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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사여행...

답사여행 段想> 완성이란 무엇일까? ... 1206

 

 

 

 

 

 

 

 

완성이란 무엇일까?

 

 

 

1.

 

 

完成(완성)... 먼저 뜻풀이를 해볼까?

完(완)의 뜻풀이를 보면 全(전)의 의미를 포괄하니, 完全(완전)과 끝맺음을 전제로 한다.

때문에 완성, 완전 외에도 完了(완료), 補完(보완) 등의 표현과 어울려 사용되니,

完結(완결)된 형상, 즉 현재의 상태를 드러낸 개념이라 할 수 있다.

 

 

또한 成(성)이란, 말 그대로 ‘이루어지는 것’이니 부수적거나 반복적인 낱말을 필요로 하지 않는다.

그래서 명사나 동사, 형용사 등과 곧잘 어울려 成功(성공), 成就(성취), 成人(성인)이란 개념을 만들기도 하고,

成長(성장), 構成(구성), 形成(형성) 등의 다양한 형상과 과정을 나타내는데 사용되는데,

결국 현재의 상태를 분석적으로 이해하거나, 과거로부터 이어져 온 시간 축적을 내포하고 있다.

 

 

 

 

 

그렇다면 完成(완성)이란, 完全(완전)한 成功(성공) 혹은 完結(완결)된 構成(구성)으로 풀이해도 되겠지?

이렇게 말하면 너무 딱딱하니 문학적 상상력이 풍부한 이의 입을 통해 완성이란 개념을 풀어보면 ;

‘더 덧붙일 것이 없는 상태가 아니라, 무엇 하나도 떼어 낼 것이 없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으니

(생텍쥐페리 / Antoine Jean-Baptiste Marie Roger de Saint-Exupéry / 1900 ~ 1944)

완성에 대한 동/서양과 상식/학술적 접근은 의외로 비슷하거나, 의외로 견고하다고 생각된다.

 

 

 

 

 

 

 

 

2.

 

 

하나씩 떼어내 볼까?

완성이란 모든 것을 다 갖춘 것이란 말이지?!

완성이란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상태란 말이지?!

완성이란 지금까지 진행되었던 것들의 최후 종결자란 말이지?!

결국 완성이란 끝을 냈다는 말이 되지?!

 

 

 

 

그렇게 보면 나에게서 완성은 ;

끝을 맺었다는 종결(終結) 혹은 궁극(窮極),

더할 것도 뺄 것도 없는 상태의 완벽(完璧) 혹은 결정(結晶),

그리고 과거로부터 누적된 성과를 포괄하는 성장(成長)과 축적(蓄積),

더 이상의 변화와 미래가 필요 없는 최상(最上)과 최선(最善)의 가치를 내포하고 있었다는 생각이 든다.

 

 

 

 

그럼 중도에 멈춰선 것은 완성이 아니란 말인가?

이전과의 연속선상에서 벗어난 일탈은 완성이 아니란 말인가?

부족하고, 어수룩하고, 느슨하다면 완성이란 말을 쓸 수 없을테니,

조금이라도 아쉬운 것이 있다면 그것도 완성이 아니란 말이 될 것이고,

완성 이후의 완성은 상충될 수밖에 없을테니, 결국 완성이란 終末(종말), 終局(종국)을 의미할까?

과연 내가 생각하고 음미하고 있는 이 완성의 의미는 올바른 것일까? 합리적일까? 궁극적일까?

나는 왜 이렇게 완성이란 개념에 집착하고 있는지 스스로 물어보고 있다.

 

 

 

 

 

 

 

3.

 

 

답사여행을 즐기면서 나는 줄곧 완성된 어떤 것(!)들을 찾아다녔던 거 같다.

線(선) / 色(색) / 形(형)과 明暗(명암) / 餘白(여백) / 質感(질감), 그리고 氣運(기운)에 대한

史(사)적, 美(미)적, 知(지)적인 감상을 통해

구조를 분석하고, 내용과 의미를 이해하고, 또 가치를 평가하여

造形(조형)의 유기성과 생명력, 그리고 완성도를 느끼기 위해서였다.

 

 

 

 

왜냐하면 당대의 경제적 문화예술적 수준이 응집되고 그에 조응하여 만들어진 모든 조형물들은,

역사를 기록할 수밖에 없고, 신념과 사상을 고취하고자 하는 목적을 벗어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렇게 만들어져 생활을 아름답게, 마음을 편안하게 해주는 조형물들은

정보전달과 생활의 변화, 그리고 교감(혹은 교류)과 축제의 상징이자 매개의 기능을 갖추면서,

아름다운 표현을 통해 감정의 울림을 주고, 또한 미지의 세계를 깊고 넓고 밝게 열어주는 창이 되었다.

 

 

 

 

때로는 정면성과 부동성의 완벽함과 엄숙함으로 과학적 수학적 조화와 균제의 이상미로 실현되기도 하고,

때로는 해체의 복잡함과 역동적 생명력으로 화려 장대하거나 극적 감정의 율동과 변화로 표현되기도 하며,

때로는 자연과 사람과 물질의 한계를 극복하기도 하고, 때로는 그들을 본받고 닮은 형상으로 발현되기도 한다.

또한 부와 권력의 과장된 상징이 되기도 하고, 혹은 개인적 창조와 일탈을 위한 소극적 회귀가 되기도 한다.

그것이 재현적 표현이든 추상적 표현이든, 어떻게든 완성된 조형물들의 감상의 잣대는,  비례/균형/조화의 합리적 성격과 다양하며 유기적인 율동, 그리고 통일과 변화의 카테고리를 벗어나지 않는다.

 

 

 

 

결국 신념과 과학과 권력의 상징이면서 단초가 되고 귀결이 된 역사문화예술 유적과 유물들은 우리에게,

자연과 교감하고, 물질 또는 소재와 대화하는 매개가 되면서 우리의 인식을 새롭게 만들고,

인간을 관찰하는 동기가 되면서, 자연과 사회와 물질에 대한 시대의 요구와,

시공간을 포괄한 역사적 관계를 더욱 풍부하고 선명하고 아름답게 이해하는 결정이자 단초 자체다.

그런 의미를 가지고 있기에 나는 답사여행을 통해 그것 혹은 그 공간을 소요하면서 ;

그들과 대화하고, 그것을 선물한 이들에 감사하며, 나와 우리와 지금을 되돌아 볼 수 있었던 게 아닐까?

답사여행을 통해 인간/세상/우주와 소통하는 자세로, 열린 마음과 깊은 안목을 갖춘 아름다운 선택을 나는 배우려 했다.

 

 

 

 

 

 

 

4.

 

 

때로는 진지하게 때로는 건성으로, 때로는 깊이있게 때로는 주마간산 격으로 다닌 답사여행이었지만,

이미 블로그 몇몇 글들을 통해 각각의 완성에 대해 나의 취향을 밝힌바 있다.

가람건축공간에서는 불국사와 석굴암, 부석사, 통도사, 화엄사, 선암사 등등...

궁궐과 서원 건축공간에서는 창덕궁과 연경당, 종묘, 화성, 경복궁, 병산서원 등등...

그리고 놓치기 싫은 공간으로 거돈사지, 명옥헌, 미황사, 소쇄원, 보리암 등등...

 

 

 

 

건축에서는 수덕사 대웅전, 부석사 무량수전, 화엄사 각황전, 금산사 미륵전, 강릉 객사문,

무위사 극락보전, 무량사 극락전, 해인사 장경각, 기념비각(교보문고 앞)과 불국사 석축 등등...

탑에서는 감은사탑, 석가탑, 정림사탑, 봉감 오층탑, 원원사탑, 다보탑과

술정리 동탑, 고선사탑, 화엄사 사사자탑, 탑평리 칠층탑, 왕궁리탑, 낙산동탑 등등...

불상에서는 석굴암본존불, 서산마애불, 삼화령애기부처, 광륭사와 중앙박물관의 금동미륵보살반가사유상,

백제관음, 그리고 선산과 규암면 출토 금동보살입상과 석굴암의 보살상(문수,범천,십일면 등)들...

 

 

 

 

부도 혹은 승탑에서는 지광국사, 염거화상, 철감선사, 연곡사, 망해사지, 원감국사 부도 등등...

부도비에서는 지광국사, 귀부에서는 원종대사, 월랑선사, 흥경사비갈, 태종무열왕 귀부 등등...

석등에서는 보림사, 화엄사, 법주사 쌍사자, 법주사 사천왕, 경주읍내, 용암사지 석등 등등...

당간지주에서는 미륵사지, 불국사, 용두사지, 삼랑사지, 굴산사지, 숙수사지 당간지주 등등...

그리고 범종에서는 성덕대왕신종 등을

나는 습관처럼 관성처럼 각각의 영역에서 완성 혹은 최고, 또는 내가 가장 좋아하는 것으로 꼽고 있다.

 

 

 

 

 

 

 

5.

 

 

그런데 과연 위에서 꼽은 것들만이 진정한 완성이라 할 수 있을까?

완벽과 궁극, 결정과 종결, 최상과 최선의 것들만이 완성이라 할 수 있을까?

세상은 그런 완성들만으로 이루어져 있을까?

그렇지 않은 많은 것들, 아니 훨씬 더 많은 것들의 존재의의는 없거나 무시해도 된다는 말인가?

 

 

 

 

중언부언이 될지 모르겠지만,

중도에 멈춰선 것들, 아쉬움이 많은 것들, 보편에서 벗어난 일탈...

세상엔 그런 것들이 더 많지 않을까?

도대체 왜 그렇게 나는 완성에 집착했고, 지금 이 순간도 집착하고 있을까?

거기에 덧붙여 올바르고 합리적이고 궁극적인 완성으로만 이 세상은 이루어지지 않았을텐데 말이다.

 

 

 

 

이제 마무리 되고 있는 건설현장을 보듬고 있다.

누구를 위해서 이리 애쓰고 있는지, 모두가 만족할 수 있는 수준은 무엇인지, 어느 시점이 끝인지,

끊임없이 자문하고 시시때때로 반문하면서 <完成(완성)>이란 내게 무엇인지 그 의미를 추적하고 있다.

그리고 문득 답사여행을 통해 지금까지 갖추고자 했던 열린 마음과 깊은 안목, 그리고 아름다운 선택은

너무 직선적이거나, 단조롭거나, 주관적이었던 것은 아니었을까 돌이켜 본다.

 

 

 

 

나는 아직도 목표 지상주의, 합목적성이란 개념에 찌들려 이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지 못하는 것은 아닐까?

아쉬움을 인정하고 못하고, 중도에서 멈추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최고만 지향하는 것이 아름다운 선택일까?

혹 완성이란 是非(시비)나 合理(합리)의 문제도 아니고, 美醜(미추)나 好不好(호불호)의 문제도 아니고,

得失(득실)이나 效率(효율)로 접근할 문제가 아니지 않을까?

덧붙여 완성이란 終結(종결)과 最善(최선)의 문제는 더더욱 아니어야 한다는 변명을 주문하고 있다.

 

 

 

 

완성을 추구하는 합목적적인 의지, 신념, 자세를 거부하는 것이 아니라

완성의 濃淡(농담)과 餘白(여백), 明暗(명암)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열린 마음과 깊은 안목을 반성하는 것이다.

또한 완성은 끝이 아니며, 완성 뒤에 세상이 끝나는 것도 아니라는 것을 되새겨 보고 있다.

Post 完成... 작고 큰 완성과 무관하게 역사는 이루어져 왔고, 완성은 시작도 끝도 아니었다.

세상은 늘 그렇게 존재해왔으며, 그렇기 때문에 또다시 아름다운 선택이 강조될 수밖에 없지 않을까?

 

 

 

 

어쩌면 세상 모든 일과 모든 것, 그리고 모든 관계가 그러하듯이 때로 완성은 느림과 중단, 낮음과 부족함, 어둡고 습함, 복잡하고 어지러움, 후퇴와 단절로 귀결될 수도 있다.

결국 어떠한 完成(완성)이란, 是非(시비)나 合理(합리), 美醜(미추)와 效率(효율), 그리고  終結(종결)이나 최상이란 관점에서 평가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높고 낮음(高低), 밝고 어두움(明暗), 그리고 가깝고 먼(近遠)이란 잣대로 접근해야 되는 게 아닐까 싶다. 그런 이유로 존재하는 모든 것들이 합리적이듯, 어떤 완성도 아름다울 수밖에 없는 거 아닐까?

 

완성되지 않음을 두려워하지 말자, 느림과 부족함을 부끄러워하지 말자, 중단과 후퇴를 아쉬워하지 말자. 단지 그 마무리의 깊고 얕음, 빛과 그림자, 그리고 그 이후(post)에도 주인인지 아닌지만 생각하자. 이 모든 과정이 내가 읽어내지 못하는 또 다른 완성일테니까...   

나의 수준과 한계를 현실 그대로 받아들이고 인정할 줄 아는 열린 마음과 깊은 안목을 갖춘다면

완성이란 무엇인지 찾아다녔던 나의 답사여정과 소요는 진정 아름다운 선택이 되지 않을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