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끔 자리가 사람을 바꾼다는 말을 이해할 때가 있다.
사람만이 아니라, 지금 보는 원랑선사탑비도 그렇다는 생각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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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 경복궁 야외 전시실,
잔디위에 비슷비슷한 석물들과 같이 놓여있을 때는
워낙 뛰어난 법천사지 지광국사현묘탑이나, 염거화상탑비 등에 가려 눈요기꺼리로 지나치곤했는데,
중앙박물관 주통로, 고달사시 석등이 놓여있던 자리로 옮겨지더니
그 진가가 이제야 하나씩 보이는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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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석을 받치고 있는 귀부의 조각 하나하나가 어여쁘고,
특히 비석받침의 꽃문양 같은 운기문(강우방 교수가 좋아하는 표현으로 구름이 기로 형상화된 문양)이
너무나 탐스럽게 세련되어 보이고,
거북이의 목줄기를 가공한 조각들도 격조높다 싶게 부드럽다.
김영이 쓰고 구양순체로 새겼다는 비석의 글짜와 내용은 알지 못하나,
비석을 누르는 이수의 용들도 한사람의 영혼을 위로하기에 충분한 여유를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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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도탑의 형식과 제작연대를 추정하는데 기준이 되는 비석받침의 독창성이 눈에 띠고,
거북이 등껍질에 새겨진 꽃무늬는 정성스럽고
비석은 날씬하고 우아한 빛깔을,
그리고 이수는 자유롭게 조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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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0년이면 장보고의 후원을 받던 선종계열의 선사들이 전국 각지에 구산선문을 일으키던 시기.
중앙의 집권력은 약화되고 귀족은 분열되고, 지방 호족들이 서서히 역사의 전면에 나서던 때인데,
원랑선사는 자신의 깨달음을 민초들에게 충분히 환원했는지 입적해서도 이리 호사를 받았나보다.
모든 게 과하면 넘치고, 고이면 변하게 되는 게 인지상정이듯이
나라의 구심점을 만들고, 통치의 정당성을 살렸던 불교는 결국 왕권과 나라의 정통성을 위협했으니
원랑국사의 화려하고 세련된 부도탑비를 보면서 나는 거꾸로 신라의 끝자락을 느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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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생몰에 귀천과 시비, 그리고 호불호를 논하기 쉽지 않지만,
또한 그의 인생을 충분히 더듬어보지 않고 그의 비석으로 생을 논한다는 게 불편하지만,
기억되는 이와 기억해야할 이로 자신의 흔적을 남긴다면 그 또한 명예롭고 축복받을 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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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그의 사상과 행적, 그리고 그를 추앙하고 기억하는 이들을 충분히 알아보지 않고,
그 시대가 만들 수 있는 문화의 성취와 예술의 깊이를 천년이 지난 내 눈으로 보고 있으니
나는 여전히 한사람을 보지 않고, 시대와 예술만 논하는 관념에 빠졌다는 지적을 받는다 해도,
그 화려함속에서 생동감을 잃어가는 신라와, 형식으로 깊이를 자랑하는 관념을 찬양할 수만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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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이순간 바라보는 원랑선사비는 참 즐겁고 경쾌한 눈 맛을 주는 게 분명하다.
세련되고 우아한 손놀림이 그렇고, 단아하면서도 화사한 문양들이 그렇다.
몰락해가는 신라와 이미 넘쳐흘러 자유분방하게 자랑되는 문인들의 찬양속에
한 사람의 생이 기록되고, 한 시대의 예술혼이 조각되고, 하나의 사상이 완성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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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몰이 완성이 될 수 없겠지만,
성/쇠가 결말은 아니겠지만
저 작은 조각들 하나하나에 스며든 정성과 숭고한 기도는 그렇게 우리들의 눈을 자극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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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리가 바뀌더니 자태가 달라지고, 보이지 않던 것들이 보인다.
가끔은 비교되지 않고, 혼자만의 넉넉한 공간에서 스스로를 드러내 보이는 것도 필요하리라.
시선이 집중되고서야 작은 것들이 커져 보이고, 낮은 게 높아 보이고...
역시 자리는 중요하고, 충분한 여백이 본질을 돋보이게 만들지도 모르겠다.
홀로, 스스로 드러내는 것도 필요한 일이며, 변화는 수동적이든 능동적이든 자극이 될듯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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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가위 명절...
변화된 자리와 충분한 여유-혹은 여백, 그리고 혼자만의 시간이 필요한 이유가 아닐지...
여유롭고 즐겁고 멋진 연휴 맞이하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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