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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

답사여행> 보림사 석등을 보면서 생각하는 신라문화의 이중성...1203

 

 

 

 

 

 

 

보림사 석등을 보면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나의 색과 향과 기를 갖춘 문화에는 항상 양면성이 있을 수밖에 없다는...

 

 

<보림사 전경... 우리나라 사찰 중, 건축물과 불상, 석탑과 석등 등이 모두다 국보로 지정된 곳은 아마 보림사가 유일할 것이다... 국보 건축물 대웅전이 불타 너무나 아쉽지만, 부도와 부도비, 그리고 현존하는 목조사천왕상 중 가장 오래된 보물들까지 보림사는 풍부한 문화유산을 가지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보림사가 충분히 사랑받지 못하는 건, 너무 많이 훼손된 평지식 가람의 불안정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고려불화와 청자, 대장경 등의 섬세함 속에 은은하게 감지되는 넉넉하고 풍요로운 맛의 이면에는

고려불상과 석탑, 석등 등의 거칠고 둔중한 야성미를 함께 갖춰야만 하고,

조선 백자와 분청사기, 소반 등의 간결함에 곁들여진 해학적이면서도 천연덕스러운 고졸함에는

조선 유학과 서예, 청화백자에서 느껴지는 은밀하면서도 치열한 완성에 대한 고집스러운 집착이 깔려있다는...

 

 

 

 

<청자와 사경과 석탑... 도저히 융합할 수 없다고 보이는 이 세가지의 문화유산은 동시대에 만들어진 것들이다... 세련됨, 우아함, 정교함, 그리고 투박하고 우직함까지... 하나의 유적을 통해 한 시대의 문화적 특징과 정신을 모두 이해하려는 것이 진짜 위험한 것일까? 조금 더 넓은, 조금 더 깊은, 그래서 시대를 관통하는 보편성과 일관성, 그리고 서로를 보완하고 균형을 이루려는 안목이 있어 다양성과 통일성은 확보되는 게 아닐런지...>

 

 

 

 

그러면 그 이전 고구려, 백제, 신라는 어땠을까?

고구려의 깊은 맛은 느끼기 어렵겠지만, 아마도 장중하고 장쾌함의 허전함을 화려함으로 보완했을 거고,

백제의 담백함과 부드러운 이면에는 화사하고 우아한 맛을 함께 갖춰야만 했지 않았을까?

그러면 신라의 양면성은??

 

 

<석가탑과 다보탑...>

 

 

혹시 석가탑과 다보탑의 공존이 확연한 답이 아닐까?

다보탑의 정교함과 현란함을 관촉사 은진미륵 같은 거친 야성미로 대체하지 않았고,

석가탑의 간결함과 우아함을 정림사탑의 경쾌함이나 분청사기의 고졸함으로 대체하지도 않았다.

어쩌면 신라는 석가탑과 다보탑의 이중성을 갖췄을뿐, 반대의 개념으로 균형을 추구하진 않았다.

 

 

<우리의 미감을 대비시키기위해 다보탑과 관촉사 은진미륵(관음보살상이 맞지?)을 비교하지는 않지?>

<관촉사... 1000년 전후, 고려 광종대의 석탑과 석등과 불상이 함께 있는 곳... 저 작게 보이는 석등의 크기가 6m다... 화엄사 석등과 비슷한 크기...>

 

 

 

하나의 문명에는 빛과 그림자가 있을 수밖에 없고,

하나의 문물에서 문명의 수준을 가늠할 수는 있지만, 모든 미감을 만족시킬 수는 없다.

그리고 하나의 미감을 통해 우리의 삶은 충분히 윤택하거나 풍부함을 연출할 수도 없고.

결국 균형과 조화, 대비와 반전, 변화와 통일이라는 양면성을 통해 전체 문명을 바라봐야만 한다.

문득 보림사 석등을 보면서 신라의 양면성을 찾아보고 있다.

 

 

<보림사 대적광전 앞, 삼층쌍탑과 석등...>

 

 

 

 

 

모처럼 보림사에 와(15년만일까?^^) 보림사 석등이 이렇게 좋았나 스스로 반문해본다.

신라시대 팔각간주석 형식 석등의 아름다움을 왜 몰랐을까? 왜 이제야 느끼는가 하면서 말이다...^^

문득 수많은 석등들이 떠오르고, 석등에 대한 나의 생각이 매우 짧았음을,

그리고 팔각간주석 형태 석등들에서 느꼈던 단순함과 자연스럽지 못한 인위적 형태에 대한 거부감이

이 보림사 석등을 보면서 새롭게 다가옴을 느껴본다.

 

 

<보림사 석등... 왜 이석등이 내게 깊이 각인되지 못했을까? 가녀림? 왜소함?  물론 이 석등을 본지 지나간 15년 동안의 변화가 나의 부족함과 트이지 않는 눈은 열어주었기 때문이기도 하겠지만, 아마도 가장 큰 이유는 생동감이었을 거 같다... 화려함, 정교함, 세련된 장식, 적절한 조화와 비례 등 하나하나 섣부른 부분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의 마음을 움직이는 생동감이 없었기 때문이 아닐까?... 어쩌면 그때는 그런 기운을 내가 필요로 했을 것이기도 했을지 모르지만, 뭔가 끌어들이기에 이 석등은 나르스시즘에 빠졌거나, 실제로 너무 완벽해서 일지도 모르겠다... 사랑받으려면 역시 뭔가 부족해야 한다... 그래야 채워줄 게 있지...^^>

 

 

불국사 창건 후 100여년...

절정을 치닫는 신라인들이 만들어 놓은 마지막 정수를 보는 느낌...

그러면서 또 물어본다.

이 석등과 대비되는 유물은 어떤 것이 있을까??

 

 

 

 

 

물론 당장에 석등을 호위하는 듯한 좌우의 삼층쌍탑이 눈앞에 보이지만,

여전히 나는 그 석탑들이 낯설다. 심지어 이 탑들을 보면서,

도대체~ 왜? 이 석탑들이 국보로 지정될 수 있었을까 하는 의구심은 여전히 풀리지 않기 때문에...

화사한 석등에 단순하고 우직스러운 느낌으로 이야기도 만들어 보고,

가녀리고 경쾌한 석등에 둔중하고 장중함을 떠올려 보기도 하지만 어쩐지 어설프다.

 

 

<삼층석탑과 석등... 함께 있다는 이유로 대비되는 미감을 한정시킬 필요는 없지?>

<어쩌면 860년대 보림사 석등은, 680년대 고선사 삼층석탑과 비교해야 제 맛이 살아날지 모르겠다...>

 

 

 

 

 

차라리 보림사를 떠나면 이 석등과 대비되는 개념은 쉽게 찾아질지도 모르겠다.

맨처음 떠오르는 게,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그리고 이어지는 것이 고선사 삼층석탑과 선산 낙산동의 삼층석탑...

그래... 통일신라 초기의 고선사탑과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던 탑리리나 죽장동, 낙산동의 석탑들이

어쩌면 보림사 석등과 좋은 대비가 되지 않을까?

 

 

<의성 탑리리 오층석탑... 장대한, 그리고 정연한.... 아직까지 신라는 충만하지 못했을 때가 아닐까?>

<선산 낙산동 삼층석탑... 중후한, 그리고 역동적인... 정적인 맛의 보림사 석등과 잘 대비된다...>

 

 

 

 

장중함과 우아함...

중후함과 경쾌함...

담백함과 화려함...

탑리리,죽장동 오층탑은 조금 떨어지지만 고선사탑이나 낙산동탑은 보림사 석등과 정말 좋은 대비가 된다.

정제와 절제를 관통하면서도 다양성과 변화에 대한 집요함이 함께 느껴지고...

 

 

<상륜부가 이처럼 완벽하게 살아있는 석등도 매우 귀할터... 그것만으로도 국보의 가치는 충분하지? 지붕돌의 귀꽃에 조응하는 상륜부 보개의 귀꽃, 개선사 석등의 간주석과 비슷한 보륜 상하에 정성스럽게 조각된 복련과 앙련, 보개 밑면 꽃잎장식에 조응하는 보개 상단의 복련, 그리고 약간 손상은 있지만 통통한 보주의 장식까지, 보림사 석등은 비워 놓을 곳과 채워 놓을 것을 구별할줄 알고, 채워 놓을 부분은 상하좌우를 고려하여 대비와 조응, 그리고 변화의 즐거움까지 남겨 놓았다... 조용한 이미지때문에 조심스럽게 보이지만, 이 석등은 뜯어볼수록 진가를 느낄 수 있는 명작이라 생각된다...> 

<일반적인 신라 석등의 화사석은 높이와 폭의 비례가 1:1이다... 그래서 마름모꼴의 변화를 주었던 백제 미륵사지 석등의 화사석에 비해, 한편 두툼하거나 투박하게 보이게 되지... 그렇지만 보림사 석등은 화사석의 화창을 크게 뚫어서 답답하거나 둔중하게 보이는 부분을 말끔히 상쇄하였다... 크기나 양감만으로는 양쪽의 삼층석탑에 크게 눌리면서도, 석등 그 자체로 전혀 답답하게 느껴지지 않는 이유는 이런 작은 비례들 하나하나가 살아있었기에 가능하지 않았을까?>

<상대석과 하대석의 앙련과 복련도 그 양식을 달리하였지만, 전혀 이질적이지 않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아니 하고싶은 모든 미감을 최대한 동원한 석공의 마음이 보이는듯... 그리고 하나의 작품에 시대의 유행을 모두 담고 싶어했던 욕심 많은 예술품에서 보기 쉬운, 장식에 치중한 작품들에서 보이는 백화점 나열식의 산만함이나, 일관되지 못한 절충과 조합에 대한 반감과 어색함까지 즐거움으로 남길 수 있었다면, 이 석등을 만든 석공의 내공은 어느 정도였을까?^^ 그는 자랑하고 싶었을 것이고, 그로 인해 우리는 즐겁고...^^> 

<보림사 석등에서 구조적으로 가장 취약하게 보이는 부분이 바로 생각보다, 또는 상대석 위와 비교했을 때 상대적으로 짧은 간주석의 길이다... 그 단점을 보완한 것이 바로 이부분... 연화하대석보다 좁은 기대석이다... 즉 기대석을 하대석보다 좁게 만들어 짧은 간주석으로인해 가라앉는 느낌을 상쇄하고, 높은 기대석과 볼록형으로 솟은 하대석을 만들어 상승감을 살렸다... 만약 기대석이 하대석보다 넓었거나, 하대석의 복련이 다른 석등의 하대석처럼 얇았다면 보림사 석등의 미감은 크게 깨졌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보림사 석등의 지대석이 같은 팔각형이었거나, 괴임부분이 사각형이었거나, 또는 그보다 컸다면 보림사 석등은 지금의 시원함과 날씬한 느낌을 살릴 수도 없었을 것이다... 보림사 석등은 하나 하나를 뜯어 볼수록 그 가치가 빛난다...>

 

 

 

외진 곳...

뻗어나가는 신라의 기세가 불과 200년이 지나 이곳 보림사에서 멈춤을 느껴본다.

그곳을 장식하는 세련된 자태의 그렇지만 어딘지 연약하고 좁아진 느낌을 부정할 순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완벽한 균형미에 흐트러지지 않은 정연함을 볼 수 있어 좋았다.

 

 

<불국사 대웅전 영역의 석등... 석가탑, 다보탑에 가려 그 느낌이 작아지지만, 당당하고 굳은 의지에 힘이 넘친다... 아쉽다면 화사석의 양감이 부족하고, 지붕돌이 너무 좁다는 점... 그렇지만 역사의 팔뚝처럼 굵은 간주석 하나만으로도 그런 부족함은 충분히 보완된다... 내 사진기를 위해 포즈까지 취해주신 두분께 감사를...^^>

<법주사 사천왕석등... 사천왕석등의 대왕이라 불릴만 하지? 장대한 크기에 중후한 느낌까지 살린 수작이다...>

<경주박물관의 흥륜사지 석등/경주 읍성 석등... 내가 본 팔각간주석 형태의 석등중 최고의 여왕으로 불릴만 하다... 어디 한곳 답답함없이 장대하고 시원시원하며, 부드럽고 우아함까지 갖췄다... 750년대, 800년대, 그리고 보림사 석등이 만들어진 860년대 석등들과 비교해보면 신라시대 석등의 변화를 읽을 수 있지 않을까?...>

 

 

 

이때의 신라는 불국사 대웅전 석등에서 느껴지는 굵고 묵직하지도,

법주사 사천왕 석등에서 느껴지는 장중하고 당당하지도,

경주박물관의 흥륜사터 석등처럼 장대하면서도 시원스럽지 않았다.

보림사에서, 신라말기를 장식하는 아리따운 공주를 만난 것처럼 참 어여쁜 석등을 바라보고 있다.

 

 

 

 

 

지금 우리시대는 어떤 미감들로 문화와 문명을 꾸려가고 있을까?

상반된 혹은 다양함 속에 숨어 있는 통일성과 보편성은 무엇일까?

그리고 어떻게 조금씩 혹은 급격하게 변하고 있을까?

우리를 관통하는 일관성과 변화의지는 무엇을 목표로,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또 하나의 명품을 보면서 석등의 변화와 시대의 미감을 읽어보고 있다.

꼭 추천하고 싶다.

보림사 석등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