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통일신라 말기 석탑 (898~935년)
<표11>
이층기단 삼층석탑 |
경주 남산 지암골탑, 영천 은해사 중앙암탑, 예천 간방동탑, 의성 운남사탑, 의성 만장사탑, 의성 고운사탑, 의성 치선동탑, 영양 신구동탑, 영주 초암사탑, 동해 삼화사탑(보물1277), 양양 오색리탑(보물497), 울진 구산리탑(보물498), 창녕 도천탑, 진주 이현동탑, 의령 보천사탑(보물373), 보성 우천리탑(보물943), 장흥 천관사탑(보물795), 곡성 태안사탑, 광주 증심사탑, 광주 약사암탑, 공주 동원리탑, 예산 수덕사탑 |
이층기단 부조석탑 |
경산 불굴사탑(보물429), 김천 청암사 수도암탑(보물297), 울주 석남사(소)탑, 예천 동본동탑(보물426), 예천 청룡사탑, 단양 향산리탑(보물405), 영동 영국사탑, 원주 흥법사탑(940/보물464) |
단층기단 삼층석탑 |
경주 남산 마석산탑, 남산 지암골2사지탑, 남산 탑곡탑, 기림사탑, 달성 대견사지탑, 청도 덕양동탑 |
이형기단 삼층석탑 |
구례 연곡사탑(보물151) |
이형석탑 |
경주 남산 용장계 모전석탑, 경북대 모전석탑, 해인사 원당암다층석탑(보물518) |
승 탑 |
울주 석남사승탑(917년/낭공대사 행적/보물369), 울산 태화사지 십이지상부도(보물441), 창원 봉림사 진경대사 보월능공탑(924/보물362), 영월 흥녕사 징효대사 보인탑(945) |
* 효공왕부터 경순왕까지로, 이 시기가 되면 통일신라의 정국주도권은 사실상 마비된 시점이면서, 진흥왕 이전이나 진평왕 말기처럼 소백산맥 안쪽으로 행정력이 급속히 위축되던 시점이다.
** 왕건이 고려를 건국한 시점이 918년이며, 발해가 멸망한 게 926년, 후백제 견훤에 의해 경주가 함락된 게 927년, 후발해국이라 할 수 있는 정안국이 건국된 게 930년, 후백제가 멸망한 게 936년이니 한반도 전역을 비롯한 만주지역까지 온통 전란에 휩싸였던 시기다.
*** 고려시대 유물이 분명한 흥법사탑과 징효대사승탑을 포함 시킨 이유는 관련 사적과 인물들이 통일신라와 관련이 깊고, 통일신라의 멸망과 함께 가장 근접한 시점이기 때문에 이후의 변화를 추정 비교할 수 있다고 생각해 같이 포함시켰다.
* 석탑의 수량이 급격히 줄어들고 수준도 완전히 퇴화한 상태다.
** 석탑의 규모가 3m 전후까지 작아지고 양식도 단순해지면서, 오랜 세월 자연적이거나 인위적인 도괴에 취약할 수밖에 없어, 이전 시기와 만들어진 숫자는 비슷할 수 있지만, 온전한 형태로 남아있는 수량이 적을 수 있다는 점을 고려할 필요가 있다.
*** 탑신은 공예품처럼 작아지면서 하층기단부가 상대적으로 커지고, 지대석이 완전히 지면에 노출돼 기단부가 삼단으로 보이기도 한다. 상층기단부 면석에서까지 탱주가 사라지고, 하층기단부 결구방식이 사라지거나 단일석으로 바뀐다. 또한 상하층기단부 괴임은 더 이상 양식적 통일성을 갖질 못하게 된다.
* 가장 어려웠던 점은 신라말과 고려초를 어떻게 구분할 것인가 모호한 시기라는 점인데, 고려의 미감은 통일신라와 다르다는 생각에서 통일신라의 여운이 남아있는 석탑을 문화재청 등의 기준과 무관하게 잡았다.
** 고려시대 석탑은 통일신라 석탑에 비해 ;
①하층기단부의 건축적 양식과 결구방식이 완전히 사라지고,
②상층기단부 갑석에 부연이 사라지거나 두꺼워지거나 돌출이 심해지는 등 일정하지 않고,
③일층몸돌 괴임이 강조되거나 별석으로 만들어지고, 지붕돌에서 가장 많은 변화들이 생기는데,
④지붕돌의 낙수면이 완전한 곡선으로 과장되게 가공되며,
⑤낙수면과 층급받침이 만나는 절단면이 두터워지거나,
⑥낙수면과 절단면에 비해 층급받침 두께가 매우 얇아, 숨겨져 보일 정도로 안쪽으로 들어가거나 형식적인 모습으로 만들어지고,
⑦지붕돌이 지나치게 두꺼워지거나 얇아져 조화로운 비례가 깨지고,
⑧상층기단부에 비해 일층몸돌이 지나치게 넓어지거나 높아지고,
⑨지붕돌에 비해 몸돌이 지나치게 좁고 얇아지는 등, 통일신라 석탑이 가졌던 정연함과 안정감, 세련된 비례와 수리적 완결성에서 완전히 벗어난다는 특징이 있다.
*** 그 이유로는 ;
①통일신라에서 유지되던 석공조직은 해체된 이후 더이상 관리되지 못한채 경험과 기술의 전승이 단절되면서 불탑건립이 형식적 모방으로 전락하고,
②통일신라에 비해 지방호족 세력이 비대하고 왕실과 균형을 이루면서 출발해 왕실의 견제와 지원 여부와 무관하게 불사가 지역별로 독립적으로 진행된 경우가 많았고,
③통일신라의 정복전쟁과 달리 고려의 통일은 지배권력의 교체 성격에 불과한 한계를 가지고 있어, 고려가 누릴 재원이나 노동력, 기술력이 확충될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고, 특히 고려초기에는 더더욱 불사에 투입할 여력이 없었던 것으로 보이며,
④947년부터 시작된 광종의 개혁이 이루어지기까지 60여년의 전란 동안 일관된 미감이 관리되지 못했는데, 특히 미륵신앙(법상종)과 선종세력에 포함돼 승탑과 석등 제작에 경험이 많은 낙동강 연안 서쪽의, 구 백제지역 석공들이 고려초기 개경일대 불사를 주도하면서 백제식 미감이 유입돼 고착된 것으로,
⑤괴체감, 세장미, 부드러움 등 수식이 붙지만 엄밀히 말하면 고려시대 석탑은 하나의 일관되고 통일된 미감으로 개념화하기 어려운 공통된 특징이 없다는 점이 가장 큰 특징이라고 말할 수 있다.
* 당연히 이런 특징들이 918~935년 사이에 만들어진 것은 아니기 때문에 통일신라와 고려의 경계가 모호하지만, 내가 본 석탑들 중 신라의 미감을 유지했다고 생각한 석탑들을 포함시켰다.
** 그 외 내가 직접 보지 못한 석탑들(어지간히 봤다고 생각했는데, 보물급 이상만 10여개를 못 본거 같다)은 하늘사랑, 시나브로, 머털, seilschft, 침향, stupa, 노루귀, 솔뫼, 들꽃님 블로그와 카페 등의 자료들을 참고했다.
*** 시대별 석탑에 대한 자세한 자료는 문화재청 검색란에 ‘통일신라시대 보물 석탑’ 등으로 검색하면 원하는 자료를 찾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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