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전성기 통일신라 석탑 편년과 관련한 몇가지 문제 검토
경주 염불사지 쌍탑, 천군동 쌍탑, 원원사지 쌍탑, 용명리탑, 청도 봉기동탑과 석가탑/다보탑 이후에 만들어진 갈항사 쌍탑, 월광사 서탑, 선본사탑, 보월동탑, 석굴암탑 등에 대해서는 조금씩 살펴봤고, 이제 이들과는 다른 특징이 있거나 논란이 있는 탑들에 대해 몇가지 메모하고자 한다.
1) 경주 남산 창림사지 삼층(?)석탑 - 팔부신중으로 장엄된 기단부의 탄생
- 석탑의 편년설정과 관련한 사지와 출토유물의 검토...
<창림사지 삼층석탑... 경주 남산 서쪽, 나정과 포석정 가운데쯤, 남산사지 당간지주에서 멀지 않은 곳에 장대한 위용을 자랑하며 서있다... 지금은 주변이 잘 정리돼 멀리서도 잘 보인다...>
사실 석탑의 제작연대를 알아보는 것은 중요할 수도 있고, 아무 것도 아닐 수도 있다. 다만 내가 석탑의 편년(석탑을 제작한 연대순서대로 묶어 보는 거)을 중시하는 이유는, 그것을 통해 알고 느낄 수 있는 폭과 깊이가 다르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내가 답사여행 등을 통해 석탑을 바라볼 때, 먼저 석탑의 완성도가 높을수록 마음이 열리고, 주변 풍광과 어우러질수록 편안해지며, 그때 석탑의 제작연대를 알고 있다면 내가 나눌 수 있는 역사와의 대화는 그만큼 풍부해진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당대의 시대정신을 떠올릴 수 있고, 사상의 변화도 감지할 수 있으며, 선후 탑과 비교를 통해 무엇이 어떻게 왜 변했는가를 추적하다보면 이 석탑을 만든 사람도 떠오르고, 그 시대를 살아갔던 이들과 교감도 할 수 있으니 얼마나 자유로워지겠는가.
비단 이런 경험은 석탑만이 아니라 모든 예술작품을 대할 때나 사람과의 관계에서도 그럴거라 생각된다. 인격과 자태, 능력이 있는 사람에게 호기심을 느끼고, 그 사람이 주변 사람이나 일과 잘 어울릴 때 좋아 보일 수밖에 없는데, 그 사람의 과거와 미래를 함께 공유할 수 있다면 그것만큼 좋은 것이 어디 있겠는가... 사람이나 문화예술작품에서 보고 만질 수 있는 모든 행위들이 나의 생동감을 자극하는 것이라면, 보이지 않고 숨겨진 것을 공유할 수 있다면 그건 영혼의 교감으로 승화될 수 있으리라 생각된다(이건 너무 거창한데? 애초 이렇게 나갈 건 아니었는데... 아무튼). 즉 제작연대를 알 수 있다는 것은 가공된 돌무더기에서 역사를 찾는 통로가 될 것이고, 문화예술작품이 해독의 대상이 아닌 영혼을 자극하고 상상의 원천이 되는 주요한 계기가 되리라 생각한다.
<창림사탑... 3층 지붕돌까지 7m 크기면 황복사탑/천군동탑/석가탑과 거의 같은 크기로, 감은사탑/고선사탑/나원리탑/장항리탑 다음으로 큰 규모다... 게다가 탑 규모에 비해 주변이 넓지 않아 늘 올려다 보게끔 자리잡고 있다... 광각렌즈로 일부 왜곡이 있으니 참고하시길...>
해서 내가 석탑의 편년을 추정하는 하나의 예로 경주 남산의 창림사지 삼층석탑을 골라봤다. 왜냐하면 먼저 창림사탑은 현지 안내문에 제작연대가 분명히 표기되어 있음에도 내가 전혀 동의하지 않은 게 첫 번째 이유고, 통일신라 석탑에 팔부신중이 표현된 최초의 예이면서 높은 수준의 기량을 뽐내고 있어 꼭 볼만하며, 양식적 특성과 가람배치, 창림사지의 의의 등 알아서 유익한 것이 훨씬 많기 때문이다. 물론 이보다 중요한 이유는 그 탑이 좋고, 무엇보다 그곳에 있어 더 좋기 때문이다. 아쉬운 것은 이런 의의와 가치, 완성도에도 불구하고 문화재로 미지정 상태라는 것이다. 국보급으로 보이는 삼화령 미륵삼존불을 비롯해 상당수 비지정 문화재들이 있지만, 창림사탑도 주변 사지의 발굴과 편년 검토가 계속돼 하루빨리 보물로 지정되어, 지금보다 많은 사람들의 관심 대상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에서 시작해 본다.
<예전에는 주변이 정비되지 않아 크다는 느낌, 상층기단부에 조각된 팔부중상이 아주 세련되고 힘이 있다는 느낌 밖에 가지질 못했었던 기억이 있는데, 아무튼 컸었다...>
<지금은 석탑의 서쪽을 중심으로 정비가 되고 있어 시원한 느낌이다... 이건 아주 잘한 일이라고 생각한다...^^>
내 생각이지만 편년과 관련하여 가장 많은 논란이 있는 탑 중 하나가 창림사탑이 아닐까 싶다. 왜냐하면 창림사지에서 출토된 ‘무구정탑원기(이하 탑원기)’에 따르면 창림사지에 무구정광탑을 조성한 게 855년이란 기록이 있음에도, 현존하는 석탑의 비례나 체감 등은 800년대 중반이 아니라 700년대 중반으로 보는 사람들이 많기 때문이다. 또 아쉬운 건 팔부신중이 조각된 석탑 중 가장 뛰어나고 최초의 탑이라는 추정에도 불구하고, 도괴된 상태에서 2층과 3층 몸돌이 보수하여 중건되었기 때문인지 문화재로도 지정 되지 않아 충분한 연구대상에서 밀려난 것도 한몫했으리라 생각된다.
<855년 확정적으로 설명하고 있다... 그리고 안내판 오른쪽 위에 새겨진 문양이 있는데, 장항리탑 문비에 새겨진 문고리로 보인다...>
때문에 일부에서는 800년대 중반 통일신라 전성기를 회고하며 마지막 부흥을 꾀하는 복고풍으로 이해하기도 했고, 나 역시 창림사탑을 천군리탑과 같은 시대로 볼 것인지, 아니면 부석사나 청송사탑과 비슷한 시기로 볼 것인지, 기록에 맞춰 855년으로 볼지 고민이 많았다. 그러나 창림사탑의 편년을 정확히 하는 일은, 석탑의 양식적 변천은 물론이고, 팔부신중 뿐만 아니라 문비와 안상을 비롯해 비천상, 보살상, 불상 등 부조가 삽입된 석탑의 편년을 확정하는데 매우 주요한 지표이기에 그냥 지나칠 수 없고, 또 그래야 내가 설정하는 석탑 편년의 타당성을 부여할 수 있다고 생각해 맨 앞으로 순서를 잡았는데, 현재 창림사탑의 편년에 대한 내 생각은 아무리 늦어도 석가탑과 비슷하거나 그 이전 시기로 편년을 설정하고 싶다.
* 황복사탑과 천군동탑, 그리고 창림사탑의 미감 비교...
- 정면을 바라보는 방향과 비슷한 거리에서 세 탑의 미감을 비교해 본다(창림사탑을 찍은 거리가 가장 가깝다).
<황복사탑... 하층기단부가 완전히 노출되어 있지 않지만, 이 시대 비슷한 미감의 기준점으로 삼을 수 있다...>
<천군동탑... 일부로 노반이 없는 서탑으로 골랐는데, 조금 떨어져서 보면 하층기단부가 완전히 묻히게 보여 많이 아쉽다... 황복사탑에 비해 낙수면이 조금더 완만한 직선으로 보이는데, 지붕돌 전각 부분이 조금씩 깨진 영향도 있을 거라 생각된다... 2층과 3층 지붕돌은 보수해야 한다고 생각하는데, 다른 분들의 의견은 어떠신지... 내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전각의 반전 끝부분이 결손된 석탑 지붕돌은 모두 보수하는 게 올바른 관리라고 생각한다...>
<창림사탑... 세탑에 대해 자세히 보신 분들은 상층기단부의 탱주 숫자가 주는 차이를 느낄 수도 있다... 왜냐하면 세탑의 상층기단부 폭과 높이의 비례는 황복사탑 1:2.7, 천군동탑 1:2.6, 창림사탑 1:2.74(신용철/2002년)로 비슷하다... 그런데 사진으로 보면 가장 넓은 비례를 가지고 있는 창림사탑의 상층기단부가 가장 좁고 높아 보인다... 탱주가 하나와 둘일 때의 차이다...>
사실 내가 탑의 편년을 고려하는데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는 것은 역시 비례나 체감에서 오는 ‘첫 느낌’이다. 경주답사에 대한 두 번째 답사기(2003년)에서도 나는 분명히 창림사탑을 황복사탑이나 천군동탑과 동일한 미감을 가진 석탑으로 메모했었고, 그 이후로도 내 주장이 맞다는 생각에서 이를 증명할 정보를 찾게 됐는데, 내 느낌을 살려준 첫 정보는 탑원기 동판이 창림사탑 사리공에 넣을 수 있는 크기와 모양이 아니라는 점이었다(창림사탑 사리공은 지름 33.3cm의 원형인데, 탑원기는 30x24cm 사각형으로 사리공에 들어갈 수 없다/윤경렬/1993년, 그러나 이런 주장에 대해 탑원기가 사리공이 아닌 2~3층 몸돌 위에 있었을 수 있다는 반대되는 추정도 이미 1940년에 제기된 바 있었다).
그 작은 단서에 100여년의 편차를 주장한다는 것이 무척 주관적이고 위험한 방법일수 있고, 이런 상상이야말로 아무추어의 특권이니 누가 간섭할 문제는 아니겠지만, 지금은 많은 연구들이 700년대 중반, 최고로는 황복사탑이나 천군동탑과 비슷한 700년대 초반에 조성된 것으로 연구한 논문(경주 남산 창림사지 삼층석탑의 고찰/2002년, 통일신라 석탑 연구/2006년/이상 신용철, 그 외 창림사탑을 직접 대상으로 하지 않았더라도 700년대 중반으로 편년을 추정한 논문들이 다수 있다)까지 있느니, 지금은 그렇게 엉뚱한 주장은 아니라 생각된다. 이를 조금 더 구체적으로 살펴보면 ;
<창림사지... 쌍귀부가 있는 곳에서 바라다본 창림사탑... 폐탑 부재들은 사진의 오른쪽 아래 방향이다...>
먼저, 추사 김정희가 확인하고 필사한 탑원기에 따르면 창림사지 무구정광탑은 855년에 만들어진 것이 분명하다. 문제는 창림사지에는 탑이 하나가 아니라 두기 이상으로, 현존하는 삼층탑 아래쪽(현 창림사탑 아래쪽으로 내려가면 쌍귀부가 있는데, 서쪽방향으로 또 다시 그만큼 내려가면)에 폐탑 부재들이 최소 6곳에 있거나 파편들이 수습되고 있다는 점이다. 때문에 탑원기는 현존하는 탑이 아닌 다른 석탑의 사리갖춤으로 출토되었을 가능성도 많고, 실제 850년대 중반으로 추정되는 규모와 당대의 조각양식이 반영된 폐탑 부재들이 경주박물관에 전시(팔부신중이 조각된 면석으로 현존 창림사탑 팔부신중보다 높이가 20cm 가량 작아 진전사탑과 비슷한 규모로 추정된다)되고 있어, 이 탑이나 아래쪽 폐탑들 중 하나가 무구정광탑이었을 개연성이 훨씬 높다.
<창림사지 쌍귀부... 창림사적비가 있었을 것으로 추정되는 이 귀부를 600년대 말기의 고선사지/황복사지와 800년대 숭복사지의 귀부들과 비교해보면 차이가 금방 드러난다... 당시의 귀부는 선승들의 부도비를 위해서가 아니라, 사찰의 사적비 용도로 주로 만들어졌던 것으로 보인다... 그렇게 보면 800년대 초 고선사지와 분황사에서 각각 출토되어 중앙박물관과 동국대 박물관에서 나눠 소장하고 있는 원효대사의 서당화상비는 특이한 예라고 생각된다...>
또, 하나의 사찰에 규모와 시대를 달리한 탑이, 그것도 상당한 공력을 투입한 탑이 두 개 이상 있다는 것에 이의를 제기하시는 분이 있을 수 있으나, 화엄사를 비롯해 월광사지/석남사/청암사 수도암 등 그런 예들이 있고, 창림사지는 박혁거세가 탄생한 나정에서 멀지 않은 곳으로 신라 최초의 궁궐지였다는 설도 있으며, 대구에서 영천-건천으로 들어오거나, 부산에서 언양을 거쳐 경주로 들어와 반월성으로 가는 길목을 바라보는 남산 중턱에 자리잡고 있어, 신라왕실에서 보면 전략적으로나 상징적으로 충분히 중시할만한 곳이기 때문에 지속적으로 석탑을 추가 조성한 것이 문제 되지 않는다고 생각된다.
<경주 박물관의 창림사지 출토 노반... 경주박물관에는 창림사지에서 출토된 노반과 팔부신중 및 기타 부재들이 수습되거나 전시되고 있다... 다른 탑들이 다수 있었을 것이라는 추정을 못했을 때, 나는 이 노반이 현재 서있는 창림사탑의 부재라 생각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폭이 맞질 않았다...>
또 이런 중요성이 있어선지 창림사지에서는 석경 파편이 수습되어 동국대 박물관에 전시되고 있는데, 석경이란 종이나 비단, 죽편, 금동판, 옥 등에 사경(寫經) 즉 경전을 베껴 쓰듯이 석판에 경전을 새겨놓은 것으로, 현존하는 최고의 화엄경 필사본이기도 한 신라백지묵서대방광불화엄경(754년)을 비롯해 우리나라 국보와 보물의 1/10에 가까운 200여 점이 사경관련 유물임에도 불구하고, 중국과 달리 유독 석경이 희귀하여 칠불암(금강석경), 화엄사(화엄석경), 창림사(법화석경) 등 3곳에서만 출토(한때는 법화석경이 김생의 글씨라는 말이 있었으나, 이는 ‘창림사지비’의 착각이다. 추사 김정희도 인정한 최고의 명필 김생은 711년 태어나 80세에도 사경을 했다니 그의 글씨도 사경을 통해 단련된 것이 아닐까 생각된다^^) 됐는데, 그 중 한 곳이 창림사지이니 통일신라 왕실에서 수기의 석탑을 한 사찰에 추가로 조성했다는 게 의아스러운 일만은 아닐 것이라 생각된다.
<창림사지 출토 법화석경/동국대 박물관/ 소장품도록/2006년... 내가 갔을 때 사진을 찍은 게 없어 도록을 스크랩했다... 창림사지 법화석경은 각각 1,260자가 새겨질 수 있는 150cm x 100cm 크기의 석판 19매로 이루어진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연대 추정은 없었다...>
<화엄석경/동국대 박물관... 말 나온 김에 석경에 대해 조금 더 살펴본다. 이 것은 14,000여개로 파손된 화엄사의 화엄석경 중 하나다... 부분 안내판에서는 725년이라 제작연대를 명시하고, 도록에서는 797년에 만들어진 것이라 설명하고 있어 혼돈이 있는데, 나는 750년대로 보고 있다...>
참고로 사경에 대해 조금만 더 살펴보면, 600년대 후반 조탑공덕경/금강명경 등이 유입되면서 불탑의 수량이 늘어나고, 무구정광다리니경에 이르러 사경의 수요와 불탑 봉안은 급속하게 유행하기 시작했는데 그 역사적 문화사적 의의는 막중한 것으로, 우리나라는 사경문화의 후광으로 세계 최고의 목판인쇄물(무구정광대다라니경/741년 이전),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인쇄물(직지심체요절/1377년), 현존 유일의 완본 목판대장경(해인사 대장경판, 재조대장경판/팔만대장경으로도 불린다/1248년)을 비롯해 세계 유일의 금판경(왕궁리 오층탑 출토 금판 금강경/백제 무왕대 추정) 등 세계적인 기록문화유산 보유국이 되었다.
<다라니/ 동국대 박물관에서...>
또 사경문화는 당대 지식인과 지성인들이 불교문화와 결합할 수 있는 적극적인 매개가 되었고(글씨를 쓰고 읽는 사람은 극소수의 귀족층에 불과했으니까), 이에 대한 반발로 글을 모르는 사람도 불교에 심취하고 깨달음이 가능하다는 선종의 주장이 확산하는 계기가 되었으며, 말기에 이르러 사경에 금은이 사용되는 등 불교가 기복신앙을 위한 사치의 대상으로 전락하고 호국불교의 정체성을 상실하면서 통일신라가 멸망에 이르는 원인이 되기도 했다.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사경/동국대 박물관에서...>
그런데 탑원기와 창림사지를 살펴보면서 오히려 우리가 조금 더 관심을 가져할 부분이 있다고 생각된다. 100여년 이상의 시차를 두고 만들어진 폐탑들과 그 중 하나로 추정되는 855년 조성된 무구정광탑의 위치인데, 왜 월광사지처럼 현존하는 삼층탑 주위에 쌍탑 방식으로 배치하지 않고 금당이나 쌍귀부보다 훨씬 아래쪽에 조성했을까 하는 점이다. 어쩌면 이 점이 창림사탑 편년을 추적하는 주요한 단서가 될 수 있다고 보이는데, 현재 창림사탑 위쪽으로는 금당이 들어갈만한 터도 닦이지 않았을뿐더러 조성되었던 유구도 없다. 즉 초창기에는 가장 높은 곳에 탑을 조형하고 그 아래쪽에 금당을 두어 탑원과 금당원을 분리해 조성했다는 점, 후대에 지속된 중창은 아래쪽으로만 진행되어 성역화된 초기 영역을 훼손하지 않았다는 점과, 그리고 확장과정에서 새로 추가된 영역에도 팔부신중을 조각한 석탑 등이 추가 됐다는 점 등을 확인할 수 있다.
<창림사지 현황도/경주 남산 창림사지 삼층석탑의 고찰/신용철/2002년... 맨 왼쪽 동그라미가 폐탑 부재들이 있는 곳, 노란색 화살표는 비로자나불 발견지, 6각 별표 모양이 쌍귀부고, 맨 오른쪽 별표가 창림사탑이다... 나원리사지/황복사지와 비교하기 위해 정북방향으로 도면을 세웠다...>
<나원리사지와 황복사지 가람배치도/앞 박보경 논문에서 재인용... 차이가 있다면 나원리사지와 황복사지는 지도의 왼편, 즉 서쪽이 높고 창림사지는 그 반대의 경우다... 각각의 석탑은 남쪽이 아닌 각각의 아래쪽을 바라보게 기획되었다고 생각하는데, 창림사지를 보면 금당의 방향이 남향이다... 지금 우리들 상식으론 쉽게 그려지지 않는데... 하긴 장항리사지도 탑과 금당은 일방향으로 병렬적으로 세워졌다...>
<왼쪽은 신용철의 창림사탑 복원도이고 오른쪽은 한민주가 인용한 국립문화재연구소에서 실측한 황복사탑 도면이다... 같은 비례와 높이로 조정해보면 가장 큰 차이점은 지붕돌이다... 특히 3층 지붕돌은 과연 저 폭에 맞는 노반이 있을까 싶을 정도로 넓은데, 황복사탑과 확연히 차이가 난다... 만약 현재의 2~3층 지붕돌이 기단부 및 일층과 제짝이고, 복원된 2~3층의 몸돌이 맞다면 현재의 비례는 삼층보다 오층탑에 가까울지도 모른다... 게다가 2층과 3층 지붕돌은 황복사탑에 비해 조금 더 넓고 얇게 보인다... 사실 이렇게까지 가면 끝이 없을 거 같아, 내가 일말의 가능성으로 남겨 놓은 5층탑 추측은 이 정도에서 마무리 한다...^^>
그런데 이런 방식의 가람배치는 이미 앞선 글에서 살펴봤듯이, 탑원과 금당원이 분리된 고선사지(670년대)를 비롯해 나원리사지(680년대)/황복사지(692년) 등 통일신라의 초기에 유행한 가람배치로, 만약 창림사지가 고선사지 유형을 따르고 있다면 창림사탑이 조형된 시기도 그와 비슷하다고 설정할 수 있으니, 황복사탑/천군동탑과 비슷한 체감과 비례, 그리고 미감까지 비슷하다는 주장과 일치하게 되고, 결국 창림사탑의 조탑연대 상한선은 700년대 초반에서 600년대 후반까지 올라가게 된다. 자 그럼 관련기록에 대한 검토와 사지에 대해 개략적으로 살펴봤으니, 이제 실제 석탑의 양식과 체감 등에 대해 검토할 필요가 있다. 고고학적 유물은 그 자체에 가장 많은 정보를 담고 있는 것이니까...
<5층 혹은 노반을 염두에 두고 멀리서 잡아봤다... 아무튼 창림사탑은 생각할수록 궁금해지는 게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지금 상태로도 충분히 만족할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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