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탑여행-趣,美,香...

우리나라 석탑 편년 6> 통일신라시대 후기 (822~901년) 승탑...1310

 

 

 

 

   통일신라 후기 승탑

 

                                                                                                                                      <표10>

 영양 진전사 도의선사탑(825~840경/보물439), 원주 (전)흥법사 염거화상탑(844/국보104)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861/보물273), 화순 쌍봉사 철감선사탑(868/국보57),

 구례 연곡사 동승탑(국보53), 울주 망해사 쌍탑(보물173), 구례 연곡사 북승탑(국보54),

 남원실상사 증각대사응료탑(868~880/보물38), 장흥보림사 보조선사창성탑(880/보물157),

 문경 봉암사 지증대사적조탑(883/보물137), 영양 선림원지승탑(886년/홍각선사/보물447),

 하동 쌍계사 진감선사 대공령탑(887), 강릉 굴산사지승탑(890년/통효대사 범일/보물85),

 남원 실상사 수철화상탑(893/보물33), 여주 고달사지승탑(원감대사/국보4)

기록물

 제천 월광사 원랑선사 대보선광탑(884), 성주 성주사 낭혜화상 백월보광탑(890년)

 

* 화려하고 정교한 장식으로 치장된 승탑은 석탑의 변형이라 봐야 한다고 생각하기 때문에 같이 묶어봤다.

** 제작 순서를 기준으로 나열하였다.

 

*** 염거화상탑과 태안사승탑에서 전형화된 승탑은 극히 짧은 시간인 870년 전후 쌍봉사와 연곡사에서 절정의 솜씨를 구현하고, 890년 전후에는 각 지역적 특성까지 유입된 다양한 형태로 발전했다는 점이 여타 공예/미술분야와 달리 극히 이례적인데, 그 이유는 ;

**** ①각 지방에 자발적인 경제력을 갖춘 선종세력들이 충분히 성장했으며, ②이들과 합종연횡하면서 대중적 지지를 얻으려는 지방호족세력, 그리고 ③이들의 요구에 상징적으로나마 재원과 장인을 파견하여 권위를 유지하려는 왕실의 지원 필요성과, ④이형석탑과 석불좌상 등을 통해 충분히 숙련되고 노련한 석공들이 많이 배출돼 있었다는 점들이 절묘하게 어우러져 있었고, 여기에 ⑤교단의 확장을 꾀하려는 9산선문의 상호 경쟁적인 분위기 속에서 시너지 효과가 극대화된 결과라 생각된다.

 

***** 그러나 우리나라 석조예술에서 최고 수준을 뽐낸 이 시기의 승탑의 수준은 고려 왕조가 개창됨과 동시에 제작 시스템이 무너지면서, 짧은 전성기를 마감하고 다시는 그 수준을 회복하지 못한다.

***** 다만 통일신라 말기에 이르면 승탑과 석등에 치중했던 석조공예는 선승들의 행적을 기록한 탑비의 귀부와 이수 조형으로 무게중심을 이동하면서, 당나라풍에 입각했던 지금까지의 경직되고 도식화된 체계에서 벗어나 매우 생동감 넘치고 활달한 탑비들이 등장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