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경주 남산 창림사지 삼층석탑
- 하층기단부 결구방식과 비례 및
- 통일신라 석탑의 팔부신중과 문비의 변천과 관련하여...
먼저 창림사탑의 가장 큰 특징은 하층기단부에 탱주가 3개라는 점이다. 지금까지 상층기단부의 탱주가 하나라는 점이 탑원기의 기록과 맞물려 800년대 중반이 기정사실로 받아들여지는데 이의가 없었지만, 하층기단부의 탱주 숫자 역시 우연히 추가되었다고 보기에는 석탑의 발전방향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지점임을 부정할 수 없다.
<창림사탑... 이제 세부적으로 들어가 본다... 먼저 하층기단부의 탱주다...>
<나원리탑... 오층석탑이면서 감은사탑/고선사탑과 함께 하층기단부에 탱주가 3개 있는 매우 드문 형태로, 600년대 후반까지만 사용된 고식이다... 그외 하층기단부에 탱주가 3개가 있는 경우는 창림사지탑을 비롯, 선산 낙산동 삼층석탑과 광양 중흥산성 삼층석탑이 있다...>
왜냐하면 석탑 변천의 가장 가시적인 지표가 상하층 기단부 탱주 숫자의 감소인데 이를 시대적으로 살펴보면, 먼저 통일신라 초기(600년대 말)와 중기(혹은 전성기, 700년대) 석탑을 가르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가 하층기단부 탱주가 3개에서 2개로 줄었다는 점이다. 또 중기에서 후기로 넘어가는 과정에서는 약간의 시간차를 두고 상하층 기단부 탱주가 각각 하나로 줄어드는데, 상층기단부 탱주가 하나로 줄어든 시점이 대략 700년대 말이고, 하층기단부 탱주가 2개에서 하나로 줄어든 시점은 800년대 초반, 그리고 900년대 나말려초가 되면 상하층기단부의 탱주가 아예 없어진다는 점들임을 고려할 때, 감은사탑/고선사탑/나원리탑에서만 사용되던 창림사탑 하층기단부의 탱주 3개가 시사하는 의미는 상층기단부 탱주가 하나라는 점만큼 중요하다고 할 수 있다.
<탱주가 하나일 때와 둘일 때의 복원도 비교... 상층 기단부의 탱주가 2개일 때와 하나일 때의 미감은 생각보다 크다고 생각된다... 해서 조금 무리다 싶지만, 현재 상층기단부의 팔부신중 부조와 탱주를 지우고, 황복사탑/천군동탑 처럼 탱주 2개로 바꿔보면 완전히 달라진다... 즉 상층기단부의 탱주가 둘일 때와 하나일 때는 구조 뿐만 아니라, 미감에도 커다란 영향을 끼치기 때문에 700년대 초반과 중반을 가르는 주요한 양식의 기준점으로 보는 것이다... 탱주의 숫자가 이렇게 중요한데 하층기단부 숫자를 그냥 무시하는 건 맞지 않다고 생각해 그려봤다... 좌측은 신용철의 복원도이고, 우측은 내가 임의로 상층기단부만 수정한 것이다...>
또한 하층기단부 탱주의 숫자는 외형상의 문제만이 아니라, 기단부의 결구방식을 결정하기도 하는데, 감은사탑(전형기)에서 황복사탑(정형기), 그리고 남산리탑(난숙기 및 과도기)에서 확인되듯이 결구방식은 석탑의 부재숫자와 떨어져 생각할 수 없고, 실제 우리 석탑의 역사는 화강암이라는 재료의 특성상 가장 안정적인 결구방식과 석질의 괴체감을 살릴 수 있는 방향으로 발전했다(목조건축이 선의 건축이라면, 석조건축은 면과 부피의 건축이다).
<천군동탑과 창림사탑의 비례와 체감 비교... 위 도면을 기준으로 다시 두 탑을 비교해보면, 거의 같은 폭과 넓이를 가진 두 탑-신용철에 의하면, 창림사탑 상층기단부 폭이 천군동탑보다 7cm넓고, 높이는 3cm 낮다- 의 상층기단부 미감은 전혀 달라 보이는데, 창림사탑 상층기단부가 훨씬 좁고 높아 보인다... 상대적으로 하층기단부는 창림사탑 쪽이 훨씬 넓어 보여, 상층기단부는 더더욱 좁아 보이게 된다...>
때문에 안정적인 결구방식을 찾아가는 과정에서 부재 숫자는 줄어들 수밖에 없고, 이 원칙을 벗어나는 것은 극히 이례적인 경우나, 다보탑 등 이형의 석탑, 그리고 투입될 경제력과 기술력의 부족에 따른 임시방편 밖에는 없다. 그런데 10개 부재가 사용된 창림사탑의 하층기단부는 정형화된 형태의 8개로 만들어진 황복사탑이나 장항리탑보다 많아 오히려 고식에 가깝다.
<감은사탑, 장항리탑과 창림사탑의 상층기단부 면석의 가공 형태/신용철 앞 논문에서/2006년... 창림사탑은 가장 초창기인 감은사탑 보다 양식적으로 정리되지 않았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석탑에 관심을 두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최근에 등장한 주요한 지표 중 하나가 기단부와 일층몸돌의 폭과 높이, 그리고 기단부와 탑신부의 폭 혹은 높이의 비례(아직 단면적 비례 개념은 본격적으로 연구되지 않고 있다^^) 등이라고 생각되는데, 누가 알려주지 않았지만 내게도 매우 중요한 관건 중 하나로 자리매김된지 오래다. 그러나 전문적인 연구자들 이외에 그 실제 수치를 확인할 수 없었는데 최근에는 비례에 대한 자료들이 상당수 확인되고 있어 이렇게 자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는데, 창림사탑의 상층기단부 폭과 높이 비례는 1:2.74, 일층몸돌은 1:1.2(건축기술자이도 한 나는 항상 높이/넓이로 계산하는데, 대부분 인문계 연구자들은 넓이/높이로 계산(무조건 큰 수로 작은 수를 나눈다?)한다는 점이 재밌다. 그렇지만 TV화면을 16:9로 표기하듯이 비례는 가로:세로(이를 표현하면 1:1.77이 아니라, 1:0.56이 된다)가 맞다고 생각한다^^)로, 기단부 비례는 황복사탑/석가탑과 비슷하고, 일층몸돌 비례는 황복사탑과 비슷(석가탑은 1:1.12로 큰 차이를 보인다)하다.
<통일신라 주요 석탑의 기단과 탑신의 관계 비례표/신용철 앞 논문에서/2002년... 앞 글에서 내가 만들었던 표와 수치에서 약간씩 차이가 있다... 좋은 자료...^^>
이렇게 본다면 석탑의 부재수와 결구방식, 그리고 체감과 관련한 기단부나 일층몸돌의 비례는 황복사탑이나 천군동탑과 가장 근사하게 되고, 창림사탑은 그와 비슷한 미감이 유행하던 시기에 비슷한 미감을 선호했던 석공들에 의해 조성된 것이 맞다고 보인다. 다만 걸리는 문제는 741년이 분명한 석가탑에서도 하층기단부의 부재숫자가 이례적으로 늘어났다는 점(12개다)과, 기단부가 동시대 다른 탑에 비해 높고 일층몸돌이 높아진 원원사탑에서 확인되듯 기단부와 일층몸돌의 비례를 무조건 적용하기 힘든 점 등을 감안한다면, 창림사탑을 일방적으로 황복사/천군동탑과 같은 시기에 조형했다고 주장하기는 어렵게 된다.
<창림사탑... 이제 일층몸돌의 문비와 상층기단부의 팔부신중 부조로 넘어가 본다...>
<먼저 창림사탑 상층기단부의 팔부신중... 이 사진은 주변이 정비되기 전 사진이고, 아래 사진은 최근 사진이다...>
<팔부신중 부조 중 가장 완성도가 높고 세련된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마지막으로, 이제까지 양식적 측면과 비례에 대해 살펴봤지만 가장 눈에 띠는 부분이 설명되지 않았는데, 상층기단부 면석에 조각된 팔부신중과 문비다. 물론 이 문제는 통일신라 조각과 회화, 그리고 불교공예에 대한 기본 소양도 필요한데다 금동불을 비롯 동종, 신라왕릉의 십이지신상 등에 대한 연구까지 포괄하는 문제이니 내가 감당할 영역을 넘는다 생각하여 뒤로 미뤘던 것이지만 확인 가능한 부분만이라도 살펴보기로 한다.
* 통일신라 석탑의 팔부신중 등 주요 석탑의 조각 양식 변천 ;
팔부신중을 비롯해 석탑에 새겨진 부조의 흐름을, 각각의 시대를 대표하는 석탑을 통해 비교해 본다...
<원원사탑 일층몸돌의 사천왕상... 일층몸돌에 사천왕상이 새겨진 최초의 예다...>
<원원사탑 상층기단부의 십이지신상... 역시 십이지상이 석탑에 조각된 최초의 예이면서 구성과 조각의 난숙미에서 최고를 자랑한다... 참고로 692년 조성된 황복사지탑 발굴현장에서도 십이지신상이 발굴된 바 있어, 시기의 문제는 없다고 보인다...>
<경주 남산 남산리 서탑의 팔부신중... 창림사탑과 원원사탑이 740년을 전후한 시기 석탑 부조의 최고작품이라면, 이 조각은 700년대 후반 석탑 부조의 최고라 할만하다...>
<진전사탑의 팔부신중... 그리고 이 조각들은 800년대 초반을 대표하는 것이고...>
<진전사탑에는 상층기단부 만이 아니라, 하층기단부와 일층몸돌에도 비천상과 사방불이 조형되어 있다...>
먼저 창림사탑 상층기단부에 있는 팔부신중 조각은 그 규모도 크지만 완성도에서도 우리나라 석탑을 대표할만 하다. 게다가 석탑에 팔부신중이 조각된 시원양식으로 이후 법흥사지 전탑/화엄사 사사자탑/인용사지탑/진전사탑/범학리탑/관덕동탑 등의 규준이 되었을 뿐만 아니라, 장항리탑 인왕상/원원사지탑 십이지신과 사천왕/남산리탑 팔부신중/상주 석각천인상 등과 함께 조각사에서도 가장 수려한 솜씨(물론 절정의 기량은 석굴암에 있지만) 중 하나로 꼽는데 이견이 없을 것이다.
<안동 법흥사지 전탑 기단부의 조각상들... 조각의 양식과 기법이 균일하지 않아 이 부조들의 조성 시기에 대해 논란이 있다... 700년대 후반에서 800년대 초반으로 보인다...>
<전 경주 인용사지탑 팔부신중... 표대나 갑주, 그리고 구성면에서 조금씩 약화되는 등의 차이가 발행한다...>
<전 인용사지탑 팔부신중/국립중앙박물관에서...>
<숭복사지 삼층쌍탑의 팔부신중... 대체적으로 700년대 후반에서 800년대 초반으로 추정하고 있다...>
<숭복사지탑의 팔부신중... 그러나 쌍탑으로 조형된 숭복사지의 두 석탑은 팔부신중 조각 기법과 양식에 차이가 있어, 한 번에 조성되지 않고 약간의 시차가 있다는 설이 있는데, 나도 동의하는 입장이다...>
<청도 운문사 삼층쌍탑의 조각상... 그리고 800년대 중후반이 되면 팔부신중의 조각 양식을 비롯해, 상층기단부 갑석의 돌출 등 석탑양식에서도 눈에 띨 정도로 확연한 차이를 보이게 된다...>
그리고 이 조각상에 대해 꼭 짚고 넘어가야할 점은 중국의 전탑, 일본의 목탑 등과 비교하여 부처의 형상이나 다름없는 불탑에 다양한 의미의 조각상, 특히 팔부신중을 첨가한 예는 우리나라 석탑이 유일한 것으로, 창림사탑의 의의는 자못 크다 할 것이다. 문제는 조각의 완성도와 제작 연대의 관계로, 뛰어난 수준과 규모가 크다는 점이 가장 먼저 만들어졌다는 근거가 될 수 없다는 점이다.
<의성 관덕동탑의 조각상... 그리고 800년대 중후반을 대표한 것으로 관덕동탑을 꼽을 만 하다... 조각 뿐만 아니라, 탑의 미감과 양식 등에서 완전히 다름을 느낄 수 있다...>
<상주 석각 천인상... 면석에 조각된 부조 중 빠뜨리기 아쉬워 같이 올린다...>
<상주 석각 천인상... 그러나 이 부조들은 높이만 1.2m에 달해(참고로 천군동탑은 상층기단부 전체가 1.1m이고, 면석만 1.2m면 갑석과 괴임까지 포함하면 최소 1.55m를 넘을 것으로 추정되는데, 감은사/고선사탑 보다 30cm이상 높은 크기가 된다) 석탑 기단부 면석으로는 너무 크다는 의견이 많았다... 해서 건축물 기단부 면석에 사용된 것으로 추정하는데, 나도 동의하는 입장이다...>
<중흥산성탑 기단부 조각상들... 그리고 통일신라 후기 석탑의 기단부 부조로 가장 예외적인 경우를 소개한다... 일층몸돌에는 사방불이 새겨져 있고, 상층기단부에는 인왕상(장항리탑) 2구, 사천왕상(원원사탑) 2구, 팔부신중(창림사탑) 2구, 공양상 2구가 각각 조각되어, 통일신라 초기부터 후기까지 유행했던 조탑공덕경과 관련한 모든 부조상들이 한 곳에 모여 있는 유일한 예이기 때문이다... 참고로 3개로 구성된 하층기단부 탱주와 하층기단부 갑석 합각 부위에 모각된 우동, 그리고 상층기단부 갑석에 풍령을 달았을 것으로 추정되는 못구멍과 둔각으로 변한 일층몸돌 괴임 등 통일신라 후기 석탑의 장식적 요소들을 한 눈에 확인할 수 있는데, 이 석탑을 보면 공예화된 석탑이 어떤 느낌인지 쉽게 이해된다...>
그렇지만 이 문제에는 또 하나의 단서가 있으니 바로 일층문비에 남아있는 문고리다. 왜냐하면 통일신라 석탑에 새겨진 문비는 일정한 패턴을 가지고 변화했는데, 맨 처음에는 문비(고선사탑)만, 그다음엔 문고리(장항리탑)가 생기고, 그 다음에 문고리 위에 자물쇠(화엄사)가, 마지막엔 자물쇠만 조각하는 수법으로 변했기 때문이다(아마 최후의 완성형태는 성주사지탑일 듯 싶다).
* 통일신라 석탑의 일층몸돌 문비의 양식 변천에 대하여 ;
문비가 변화하는 주요 석탑을 사진으로나마 비교해 본다...
<고선사탑 문비... 일층몸돌에 새겨진 문비의 양식적 변화에 대해서도 사진으로나마 정리해본다... 고선사탑에는 여러개의 규칙적인 못구멍들이 보여, 문비 안쪽으로 청동판으로 문의 모형을 가공해 장식했을 것으로 보인다...>
<장항리탑 문비... 고선사탑에서 문비 양식은 그대로 차용하였는데, 문고리보다 귀면상이 눈에 띈다...>
<숭복사탑의 문고리... 고선사/장항리탑에서 보이던 문비 양식도 완전히 모형화 되고, 내부에도 문고리만 보이게 된다...>
<성주사탑 문비... 화엄사 사사자탑 등에서부터 자물쇠와 문고리가 함께 등장하는데, 이 중 성주사탑이 가장 화려하다고 생각되어 이 사진을 올린다... 통일신라 후기에 만들어졌지만, 초창기 고선사탑 문비 안쪽의 청동조각문은 이런 양식이 아니었을지 추정해 본다...>
<간송미술관 탑의 문비... 개인적으로 이 일층몸돌은 상하가 바뀌었다고 생각하는데, 위쪽 동그라미 두개가 문고리라고 생각한다... 즉 장항리탑에서 시작한 문고리는 후대에 무의미한 동그라미로 약화되고, 자물쇠가 오히려 강조되어 보인다... 문고리가 완전히 생략된 경우도 있다...>
<장흥 보림사 보조선사 창성탑 부분/880년/보물157호...그리고 참고로 석탑과 승탑을 통털어 가장 화려하고 장식적인 문비를 고르라면, 보조선사 창성탑 문비가 아닐까 싶다... 문비 상부의 화려한 꽃장식에서부터 문고리에 이르기까지 최고 절정의 솜씨를 뽐내고 있다... 석탑과 승탑의 차이일까??...>
창림사탑 일층몸돌 문비에는, 도깨비(최근 강우방 교수는 도깨비가 아니라 용의 정면 얼굴 모양이라 주장한다)가 원형 문고리를 물고 있는 형상으로 조각되었는데, 이는 고선사탑 이후 두 번째 단계에 해당하는 것으로 같은 유형의 장항리탑 보다 간략화 되었지만, 800년대 초반에 조성된 것이 확실한 숭복사탑 문고리에 비해 세련되게 보여, 창림사탑 조성연대의 하한이 결코 800년을 넘을 수 없다고 확인된다. 다만 여기에서도 걸리는 문제가 간월사탑과의 선후문제다. 왜냐하면 장항리탑 일층몸돌을 모본으로 만든 간월사탑에는 장항리탑에 비해 약화된 모습의 인왕상과 문비가 있는데, 문고리가 창림사탑에 비해 훨씬 원형에 충실하고 문비에도 신방석의 흔적이 그대로 살아있기 때문이다(창림사탑과 간월사탑 편년은 상당히 긴밀할 것으로 보인다).
<간월사탑과 창림사탑 문비 및 문고리의 비교... 간월사탑 문비 삼면의 액연과 하부의 신방석 문양은 장항리탑과 똑같은데, 창림사탑 문비는 숭복사탑 문비와 같이 신방석이 없고 액연도 모형화 되는 등, 문비만 가지고 두탑을 비교하면 간월사탑 양식이 훨씬 고식이다...>
<창림사탑 일층몸돌의 문비... 그러나 간월사탑 인왕상 조각과 창림사탑 팔부신중 조각을 비교해보면, 창림사탑쪽이 훨씬 세련되고 체계적으로 흐트러짐이 없고, 일층몸돌의 비례가 창림사탑은 1:2로 741년 이전 비례를 보이지만, 간월사탑은 1:1.12로 큰 차이를 보이고 있어 750년대 이후의 비례를 보이고 있다...>
이상을 종합해 정리하면, 하층기단부 탱주숫자는 감은사탑/나원리탑과 같고, 가람배치는 나원리사지/황복사지와 비슷, 미감과 규모는 황복사탑/천군동탑과 같고, 기단부와 일층몸돌의 비례는 석가탑을 넘지 않고, 문비를 보면 장항리탑보다 앞설 수 없으며 간월사탑과 비슷하거나 늦다고 정리할 수 있다. 또 하나는 자세히 살펴보지 못한 3층 지붕돌의 비례와 관련해 5층탑으로 조성했을 경우인데, 여기서도 나원리탑/장항리탑이 만들어진 바로 다음 시기로 상정할 수도 있고, 다보탑 등 이형석탑이 등장하는 700년대 후반으로 상정할 개연성도 생긴다.
<창림사지 삼층석탑의 오층 추정 상상도... 위 신용철의 삼층복원도를 그대로 살려 오층으로 복원 상상도를 그려 봤다...^^ 사실 이 그림은 생각만 하고 있었는데, 하늘사랑님이 오층 추정에 동의하신다는 댓글을 남기는 바람에, 급히 그려서 올리는 것이지만, 신용철의 복원도가 맞다는 전제에서 보면, 삼층지붕돌 위로 두개층의 탑신이 올라가도 전혀 무리가 없어 보인다...^^ 막상 그림까지 그려보면 삼층보다 오층이 원형에 충실한 게 아닐까?? ㅋㅋ>
<해서 아예 맘 먹고, 오층석탑으로 만들어졌다면 어떻게 됐을까를 상상해 봤는데, 역시 괜찮타...ㅋㅋ 나원리탑 보다는 장항리탑 체감에 가까울 것으로 보이는데, 문제를 이렇게까지 키우면 너무 산만해질 거 같아 이쯤에서 마무리하지만, 지금 아니면 따로이 올릴 기회도 없을 거 같아 무리했다는 걸 이해하시기 바라고...^^>
아무튼 그렇게까지 고려하면 너무 복잡해지니, 최고 상한과 불분명한 하한을 제외하고 절충해보면, 창림사탑의 조형 연대는 장항리탑이 만들어진 이후인 702년을 상한선으로, 석가탑인 만들어진 741년을 하한선으로 설정할 수 있다고 보이며, 여기에 내 생각을 조금 더 보태면 715년 이후 741년 이전으로 결론을 내리고 싶다.
<아무튼 내 결론은 740년 전후다... 이 편년에 동의하시는 분들이 얼마나 될까?^^>
이제 창림사탑의 제작 연대를 나름 설정했으니 남는 것은 시대와 묶어서, 주변경관과 묶어서, 선후의 탑이나 비슷한 위치에 있는 탑들과 비교하면서 생각하는 이 탑에 대한 느낌일 것이다. 사실 이렇게까지 정리할 겨를이 없을 거 같아, 이미 앞선 글에서 내 생각을 말해 중복될지 모르겠지만, 창림사탑을 보면 전성기 통일신라가 세상을 포효하려는 의연함과 당당함으로 똘똘 뭉쳐져 있다는 생각이 들 때가 많았다. 게다가 끊임없는 파발마가 달려들었을 영천방향과 언양방향을 굽어보는 창림사탑의 위용은 경주와 신라를 호령하기에 부족함이 없다고 생각 되는데, 당시 바다를 통해 감포에서 토함산을 넘어오는 길목인 명활산 동편의 천군동탑, 울산에서 들어오는 길목의 낭산 동편의 황복사탑과 함께 경주 남산에 자리잡아 경주의 서쪽을 지키는 창림사탑은 그렇게 서로 어울려 배치된다.
<어째든 처음 내 출발은 황복사탑/천군동탑과의 상관성이었다... 이를 살려 세탑의 위치를 지도에 표시해보면, 맨 왼쪽이 창림사탑, 가운데가 황복사탑, 맨 오른쪽이 천군동탑이다... 경주로 들어오는 서쪽과 남쪽, 그리고 동쪽 길목에 자리잡게 된다... 참고로 비슷한 시기에 새워진 경주 북쪽탑으로는 나원리탑이 있긴 하지만, 당대 통일신라의 주요 교통로는 북쪽보다 서쪽이 가장 주요한 길목이었다...>
<황복사탑... 경주 낭산의 동쪽에...>
<천군동탑... 경주 토함산의 지류로 소금강산과 만나는 명활산의 동쪽에...>
<창림사탑... 경주 남산의 서쪽에...>
또 그리 높지 않은 경주 남산의 끝자락에 이처럼 넉넉하면서도 굳센 의지를 담아내기 쉽지 않았을텐데, 창림사탑은 탑이 바라보는 주위와 잘 어울린다. 또 이렇게 주변경관과 함께 바라볼만한 탑들이 있어 비교해보면,
<창림사탑에서 서쪽을 바라보면, 주변 경관이 들어오는 게 아니라 산하를 꽉 채운 탑이 더 크게 느껴진다...>
<이렇게 주변 산하를 굽어봐야만 할 것처럼 말이다...>
경주 남산의 용장사지탑과 합천 청량사탑은 자연과 어울리는 꼭 그만한 크기로 먼 곳을 향해 시선을 향하게 만들어 탑을 잊게 만드는 매력이 있고, 가야산과 한 고을의 염원을 담아낼만한 성주 법수사탑은 앞과 뒤를 맴돌게 재촉하면서 탑에 기대게 만든다면, 창림사탑은 팽팽한 긴장감으로 탑이 바라보는 밖으로 뛰쳐나가야 할 거 같은 충동을 자아내니 탑을 우러러 보게 만든다.
<경주 남산 용장사지 삼층석탑... 주변 경관만 기억 돼 탑이 잊혀지기는 하지만, 탄탄하면서도 참하게 생긴 게 노련하고 맵씨있는 석공이 만든 차분하면서도 의젓한 탑이다...>
<용장사지 탑에서 바라 본...>
<합천 청량사탑... 주변 자연과 가장 잘 어울려 동화된 느낌을 찾는다면, 나는 청량사에 있는 이 탑을 최고로 꼽고 싶다...>
때문에 용장사지탑/청량사탑이 주변 풍광에 동화되는 하나의 부분으로 기억된다면, 창림사탑은 하나의 건축으로 주변 산하에 위축되지 않고, 당당하게 자신을 드러내는 모습으로 각인되니, 달라진 조건에 조응하는 시대정신과 상반된 미감까지 읽어볼 수 있어 같이 비교해볼만 하다. 다만 완결되지 않은 상층부의 체감이 3층으로 마무리될지 5층까지 올라갈지 모호해 아쉬움이 없지 않지만, 현존 하는 모습만으로도 나무랄데가 없으니, 군림하면서도 어울리고 거들먹거리지 않으면서 장중한 기운을 숨기지 않아, 창림사탑에는 파수꾼의 날렵함과 예민함, 그리고 주변 경관을 장악하고 압도하려는 장군의 기개가 복합적으로 어울리며 충만한 기운을 담고 살아있어, 꼭 볼만한 탑으로 추천하고 싶다.
<꼭 올라볼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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