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립중앙박물관 특별기획전 <천하제일 비색청자>
2. 국보 청자는 몇 점이나 있을까?
3. 고려청자의 시대적 흐름 - 용도와 기형, 문양의 변화를 중심으로...
4. 고려청자의 다양한 色(색) - 도기와 자기, 청자와 백자, 자토와 유약...
5. 몇가지 메모 - 쉬어가는 페이지...^^
5-1. 운동회는 왜 청백전으로 치러질까?
5-2. 쓸데없는 이야기 - 일본의 3대 전투와 3대 사건, 그리고 도자기
5-3. 고려청자는 왜 천하제일 비색일까? - 비색(秘色, 翡色)의 의미...
6. 우리나라에서 고려청자가 조선백자보다 더 귀한 이유
7. 천하제일 비색청자 - 고려청자
5. 몇가지 메모 - 쉬어가는 페이지...^^
청자의 종류와 색에 대해 살펴 여기까지 왔으니 다음은 비색이란 무엇이고, 고려청자는 어떻게 단절되어 가는가도 살펴봐야겠지요? 근데 이렇게 진행하면 너무 지루하거나 재미없거나, 진지하거나... 해서 잠시 쉬어가는 게 났겠다는 생각도 듭니다. 어째든 이번 편에서는 고려청자의 비색이란 무엇인지 살펴보겠지만 잠시 삼천포로 빠져봅니다...^^
5-1. 운동회는 왜 청백전으로 치러질까?
가볍게 시작해 볼까요? 청자와 백자, 청자 백자... 청백자... 하다가 갑자기 어렸을 적 운동회가 생각났습니다. 학교 다닐 때 운동회는 항상 청군과 백군으로 갈라지잖아요? 혹시?? 이 청군과 백군이 청자와 백자에서 유래한 게 아니야??? 우리들의 의심 혹은 추측이라는 건 시작만 있고 끝이 없는 경우가 대부분이듯 저의 호기심도 여기서 멈췄었지요. 근데 이번엔 청자와 백자를 하도 생각하다보니 이젠 답을 내려야겠다는 욕심이 들더군요. 해서 시작해 봅니다. 왜 우리나라 운동회는 나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청군과 백군으로 갈라져 싸워야만 했을까? 그리고 왜 얼마전까지 가요대상 같은 걸 할 때도 청백전이 되었을까요?
<제가 다니던 초등학교... 학강 국민학교였는데...^^ 당시 저는 집에서 학교로 가는 10가지 이상의 방법을 알고 있었지요... 저렇게 담을 넘는 곳도 여러곳으로 정해놓고...ㅎㅎ 그때는 꽤 높은 담이었는데...^^>
<충무공 이순신 장군 동상은 변함없네요... 너무 오래 서 계셨는지, 많이 야위셨어요...>
<우리 모두가 경험하지요? 그 넓던 운동장이 왜 그리 좁아졌는지... 목이 타도록 뛰어 다녀도 좋았는데...^^>
우리가 편을 가를 때 사용하는 방법은 많습니다. 먼저 방위에 의한 구분이 있겠네요. 우리나라도 남북으로 갈라져 있고, 미국의 노예해방 전쟁 때도 북군과 남군이 있었고, 베트남이나 예멘의 분단도 남북이니 남군과 북군이 있을 수 있겠습니다. 또 있습니다. 독일처럼 동독과 서독... 우리나라 신라와 백제처럼, 혹은 70년대 이후 전라도와 경상도처럼 동쪽과 서쪽의 구분도 있겠네요. 역사적으로 추적해보면, 이웃 일본의 세키가하라 전투에서도 동군과 서군으로 나뉘어 있었죠. 근데 방위를 쫓아가려다보니 너무 정치적이거나 역사적이죠? 승패가 분명한 이유도 있겠지만, 오해의 소지 때문인지 잘 사용하진 않겠군요.
또 하나, 방위는 아니지만 좌측과 우측의 구분도 있을 수 있습니다. 장난삼아 하는 내기골프에서 좌탄, 우탄으로 편을 가르기도 하지요? (물론 장타와 숏타의 구분도 있지만...^^) 근데 이것도 좌파, 우파로 나뉘다보면 이야기가 엉뚱하게 전개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거기다 상하로 나누는 것도 너무 위계적이지요? 그래서 그런지 이것도 잘 사용하질 않습니다.
<색... 서울 시립 미술관인가요? 덕수궁인가요??>
그러면 가장 쉬운 방법이 뭘까요? 색으로 구분하는 게 아닐까 싶습니다. 이건 의외로 많이 사용되고 있습니다. 태극기를 생각하면 적색과 청색으로 구분되고, 또 음양오행을 생각하면 적,청,황,흑,백의 다섯가지 색이 나오는데, 삼국지에서 제갈량이 만든 팔괘진이나 수호지에서 오용이 만든 구궁팔괘진에서 음양오행에 부합하는 생사의 관문이 색으로 표현된 적 있으니 잘만 고르면 괜찮은 조합이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그리고 조금 더 불편하지 않게 나가면 색의 보색대비도 있으니 이게 나쁘지 않을 거 같군요.
<서울여자대학교... 우리가 칠할 수 있는 모든 색?? 다시 인용합니다...>
그러면 가장 쉬운 건 백군과 흑군입니다. 흑백의 대립... 선명하잖아요?! 그런데 이것도 잘 사용하질 않지요. 왜냐하면 천사는 백색이고, 악마는 흑색이잖아요. 게다가 무림 무협만화에서도 항상 정의맹은 백도고, 마교는 흑도니까...ㅋㅋ 하나 더 나가면 태극문양에서 나오는 적색과 청색의 대비가 있을 수 있겠습니다. 우리 전통의 청사초롱도 항상 적색과 청색의 조합이잖아요. 문제는 지금까지 왜 양이 적색이고, 음이 청색인지 우리가 자세히 설명들은 바 없었고, 조선시대까지 주로 사용하던 태극은 적청 이태극이 아니라, 적청황 삼태극이 주류였는데(한중일 모두가 삼태극을 주로 사용했지만, 우리의 삼태극에서만 황색이 표현되고, 중국과 일본에서는 흑색이 많이 사용) 언제부터 이태극이 고착됐는지 잘 모른다는 점이죠.
<환구단에서... 삼태극... 막상 찾으려니 없네요...ㅉ 부채 사진이라도 하나 찍어 둘 걸...^^>
먼저 태극기에 이태극이 최초로 사용된 건, 1882년 박영효가 허가받지 않은 국기를 사용하면서 만든 게 사람을 상징하는 황색을 빼고 천지-음양-적청, 이태극으로 그리면서 부터랍니다. 그러면 왜 태극은 적색과 청색으로 칠해졌을까요? 그냥 규칙이고 규범이라 받아들이면 편할 거 같아요. 유교적, 도교적 설명이전에 <주역>과 <주나라의 예법>에 근거해서 말입니다.
日(일)-陽(양)-東(동)-左(좌), 月(월)-陰(음)-西(서)-右(우)(그러니까 조선시대엔 좌의정이 우의정보다 높고, 만원권 지폐 배경인 ‘일월오봉도’에도 해가 왕의 좌측에 그려지게 됩니다. 그리고 제사 지낼 때 동쪽이 좌측인지 우측인지도 여기서 정해진 거죠) 天(천)-上(상)-陽(양)-赤(적), 地(지)-下(하)-陰(음)-靑(청)... 음양을 상징하는 색깔이 왜 적색인지 청색인지 분명해지지요? 그런데 이런 철학적이고 문화사적이며, 시대정신이 분명한 전통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왜 우리나라에서는 청백전이 고착되었을까요?
<탑골 공원 앞에서... 당신 눈에는 빨간색이 더 많이 보여요? 아니면 파란색이 더 많이 보이나요?^^>
사실 그 이유를 근현대 역사에서 찾아보면, 일제 강점기부터 시작합니다. 지금도 일본에서는 청백전이 아니라 홍백전이 주류를 이룹니다. 그러니 당연히 해방 후에도 우리나라에 정착한 것은 홍백전이었겠죠. 그런데 분단과 625전쟁 이후 북한과 공산당을 상징하는 적색을 인정할 수 없었겠죠. 그래서 50년대쯤부터 적색이 의도적으로 사라지고 청색이 사용됩니다.
물론 2002년 붉은 악마가 거리를 휩쓸던 한일 월드컵부터 레드 콤플렉스는 서서히 사라져 가는지, 수구 보수진영의 대표인 새누리당에서 적색 비슷한 자색을 당기로 사용하기 시작하면서, 목도리도 잠바도 붉은 색으로 입게 되었으니 얼마나 세태가 변했나 알 수 있지만, 아무튼 색은 단순한 기호나 취향의 문제가 아닌 정치적 사상적 선택의 기준이 되기도 합니다. 결국 일본의 홍백전 문화와 우리의 분단상황이 문화적으로 반영되면서 우리에게 청백전 대항으로 정착되는 것입니다.
5-2. 쓸데없는 이야기 - 일본의 3대 전투와 3대 사건, 그리고 도자기
그러면 왜 일본에서는 적대적이지 않은, 친목도모와 협력을 강조하는 편가르기에서 홍백전이 정착했을까요? 일본 답사여행 법륭사와 동대사편에서 잠깐 소개하다 말았는데, 간무천황이 헤이안으로 천도하고 시라카와천황이 1086년 원정(우리나라로 말하면 상왕쯤...)을 시작했다고 말씀드렸죠? 그후 100년이 지나 일본 군부와 정계는 미나모토(源氏(원씨)) 가문과 타이라(平氏(평씨)) 가문의 대립으로 좁혀지는데, 이 둘이 맞붙은 1185년 겐페이(源平)전쟁(일본의 3대 전투 중 하나인 ‘난노우라 전투(해전)’가 여기에 포함되어 있고, 당구칠 때 겐뻬이라고 하시죠? 그 겐뻬이가 이 겐페이입니다. 생각해보면 당구공도 빨간색과 흰색으로 돼있죠?...^^)에서 각각 사용했던 깃발이 백색과 홍색이었고, 결국 백군을 이끌던 미나모토 요리토모가 이기게 됩니다.
이 과정은 전투의 드라마틱한 과정뿐 아니라 일본역사에도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되었는데, 이때부터 천황이 정치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쇼군이 주도하는 막부정치가 시작되고, 이 때 미나모토 가문이 연 막부를 ‘가마쿠라 바쿠후’라고 부릅니다. 오늘날 일본의 홍백전은 겐페이 전쟁에 기원을 두고 있으니, 결국 역사가 문화가 되고, 다시 전통으로 굳어졌다고 말해야겠군요.
<그래도 일본과 도자기에 관련된 이야긴데, 일본 도자기 몇 점은 감상하고 가는 게 좋겠죠? 국립중앙박물관 일본관... 저렇게 편안한 로마식 자세로 누워 시작합니다... 일본엔 청자 만들 기회가 없다고 기껏 이야기했더니 이건 아무래도 그런 종류가 아닐지...>
홍백전의 효시인 겐페이 전쟁에 일본의 3대 전투 중 하나가 포함되었다고 말씀드렸는데 조금 더 나가보렵니다. 흔히 일본의 역사를 바꾼 3대 사건이 있다고 하는데, 하나는 쇼토쿠 태자의 등장과 다이카 개신이고, 두 번째는 일본의 3대 전투 중 하나인 세키가하라 전투(동군/서군)로 등장하는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에도막부, 세 번째는 보신(무진)전쟁(역시 일본의 3대 전투 중 하나인 도바․후시미 전투와 하코다테 전투를 묶어서)으로 선포되는 메이지 유신이 그것입니다.
일본의 역사와 정체성을 바꾼 세 번의 사건 중 두 번이 군부 및 천황과 연결(그래서 군국주의 성향이 강한가?^^)돼 있고, 곰곰이 생각해보면 세 번의 사건은 모두 한반도와 연결되어 있죠. 백제의 멸망을 전후해 다이카 개신이 일어나고, 임진왜란 이후 에도막부가 탄생하며, 메이지 유신은 우리나라 근대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치게 됩니다. 그리고 지금 주제인 도자기와도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습니다.
<국립중앙박물관...>
이미 앞서도 이야기 했지만 도자기는 인류의 식생활을 변화 시킬만큼 중요한 문화자산이었습니다. 더욱이 습한 기후에서 위생적인 생활을 갈구하던 일본인들의 욕구와, 불교의 전파와 함께 수백년 동안 정착한 다도문화 향유를 위한 茶器(다기)에 대한 갈망은 생각보다 대단한 것이었습니다. 때문에 가마쿠라 막부 이후 쇼군과 사무라이들의 회합에서 茶道(다도)에 대한 격식이 상류층의 품위와 직결 될만큼 중시되는 거죠.
그때 사용했던 다기들은 왜구들이 조선에서 약탈해 온 막사발(오랜 왜구의 침탈로 조선 남해안과 서해안 일대의 관요들은 모두 철폐되고, 내륙으로 이동합니다)이었으니, 임진왜란의 발발과 함께 대대적으로 진행된 것은 도자기 약탈뿐만이 아니라 가장 귀중한 인적자원인 사기장들의 납치였습니다(요즘에는 임진왜란을 설명하면서 꼭 <도자기 전쟁>이란 부연이 들어가죠?).
<다기들/아사가... 여기서 마셨던 차(철관음) 맛은 아마...^^ 흠~~~>
여기서 일본의 도자기 역사가 시작합니다. 먼저 당시 조선은 최고 품질의 백자를 만들 수준에 이르지 못했죠. 아직 그에 적합한 고령토 산지를 찾지 못했다는 것과 관요에 소속된 장인들은 한정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었죠. 때문에 그때 잡혀간 도공들은 대부분 일반 가마에서 일하던 사기장들이었을 겁니다.
당연히 그들이 만들기 시작한 것은 조형과 색, 문양이 완벽한 백자가 아니라 사기, 즉 막사발이 주류(일본의 국보와 중요문화재에는 막사발이 많습니다)를 이루게 됩니다. 그리고 이들이 정착한 곳은 조선에 가까운(고향에서 가까운!!?) 큐슈를 중심으로 한 관서지방이 되구요(도자의 명인이라는 이삼평이나, 심수관 모두 이곳에서 고령토를 찾고 가마를 만듭니다. 또 그런 이유로 일본에서는 청자가 만들어질 수 없었고, 일제강점기 때 백자보다 고려청자가 귀한 대접을 받습니다. 그들에게는 없는 문화니까...).
<예다원중앙회 카페에서... 막사발에 대한 생각이 나온 거 같아 스크랩했습니다...>
<억지 하나 더 부려 볼까요? 도자기 운반은 육로보다 해운을 이용하는 게 파손이 적습니다. 운반과정의 흔들림을 방지하기 위해 이집트나 중동 사막에서는 궤짝에 모래를 채웠다고 했으니 얼마나 무겁고 느렸겠습니까? 일본 내에서는 어떻게 했을까요? 일본은 섬나라임에도 불구하고, 운하 즉 해운 교통망이 아주 잘 만들어져 있습니다. 도자기와 무관할까요?... 그런 생각을 해봤습니다... 이 사진은 큐슈 정반대쪽 훗카이도 오타루입니다...>
이들의 역할은 우리의 생각이나 상상을 뛰어 넘습니다. 먼저 1600년대 중반 드디어 큐슈에서는 백자가 생산되기 시작합니다. 대량으로... 그리고 얼마 후 청나라에서는 일시적으로 유럽에 대한 도자기 수출을 금지하게 되고, 상대적으로 저렴했던 일본산 도자기는 유럽 시장을 잠식해 들어갑니다. 생각해보세요. 금값과 맞먹던 도자기를 수출한 일본(당시 큐슈지역의 藩(번))이 어느 정도의 자산을 축적할 수 있었는지(방식과 핵심은 다르지만, 경제학원론에서 말하는 원시적 자본축적이 되나요?^^ 아무튼 일본 근대화를 이룬 자본축적의 원동력이 어디에 있는지, 임진왜란을 왜 도자기 전쟁이라 불리게 되는지 이유가 분명해지지요?!)...
뿐만 아닙니다. 이때부터 일본은 유럽에 상당 수준의 문화국가로 각인되기 시작(일본국호 japan은 영어로 옻칠, 칠기와 도자기 등을 뜻하기도 합니다)하고, 심지어 도자기 수출을 위해 포장지로 사용하던 판화가 새겨진 폐지는 고흐 등에게 영감을 주게 되고, 그로 인해 촉발된 게 바로 인상주의의 시작입니다.
<이건 판화가 아니라 그림입니다... 일본 판화 그림... 그걸 올렸어야 하는데 찾아봐도 없네요...ㅉ>
<역시 국립중앙박물관 일본관에 있는 칠기입니다... 이번에 공부 많이 합니다... japan이란 영어 단어의 뜻도 다시 찾아보고...^^ 옻칠을 누가 전해 주었냐는 중요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일본은 그 국호에 세계 최고의 기술의 옻칠을 지닌 문화강국으로 인식되어 있으니까...ㅠㅠ china나 japan이나 유럽에서는 도자기가 두나라에서만 생산된 것으로 알고 있다는 말이지요?>
하나 더 나가면 이때 축적된 큐슈지방과 관서지방의 부(도자기뿐만 아니라 동, 설탕수출도 큰 몫을 했다고)는 신진세력을 등장시키게 됩니다. 풍족한 환경에서 충실히 교육을 받고 자란 체계적 엘리트 양성에 사회적 기반이 된 거죠(이들의 미국유학은 자발적이었다고). 그들이 바로 에도막부를 반대해 존왕양이론을 들고 나와 메이지유신의 주축을 이룬 사츠마藩(현재 가고시마현), 조슈藩(현재 야마구찌현)의 토막파(이에 반해 막부 독재파를 좌막이라 부릅니다)입니다. 그리고 교토에서의 도바․후시미 전투 이후 관군의 훗카이도까지의 동진을 보신전쟁이라고 합니다.
이 세력이 폐번치현의 군사적 기반(유신군, 요즘 일본의 극우정당으로 떠오른 게 유신당이죠?)이고, 메이지 천황의 정치적 기반(보신전쟁의 전몰자 3,588명을 위해 1869년 창건한 게 바로 야스쿠니 신사죠. 그러니 야스쿠니 신사참배는 그들이 지향하고자 하는 정치적 사상적 염원이 담겨있다고도...)이었을 뿐만 아니라, 조선침략을 주도한 정한파/지한파(다시 고향으로 돌아가려는 회귀본능?)의 지역적 기반이며, 이후 100년 넘게 일본의 정치사상계를 주름 잡는(안중근 의사에게 암살 당한 이토 히로부미(이등박문, 메이지 유신의 초안을 잡은 이토 히로부미는 일본 근대사에 가장 비중있는 인물 중 한사람이다. 그의 유일한 실패는 조선통감... 그리고 그의 암살로 오히려 매파가 득세하게 된다)부터) 주축(대략 70%쯤 되죠?)이 됩니다.
<'삶의 흐름속에' 블로거님에서 스크랩... 좌도우사... 지도가 때론 많은 걸 설명해 주지요...>
임진왜란-도자기 전쟁으로 납치된 사기장들에 의해 큐슈지방에서 도자기가 생산된 200년 후 조선과 일본은 그렇게 변합니다. 도자기 하나로 한반도와 일본의 근대사가 다시 쓰일 수도 있겠죠?^^ 임진왜란 이후 주고받던 관계의 조선과 일본은 똑같은 쇄국과 불평등 조약을 거치지만, 그 결과는 천양지차였습니다. 생각해보면 조선의 쇄국은 대원군에 의해 시작된 게 아니라, 임진왜란 이후부터 지속되다가 그에 의해 완성된 것일지도 모르겠습니다.
똑같은 쇄국 상태에서도 우리는 중국에만 열려 있었고, 일본은 조선과 중국 외에 네덜란드라는 통로가 있었죠(일본도 1639년 최후의 쇄국령을 내려, 1853년 페리에 의한 강제 개방까지 지속됩니다. 그러나 한 곳을 터놓았죠. 그곳이 큐슈(!) 나가사키였고, 이곳 데지마(인공섬, 그때 이미...)에 정착한 네덜란드 상인은 214년간 일본의 대 유럽무역 독점권을 가지게 됩니다. 참고로 빈센트 반 고흐도 네덜란드 사람이구요.^^).
<철화백잔데, 색감이 아쉽네요... 국립중앙박물관 일본관... 이하 같습니다...>
그리고 쇄국과 개방, 수구와 개혁, 존왕양이와 통상... 거의 비슷한 경로를 답습하면서도 당시 조선과 일본은 전혀 다른 길을 걷게 됩니다. 실학사상과 동학농민군은 무참히 짓밟히지만, 탈아입구와 관군(유신군)은 일본을 점령하지요. 그들에게는 축적된 부와 무력을 동원할 저돌성을 갖추고 있었던 것입니다. 여기에 도자기 산업은 큰 역할을 합니다(참, 앞에서 난데없이 태극에 대해 설명했는데, 최초의 외교를 위한 공문에 태극기를 그려 보낸 이가 바로 일본 수신사로 있던 박영효였기에 이렇게 저렇게 엮어 봤습니다...^^).
천하제일의 빛깔을 갖춘 청자를 만들고, 조선만의 백자를 만들었지만 우리는 왜 수출과 교역을 하지 않았을까요? 그렇지 않습니다. 그들도 했지요. 다만 그들에게 세상은 중국에 한정되어 있었을 뿐이죠. 흔히 조직의 운영이든 국가의 경영이든 선택과 집중에 대해 이야기 합니다. 그게 문제일까요? 혹은 상업을 천시했기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사대주의와 보수세력의 반대 때문에? 그렇지 않습니다. 일본도 똑같았지요. 정말 차이가 있다면, 그들은 내부를 통제하고 관리한 상태에서 개방에 대처했다는 것이고, 우리는 내부의 축적과 준비없이 계획만 난무 했다는 것이 더 중요하지 않을까요?
아무튼, 우리는 만들 줄(만) 알았지만, 일본은 활용할 줄(도) 알았습니다. 또한 우리는 아직까지 누가 먼저 알았고, 누가 가르쳐주었는지 권위와 체면을 따지는데, 그들은 그걸로 무엇을 했는지, 얼마나 보편적으로 확산시켰는지를 반문하고 있습니다. 그 차이겠죠. 그리고 그 부와 가치가 무엇을 변화시켰는지, 그들이 지향했던 세계는 어디를 겨냥했는지도 분명히 차이가 납니다. 청백전에서 시작한 일본의 도자기 역사와 한반도를 둘러싼 중세와 근대사... 도자기를 단순히 문화예술 감상품으로만 볼 수 없는 역사가 담겨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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