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국립중앙박물관 특별기획전 <천하제일 비색청자>
2. 국보 청자는 몇 점이나 있을까?
3. 고려청자의 시대적 흐름 - 용도와 기형, 문양의 변화를 중심으로...
4. 고려청자의 다양한 色(색) - 도기와 자기, 청자와 백자, 자토와 유약...
5. 몇가지 메모 - 쉬어가는 페이지...^^
6. 우리나라에서 고려청자가 조선백자보다 더 귀한 이유
7. 천하제일 비색청자 - 고려청자
3. 고려청자의 시대적 흐름 - 용도와 기형, 문양의 변화를 중심으로...
다음에 자세히 말할 기회가 있겠지만, 간략하게 고려청자의 변천을 정리해보겠습니다.
먼저 신라말 고려초 10세기부터 청자는 생산되기 시작했지요?!
11세기 제작된 청자들이 출토되었지만 아직 고려청자 본원의 색을 띠지는 못했고,
제작기술과 좋은 태토를 확보한 12세기 중반이 되면 문양은 없지만 다양한 형태의 순청자가 완성되어, 무신정권이 시작될 즈음 고려청자는 기형과 색깔에서 최고의 수준을 보이게 됩니다.
이어 13세기초, 몽고 침략으로 시작된 원나라 간섭기에는 다양한 문양을 갖춘 상감청자가 절정기를 맞이하고, 14세기 고려말에 이르면 고려청자는 많이 퇴화하면서 분청사기가 확산되기 시작합니다.
왕실이 바뀌어 조선이 개국하면서도 청자는 백자와 함께 맥을 이어가다가 17세기 중반 고려청자는 완전히 자취를 감추게 됩니다(얼만큼 철저히 잊혀지냐구요? 구한말 고종황제는 일본인들이 선물한 고려청자를 보면서 이게 무엇이냐고 묻지요...).
청자를 이해하기 위해 맨 먼저 짚고 넘어갈 부분은, 고려가 시작되기 이전부터 신라말 선종의 영향 때문이겠지만 ‘茶道(다도)’의 정착과 함께 도자기의 수요가 많아졌다는 점에서 출발해야 될 거 같아요. 다도의 격식을 위해서는 당연히 ‘茶器(다기)’가 있었어야 할 거고, 그래서 주전자와 碗(완), 대접, 합 같은 것들이 만들어졌겠지요? 그래서 이번 전시회 1부는 당나라의 다기와 신라의 다기 일부에서 청자가 만들어져야 할 사회적 필요성... 당대 시대의 욕구가 먼저 던져지지요.
<그럼 먼저 다기에서 주자(주전자)의 변화에 대해서 살펴보자>
<주자/8세기 당나라... 아마 이번 전시회 처음 시작이 이 작품이라는 점은 여러가지로 시사하는 바가 크다... 청자(엄밀히 도자기라고 해야겠지?)의 수요와 용도, 형태가 어디서부터 시작하는지를 설명하는 단초가 아닐까 싶다... 나의 이야기도 여기서부터 시작한다... 큐레이터의 의도를 충실히 살리기 위해...^^>
<대나무 모양 주자... 언제 만들어졌고, 누가 소장하는지 메모하질 못했다... 극상품은 아니라는 생각에서...^^ 하지만 청자는 - 주자는 이렇게 변해간다...>
<석류모양 주자... 이것도 주전자다... 밥상이나 술상에 오르기 위한 것이 아니라 차를 마시기 위한 주전자가 아니었을까? 고려인들의 손재주가 본격적으로 발휘되는 시점... 색감도 최고에 이르게 된다... 이때가 1100년대가 아닐지...>
<모란 넝쿨무늬 주자와 받침/12세기 이데미츠미술관 소장... 받침은 승반이라고 부른다... 무늬가 없는 청자가 다양한 형태로 만들어진 이후에 이렇게 음각으로 무늬를 새겨넣은 청자들이 만들어지지 않았을까? 주자의 경우도 그런 발전 경로를 밟았으리라...>
<다양한 형태의 주자... 저 귀여운 주자들 역시 차를 마시기 위한 용도가 아니었을까? 요즘도 그렇잖아... 고려인들은 차를 혀와 코로 음미하기 전에 이미 눈으로 음미했을 거 같다...^^ >
<연잎 완, 주자와 받침... 상감문양을 넣은 주자와 완, 대접들은 많이 봤으니 다른 걸로... 언듯 왼쪽 대접은 음각을 한 거 같고, 오른쪽 주자는 상감기법을 사용한 거 같지? 처음엔 나도 그렇게 알고 있었는데 그게 틀렸다...ㅠㅠ 두가지가 한 세트로 놓인 건 제작시기가 동일해서가 아니라 제작기법이 같아서다... 둘다 자토와 백토를 붓으로 그려 넣은 것으로 '퇴화(堆花)청자'라고 부른다... 왼쪽이 12세기, 오른쪽이 조금 더 후대다...>
<그러면 잔으로 사용하던 완이나 대접은 어떻게 변했을까?>
<글자가 있는 완/통일신라/국립경주박물관... 잔도 마찬가지였을 거 같다... 이미 상당 수준에 오른 중국의 다기들이 수입되어 들어올 때쯤, 신라에서도 자체적으로 다기들이 만들어졌겠지(1920년대 아르헨티나나 1970~80년대 우리나라의 수입대체산업을 생각해 보라)... 신라말기의 도자기는 아직 도기 수준이 아니었나 싶다... 아직 한반도는 자기를 만들 기술을 가지고 있지 못했다...>
<연판무늬 발/12세기/오사카시립 동양도자미술관 소장... 이제 고려에서 잔을 생산하게 되었을 거고, 그 첫번째 문양은 불교와 관련있는 연잎이 주요한 문양의 소재가 아니었을까 싶다...>
<모란무늬 완/12세기... 그리고 얼마 있어 이렇게 상감문양이 들어간 잔들이 만들어졌겠지... 12세기 초까지는 이렇게 시원한 여백을 남겨두고 꼭 필요한 문양만 넣는 게 고려인들의 심성이 아니었나 생각해본다...>
<'기사'가 새겨진 연꽃 넝쿨무늬 대접과 '임신'이 새겨진 구름 학무늬 대접... 사진도 그렇지만 색감이 완전히 달라지지?! 왼쪽 기사년은 1329년이고, 오른쪽 임신년은 1332년이니, 바로 위 모란무늬 대접과 비교하면 최소 150년이 지났다... 시대도 사람도, 흙도 변했겠지... 14세기 작품들에는 이렇게 제작년도가 명기된 경우가 많다...>
그러면 왕실이나 불교계 등 상류층에서만 사용했던 최고의 사치품 도자기는 어떤 모양들이 만들어졌을까요? 일단 11세기까지 청자는 다양하게 만들지는 못했을 거 같아요. 탑지석과 함께 사리함으로도 사용된 걸보면 신라시대의 금속공예나 유리제품을 대체하는 정도였으니 얼마나 귀했겠습니까. 부장품으로 청자가 사용되었다는 것은 살아서의 영화를 죽어서도 이어가고 싶거나, 살아서 누리지 못했던 걸 죽어서라도 영유하고 싶다는 욕구의 표현이었을테니 그만큼 수량도 적고 귀했겠지요. 또한 향로나 제기 등 특정 용도로만 제작 되었을테니 수량도 한정되지 않았을까요? 단, 일정 기술이 습득되면 정말 다양한 모양의 청자가 제작될 동기가 될 수 있었겠지요.
<다기 외에 청자는 어떤 용도와 모양으로 만들어졌을까?>
<사리합/1009년... 도자기의 용도는 다기에서 유래했을까? 내 생각으론 그 이전부터 사리함을 금속이나 유리로부터 대체하기 위해 시도가 됐을 거라 추측된다... 물론 이 작품도 전시회 맨 앞에 놓여있다... 이것도 큐레이터의 의도였겠지... 이때가 11세기였으니, 당시 청자의 용도와 색감이 잘 나타나있다...>
<합/12세기... 왼쪽은 국립중앙박물관, 오른쪽은 오사카시립 동양도자미술관 소장품이다... 자세히보면 두개의 몸체에 뚜껑, 3개로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고, 육안으로 쉽게 확인하기 어렵지만, 왼쪽 합은 뚜껑과 몸통에 연꽃무늬가, 오른쪽 합은 뚜껑에 넝쿨무늬가 음각되어 있다... 사리함으로 추정된다...>
<새 꽃무늬 매병/14세기/밀양 영원사지 출토... 이것도 상감청자의 하나이면서 사리함이다... 11세기, 12세기, 14세기 사리함의 비교를 위해서 올린다... 생각해보면 300년 용도는 변함없지만, 문양과 기법, 수준은 완전히 달라짐을 알 수 있어서... 전체적인 품격이나 문양, 기법 등이 확연하게 퇴화됨도 확인할 수 있다...>
<위 매병의 안내문... 한글로는 분명히 14세기인데, 영문으로는 12세기라고 써있다... 무엇이 맞을까? 영문이 틀렸다... <천하제일 비색청자/국립중앙박물관/2012.10.15간> P125에 자세히 나와있다... 빨리 고치시길...^^>
<다기와 사리함 외에 또 어떤 것들이 만들어졌을까? 나는 초기의 희귀한 가치 때문에 제기의 수요가 많았을 거라 생각하고 있다... 물론 왼쪽은 사람모양 연적이니 조금 더 후대일 것이고... 오른쪽이 국보65호 기린모양 향로/간송미술관 소장을 닮은 향로다...>
<어룡 모양 향로... 연꽃 받침 위에 어룡모양이 올라가 있다... 부도의 귀부는 거북이 몸에 용의 머리인데, 청자에는 용의 머리에 물고기 몸이 많다... 머리만 사람으로 바뀌면 그게 인어??^^>
<넝쿨무늬 장고/12세기... 그리고 또 무엇이 만들어졌을까? 이렇게 장고도 만들었다... 이것도 청자일까? 철화로 넝쿨무늬를 그려 넣었지만 청자가 맞다... 여기서 나는 엄청 고민했다... 청자의 기준이 뭐지? 녹청색빛을 띠어야 청자가 아니었나?? 아니었다...^^ 다음에 자세히 알아보자...>
관요에서만 생산되던 청자는 11세기 넘어서야 진흙가마를 갖추면서 안정된 대량생산 시스템에 들어간 게 아닐까 싶어요. 해상 운송로 확보에도 행정적 통일성을 갖추고 말이죠. 그랬으니 강진이나 부안에서 개경(개성)으로 가는 해운선이 침몰하기도 하고 결국 상당수의 청자는 무덤의 부장품이나 침몰선에서 질 좋은 청자가 수거됐겠죠. 그걸 유추해 볼 수 있는 흔적들이 1부와 2부 사이에 마련된 생산과 유통 코너의 강진 가마터 흔적이 아닐까 싶어요.
<강진 용운리 가마터의 파편... 나는 저런 파편들은 아무런 가치가 없는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다...!! 요즘만 그런게 아니라, 중국 관요지 중 가장 유명한 경덕진에서는 그 파편만 모아서 판 사람이 엄청난 부자가 되었다나 어쨌다나...^^ 최근 이야기가 아니라 14~19세기까지 계속 그랬다는 이야기... 요즘에 파편을 모아 기증하신 분들의 고마움을 이제라도 알았으니 다행인가?^^>
<완... 대접이라고 해야할까? 드디어 청자의 주 생산지로 강진이 떠 오른다... 숙련된 장인들도 있었겠지만, 무엇보다 중요했던 것은 흙이었다... 도자기를 만들 수 있는 사토, 태토, 고령토... 그 태토가 가장 좋았기에 강진, 특히 사당리 관요에서 만든 고려청자는 최고의 수준이었다...>
<도철무늬 향로... 어디선가 본 거 같지? 바로 청동기 시절의 문양이다... 왜? 유행이란 항상 돌고 도는 것... 향로가 만들어지면서 결국은 그 근원까지 찾아올라갔겠지... 그래서 찾은 게 중국 청동기 시절의 고대 문양이 고려청자에도 나타난다... 그런 무늬를 통털어 도철무늬라 부른다...>
<찻잔의 받침이다... 이미 12, 13세기가 되면 다기는 대접같이 생긴 완이나 발에 만족하지 못하고 최고로 사치스럽고 화려하게 만들어진다... 최고 작품들이 충분히 전시되지 않았지만, 이런 파편이라도 만족해야지...>
<12, 13세기의 파편들이 구별되어 전시하고 있다...>
이렇게 확산된 청자는 어떤 곳에 사용되었을까요? 그 궁금증을 풀어주는 게 2부, ‘고려를 보는 창’인데, 12세기 넘어서면서 청자는 다양한 용도로 제작된 걸 확인할 수 있답니다. 신성시되던 장소에 용도에 국한되었던 게, 술상에도 밥상에도 심지어 집을 짓는 건축부재로까지 사용되었나 봅니다. 오늘날 청와대처럼 기와도 청자로 굽고, 계단 난간의 모서리도 청자 봉오리가 올라가고, 요즘 아파트 거실벽의 아트월이나 욕실, 주방 등에 대리석이나 타일을 붙이듯 청자로 만든 타일까지 만들어지지요. 뿐만 아니라 조선시대의 문방사우라 할 수 있는 벼루나 연적, 붓꽂이에 베개와 변기까지 청자로 만들었으니 가히 누릴 수 있는 사람들의 사치와 호사가 극에 이르렀을 거 같아요.
<청자의 다양한 용도... 집도 꾸미고, 화장용기로도 쓰이고, 밥상 술상에도 오르고, 변기도 만들고...>
<옛날이나 요즘이나 우리 문화 DNA는 같은가 보다... 활을 잘 쐈다는 말도 양궁에서 확인되고, 음주가무에 능했다는 동이전의 기록은, 세계 유일무이한 음주문화로 정착한 강남스타일에서도 확인되고...^^ 고려 때나 지금이나 집 꾸미기를 좋아하는 것도 우리 민족의 특성인가??>
<고리모양 의자... 청자로 만든 의자... 편했을까? 하긴 당시는 좌식문화가 아니라 입식이었으니, 요즘 소파로 신분과 구매력을 가늠하듯, 당시에도 청자의자를 가질 수 있는 신분과 그렇지 못한 계급은 차이가 있었겠지...>
<연봉... 어디에 쓰는 물건일까? 아파트나 상가 엘레베이터를 타지 않고 계단으로 오르내리는 사람은 쉽게 짐작할 수 있을 거 같다... 계단난간 마지막이나 코너 손스침 위에 동그랗게 올려진 마감재... 그런 것까지 이렇게 청자로 구웠단다...ㅎㅎ 지붕에도 얹었고...>
<모란넝쿨무늬 타호/12세기... 이건 무엇일까? 쉽게 상상이 안 가지? 이건 밥상, 술상에 올랐던 것이다... 어떻게 사용했냐고? 생선이나 고기를 먹고 발라낸 뼈를 버리는 곳...ㅋㅋ 상상이 가시나?>
<물론 공식 안내문에는 차 찌꺼기 등을 버리는 용도라고 설명하고 있는데, 나는 생선 가시 버리는 곳에 한표...>
<모란넝쿨무늬 타호 상부... 그림이 예쁘지?... 왼쪽 그림자가 내 손... 이렇게 사진 찍었다...^^>
<모란무늬 합/12세기... 이건? 밥그릇이다...>
<모란무늬 합... 철화로 포인트를 준... 저 뒤로 보이는 것이 뚜껑이다... 이런 식기로 밥을 먹는다? 상상해본다..>
<이렇게 베개도 청자로 만들었다... 이번 출품작에는 없어도 베개 옆판도 있다... 시원했을까? 딱딱했을까? 하긴 얼마 전까지 목침이란 것도 있었으니... 변기를 안 찍어둔게 섭섭하네?^^>
생각해보세요. 1170년이면 무신정권이 시작될 때고, 그 이유는 문관들의 사치와 오만이 극에 달했을 때 아니겠어요? 요즘 추석, 구정 선물하듯이 매관매석을 위해, 진상을 위해 혹은 친한 이들의 선물 용도로까지 청자는 만들어졌겠지요. 술병은 물론 꿀단지도 만들고, 화병도 만들고 실생활에 정착하기 전 청자는 감상용으로 선물 포장용으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 모든 용도로 만들어졌겠지요. 단, 가질 수 있는 사람들에 한정되었겠지만... 조금 더 지나면 주문품도 생겼을 거 같아요. 그랬으니 술병 겉에 詩(시)도 써놓고 그림도 그리고, 문양도 새겨넣고... 이제 청자는 고귀함을 떨어내고 유흥과 여가를 즐기는 문화적 소품으로 전락했겠지요.
<당시 청자도 주문제작이 가능했을까?>
<연적이다... 오른쪽 기러기 모양 연적은 국보74호 압형수적(기러기 모양 연적/간송미술관 소장)과 비슷한데 색감이 틀리고 기러기 부리에서 등으로 이어지는 넝쿨이 끊어져 있다...>
<동녀 동자 모양 연적/12세기/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소장... 일본의 중요문화재다... 색감과 음각으로 새겨넣은 문양들이 매우 정교하고 예쁘다...>
<용머리 장식 붓꽂이... 이번에 출품된 붓꽂이가 두갠데 이게 워낙 빼어나다... 내 볼펜 꽂이로 너무나 갖고 싶은...ㅋㅋ 이런 걸 문화재 상품으로 만들어야 되는가 아냐?!!!!>
<얼마나 귀엽고 앙증맞으면서도 유쾌하고 정갈하고 세련되고 아름답고... 정말 좋은... 여기에 붓을 꽂아 놓고 썼던 사람은 글씨를 잘 썼을까? 시를 잘 썼을까?^^>
<시가 새겨진 주자... 이건 주문품이었을까? 아니면 장인이쓰고 싶은 걸 썼을까? 어느쪽이든 당시에 그런 수요들이 많지 않았을까? 요즘에 유명한 시가 새겨진 액자나 기타등등 악세사리처럼...>
<역시 시가 새겨진 병... 이 술병을 따르기도 전에 이미 맘은 충분히 취했을 거 같은데...^^>
<시에 취했을까?... 술병에 취했을까?... 술향에 취했을까?...>
<연꽃가지무늬 매병/국립해양문화재연구소 소장... 공식 명칭이 '청자 음각 연화절지문 매병'인데 그 절지문을 가지무늬라고 풀어 놓았다... 이 병의 용도는 확실히 밝혀졌다... '중방 도장교 오문부, 좋은 꿀을 단지에 채워 댁에 올림'... 오문부가 보냈는지, 오문부에게 보냈는지 모르지만 이 병에는 꿀이 채워졌었다...^^ 태안에서 침몰된 마도 2호선에서 출수되었는데, 또 한병에는 참기름을 담았다는 기록이 있단다...>
2부부터 전시되는 청자들을 보면 그런 생각들이 듭니다. 결국 있는 사람들의 소비패턴이 선망의 대상이 되고, 그것이 사회의 정신을 만들고 그걸 쫓는 사람들과 그로부터 멀어지는 사람들... 결국 문화란 사용하는 이들에겐 활력이고, 누리지 못한 이들에겐 사치라는 비난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을까요? 아니면 애초부터 차별을 위한 상징일까요? 사용하고 누리는 이들만의 리그... 어쩌면 청자도 그런 태생적 한계를 벗어나진 못할 겁니다. 아무튼 이제 청자는 누리고 싶은 이들의 기호에 맞는 문양이 그려지고 새겨지면서 화려하게 발전해 나갑니다. 그 절정에 놓인 게 상감청자겠지요. 처음엔 붓으로 쓰고, 다음엔 음각으로 파고, 조금 더 독특하게 철화로 그리다가 결국엔 백토로 상감을 하고, 심지어 청자에 금은을 입사한 화금청자까지 만들어집니다. 그게 13세기 중반이고 전시회 3부까지를 채우고 있습니다.
<상감청자의 탄생...>
<이렇게 다양한 용도로 만들어지던 청자에 드디어 상감기법이 사용된다... 기술과 예술의 조화? 이번에 올리는 상감청자들은 초기 문양들이다...>
<모란 국화무늬 병... 청자에 새겨진 꽃문양 중 가장 많은 게 모란과 국화가 아닐까 싶다....>
<보물346호 - 모란무늬 매병... 또한 고려청자의 문양은 상감기법에 이 매병처럼 철화나 산화동 안료 등이 다양하게 사용되어 화려한 느낌을 배가시킨다... 이건 상감기법과 함께 고려청자가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독창적 기술이었다...>
<모란무늬 매병 상부... 이번엔 이렇게 위까지 자세히 볼 수 있어 너무 좋았고... 여긴엔 국화꽃 무늬가 상감되어 있다...>
<구름 학무늬 매병... 뚜껑까지 온전하게 보존된... 멋지지 않나? ㅎㅎ 고려청자에 가장 많은 문양을 찾으라면 당연히 구름과 학일터... 왜 그랬을까??>
<원숭이무늬 편병... 원나라 세조(1271~1294년)에게 진상 되었다는 화금청자... 이제는 청자에 금까지 입사해 넣었단다...^^ 이 편병의 흰색 상감 사이 사이 누렇게 보이는 게 금이다...>
청자에 새겨진 문양도 시대에 따라 변합니다. 고려 창업부터 풍수비보가 유행했다는 건 아시죠? 그건 불교만큼 도교의 영향이 컸다는 걸 의미합니다. 먼저 불교에서 최고의 문양은 당연히 연꽃과 연잎입니다. 당연히 초기 문양은 그걸 따랐겠죠. 그러나 있는 사람들은 그에 만족하지 못했을 겁니다. 유학자 최치원이 신선이 되었다는 말이 라말려초에 이미 퍼져있었으니 도교의 영향 하에서 신선처럼 살고 싶은 사람들이 얼마나 많았겠습니까? 그 표현이 바로 구름과 학이 아니었을가요? 그러니 당연히 고려청자에 가장 많은 문양을 차지하는 건 구름과 학이 되겠죠.
<청자와 종교... 불교가 청자를 원했을까? 청자가 불교를 꽃 피웠을까?
그렇게 불교와 연관성이 높을까?>
<참외모양 정병... 흔히 청자하면 불교가 떠오르도록 우리는 교육 받았다... 그러나 그게 사실일까? 나는 사회적 분위기나 도자기 발전 역사에 매칭될 수밖에 없는 시대적 관련성은 인정한다(내 생각에 청자와 불교가 만난 것은 필연이라기보다 우연이 아닐까?) ... 청자가 불교를 끌어 안았지, 불교가 청자를 만들지는 않았다는 게 내 생각이다... >
<물가풍경무늬 정병... 오른쪽에 잘 안보이는 게 기러기다... 정병은 당연히 불교의 주요 기물 중 하나다... 당연히 그 수요만큼 정병은 청자든 청동이든 끊임없이 만들어졌다...>
<국보97호-연꽃넝쿨무늬 매병 부분... 그리고 연꽃은 초기 청자의 가장 주요한 문양이었다...>
<국보61호-어룡모양 주자... 그리고 어떤 모양을 만들든 이처럼 하단에는 연잎이 조각되었고...>
<국보96호와 보물452호 - 거북모양 주자... 여기에도 마찬가지로 연잎이 앙련처럼 새겨져 있다... 그럼 이런 청자들은 사찰이나 승려들만 사용했을까? 절대 그렇지 않을 것이다...>
<여의두 연꽃잎 무늬 병... 가슴에 새겨진 문양을 '여의두' 무늬라고 부르는데 기억해 둘만 하다... 아무튼 여기 하부에도 연잎이 앙련처럼 새겨져 있다... 이런 현상은 당시 불교의 나라였던 고려에서는 너무나 당연했을 것 같다...>
<참, 좌우 손잡이와 연잎 위로 새겨진 하얀 점들은 상감기법으로 만들어진 것일까?... 아니다. 이 병을 만드는데 사용된 기법도 앞서 이야기했듯 붓으로 칠하거나 그린 '퇴화기법'이다...>
<국보173호 - 나한상/12세기... 그리고 나한상까지 청자로 만들어졌으니 불상도 만들어졌을지도 모르고... 그러나 비단 불교를 위해서 청자는 존재했을까?...>
<국보167호 - 사람모양주자/12~13세기... 이 모양은 단순히 사람모양에 그치지 않는다... '의복의 형식과 봉황이 장식된 관, 두 손을 가지런히 모아 받쳐든 복숭아 등을 통해 도교의 도사나 전설 속의 서왕모로 추정할 수 있다. 서왕모는 곤륜산 정상에 있는 궁에 기거하며 불로불사와 신선을 주관하단고 전해진다'<천하제일 비색청자 P107>... 청자는 비단 불교를 위해서, 불교의 필요에 의해서 청녹색을 띠었던 것이 결코 아니다... 청자는 당시에 만들 수 있는 최상의 도자기였고, 불교나 도교, 심지어 유교적 상징이든 민속적 문양이든 어떤 것들로도 표현될 수 있었다... 필요가 생산을 제어했지, 사상이 생산을 통제했던 것은 아니다...>
또한 여기에 잊지 말아야 할 것은 고려란 국가는 여전히 유교적 체계 하에서 움직였다는 점이니 당연히 유교와 중국에 대한 갈증도 적지 않았을 겁니다. 중국인들이 좋아하는 모란(선덕여왕에게 당 태종이 선물한 게 바로 모란그림이잖아요. 물론 이황도 좋아했으니 도산서원에 심었을테고...)과 4군자 중 매화와 국화, 대나무(난초가 빠졌죠? 이민족의 지배를 받았다고 생각하던 청나라 중후반부터 중국과 조선에서 난초가 유행하게 됩니다)도 그만큼 선호했겠죠. 여기에 고려인의 심성도 한 몫 했을 겁니다. 마음에 획을 그리듯 충분한 여백에 여유로운 풍경을 담은 모습들... 다산을 상징하는 포도와 부부금슬을 원하는 원앙, 유교적 가치에 입각한 버드나무, 그리고 시대를 초월해 늘 사랑받았던 소나무(게다가 도자기를 굽기 위한 가마에서 사용할 수 있는 나무는 소나무뿐 입니다) 등도 청자의 문양에 빠지지 않습니다.
<고려청자에 새겨진 다양한 문양들...
고려청자는 당시의 취향과 기호를 담았던 문화상품이었지, 종교용품이 아니었다!!?^^>
<소나무 인물 학무늬 매병... 여기에서는 12~13세기 제작된 청자의 다양한 문양을 살펴본다.(아마도 강진과 부안의 관요와 가마를 벗어난 것들이 아닐런지)...>
<물가풍경무늬 주자... 버드나무도 있고, 학도 있고, 오리도 노닐고...>
<나비무늬 항아리/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나비도 날라다니고...>
<꽃무늬 매병... 이름모를 꽃나무도 있고... 이것도 모두 청자다...>
<매화 대나무 버들 갈대 물새무늬 매병/도쿄국립박물관 소장... 이처럼 하나의 도자기에 넣고 싶은 문양을 다 그려넣은 상감청자도 있다...>
<매화 대나무 버들 갈대 물새무늬 매병 부분...휴우~~~ 이름이 너무 길다...^^>
<매화... ... ... 갈대... 매병...^^>
그러나 12세기 후반 등장한 무신정권과 함께 무인들의 취향과 기호를 반영하면서 청자의 문양들은 변하기 시작해, 13세기 중후반, 원나라 간섭과 함께 청자는 또 한번 커다란 변화를 맞이하게 됩니다. 이미 최고의 기술을 갖춘 고려청자는 중국에서도 호평을 받았을테니, 이제는 고려인들만의 만족뿐 아니라 중국인과 원나라 황실의 기호(원나라의 마지막 황제의 부인이 고려인 기황후입니다)에도 부응해야만 했을 겁니다. 인위적인 파격을 좋아하고 풍만하면서도 활달함을 좋아하는 중국인들의 심성은 고려청자에 또 다른 주문을 하게 됩니다. 똑같은 문양들이 반복되고, 구불구불 변화무쌍한 넝쿨들이 보이는 면을 꽉 채워 여백이 없어지고, 단조로움을 피해 여러 색깔이 사용되고... 이제부터는 맑고 투명하면서도 그윽하고 청량한 소요의 기품이 아닌, 기름지고 풍만한 청자들이 대세를 이루었을 겁니다.
<자판을 통해서 살펴본 고려청자의 문양 변화... 고려인들은 어떤 스타일로 문양을 채웠을까?>
<물가풍경무늬 자판/12세기/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자판이 뭐냐고? 타일이다...^^ 고려 왕실이나 지배층의 집, 한쪽 벽면이나 욕실을 장식했을 이 타일의 시대적 변천을 보면, 고려청자의 시대적 흐름을 한 눈에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해 모아봤다... 12세기... 아직 색감은 떨어지고, 도안은 한폭의 그림 같다...>
<매화 대나무 새무늬 자판/12~13세기... 색감이 완숙해지고, 학은 상감으로 표현했다... 그림 수준이 높지는 않지만 자연스럽다...>
<모란무늬 자판/12~13세기/오사카시립동양도자미술관... 상감문양이 적극적으로 사용되고 도식화된 문양으로 채워졌지만, 아직 여백도 많고 시원한 느낌...>
<모란무늬 자판/12~13세기... 구름 학무늬에 넝쿨무늬 등등이 반복, 대칭으로 전체면을 꽉 채웠다... 이런 발전방향은 필연적이었을까? 적어도 고려청자는 그렇게 발전해 갔다... 참고로 금간 부분을 메운 건 금이다... 이렇게 깨진 부분이나 파손된 부위를 금으로 보수한 흔적이 남은 것들은 전부 일제강점기때 작품이라 보면 된다고 한다... 요즘엔 굳이 보수하지 않거나, 금으로 때우지 않는다고...>
<매병을 통해 살펴본 고려청자 문양의 흐름... 다음 3점의 매병도 비교해 보자...>
<국보97호 - 연꽃넝쿨무늬 매병... 이게 12세기의 대표적인 매병이다... 음각에 연꽃넝쿨이...>
<구름 학무늬 매병... 이게 12~13세기의 대표적인 매병이 아닐까?... 운학문에 상감이... 그러나 여백도 많고 자유분방하고, 기형도 날씬하면서도 훨씬 세련되어가고...>
<국보68호 - 구름 학무늬 매병/간송미술관... 이게 13세기를 대표하는 고려청자... 혹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지만 매병 중 매병이라는데 이견이 별로 없을 듯... 특히 간송 전형필의 일화로 더 유명해졌는지도 모르겠지만... 광각 카메라로 잡다보니 왜곡이 생기는 것 같아 원근을 두고 두장을 올려본다... 비교해 보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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