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내가 왜 이곳을 택했지? 사진으로만 봤지만 만장사 석조여래좌상의 첫 느낌이 좋았다는 게 하나고,
군위에서 의성, 예천으로 이어지는 지리적 흐름을 눈으로 보고 싶었던 게 또 하나고,
무엇보다 군위 삼존불을 지나 예천 등지로 이어지는 석불좌상의 변화를 보고 싶었던 게 세 번째 이유였다.
그래야만 군위 인각사, 김천의 갈항사터나 수도암, 구미 해평동, 상주 용화사, 복룡동, 남장사와
예천의 청룡사, 용문사, 한천사 그리고 영주의 흑석사나 백룡사, 영양의 연당동까지 바라볼 수 있다.
짧게 몇 개만 골라야 하는 시간적 한계 때문에, 흐름의 길목이고 중간쯤이라 선택한 이유가 의성이었다.
<의성 만장사 석조여래좌상... 깨진 광배가 아쉽지만, 땅 속에 묻혔던 부분은 너무 온전하게 보존되었다...>
<의성 만장사 위치와 경주를 중심으로 광배와 좌대를 갖춘 석불좌상(여래불과 비로자나불이 대부분이다) 분포도... 아래쪽까지 모두 나타나게 할 걸 그랬다...^^>
지금은 시원시원한 4차선 도로로 막힘이 없고, 밟으면 밟는 대로 나가는 차가 있어 불편하지 않지만
조금만 시선을 돌려도 첩첩산중인데 과연 신라시대에는 이런 길로 군마를 거느린 대군이 지나갔을까?
신라의 확장과 명멸을 이어간 왕조들의 역사속 전쟁과 대립을 느껴보긴엔 너무나 한적하고 조용한 곳...
의성 만장사로 가는 길은 의성군청이 자리한 곳에서 상주로 길목 작은 마을, 다시 산속 깊은 곳에 있다.
<만장사 석조여래좌상 상호...>
<빛에 따라, 마음에 따라 다양한 느낌을 갖추고 있다... 한마디로 표현하기엔 아쉬움... 그래서 좋았다...^^>
제법 가파른 길, 길고 만만치 않은 거리에 차 한 대 간신히 지나갈 수 있는 좁은 길을 어서어서하며 오른다.
예천 청룡사만큼 가파르지는 않지만, 옛날 신라인들이 오르려면 작심을 하고 땀을 뻘뻘 흘려야 할 위치다.
만장사에 석조여래좌상이 만들어질 때, 더 이상 도심 생활속에서 구복과 수양의 공간으로 안주하지 못한
불교는, 계율과 종단의 시스템에 의해 신성과 권위로 경배해야할 대상이 되어 고행을 요구했기 때문일까?
하나를 보면서 넓게 생각하고자 잡은 행선이지만 생각보다 외지고 깊고, 높다는 느낌을 떨칠 수 없다.
<의성 만장사 위치... 분포하는 마을이나 전답보다 산이 많지? 지금은 저렇게 길을 냈지만, 예전에는 어떻게 다녔을까??^^>
<만장사 뒤로는 화장산에 오르는 등산로가 있는 듯...>
만장사에 다다라 보이는 성벽 같은 축대...
이곳에도 산성이 있었나? 그렇게 만들어진 것치고는 너무 낯선데?
아니다. 새로 손을 대면서 축대와 성벽의 치 같은 돌출부위도 생긴 걸 보니 엄청난 공력이 투여된 듯...
<만장사 올라가는 길... 부석사 같은 신라식 석축도 아니고, 조선식도 아니고, 그렇다고 일본식도 아니고...? 아무튼 대단한 정성과 공력이 보태진 게 공공한 느낌을 준다...>
그 위로 일자형으로 배치된 전각들이 보이고 작은 삼층탑과 4그루의 소나무에 가려진 대웅전이 보인다.
새로 지은 전각이나 엄청난 축대를 보면 꽤나 신경을 썼다는 느낌이 드는데 대웅전 앞에 웬 소나무?
비닐로 방풍 작업을 하시려던 스님의 안내를 받아 석불좌상의 내력을 들으며 편안하게 사진을 찍었다.
나중에는 차까지 마시면서 만장사를 가꾼 이력과 정황을 이해할 수 있는 행운까지 누리면서...
<대웅전 앞에 소나무가 있는 경우도 있나? 특이하다는 느낌도 있지만 그 이유를 나중에 알았다... 그래도 이곳 석축은 주차장쪽보다 훨씬 보기 좋다... 오후에 올라갔기에 역광이었다...>
2.
IMF 전이었죠. 이곳이 제법 기도 강하고 명당자리라는 이야기를 듣고 몇 번을 오르다가
40대 후반 나이에 모든 걸 이곳에 걸고, 불사를 위해 인수하려 하는데 터무니없는 가격을 제시하는 거요.
주위 사람들에게 아무리 들어봐도 과하다싶어 포기할 수밖에 없던 날, 꿈을 꾸었지요.
스레트로 지어진 작고 낮고 허술한 불당에 들어섰는데 가운데 젊은 스님이 한분 서계시는 거요.
그래서 생각했지요. 포기한 게 너무 아쉬워서 꿈에서도 이곳에 들어와 보는구나 생각도 하면서...
<석불좌상을 향한 조명... 마음에 든다... 이것도 정성이다...>
같은 중이기도 하고 남의 법당에 들어갔다 생각해선지 내가 나이도 많지만 먼저 인사를 드렸답니다.
그럴 수도 있겠다 싶어 그랬는데 그 젊은 스님은 맞절도 하지 않고 나를 무시 하지 뭐요?!
이건 아니다 싶었지만 가만보니 나이는 젊지만 나보다 법력도 높으신 거 같고,
뭔가 범하기 어려운 느낌도 들고해서 삼배를 올렸지요.
그래도 이 젊은 스님은 나를 본체도 안 합디다. 너무 하신다 싶었지만 너무 도도하고 근엄하게 계셔서
할 수없이 스님, 법당 한번 둘러봐도 되겠습니까? 물었더니 처음으로 고개를 끄덕이며 댓구를 하시데요.
(그때 그 젊은 스님이 뭐라고 하셨다는데, 내가 잘 기억을 못하겠다...^^)
<풍만하면서도 안정적이고, 모든 면이 비례를 갖추고 조화로웠다... 광배는 내원사나 청룡사, 원주박물관 실내 석불좌상과 비슷하지?>
그래서 스님 뒤로 들어갔는데, 그 뒤가 의외로 넓지 않겠소?
허허~ 이런 곳을 내 몰랐구나 싶어 그 젊은 스님에게 물어보려는데 홀연히(!!!) 사라지셨지 뭐요.
참 희한한 일이다 싶어 다시 둘러보려는데 스님이 서 계시던 자리에 갑자기 불이 붙기 시작 한 거요.
깜짝 놀라, 불이야~ 불이야를 외치며 서둘러 법당 밖으로 뛰쳐나올 수밖에 없었다오.
생각해도 웃기지요? 꿈이라 생각하고 꿈속에 있다고 느끼고 있는데 살아야겠다는 마음이 들었다는 게?!
밖으로 뛰쳐나와 발을 동동 구르는데, 갑자기 큰 불로 바뀌면서 그 집이 훨훨 타는 게 아니겠소?!
그렇게 활활 타오르는 불빛이 너무 좋아, 야~ 장관이다는 생각에 불을 끈다는 생각도 못하다가
갑자기 꿈에서 깼죠. 그런데 너무나 기분이 좋은 거요.
이건 길몽이다, 내 인생에서 최고로 기분 좋은 꿈을 꾸었구나 생각하다가 결심을 했지요.
그래서 남들이 미쳤다고 말하는데도 당장 올라가 계약을 하고 말았지요.
(내가 생각해도, 시세보다 100배는 더 비싼 값에 현재 만장사 중 일부 부지를 인수하신 듯 싶었다)
<좌대까지 온전히 남아있어 참 좋았다...>
3.
그런데 지금 보이는 저 부처님은 가슴 위쪽만 살짝 드러난체, 낮은 높이의 스레트 지붕으로
대충 비만 가릴 수 있는 허술한 건물만 있어 다시 짓고 싶은데 내가 인수한 땅은 얼마 되지 않은데다,
이 곳까지 차량이나 장비가 올라올 길도 없었고, 더군다나 불상을 파 봐야겠다는 엄두도 못 냈지요.
생각해봐요. 나는 땅만 샀지, 막상 파보려니 아랫마을 사람들은 옛날부터 마을의 수호신이었다 말하고,
이 근처 일대가 전부 문중 땅이고 그들이 길을 내주지 않으면 안 되니 내세울 게 뭐가 있겠소?
그래도 주장했지요. 이건 당신들이 마을 수호신으로 만든 게 아니라 신라시대 불상이고 여긴 내 땅이다.
안 되겠다 싶어 부처님 사진을 찍어 문화재로 지정해달라고 사방을 뛰어 다니는데 들은 척도 안 합디다.
문화재로 지정돼야 정부 지원도 받고, 길문제도 해결될 수 있겠다 싶었는데 정말 아무것도 할 수 없었지요.
그렇게 길 문제로 7개월이 지나고, 다시 부처님 발굴하자고 4개월이 지나 아무런 진척이 없었는데
문중에서 옆에 ***을 만든다고 길문제가 해결되더니 마을사람들도 부처님을 파보자고 합의를 해주는거요.
게다가 문중에서 데려온 지관이 현재의 만장사 부지는 너무 기가 쌔서 ***부지로는 적합하지 않다고 말하니
더 이상 땅문제와 부처님의 관리 문제는 거론하지 않기로 합의가 될 수 있었지요.
잘 됐다 싶어 길이 나는데로 장비를 불러 불상을 파려는데 어디서 소문을 들었는지 신문기자들이 왔지요.
그래서 지방신문에 국보급이니 보물급이니 사진이 실리더니 갑자기 문화재로 지정해주겠다는 거요.
어리둥절한 사이 그런 제안이 들어오니 통도사 **스님께 사진을 들고 다시 자문을 얻으러 갔지요.
그랬더니 소유와 관리의 문제를 해결하기 전에는 보물급으로 지정 받아서는 안 된다는 거에요.
내가 예천 청룡사에 대해 언급하자 이 스님도 그곳 보살님과 만나봤다며 사정을 잘 알고 계신 눈치였다.
나도 그곳 스님을 만나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는데, 본래 청룡사에는 석조비로자나불좌상만 있었단다.
그런데 인근 소백산 중턱에 광배와 좌대까지 온전히 갖춘 석조여래좌상이 방치되어 있었고,
이 불상을 예전에는 청룡사의 말사였던 **사에서 사세 확장과 함께 이 석조여래좌상을 운반하는 도중,
벼락이 치고 나무가 부러지면서 길이 막혀 일꾼들이 놀라 도망가고 땅속에 묻힌 게 일제강점기였다고 한다.
<예천 청룡사 석조비로자나불좌상... 애초부터 청룡사에 있었던 불좌상... 본래 있던 자리에서 10m 위쪽으로 이동되었고, 사각좌대를 갖췄다... 석조여래좌상도 그렇지만 코가 완전히 닳아 상호의 이미지가 살질 못해 아쉽고...>
<문득 눈에 들어왔는데 석조여래와 너무나 비교됐다... 발바닥이 추우셨는지 소매자락으로 덮었지?^^>
다시 해방후 청룡사 인근에서 무속인들이 그 불상을 발굴하여 지금의 자리에 함께 봉안하게 되었는데,
정작 보물로 지정을 받고 정부의 지원을 받아 법당을 신축하려 했는데 땅 소유주의 동의를 받지 못해
결국 지원자금(3억으로 기억한다)은 국고로 환수되고 처음 관리하시던 보살님도 사망하면서
지금처럼 초라한 불당에 아무도 기억해주지 않는 보물로 방치되고 있다는, 똑같은 이야길 다시 들었다.
아무튼 그런 경험과 기억들 때문에 이 불상은 보물급임에도 불구하고 지금처럼 유형문화재로 등재되어 있다.
<예천 청룡사 석조여래좌상... 광배까지 완전한 모습에 모든 게 완전했지만, 현재 제대로 보존 관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이곳을 관리하시는 스님은 무속인들이 한 법당에 모셔 한곳에 같이 봉안된게 못내 아쉬웠겠지만, 내눈에는 이처럼 뛰어난 보물들이 행정적 절차와 당국의 무관심에서 방치되고 있는 것이 더욱 안타까웠다... 석조여래좌상이 보물424호고, 옆에 있는 비로자나불이 보물425호다...>
<위쪽의 비로자나불과 달리 이 불상은 이렇게 발가락을 노출시켰다...ㅋㅋ 고무장갑을 낀듯 두툼한 손을 봐선지 생동감이 많이 떨어진 느낌...>
4.
다시 만장사로 넘어간다.
부처님을 파려고 침봉으로 눌러보니 하반신과 좌대까지 모두 완벽하다는 느낌이 들었는데
주위의 소나무 뿌리가 불상과 좌대를 조금도 침범하지 않았던 거 아니오?
워낙 뿌리가 질기고 넓게 퍼져가는 소나무라 부처님을 파면서 모두 잘라버리려고 마음먹었었는데,
이게 아니다 싶어 원래부터 있던 소나무를 부처님 수호신인 사천왕이라 생각하고 그대로 살리기로 했지요.
이 소나무들이 앞을 가로막고 있어서 홍수에 유실되지도 않고 벼락을 맞지도 않았겠다는 생각 때문이었죠.
그래서 대웅전을 새로 지으면서도 이 소나무들만으로 그대로 보존한 거지요.
<대웅전 앞의 네그루 소나무... 만장사는 밀도 있는 가람배치를 이루지 못했지만, 대체로 경사를 고려한 긴 일자의 병렬적 구조다... 높낮이와 전각의 크기로 운율을 살릴 수 있을텐데 하는 아쉬움이... 억지로 비슷한 곳을 고르라면 강화 전등사가 생각나는데 그쪽은 크기와 높이, 그리고 깊이를 달리해 아기자기한 재미를 붙였는데, 이쪽은 호방한 기상을 우선으로 하나씩 불사를 이어간 결과가 아닌가 싶다...>
그럼 이런 축대들은 스님 혼자 생각으로 다시 만드셨나요?
아니에요~ 그때는 이미 문화재 위원들과 이름있는 스님들이 고증을 통해 지금처럼 자리를 잡았지요.
그리고 어디 법당에 가도 지금처럼 부처님이 잘 보이도록 조명을 한 곳이 없지요?
사실 그렇다. 대부분 사진촬영 금지가 붙은 명승지들도 그렇지만 최근의 용화사나 어디에도
의성 만장사처럼 불상이 잘 보이고 어울리게 조명이 의도적으로 설치된 곳은 없었던 거 같다.
<바라보는 쪽에서 왼편의 위주로 조명이 설치됐다... 관리하시는 주지스님의 입장에서 심사숙고한 결과다...>
한번은, 지금은 돌아가셨지만 관조스님이라고 사진으로 많은 문화재를 소개하셨던 분이 오셨지요.
네~ 저도 그분 사진 몇 번 접해봤습니다.
부석사나 다른 여래불처럼 이 부처님도 동쪽을 바라보게 자리 잡고 계시지요.
(그래서 처음 대웅전으로 올라오는데 역광이 될 수밖에 없었구나^^)
관조스님도 사진은 자연광이 최고라며 해 떠오르는 시간에 맞춰 사진을 찍으셨지요.
(사실 동쪽이나 서쪽을 향한 불상사진은 춘추분때, 오전 9시부터 10시 반까지 빛온도가 제일 좋다)
<반대편도 약한 조명을 두어 또 다른 느낌이 살 수 있도록... 법당 내부의 불상에도 이런 정성이 있어야...^^>
그리고 우리 부처님께 많은 애정을 가지셨던 문화재 위원 김**교수님도 많은 지원을 해주셨는데,
그때 관조스님과 김교수님이 사진을 찍을 때 빛의 방향을 유심히 봐두었답니다.
그래서 지금처럼 조명의 방향과 밝기를 조절해 가장 좋은 모습이 나오도록 조명을 설치했지요.
사실 그렇다. 예전에 서산마애불이 보호각에 있을 때도 조명의 방향에 따라 본존불의 미소가 달라졌으니까.
더군다나 자신의 모든 걸 바치겠다 마음먹은 분이 나름의 식견과 전문가의 도움까지 청할 줄 아셨으니
지금처럼 참 기분 좋게 설명도 해주시고, 불도 켜주시고, 이렇게 편안하게 보여주시는 게 아닐까...
<디카로 찍으면 왜 이렇게 색이 달라질까?>
필름 카메라로, 디지털 카메라로, 다시 핸드폰으로 여기저기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석불좌상을 관찰했다.
가슴 위쪽으로만 노출되었으니 그 위로 올라왔던 광배는 손상을 이미 받을 수밖에 없었겠구나 이해됐고,
그 밑으로는 온전하게 보존된 석불좌상과 좌대를 볼 수 있었다. 아쉽다면 지대석이 깨져 있었다는 점.
안상만 새겨진 지대석에 아직 사자상은 조각되지 않았고, 여덟 잎으로 구성된 복련은 크고 탐스러웠다.
<그리고 이건 핸드폰으로 찍은 거다... 필름과 디카와 핸펀의 색감이 이렇게 다르다...^^ 아무튼 좌대를 유심히...>
중대석에는 우주만 새겨져 있어 역시 공양상이나 비천상 등 조각이 전혀 없어 늦지 않은 시기라 생각되고,
앙련은 연꽃잎의 모양을 살리지 않고 둥글게 처리했는데 춘천박물관의 원주출토 석조비로자나불 좌상과
법주사 쌍사자 석등의 앙련의 중간쯤 형태로 생각되는데, 아무튼 원주쪽 불상들과 비슷하다는 느낌이었다.
<만장사 석불좌상의 복련은 동화사 비로암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 복련과 비슷하지? 중대석과 상대석/하대석에는 돌출된 괴임이 층급을 이루어 만들어져 있는데, 공력의 문제보다는 조금더 화려하게 치장하려는 의도에서 만들어진 게 아닌가 싶다... 동화사 비로암 삼층석탑이나 이곳 만장사 삼층석탑은 지붕돌 층급받침이 똑같이 4단으로 이루어져 있어, 시대적으로 많은 차이는 없다고 생각된다...>
<국립중앙박물관의 석조비로자나불좌상의 좌대... 복련은 이것과 더 비슷할까? 이곳 지대석에는 동화사 비로암과 달리 사자상이 조각되어 있고, 앙련의 문양은 만장사와 비슷한데, 연꽃잎의 형상은 만장사보다 사실적이다...>
<앙련 연꽃잎에 문양이 꽉찬 춘천박물관의 비로자나불좌상 상대석... 만장사와 비슷한 느낌일까?>
<법주사 쌍사자 석등 상대석 앙련... 진표율사가 활동하던 경덕왕대 만들었을까? 아니면 경덕왕 사후 700년대 후반에 만들었을까? 아무튼 석불좌상을 받치던 앙련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문양이 있었고, 이 앙련처럼 둥글둥글한 기하학적 무늬로도 표현되었었다... 다음, 좌대에 대해 살펴볼 때 다시 이야기해보자...>
5.
마당으로 나가 볼까요? 부석사가 하나의 멘토였을까? 아니면 최근 수덕사나 영암사지가 모본이었을까?
신라말기의 작은 삼층석탑이 조심스럽게 서있는데 석축으로 넓혀진 마당이 확 틔인 느낌이어서 좋았다.
이 삼층석탑도 다시 세웠고, 저쪽에 불사를 하다가 여기저기서 모은 석재들을 모아뒀다오.
자세히보면 안동의 옥동 삼층탑처럼 기단부 판석에 낙수면이 선명하고, 지붕돌들은 사단 층급받침이다.
부재들을 모아놓은 곳에 가보니 석등 화사석 부재도 있고, 석탑의 지붕돌도 하나 더 있고, 기단석도 있다.
<의성 만장사 삼층석탑...>
<너무 많이 훼손되었지만, 기단부 판선의 낙수면은 적극적으로 표현되었다... 그때 스님은 부재가 없어 기단부 면석과 왼쪽 판석을 제대로 맞추지 못했다 하셨는데, 왼쪽 부재는 뒤집으면 맞지 않았을까?>
가만 생각해보면 이곳에는 삼층 쌍탑이 있지 않았을까?
현재의 석조여래좌상은 처음에 팠던 그 자리를 유지했지만, 그 높이는 약간 변동이 있었을지도 모르겠고,
석등까지 있었다면 현재 석탑의 위치와 높이도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문화재 위원들이 고증하면서 이런 부재들까지 고려했다면 어떤 느낌으로 바뀌었을까?
제 부재를 찾지 못한 기단부 판석과 탱주가 새겨진체 방치된 면석을 보면서 예전의 배치를 상상해 본다.
<한곳에 모여 있는 부재들... 석등 간주석으로 보이는 것도 있고, 석탑의 지붕돌 위에 있는 건 석등의 화사석으로 보인다... 내가 쌍탑 운운했던 근거다...^^>
<이 부재들은 기단부의 지대석과 면석이 아니었을까? 조금만 더 신경썼다면 어땠을지...>
삼층석탑과 저 앞산의 봉우리가 일치하지요? 저 봉우리가 탐관봉이오... 탕관봉요?
나의 되물음에 탐관이라 정정하신다. 관리를 지칭하는 탐관이라는 말이 있잖소.
(전라도 귀에 경상도 말씨가 쉽게 들어오질 않는다. 게다가 탐관은 탐관오리의 준말이 아닌가??)
그리고 저 앞 산 전체를 나는 일자봉이라고 이름을 붙였다오.
그러고보니 한일(一)자에 마음심(心)자로 충분히 보일 수 있는 능선이네?^^ 견강부회다.
<스님이 손가락으로 써 준 것을 그려봤다...ㅋㅋ 한편, 心부위를 옆으로 보면 와불처럼 보인다는데 그건 잘...??>
一心(일심)은 無心(무심)이요, 無心(무심)은 佛心(불심)이라... 바빠도 차 한 잔 나누고 가시지요?
건너편 산이 시원하게 보이게끔 전망창으로 꾸며놓은 사채에 앉아서 일심봉과 탐관봉을 바라본다.
이런저런 이야기에 당신이 살아오고 선택한 일들, 그리고 만장사의 현재를 스님의 얼굴을 통해 느껴본다.
간절함과 애정, 그리고 관심과 의욕이 있고, 여기에 나름의 식견과 열린마음들이 있어 오늘이 있었겠지.
안으로 곧고, 밖으로 넓게 사시려는 모습이 좋다 보인다.
그 분 이름이 대관스님이다.
<의성 만장사 대관스님... 허락도 받지 않고 이렇게 사진을 올려도 될까요?? 갈등입니다...>
스님 사진 한 장 찍고 싶은데요?
허허~ 나를요?
하하~~~ 스님밖에 안 계시잖아요. 제가 이건 꼭 인화해서 보내 드릴께요. 주소 좀 불러주세요...
그리고 다음에 식구들 데리고 한번 놀러 올께요...
어제 전화가 왔다.
카메라가 다른가요?
네~ 필름으로 찍었습니다.
부처님 얼굴 사진 중에 가슴이 더 나온 거 없나요? 여러장 있으면 나눠줄 수 있을텐데...
허걱~~~ 얼굴에만 필이 꽂혀 상반신을 다양하게 찍은 게 없는데??
그렇다고 다른 사진을 트리밍하면 해상도가 뚝 떨어질텐데...
네~~~ 한번 찾아볼께요...
안 커도 되니까 부탁합니다.
스님과 통화해본 적이 없어선지 어떻게 마무리 인사를 해야할지 난감했다.
6.
오랜만에 참 좋은 얼굴을 바라본다.
풍만하면서도 원만한 느낌에 부드러움과 넉넉함을 담았다.
정면에서 바라보면 통통하게 오른 볼살 때문에 스님의 꿈에 나타났다는 젊음도 느껴지고,
너무 편안한 자태 때문에 세상물정 모르는 부잣집 도령 같다는 느낌도 없진 않지만,
지긋이 내려 깐 시선은 고요하고 그지없고,
다문듯 연듯 포개진 입술은 맑은 미소를 머금고 있다.
전체적으로 넉넉한 양감도 좋다.
복식도 백룰사 금동 약사여래 입상과 똑같은 통견양식에, 안에 받쳐 입은 승각기와 매듭까지 살아있다.
건장한 어깨에 비해 조금은 짧게 느껴지는 손과 좁아진 가부좌지만 전혀 어색하지 않고,
무엇보다 항마촉지인을 하고 있는 부처의 오른손, 마지막 새끼손가락이 살아있는 것 같아 좋다.
자칫 풍만하게만 보일지 모를 불상이 이 작은 하나의 손짓으로 생동감을 얻었다면 비약일까?
꼿꼿이 내린 검지손가락 하나로 지상의 모든 마를 제압했다니 나만의 지나친 비약은 아닐 수도 있을듯...^^
<사진을 찍다가, 저 새끼손가락을 보면서 속으로 한참 웃었다... 좋아서...ㅎㅎㅎ 아마도 이 불상을 조각했던 석공은 저 손가락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심했을지도 모른다... 조금은 짧게, 그래서 살짝 치켜든듯 보이는 저 손가락에 그 석공의 흥을 담았는지도 모르겠다... 다른 석불들과 달리 아주 자연스럽고 재치있어 보였다...^^>
통통한 얼굴을 보면 동화사 비로암도 생각나고, 중앙박물관 비로자나불도 생각나지만
창녕 관룡사 용선대의 석조여래좌상이 제일 먼저 떠오른다.
같아서가 아니라 너무 달라서...
한쪽은 모진 풍파를 감내하면서도 풋풋한 미소와 권능을 잃지 않은 초연함이 배어있고,
또 한쪽은 세상사와 단절된 온실 속에서도 모든 걸 담을 수 있다는 여유와 원만함을 잃지 않은 느낌...
<창녕 관룡사 용선대 석조여래좌상... 통통한 얼굴로 따지자면 비슷한 유형인데, 느낌은 정반대였던 불상... 땀 흘리며 올라가 노천에서 찬연한 햇빛속에 있는 불상과 느긋하게 차로 올라가 전각속에 편안히 모셔진 불상의 차이였을까? 아무튼 같으면서도 다른 느낌...^^>
참 맑아서 좋고, 밝아서 좋다.
석굴암 본존불처럼 근엄하지도, 보리사 석불처럼 준수하지도, 도피안사 철불처럼 소박하지도,
법륭사 담징의 그림처럼 무심하지도, 서산마애불처럼 천연덕스럽거나 장난스럽지도,
충주 미륵사지처럼 순박하지도, 삼화령 애기부처처럼 순진하지도 않지만
살포시 깨문 미소가 발랄한 향기처럼 느껴져 좋다.
조금만 더 내력이 쌓였다면, 조금 만 더 깊었다면 원융무애의 미소가 될 수 있었을까?
아직은 젊지만 그럼에도 평화롭게 보여서 참 편안하다.
이제 세상에 모습을 다시 드러낸지 십여년...
이곳을 지나던 천여년의 염원들에게 작고 밝은 평화로 간직되길 바란다.
<대관스님처럼 저 앞산을 오랫동안 지켜보면 나도 와불을 보게 될까? 일심은 무심이요, 무심은 불심이라... 오래 기억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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