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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

답사여행> 내가 법당(당간지주+당간+상륜부+번)을 세운다면...^^1208

 

 

 

 

 

 

 

청주 용두사지 철당간(충청도 여행>청주답사2>2011.11.28일)을 읽으신 자인 님이 질문을 해 주셨다.

1) 당간은 어떻게 쌓아 올렸을까?

2) 깃발 - 번 혹은 당이 올바른 명칭일 듯 -은 어떻게 게양했을까?

3) 그리고 관련 참고 문헌은 없는가에 대해서...

관심 가져주시고, 질문 해 주신 점 감사드리며 당간을 하나 세운다는 입장에서 간단하게 요약해 본다.

 

 

 

1. 법당의 재현을 위해...

 

 

法幢(법당) 혹은 寶幢(보당)(여기서는 법당이라는 명칭을 사용하기로 하자)을 만들려면 제일 먼저 전체의 모습을 그려놓고 시작해야 한다. 혹시 당신은 법당의 완벽한 모습을 본 적이 있는가? 아마 없을 것이다. 작고 소박하게 만들어놓은 이미테이션(재현품)은 봤을지라도 사찰 앞에 휘날리는 깃발(幢(당) 혹은 幡(번)이 올바른 이름이다)의 위용은 정작 느껴보지 못했을터이니... 상상해보라! 공주나 부여, 그리고 경주 시가에 휘날리고 있었을 천여개의 당들이 여기저기서 울긋불긋 나부끼고 있었다면 어떤 그림이 그려질지...

 

 

<법당의 전체적인 이미지를 먼저 그려봐야겠지?!... 이 글에서 인용하는 도판은 아래 ↓ 자료에서 캡처했음...>

 

 

아무튼 현재 그런 법당은 없지만 추정할 수 있는 유물들이 있으니 먼저 상륜부까지 온전히 갖추고 있는 게 담양 읍내리 당간(1838년, 엄밀히 석당간과 철당간의 조합이다)이 있고, 상륜부는 없지만 전체적인 규모를 느낄 수 있는 철당간(당간지주+철당간)으로 법주사 당간(1006년 조성-1866년 고종/대원군 파괴-1910년/1927년 복원), 고려시대 만들어진 것으로 보이는 칠장사 당간과 그보다 앞선 시기로 보이는 청주 용두사지 당간(광종 962년), 그리고 비슷하거나 신라말까지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갑사의 당간이 있다.

 

 

<담양 읍내리 당간... 이 유물 하나에는 많은 사연이 새겨져 있다... 석당간과 철당간이 혼용되었고, 그 전에는 목당간이었다는 점... 고려시대 만들어졌지만 백제지역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다는 점... 그리고 철당간으로는 유일하게 상륜부가 온전하다는 점... 하나 더, 읍내리 오층탑과 이 당간 가운데 서 보면 평지가람에서 당간의 위치와 역할이 무엇이었을지 그려볼 수 있다는 점들 때문이다...>

 

 

그리고 석당간으로 상륜부까지 온전히 갖추고 있는 게 나주 동문밖 석당간(고려시대)인데 백제지역의 유사성을 고려하면 미륵사지 상륜부도 이런 모습이 아니었을까 추정하고 있다. 아무튼 높이는 11m이고 그 외 담양 읍내리(객사리라고도 하지) 당간과 부안 서외리 당간(고려시대, 여기 상륜부는 용두로 추정되고 있다), 그리고 통도사 당간 등이 있다.

 

 

<호암미술관의 용두보당... 그나마 이 유물이 있어서 법당의 전체적 이미지는 쉽게 상상할 수 있다...>

 

 

그렇다면 현재 남아 있는 이 유물들을 통해 법당의 온전한 모습은 충분히 복원될 수 있을까? 부족하다. 왜냐하면 백제와 신라의 원형이 살아있지 않고, 번을 상상하기 어렵기 때문...^^ 물론 그렇다고 불가능하지는 않다. 왜냐하면 법당에 대한 기록과 그림, 그리고 그를 축소해놓은 장식용 법당이 있기 때문이지. 그것이 바로 중앙박물관과 호암미술관, 그리고 경주박물관에 있는 청동 음각 보탑보당문판과 용두보당, 그리고 금동 당간용두다. 여기에 하나 더 보탠다면 중국의 막고굴에 새겨진 벽화와 기록 등이 남아있어 법당의 원형은 어렵지 않게 추적할 수 있는데, 여기 추천하고 싶은 자료가 <미륵사지 당간지주/ 당간지주, 그 복원을 위한 이해/전창기 지음/1999년3월>다.

 

 

 

 

 

이 문헌 내용은 먼저 당과 번, 우리나라 당간의 기원과 종류, 법당의 관한 기록과 유물 등에 대해 살펴보고 미륵사지 당간지주에 대한 실측자료를 토대로, 당간 혹은 법당의 완성된 형태를 추정한 자료집으로 당간지주에 대한 전반적 이해를 돕는 기초자료 성격을 띠고 있다. 나는 이 자료를 통해 법당에 대한 역사적 흐름을 이해하는데 많은 도움을 받았는데, 이제 이를 근거로 법당의 원형을 살펴보고 그에 맞춰 하나의 법당을 세워보는 게 이 글의 목표다.

 

 

 

 

 

 

2. 법당의 위치...

 

 

일단 당간을 세울 장소가 어딘가에 따라 자연스럽게 전체 높이와 규모가 결정될 것이다.

평지 도심가람(초기/백제식) 형식이라면 금당 앞 공간, 목탑이나 석탑 등의 높이에 따른 원경도 고려했겠지만, 우선 남문 혹은 중문의 규모에 따라 좌우 대칭으로 적당한 이격거리와 충분한 높이로 결정했겠지. 왜냐하면 평지 가람에서 당간의 위치(미륵사/불국사/보원사)는 그 사찰에서 거행하는 가장 큰 규모의 야단법석을 치룰만한 넓은 공간의 중심이었을테니까...

 

 

<미륵사지 가람배치 복원 모형... 금당과 탑으로 이루어진 공간 앞에 법당이 좌우로 서있고, 이 곳 공간이 강당앞 공간보다 훨씬 넓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렇다면 그 공간에서 과연 무엇을 했을까?? 야단법석이 났겠지?^^> 

 

 

또한 산지가람(통일신라) 형식이라면 회랑도 없고 중문도 누각형식으로 바뀌었을테니 산문과 중문 사이, 터벅터벅 산길을 올라가는데 한숨 쉴만 어디쯤, 금당을 향해 가는 이정표가 되었을 지점(부석사 당간지주를 상상해보라)에 법당을 세웠을지 모르겠다. 때문에 꼭 두 개가 한 쌍의 모습을 갖추지 않았을 수도 있고, 평지 가람에서처럼 충분한 이격거리(미륵사지의 경우 88m 가량)없이 세워졌을 수도 있었겠지. 그리고 다시 가람배치에 대한 이해와 흐름이 바뀌고 산지가람이 정착된 고려, 조선시대에는 사찰의 경계에 세워졌을 수도 있다. 아무튼 그런 사회적 필요에 따라 당간의 높이와 위치는 결정되었으리라.

 

 

<부석사 가람배치도... 산지가람을 대표하는 부석사에서 당간지주 위치를 확인해 보자... 올라가다 한 숨 쉴만한 곳이 바로 그곳이 아니었을까??^^>

<통도사의 석당간... 석당간이지만 간공이 확실하게 뚫려있다... 아마도 그 이유 때문에 수없이 많이 부러지고 부서졌을 듯... 그렇다면 과연 저 석당간과 당간지주는 같은 짝일까? 나는 의문스럽다... 아무튼 천왕문 앞 공간이라는 위치는 확인해두자...> 

<법천사지 당간지주의 위치... 쉽게 찾기 어렵지?... 언제부턴가 당간지주는 사찰의 영역 혹은 경계에 세워진 것이라는 설명이 붙었는데, 나는 사실과 다르다고 생각한다. 초기 백제시대에는 사찰의 앞마당에 포진해 있었고, 산지 가람이 정착하는 신라시대에 그 기능과 목적이 달라지면서 외부 의장도 차츰 단순해졌으며, 고려시대에는 산지와 평지가람이 공존하면서 그 위치에 맞게 각기 변형되었고, 조선시대에 퇴화되다가 후기 괘불이 유행하면서 금당 앞마당에 괘불대에 놓이고난 이후부터 사찰 끝트머리-절의 초입경계-까지 밀려난게 아닌가 싶다...>

 

 

 

 

3. 당간과 당간지주...

 

 

위치를 결정했다면 나는 어떤 모습의 당간지주를 만들었을까? 지금까지 당간지주는 외부형태나 간구와 간공의 위치에 따라 분류했고, 그를 통해 시대의 변천이 추적되었다. 물론 간구와 간공을 통해 제작시기를 추정하는 것이 필요하지만 그건 어떤 당간을 세우냐에 따라 결정이 된다. 즉 당간의 소재가 목재인가 석재인가, 철재인가에 따라 달라진다는 말이다.

 

즉 당간지주에 간공이 있다는 말은 당간이 목재였을 가능성이 높고, 당간이 석재나 철재였다면 굳이 간공을 뚫을 필요가 없거나 뚫어서는 안 되니 시대적으로 당간은 목재에서 석재, 그리고 철재로 변화했을 가능성이 높다(왜냐하면 석당간에 구멍을 뚫으면 단면적이 취약해지는 구조적 약점이 발생하게 되는데, 석당간이 처음 유행할 때에는 목당간과 당간지주를 연결하는 방법이 그대로 전승되었겠지만, 석당간이 완전히 정착한 시기부터와 철당간은 굳이 간공이 필요없이 간구만으로도 당간지주와 긴결이 가능했다-용두사지).

 

 

<당간지주와 철당간의 연결... 간공이 없다... 필요가 없어진 것이지...>

 

 

물론 1200년대 만들어진 중국 상화엄사 목재 당간이 남아 있을뿐 우리나라에는 현존하는 목당간이 없지만, 담양 읍내리 당간에 대한 기록 등을 보면 1836년 조선시대말까지 목당간은 석당간, 철당간과 함께 엄연히 공존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솟대의 연장선상에서 만들어진 목당간은 풍화와 태풍 등에 대한 내구성이 약하고, 신앙의 대상으로 장엄할 수 있는 장식성과 권위적 상징성이 부족하다 싶었는지, 백제의 미륵사지 이후부터 석당간으로 전환하게 되고,

 

 

<미륵사지 당간지주... 그 바로 옆 석기둥에 주목하자...>

<그 석기둥을 가까이서 보면 이렇게 생겼는데, 그 위치를 추정해 당간을 복원해보면 ↓처럼 되는데...>

<결국 석기둥은 엄밀히 석당의 일부이고, 기울기 등을 고려하면 미륵사지 법당은 11m 정도로 추정된다...>

 

 

다시 돌보다는 철에 대한 믿음이 높아진 신라말(이때 철불들이 본격적으로 조성되지?!)부터 병장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라 지시했던 고려 성종(987년/역사신문24P/사계절/1996년간)대에 이르러 당간은 본격적으로 철재로 바뀌면서 높이의 한계와 절단되기 쉬운 구조적 한계를 벗어났다는 게 내 생각이다. 즉 그때부터 당간의 높이는 석당간의 한계인 11~12m를 넘어서 다시 목당간이 유행하던 7장(20m) 내외의 높이(경덕왕대)가 됐을 거 같다.

 

 

 

<용두사지 철당간... 지난번 올리지 않았던 사진 중에 하나를 골랐다...> 

<갑사 철당간... 이게 더 오래됐을까? 용두사지가 더 오래됐을까? 당간과 당간의 이음부위를 보면 용두사지가 더 앞선게 아닐까? 그렇다면 갑사당간은 고려초기(1000년대)로 정정하는 게 맞을 듯 싶다...> 

<칠장사 철당간...>

<법주사 철당간... 이 법주사 당간도 참 사연이 많던데, 지금도 건재하다는 게 감사하고 고마울따름... 당간지주를 보면 구백제 지역에서 유행했던 선문양이 분명하다... 그렇다면 갑사나 칠장사는 법주사 당간지주보다 늦었으면 늦었지 빠른 시기에 조성된 유물은 아니지 않을까?? 아무튼 마지막까지 남았던 저 철당간은 대원군 시절, 화폐를 주조하기 위해 몽땅 철거되고 일제강점기때 다시 세워진다... 몇년후부터 금산사 미륵불을 조성했던 김복진은 법주사에 콘크리트 불상을 만들기 시작한다... 일제강점기... 그때 민중들에게 필요한 것은 미륵불의 재등장이었고, 당대의 예술가 김복진은 그것을 읽어낼 줄 아는 사람이었다...>

 

 

 

오히려 내가 당간지주를 만든다면 사찰의 지역을 우선 고려했을 것이다. 만약 구백제 지역이었던 충청, 전라도 지역이었다면 미륵사지 당간지주를 원형으로 전면과 측면에 선문을 장식했을 것이고(보원사지, 금산사, 무량사, 담양 읍내리 등), 구신라 지역이었던 경상도 지역이었다면 불국사와 삼랑사지 당간지주를 원형으로 기둥 바깥면에 굴곡을 주었을 것이고(해인사, 숙수사지, 성주 지산동 등), 구고구려 지역이었던 강원, 경북지역이었다면 법천사지 당간지주처럼 아무런 문양이나 굴곡이 없는 사각기둥 모양으로(거돈사지, 강릉 대창리, 홍천 희망리, 춘천 근화동 등) 만들었을 것이다.

 

 

<미륵사지 당간지주... 나는 우리나라 당간지주의 시원이라 생각한다... 측면의 선문이 분명히 새겨져있다...>

<불국사 당간지주... 신라 당간지주의 표준이 되었던...>

<법천사지 당간지주... 경북지방에서부터 강원, 북한지방을 이르기까지 이 유형을 대표한다고 생각한다...>

 

 

 

아무튼 미륵사지 당간지주를 보면 샌님처럼 가지런하지만 우아함과 세련됨을 추구했음이 보이고, 불국사 당간지주를 보면 엄격하면서 화려하고, 복잡하면서도 정연함을 중시했다는 생각이 들고, 법천사지 당간지주를 보면 담백하면서도 당당하고, 단순하면서 굵고 묵직한 느낌이 드는 것 나 혼자만의 생각일까? 문화 DNA라는 것은 생각보다 뿌리가 깊어 가장 익숙하고 친근한 것에서 우리는 전통의 권위와 편안한 아름다움을 동시에 찾았을 것인데 그 출발은 아무래도 주변 산천의 기운을 공유하고 문화를 공유한 지역성에서 출발하는 게 아닌가 싶다.

 

 

그리고 아예 지역을 무시할만한 자신감과 새로움을 위한 호기심이 충만했다면, 그리고 그것을 받춰줄만한 시간과 금전적 여력이 충분했다면 남원 만복사지나 경주 보문리, 충주 미륵사지에서처럼 인왕상 모양의 당간지주나 연화문을 새겨 넣은 당간지주를 시도해볼 수도 있다. 물론 이것은 전통의 권위에 대한 도전이 용인될 분위기가 충만했거나 자기만의 세계에 빠진 사람들의 흔적일 수도 있겠다. 그리고 그런 숙성과 만용까지도 뛰어넘었거나 모든 것 비울 수 있는 그릇이었다면 강릉 굴산사지처럼 자연스럽지만 장중하게, 담백하지만 웅혼한 당간지주를 만들 수도 있었겠다.

 

 

<보문사지 당간지주... 기단부까지 발굴된다면 얼마만한 크기일까? >

<굴산사지 당간지주... 같이 있는 것만으로도...>

 

 

 

 

4. 당간은 어떻게 세웠을까?

 

 

자인님은 당간을 어떻게 세웠을까에 대해서도 질문해주셨는데, 그리 복잡한 문제는 아니다. 가장 단순하게는 바닥에서 만들어 한꺼번에 일으켜 세웠을 수도 있고, 하나씩 하나씩 쌓아 올렸을 수도 있다. 물론 목당간이었다면 밧줄과 받침대, 그리고 도르레를 사용하면 쉽게 세울 수 있었을 것이고, 석당은 담양 읍내리 당간과 경주박물관의 석당을 통해 유추하듯이 두가지 방법을 조합할 수 있고, 철당은 당연히 하나씩 쌓아 올렸을 것이다. 그리고 석당은 이음의 방법이 한두가지를 벗어나지 못하지만, 철당은 꼬깔콘처럼 접합부분만 다듬어 하나씩 꼽아가는 것 외에도 다양한 이음방법을 혼용됐을 것으로 추측된다.

 

 

 

<경주박물관 석당... 저 석당은 당간의 일부였을 수도 있고, 석등의 부재였을 수도 있다...> 

<백률사지 석당/경주박물관... 석당에는 이처럼 조각과 글을 새겨 넣기도 했다... 818년 제작된... 분명 석당간의 일부지?>

<담양 읍내리 당간... 석당간의 중간 이음이 잘 나타나 있는...>

<부여 서외리 석당간 이음 도해...>

<용두사지 당간 부분... 용두사지 당간의 이음은 칠장사, 갑사, 법주사와 분명히 다르다...>

<갑사 철당간 이음... 여기서부터는 이음부위에 돌출된 선문양이 뚜렷하다...>

<칠장사 철당간 이음...>

<법주사 철당간 이음...>

<철당간 이음 방법... 얼른 그려봤다...^^ 혼용되었을 수도 있다...>

 

 

물론 예전의 건축기법에 대해 많은 분들이 의문을 가지실지 모르지만, 이미 400년대 북위는 높이 200m의 목탑을 세웠다는 기록이 있고, 백제 기술자들이 세웠다는 황룡사지 구층탑이나 미륵사지 목탑은 높이가 60~80m가 넘었고, 역시 백제인들이 600년대 세웠던 일본의 여러 목탑들은 55~100m가 넘었다. 바로 이런 건축을 위한 가설재인 비계를 기원전부터 축성과 건축에 사용했었다. 요즘 공사현장에서 흔히 보이는 철재 비계도 보편화된 것은 불과 20여년 안팎이고 그전엔 목재로 비계를 만들었는데, 경주에 있는 신라역사과학관에 가면 첨성대를 축조할 때의 상상도가 그려져 있으니 참고할 만하다. 아무튼 10~20m 높이에 불과한 석당이나 철당을 세우는 것은 그리 어려운 문제는 아니었고 여기엔 필히 비계를 만들어 쉽게 쌓아올리고 수리했을 것이다.

 

 

<내가 공사판에 있으니... 요즘에 이렇게 시스템 비계까지 사용한다...>

<이런식으로 한층 한층 올리기 위해 미리 비계를 설치해야만 작업할 수 있는 공간이 만들어진다...>

<공사가 완료되면 저처럼 비계를 해체하고... 옛날엔 스카이타워(현장에서 스카이 콩콩이라고도 부른다)이 없었잖아...>

 

 

 

 

 

5. 당의 게양과 상륜부

 

 

나는 앞서 깃발을 당이나 번이라 부른다했는데 어떤 모습이었을까? 幡(번)을 생각해보면 고대 중국의 행정체계가 연상 되듯이 깃발을 번이라 부른 것은 전쟁을 치루는 군대에서 유래됐을 가능성이 크다. 幢(당) 역시 비슷한 용도의 의장용 깃발을 부르는 말이니 당은 군대의 변화와 시대의 변화에 따라 그 유형이 달라졌고, 가장 오랫동안 형태를 유지한 당의 원형이 정착된 시기는 唐(당)나라 때가 아니었을까 싶다. 물론 당나라가 태동하기 1~200년 전부터 백제와 신라시대 공주, 부여, 경주에는 수백개의 번이 휘날리고 있었다하니 우리나라 번의 원형을 추정하기는 힘들지만, 현재 통도사에 소장된 번과 오늘날 일본의 농촌마을에서 휘날리는 깃발을 보며 상상하는 수밖에 없을 거 같다.

 

 

<당/번의 시대별/지역별 변천도 및 구조도...>

<번/당의 변천과정...>

<정창원... 동대사의 정창원은 정말 보고인 모양이다... 이런 거 하나 하나가 지금까지 완벽하게 보존되고 있다니 부럽다는 생각만...>

<번 복원도... 칼라니까 역시 산뜻하군...^^ 왼쪽은 사람 같고, 오른쪽은 고구마 같고....^^>

 

 

그리고 상륜부에 구멍이 있거나 도르레가 있었다고 생각하면 굳이 위험스럽게 사다리를 상상하지 않아도 쉽게 게양했다고 추정할 수 있는데, 호암박물관이나 경주박물관의 용두와 담양 읍내리 당간 상륜부를 생각하면 어렵지 않을 거 같다. 단, 석당간의 가장 오래된 모습인 나주 동문밖 당간의 상륜부에는 별도의 철물이 있어야만 한다는 생각이 드는데 어째든 <청동 음각 보탑보당문판>을 생각하면 쉽게 연상이 되실 거라 생각된다. 어때... 이렇게 하면 하나의 법당이 세워진 건가?

 

 

<청동 음각 보탑보당문판... 이 문판 하나면 법당은 충분히 그려지지?...>

<담양 읍내리 법당의 상륜부...> 

 <나주 동문외 석당간/생태연구소 터에서 스크랩... 왜 그땐 몰랐을까??>

<당간용두...>

<영주 순흥리 고분벽화의 당 혹은 번... 이게 고구려의 번이었겠지?!!>

<오늘날에도 나부끼고 있는 일본의 깃발... 이름을 잊어 버렸다...ㅠㅠ 꼬리부분이 물고기 지느러미 같지? 아무튼 생각해보자... 여기서 백제 번의 원형을 찾을 수 있는지...^^>

 

 

솔직히 나보고 법당을 만들어라면 아무리 생각해도 하나로는 만족할 수 없을 거 같다...^^

하나는 미륵사지 당간지주에 석당간을 세우고 석재로 만든 용두로 상륜부를 만드는 것이고, 또 하나는 불국사 당간지주에 석당간을 쌓고 철재로 만든 용두로 상륜부를 만든다(아예 나이키와 아디다스 신발을 한짝씩 신고 다니는 것처럼?!^^). 여기서 휘날릴 당은 영주 순흥리 고분벽화에 그려진 번을 걸어 놓는다.

그리고 그 위치는 중문 좌우나 산문과 천왕문 사이보다는 예전에 솟대를 세웠던 자리, 그곳에 세우고 싶다. 아마도 그렇게 두 개쯤 만들어봐야 법당을 온전히 이해할 수 있을 거 같다...

 

 

<지금 보당을 세우겠다는 내 생각은 솟대를 하나 세우고 싶다는 생각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아무튼 질문을 감사드린다... 아무리 바빠도 질문엔 답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