먼저 만들어지고, 석남암지, 청룡사, 세중돌박물관 석조여래좌상, 국립중앙박물관, 고운사, 원주박물관, 동화사, 부석사 순으로 만들어진 게 아닐까 싶다. (경주 영지의 석불좌상은 언제쯤 만들어졌을까? 석남암지와 비슷한 초기가 아닐까?)

 

 

 

 

 

 

7-3. 비로자나불과 석불좌상의 지역적 한계.

 

 

그리고 하나 더, 대부분의 석불좌상들은 석가여래와 비로자나불이었는데,

비로자나불은 언제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했을까?

이미 앞서 나는 내원사의 석남암사지 석조비로자나불이 766년에 조성되었다는 기록을 믿는다고 말했다.

그런데 지금까지 대부분의 기록과 안내문들은 이 비로자나불이 9세기 중후반에 만들어졌다고 설명하고 있고, 그 이유는 858년 보림사와 865년 도피안사의 철조비로자나불을 근거로 이야기 하는 게 아닌가 생각되는데, 나는 개인적으로 철조비로자나불이 만들어지기 이전부터 이미 석조비로자나불이 만들어졌었다고 믿고 있다.

 

 

<불국사 금동비로자나불좌상... 최완수씨는 저 얼굴을 경덕왕이라고 봤었지?>

 

 

 

먼저 불국사 비로전의 금동비로자나불은 751~780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고,

(750년대에 만들어진 일본 나라 동대사의 주존불도 비로자나불과 같은 의미의 노사나불이다)

여기에는 통일전쟁 후 신라의 정신적 기반은 정토사상과 화엄종이었다는 점이 근저에 깔려있다.

즉 668년 고구려의 멸망이후 신라는 대중적으로는 아미타여래가 강조된 정토사상과 타협하지만

원효와 의상을 거치면서 소위 <학해불교>의 특성을 가진 신라는 화엄종으로 모든 종파가 체계화되었고,

화엄종의 주존불인 비로자나불은 740년대 경덕왕이 등극하기 이전부터 존재했어야 맞다.

 

 

<동대사 청동노사나불좌상... 일본답사 글에서 이미 충분히 소개를 했지? 누가 주도하고, 누가 지원을 해서 만들었는지? 저 뒤 광배의 화불들에서 백제의 흔적을 느끼려한다면 견강부회가 될까? ㅎㅎㅎ>

 

 

 

게다가 철불의 등장은 석불과는 다른 새로운 유행이 불교문화를 지배했다는 말이 된다.

(백제의 목조불, 신라의 석조불, 고려의 철조불이 있듯이, 조선시대에는 소조불 조성이 주류를 이룬다)

그 유행이란 막강한 경제력을 갖춘 장보고 선단의 등장과 그를 통한 진보적인 선종의 확산,

대규모 토지와 사병을 거느린 귀족들이나 지방호족과 대토지를 소유한 사원이

백성들을 정치사상적으로 장악하고 과시하려는 욕구와 필요가 있어 가능했던 일이다.

 

 

<충주 대원사 철불좌상... 얼굴부터 이미 신라인들이 좋아했을 이미지가 아니라면, 이것도 견강부회일까?ㅋㅋㅋ>

 

 

즉 불상을 만드는 소재의 변화는 일회성 이벤트나 부분적인 실험의 소산이 아니라 민중들의 감흥과 욕구가 있어야 가능한 것으로, 800년대 중반부터 만들어지기 시작한 철불은 호족들의 무장해제를 꾀하기 위해 철제 무기들의 수거와 폐기를 주도한 고려 성종(987년)대 가장 왕성하게 만들어진다(갑자기 철 생산이 급격히 늘어난게 아니라, 그런 정치적 이유로 불상을 제작할 만큼의 철의 공급이 가능해진 것이다). 결국 철조비로자나불이 먼저 만들어지고, 불상조성 양식을 근거로 석남암지 석조비로자나불 조성시기를 860년대로 추정한 최완수 선생의 주장은 받아들이기 어렵다.(나는, 최완수 선생 팬인데...^^)

 

 

<같은 철불이라도 신라의 흔적이 남으면 이런 표정이 되나?ㅎㅎㅎ 백제지역이었던 전라도에 만들어진 몇 되지 않은 비로자나불이며, 철불이다... 보림사나 도피안사를 닮아 몸매는 많이 날씬해졌지?^^> 

 

 

 

 

 

 

그리고 마지막, 비로자나불과 광배와 연화대좌를 갖춘 석불좌상은 통일 이전의 구 신라지역을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앞서 말했듯이 화엄종의 주존불은 비로자나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장보고이후 선종의 급격한 확산에도 불구하고 선종에서도 비로자나불은 주존불의 위상을 놓치지 않았다. 이유는? 선종이 추구했던 깨달음의 본질인 불성을 가장 완벽하게 표현하는 것을 비로자나불로 보았기 때문이다. 그런 이유로 중앙집권적이고 보수적 이념의 표상인 비로자나불은 혁신과 진보를 표방한 선종이 대세를 이루던 시점에도 아이러니컬하게도 주불로서 존재할 수 있었다.

 

 

<원주박물관의 석불좌상... 나는 이 광배를 보면 자꾸 예천 청룡사 광배가 연상된다... 매우 아름다운 광배를 갖춘, 그리고 매우 세련된 조각솜씨를 갖춘 석불좌상이라는 생각엔 변함이 없다...>

 

 

 

그러나 이 비로자나불뿐만 아니라 연화대좌를 갖춘 좌불상은 구 백제지역에서는 거의 만들어지지 않았다. 꼽아볼까? 장흥 보림사 철조비로자나불, 광주 증심사 철조비로자나불, 공주박물관의 석조불좌상 3기, 평택 심복사, 그리고 정림사지... 경상도 지역 어디에서도 볼 수 있는 비로자나불과 연화대좌를 갖춘 좌불상의 빈도에 비하면 1/10도 채 되지 않을 거 같다. 이유가 뭘까? 250여년이 지나 다시 후백제가 군림하는 이 지역에는 신라의 통치철학이라 할 수 있는 화엄종과 중앙집권적 교종세력, 그리고 비로자나불 사상에 의한 통합을 그들이 거부했거나, 여전히 신라의 통치체계가 완벽하지 못했을 수 있다는 생각을 하게 한다.

 

 

<공주박물관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백제지역에 석조로 만든 거의 유일한 비로자나불중 하나일 거 같다... 사자좌, 복련, 몸태와 복식을 보면 800년대 초반에 만들어진 게 아닐까 생각된다...>

 

 

 

그들에게는 경덕왕대 진표율사에 의해 이미 미륵불 사상이 정착하기 시작했었고, 그들의 문화적 습성은 연화대좌를 갖춘 석불좌상을 달가워하지 않았을지 모른다. 결코 짧지 않은 신라의 통치에도 불구하고 그들은 끊임없이 이방인이었을까? 그들은 그때까지도 백제식 오층석탑만을 고집하고 있었고, 불국토가 아닌 새로운 미륵세상을 구원하고 있었으며, 장보고처럼 경주보다는 중국과 일본에 더 많은 관심을 가지고 있었을지도 모른다. 그리고 그 배타성이 있어 당대 가장 선진적이고 진보적인 선종을 가장 빨리 받아들이고 대대적으로 보급한 게 아닐까? 무슨 이유로, 도대체 무슨 힘이 있어 그들은 끝없이 신라가 아닌 외부를 지향했을까?

 

 

<정림사지 오층석탑... 나는 이 탑을 볼 때마다 꿈을 꾼다... 아득하고 아련한 꿈을...^^>

 

 

 

자신들의 왕족과 전통적인 지배계급은 일본에 백제본국을 넘어선 영화를 누리며 정착하고 있고,

형제였던 옛 고구려인들은 그들의 옛터전인 만주지역에서 발해국을 만들어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있고,

결국 백제 본국에 남았던 그들의 꿈을 담기에, 팔각원당형의 연화대좌는 그 크기와 넓이가 너무 비좁았을까?

과거 그 지역에 그대로 살던 옛 백제인들은 또 다른 꿈을 꾸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국립중앙박물관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이 불상이 보고자하는 것을 모두가 보았을까? 그가 응시하는 곳을 모두가 공유했을까?>

 

 

나라의 이름과 통치자가 바뀌어도 그 지역의 정서와 고유한 전통을 몸으로 체득한 민초들의 염원은 늘 그렇듯 질긴 생명력을 가지고 유지될 수 있었고, 또 역으로 비로자나불과 광배와 연화대좌를 갖춘 석불좌상이 경상도 지역을 중심으로 집중적으로 조성되고 유지되었던 이유가 되는 건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