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언제부턴가 여행하고 싶다는 생각은 기다림이 아니라 각오가 되었고,
설레임보다는 비장함으로 내게 인식됐다.
꽉 찬 일정과 비울 수 없는 업무의 양 때문이 아니라 행동반경이 제약된 직책의 압박 때문이었고,
아무도 붙잡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떨쳐내지 못한 나 혼자 덧씌운 굴레가 단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나섰다. 혼자만의 시간을 향해...
<내가 늘 바라보는 풍경이다... 때로는 적막하고 황량하게...>
<때로는 풍요롭고 따사롭게... 우리들 일상이란 늘 양면이니까...>
내게는 늘 봐야만 하는 일상들이 있다.
그리 멀지 않은 바다에서 울리는 뱃고동 소리에 묻힌 습한 바람이 있고,
조금만 움직이면 들리는 굉음 속에서 새들 보다 더 멀리 날아가는 비행기의 날개짓이 있고,
또 마음만 먹는다면 한반도에서 가장 먼 곳까지 데려다 줄 기차도 있다.
게다가 밟으면 밟는대로 움직이는 자동차 키도 있고...
그럼에도 떠나지 못했음은 전혀 객관적이지 않은 어설픈 책임감 때문이었는지도 모른다.
<영종대교 기념관에서... 꽉 차 풍요롭게 보이던 물이 빠져나가면 이렇게 질퍽한 속살을 드러낸다... 그 속에도 물이 흘러야 할 길이 있고, 배가 다녀야 할 길이 있다...>
<변함없는 물결과 햇빛과 바람에 측정하기 힘든 세월이 만든 갯벌... 똑같은 자연환경에 노출된 갯벌도, 너무나 오묘하게도 하나도 같지 않은 다양한 모습으로 나뉘고, 또 그렇게 하나가 된다...>
2.
서울 경기를 벗어나 충청도에만 진입해도 (고정된 채널 때문에) 지지직거리는 라디오 소리는,
내장 CD의 경쾌한 팝송과 감미로운 경음악의 연주음으로 바뀐다.
설레는 마음을 다그치며 내 귀속에 쟁쟁거려야 할 노래는 조용필의 ‘여행을 떠나요’가 되어야 할텐데,
문득 내 맘을 채우는 노래가 최희준 선생의 ‘인생은 나그네길~’이 떠오르는 건
나이 때문일까, 지금의 마음 때문일까?
<떠나는 설레임은 지금과 달라지는 환경에서 더 커지는 걸까?>
<그렇지만 우리들의 선택과 계획은 나 혼자만의 영역이 아니다... 누군가가 이미 지나갔고, 지금도 수많은 이들이 함께하며, 내가 다니지 않아도 늘 그렇듯 이 길을 꽉 채우고 있을 듯...>
거참 신기한 일이지? 어렸을적 들었을 노래가 지금 이 순간에 떠오르는 게?
나그네, 나그네, 나그네... 내가 나그네면 누가 내 인생의 주인공이지?
정처없는 바람처럼, 자유로운 영혼처럼, 어쩌면 덧없는 인생을 노래한 가사에 엉뚱한 시비...
어렸을적 즐겨읽던 ‘김삿갓 방랑기’의 암기되지 않은 싯구들이 머릿속을 떠다니는데
나는 아무런 목적도 목표도 없이 멀리만 멀리만 떠나고 있다.
<지금의 우리에게 멀고 긴 여행은 항상 하늘을 향해 있다...>
<그러나 먼 곳을 향한 출발은 늘 평행선을 유지해야만 하는 레일에서 시작됐을테고...>
3.
그래~~~ 여행까지 인생에 빗댈 깊이를 원했던 건 아니지만,
역시 여행은 <현재에서 떠남>으로 시작하는 것이니 일단 그걸로 만족할까?
생각해보면 여행이란 반복되는 리듬(시간)과 공간(집과 일터), 그리고 관계에서 떠나는 게 아닐까싶다.
멀어지는 시공간의 거리가 여행의 깊이를 채우는 것도,
해체된 시간과 리듬의 정도가 여행의 폭을 넓히는 것도 아닌데,
일상속에서 꿈틀거리는 일탈은 여행이란 개념을 통해서만 채워질 거 같은 착각에 나는 살고 있었다.
<지리산 자락... 그럼에도 우리의 착각은 떠나야만 볼 수 있는 것들이 있기 때문이고...>
<일상의 시간에서 벗어나야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많으며, 볼 수 있는 것만 보이는 밤을 겨냥할 때도 있기 때문에, 착각은 지속적으로 재생산 될지도 모른다... 에버랜드에서...>
그럼에도 나는 늘 생각했었지.
맘만 먹으며, 시간만 있으면, 여유만 생기면 언제든지 여행하겠다고...
그렇지만 한걸음만 물러서 생각하면, 시간과 여유는 떠나야만 생기는 게 아니었을까?
그 풀릴 수 없는 순환참조를 끊을 용기가 있는가 없는가가 더 중요한 거 아니었을까?
일상은 생산이고 여행은 소비고, 일상은 정상이고 여행은 이벤트라는 그 생각을 못 깨뜨리고 있었다.
그냥 이렇게 떠나면 되는 거였는데...
여행도 하나의 생산이며, 정상적인 리듬이며, 선택인데 말이다.
<떠나야만 볼 수 있는 나와 다른 삶과...(염전에서...)>
<떠나온 사람들의 밝은 웃음과 함께 할 때 기쁨이 배가 된다면, 여행은 떠남에서부터 시작하는 게 맞을지도 모르고...>
4.
무엇을 볼까? 어디로 갈까?
막상 떠나고 나서 쏟아지는 목적을 향한 의식들...
나의 여행은 가급적 자연속으로 향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역사를 동반하고 문화예술을 탐미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그 완벽한 조율을 위해 찾은 게 <문화유산 답사여행>이었겠지만,
늘 채워지지 않는 건 느리게 걷고, 사람과 나누며, 나를 잊는 것들이었지.
<남원에서 지리산자락... 넓게 보는만큼 내 맘도 넓어지고, 높은 걸 보는만큼 나의 시선도 높아질까?>
<영종도에서... 고기를 낚는 건지, 배를 낚는 건지, 시간을 낚는 건지... 낚시대를 드리운 것이, 그의 취미일지 생업일지 알 수 없지만, 우리는 내가 하지 않은 것들에 동경어린 시선을 가지게 된다... 특히 느리게 움직이는 모든 것들에 말이다...>
그래서 부지런히 다니며 무작정 찍어서 나중에 천천히 사진으로 감상하고,
길디 긴 글을 써가며 목마른 영혼을 누군가와 나누기 위해 안간힘을 쓰고,
또 나를 비우기 위해 나의 감상과 감성들을 중구난방 쏟아내고 있지만,
여행에서 그런 것들을 향유할만큼 나는 아직 충분히 숙성되고 여유롭지 못한 건 분명하다.
여전히 내게 부족한 여행 스타일이 변하길 꿈꾸며, 나는 지금 먹잇감을 향해 촉수를 세우고 있다.
<꽃 보다 사람? 시간과 공간은 그렇게 채워지는 걸까?>
<선암사 봉선루... 아니면 저 누각을 느껴야만 내 마음이 비워지는 걸까?>
5.
무엇을 할까 생각하다가, 불현듯 사람들은 여행하면서 어떤 것들을 하고 싶어할까? 묻게 됐다.
하고 싶었던 것을 할까? 해야 할 것을 할까? 아니면 하고 있던 것을 할까?
모처럼의 여유와 시간 속에서 그 사람이 선택한 것은 결국 그의 ‘성향’과 그‘때’의 요구가 판가름하겠지만,
가급적 <하고 싶었던 것>을 해야 미련이 덜 남는다는 생각이 든다.
하고 있던 것이나 해야 할 것이, 하고 싶었던 것이었다면 말할 나위가 없겠지만,
세상살이가 그렇게 나의 기호대로 움직여지는 것이 아닌만큼,
현명한 타협이란 ; 하고 싶었지만 하지 못했던 것을 채우는 게 자신을 채우거나 비우는 지혜가 아닐런지...
<서해안에서 배는 항상 물에 떠 있지 않다... 배가 있어도 물이 채워져야 움직일 수 있겠지... 이미 떠난 배와 아직 머물러 있는 배... 어느 게 여행이고, 어느 게 일상일까??>
<영종도에서... 그리고 늘 뜨고 지는 해도 내가 움직이고, 그 때의 조건이 맞아야 보고 싶은 걸 볼 수 있을테고...>
또 여행은 휴식이어야 할지, 부족한 것을 채우는 것이어야 할지, 새로운 자극이 되어야 할지 생각게 된다.
그것이 이것이고, 이것이 저것이기도 하지만
분명 휴식에는 단절을 전제하고, 결핍은 충족을 갈구하며, 자극은 변화를 잉태하는 것.
그래서 여행은 가급적 <자극>으로 마무리되는 게 후유증이 제일 적을 거 같다.
아무래도 우리의 뇌와 가슴을 뛰게 하는 건 미래를 향한 새로운 도전이고,
그 도전을 위한 에너지는 자극을 통해서 생성되는 것이니까 말이다.
< 이 곳에 머물면 나의 지적 호기심은 충분히 채워지는 걸까?>
<아니면 나의 욕망은 이런 자연스러움과 간절함에서 채워질까?>
6.
나의 과거가 그러했는지 모르지만, 어렸을적 기억의 여행은 기차를 통해서 시작됐다.
배는 새로움이었고, 비행기는 설레임이었으며, 자동차는 낭만의 잣대이기도 했지.
그렇지만 여행의 시작은 <가방을 싸는 것>이었고, 또 여행의 끝은 <보따리를 푸는 것>이 아닐까 싶다.
<여수 진남관에서... 한 장 한 장 그 때의 사진을 되돌리면, 나는 아직 그 속에 머물러 있다...>
조급함, 느긋함, 초조함, 번잡함, 건조함, 미숙함, 어설픔, 격렬함, 신선함, 당연함, 충족감, 아쉬움, 미안함...
짧지 않은 여행, 그러나 길지 못했던 여행의 말미에 나는 사진이라는 짐을 풀며 반추해본다.
너무나 불확실한 미래를 준비할 수 없는 답답함에서 벗어나려는 목적 없던 여행의 마무리...
본 것과 보지 못했던 것의 경계가 모호해지면서 밀려왔던 욕심과 선택의 불완전한 동거...
살아가면서 할 수 있는 것과 마음먹었던 것들의 범위와 한계가 보였던 여행의 끝자락...
<태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 예전에 느끼지 못했던 것을 다시 뜯어 볼 수 있고...>
<태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비... 그 때 충분히 느끼지 못했던 감흥을 되살리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렇게보면 이번 여행에서 내가 무엇을 하고 싶었고, 무엇을 했던간에 나를 돌아볼 시간이었던 거 같다.
지금까지 나는 무엇인가 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 위한 준비, 그릇만 봤다는 생각이 든다.
무엇인가를 이루기 향해 달리고, 뭐든 이루어야 했을 나이에 나는 나만 생각했었다는 생각...
해 봤고, 했었던 것들이 작아지고, 하지 않고 못 했던 것들이 커보이는 건 나이 때문일까?
목표를 상실하면 게을러지고, 미래를 잃으면 추해지며, 변화가 없으면 고립되는 게 우리들 모습일거 같다.
그게 싫다면, 그리고 조금 더 성숙해지기 위해 이제 나의 여행은 새롭게 변해야 할 거 같다.
싫어하는 걸 하지 않기 위해, 무엇이 아니기 위해서가 아니라, 무엇을 하겠다는 긍정과 구체 같은 거 말이다.
<여수 향일암에서... 600년대 중반 원효대사는 정말 저 자리에 앉아서 바다를 바라봤을까? 무엇이 그를 이 먼 곳까지 오게 했을까?>
<여수 산업단지... 혁명을 꿈꾸던 나의 20대... 나의 호기심은 사람과 책에 있었을까?... 조금 더 넓고, 조금 더 깊고, 조금 더 구체적이어야 하지 않았을까?... 한동안 머물렀다...>
7.
이런 생각을 남긴 이번 여행은 그리 나쁘지 않았던 거 같다.
왜냐하면 여행이란 현재의 일상에서는 마무리일테고,
먼 시간 속에서 생각하면 극히 순간에 불과한 과정이겠지만,
앞으로를 위한 미래의 시간에서는 출발일 수도 있으니까 말이다.
<걷지 않았던 길에서 또 다른 여행을 바라본다... 기차는 종착점이 어디인지 모르고, 이 기차에 탑승한 모두가 종착역에서 내리는 것은 아니겠지만, 나는 이 기차와 이 기차에 탑승한 모두가 종착역까지 간다고 생각하고 있다...>
여유가 있어서가 아니라 여유를 찾기 위해 벗어나는 공간,
휴식과 결핍을 채우려는 조급함보다 자극을 찾아 돌아오는 시간,
하고 싶었던 것을 채우면서 하고 있었던 것과 해야 할 것을 구별하고 나를 돌아보는 거울,
그래서 끝이 아니고 과정도 아닌 시작이 되는 다짐...
그런 여행을 보냈을 때 우리는,
나그네가 되어 시간을 쫓아가는 게 아니라 시간의 주인이 될 거라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다시 반복되는 리듬과 공간과 관계에 보다 밀도 있고 밝아지며,
미래를 향한 준비와 자신감을 얻어가는 출발이 되었으면 좋겠다.
<임실 용암리 진구사지 석등... 당당함과 세련됨, 장중함과 우아함을 함께 갖춘 가장 아름다운 석등 중 하나... 주변이 정비되고 공사가 일차 마무리된 용암리 진구사지에 달라지지 않은 것은 오래된 사진속의 석등 뿐이었다... 내가 항상 바라볼 수 없지만 나의 자각과 무관하게 언제든 작은 불씨를 담을 수 있는 모습으로 영원히 변치 않고 남아 있겠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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