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창녕 술정리 동 삼층석탑
- 기단부 결구방식을 통해 살펴본 통일신라 석탑의 편년...
두 번째로 석가탑과 술정리탑을 비교할 또 하나의 규준이 있으니, 육안으로 쉽게 확인할 수없는 기단부의 결구와 양식의 문제다. 이건 감은사탑/고선사탑을 비롯한 앞선 글들에서도 박보경의 논문 등을 통해 잠깐씩 인용 소개한 적이 있는데, 신용철은 상하층 기단부 결구방식을 조금 더 본격적으로 분석하여 통일신라 석탑의 상층+하층기단부를 각각 귀틀석+판석, 귀틀석+귀틀석, 판석+판석이라는 세가지 양식으로 구분하여 편년작성을 시도한 적이 있다(통일신라 석탑 연구/신용철/동국대 박사학위/2006년). 사실 감은사탑/고선사탑/나원리탑 등 초기석탑을 제외하면 황복사탑에서부터 탑신의 각층 몸돌과 지붕돌을 하나의 부재로 가공한만큼, 석탑조형에서 파악할 수 있는 결구방식은 기단부에 한정될 수밖에 없다. 때문에 기단부 결구방식을 통해 석탑의 양식과 편년을 설정하려는 의도는 주요한 기준점을 제기할 수 있다고 생각되어 인용한다.
<정림사탑/미륵사탑/왕궁리탑 등 백제의 석탑 결구방식을 계승한 탑리리탑에서 출발한 통일신라의 석탑은, 감은사탑/고선사탑에서도 3층 몸돌을 제외한 모든 부위를 최소 4매 이상의 석재를 조립하여 만들었다... 즉 각층 지붕돌과 일층몸돌은 각각 8매, 이층몸돌은 4매의 판석을 이어 붙여 만들었다는 말이다... 그러나 황복사탑에서는 일층몸돌과 지붕돌 등 탑신의 모든 부재를 하나로 가공하는 양식을 개발해낸다... 이는 대단히 획기적이며 전환기적인 발상으로 이제 석탑에서 확인할 수 있는 목조건축식 결구방식은 기단부에 한정되게 된다... 결국 기법의 변화는 석탑의 규모에 영향을 미치게 되었고, 석탑조형의 경제성을 높여 양적으로 확산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다...>
<일층몸돌을 하나의 통돌로 가공해 만든 황복사탑에서부터 석탑의 규모는 작아질 수밖에 없었고, 이를 극복한 사례는 오층으로 올린 장항리탑이 유일(나원리탑의 일층몸돌은 4매로 구성되어 있다)하다... 그리고 기단부의 결구방식은 석가탑을 만들 때 조금 복잡해지기도 하지만, 술정리탑에 이르러 완전히 통일신라적인 기법을 개발하게 되니, 감은사탑에서부터 생각하면 거의 3대 90년이 걸린셈이다...>
<이런 의미에서보면 통일신라석탑은 석가탑이 아니라 술정리탑에서 양식적으로 완성된다고 보는게 맞다는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술정리탑의 결구방식으로는 석가탑 이상의 규모를 만들기 어려운 구조적 한계에 직면하게 되어 석탑의 규모는 필연적으로 축소 하향조정될 수밖에 없었다... 이를 감안한다면 장항리탑과 창림사탑은 구조적 한계를 뛰어넘는 성과일뿐 아니라, 이를 위해서는 그만한 시간과 공력이 투입될 수밖에 없었는데, 700년대 후반 이후 중원 탑평리 칠층석탑이나 선산 죽장동 오층석탑 등이 시도 되었으나 더이상의 기회는 만들지 못했다고 생각된다... >
신용철은 위 결구방식을 각각 Ⅰ,Ⅱ,Ⅲ번 양식으로 분류했는데 이를 요약하면 ; 통일신라 석탑은 감은사/고선사탑에서 목조건축 수법을 차용한 Ⅰ번 양식으로 출발하여, 황복사탑에 이르러 700년대 상당수 석탑은 안정적 구조인 적층식 기법에 걸맞는 Ⅱ번 양식을 사용하여 전성기를 이루었지만, 장항리탑에서 시작해 700년대 후반 술정리탑에서부터 판석 + 판석 결구방식인 Ⅲ번으로 통일되는데, 이 양식이 가장 전국적 분포를 보이면서 가장 많은 수의 석탑에서 발견되는 보편적인 양식이라는 주장이다. 개인적으로는 양식과 결구방식을 편년설정의 주요 지표로 정형화하면서 통일신라시대를 관통하는 일관된 기준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성과가 돋보이는 논문으로, 내부를 뜯어볼 수없는 우리들에게 매우 유용하며 여기에 석탑의 규모와 미감까지 연결한다면 더 높은 완성도를 가질 것이라 생각된다. 해서 신용철의 자료를 내가 시도했던 석탑의 편년에 맞춰 표로 재정리해 본다.
<감은사탑/고선사탑의 기단부 결구방식/신용철 논문에서... 신용철은 이 시기를 1기로 설정했다...>
<감은사탑의 기단부와 일층몸돌... 감은사탑은 하층기단부가 24매, 상층기단부가 20매, 일층몸돌과 지붕돌은 각각 8매로 구성되어 있다... 일층몸돌을 자세히보면 우주와 판석이 별석으로 가공돼 있어, 정림사탑이나 왕궁리탑과 동일한 방식이 사용됐음을 확인할 수 있다...>
표1> 기단부 양식에 따른 통일신라 석탑 분류
구 분 | 석 탑 의 종 류 | 비 고 | |
양 식 | 시 기 | ||
Ⅰ 번 판석+ 귀틀석 | 초 기 | 감은사탑, 고선사탑, (나원리탑) | 신라석탑시원 복합구조 |
전성기 | 나원리탑, 천군동탑, 석가탑, 갈항사지탑, 마동탑, 미탄사지탑, 천관사지탑, 이거사지탑 | 상하층기단부 탱주감소(2개) | |
과도기 | 부석사탑, 기성동탑 | 사실상 단절 | |
후 기 | 화천동탑, 현일동탑 | 퇴화된 기법 | |
Ⅱ 번 귀틀석+ 귀틀석 | 초 기 | ------ |
|
전성기 | 황복사탑, 염불사탑, 원원사탑, 용명리탑, 봉기동탑 간월사탑, 선본사탑 | 양식적 완성, 안정적구조 | |
과도기 | 청송사탑, 무장사탑, 술정리서탑 | 700년대에만 사용후 단절 | |
후 기 | ----- |
| |
Ⅲ 번 판석+ 판석 | 초 기 | 장항리탑 |
|
전성기 | 창림사탑, 술정리동탑 | 결구방식완결, 단순구조 | |
과도기 | 남산동서탑, 숭복사탑, 단속사탑, 선림원지탑, 진전사탑, 범학리탑, 법광사탑 | 상층기단부 탱주감소(1개) | |
후 기 | 효현동탑, 남사리탑, 감산사탑, 장연사지탑, 신월동탑, 내원사탑, 서동리탑, 관덕동탑, 동화사탑, 축서사탑, 보림사탑, 실상사탑, 선암사탑, 대흥사탑, 중흥산성탑, 동방사지탑, 성주사지탑, 향산리탑, 거돈사지탑, 직지사탑, 봉암사탑, 용장사지탑, 화달리탑 등 | 하층기단부 탱주감소(1개) 전국적이며, 가장많은분포 |
* 양식구분은 상층기단부 + 하층기단부의 순서다.
** 자료는 신용철의 논문을 취합한 것이며, 시대 구분과 비고란은 내 기준으로 재정리한 것으로 시대구분은 차이가 있다.
*** 780~828년을 과도기라 이름 붙인 것은, 하나의 구조적 형식이 도입되어 쇠퇴할 때까지를 4단계로 나누어 ‘형식의 실험 → 전형의 정착 → 형식의 절충과 변형 → 퇴화’하는 양식적 변천 과정(한국건축 이야기 3/P315/김봉렬)에서 형식의 절충과 변형에 해당하는 시기로, 700년대를 (질적 수준의) 전성기로 보려는 나의 관점에서 이름 붙인 것이니 오해없기를 바란다. 또 통일신라 석탑의 발전과정을 살펴보면 경주와 대구 근방 등에 집중되던 700년대와 달리, 780~898년에는 오히려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양적인 측면에서의 전성기가 있어, 이 시기가 통일신라 후기에 해당함에도 불구하고 무조건적인 퇴화의 시기로만 볼 수는 없다는 것도 감안해야 한다는 점을 첨언한다.
**** 말기는 별도 양식으로 정리하는 게 무의미하다는 생각에서 분류하지 않았다.
***** 영양 화천동과 현일동 삼층석탑의 하층기단부는 통돌에 조각만 새겨 가공한 것이다. 때문에 면석과 갑석을 별도로 가공하여 결구한 감은사탑과 동일한 방식으로 보기 어렵다고 생각되는데, 신용철은 갑석의 존재유무와 상관없이 귀틀석 방식으로 결구했다는 것을 설명하기 위해 일부러 동일한 분류로 구분한 것으로 보인다.
<전성기 석탑 기단부 결구방식/신용철 논문에서... 순서를 1,2,3으로 나갔으면 좋겠는데, 일단 자료를 인용하는 만큼, 도표 순서대로 대표적인 석탑을 배열한다...>
<귀틀석 + 귀틀석 결구방식의 원원사지탑... 상하층 기단부 모두 각면에 3매의 석재로 나뉘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는데, 상층기단부의 탱주가 매우 굵고 뚜렷하게 보인다... 왜냐하면 상하층기단부 각각의 석재가 만나는 부분에 탱주를 배치한 이유는 디자인적 요소가 고려되기도 하지만, 상부 압축력을 감당하기 위해 단면적을 넓히기 위한 구조적 요인이 크다... 즉 귀틀석 방식은 구조적 고민에서 나온 것이다...>
<판석 + 귀틀석 결구방식의 천군동탑 기단부... 하층기단부는 한면에 3매의 부재가 보이지만, 상층기단부 판석은 이음매가 없이 1매의 부재로 만들어졌음을 확인할 수 있다(신재와 고재(우측면)를 비교해 보라)... 또 한개의 돌로 가공한만큼 탱주의 돌출이 작아질 수밖에 없어 원원사탑에 비해 훨씬 미약하게 보이고, 약화된 존재감만큼 시선을 붙잡지 못한다... 즉 1매의 판석에 이정도 미약한 두께로 돌출된 탱주는 더이상 구조적 의미가 없어지고, 순수히 디자인적 요소로만 사용된 것으로 보인다... >
<판석 + 판석 결구방식의 장항리탑... 각층 기단부 갑석에는 분절된 이음새가 노출되고 있지만, 원원사탑/천군동탑과 달리 상하층기단부 면석은 1매로 이루어져 중간에 이음새가 없고, 적당한 두께와 깊이로 노련하게 가공되었다... 이런 비교가 작은 차이로 보일지 모르겠지만, 각각의 부위에 이음새가 줄어든만큼 불필요한 부분에 눈을 뺏기지 않게 된다면, 우리들이 석탑을 대면하는 첫번째 느낌은 볼륨과 실루엣에만 집중할 수 있게 되어 보다 오랫동안 시선을 붙잡을 수 있게 된다... 왜냐하면 석조건축은 면의 건축이며, 괴체감을 살릴 때 소재의 질감이 더 살아날뿐 아니라, 이음부위가 적을수록 구조적으로도 안정되기 때문이다... 구조만으로 군더더기 없는 미감을 구현해내는 건축이 가장 오랜 생명력을 갖는 것이며, 또한 진실한 아름다움을 뽐낼 수 있다... 그래서 현대에 들어서도 연전히 선호되는 석조건축은, 인류문화에서 가장 오랜된 역사와 가장 장중한 건축들을 만들어냈던 것이다... 내가 통일신라 석탑의 발전과정을 이렇게 (터무니없이?) 확장된 시선으로 접근하는 이유는, 이처럼 동서고금에 보편적으로 나타나고 있는 예술적 완성도를 더욱 높이기 위해 고심하고 더 높은 단계로 발전하고자 하는 통일신라인들의 욕구를 읽고 싶었기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이상을 정리해보면, 초기 감은사탑 등에서는 나비장 등 목조건축과 관계된 수법을 석탑 조형에 적극적으로 적용하여 가장 복잡하면서 복합적인 구조로 석탑을 조성했지만, 불과 10여년이 지나 석재에 걸맞는 적층식 기법이 연구되면서 황복사탑에서부터 감은사탑에 비해 규모와 부재수를 줄이고 가장 안정적인 결구방식을 채택하여 700년대 상당수 석탑이 이 기법으로 만들어지게 되었고, 비슷한 시기에 부재의 수를 줄이면서 석재의 질감인 괴체감을 살리려는 의도로 가장 늦게 시도된 상하층기단부 판석+판석 결구방식은 장항리탑에 이어 창림사탑과 술정리 동탑에서 정착되어, 800년대 이후 대부분의 석탑에서 사용하게 된 것으로 보인다.
<과도기의 기단부 결구방식/신용철 논문에서... 전성기와 똑같은데, 상층기단부 탱주 숫자가 1개로 줄어들었다... 역시 도표의 순서대로 사진을 배열했다...>
<황복사탑에서 시작한 귀틀석+귀틀석 방식은 800년 전후가 되면서 완전히 사라진다... 그 마지막쯤에 해당하는 울산 청송사탑의 상층기단부 탱주는 별석의 이음새 때문인지 눈에 금방 띈다...>
<감은사탑에서 시작한 판석+귀틀석 방식 역시 800년을 전후한 시기에 단절된다고 생각된다... 역시 마지막쯤에 해당하는 칠곡 기성동탑 기단부로 자세히보면 상층기단부 면석에 안상을 새기면서 우주를 생략했을뿐 아니라, 판석의 이음도 바람개비식으로 엇물리지 않고 두면에만 이음새를 노출시키는 방식을 사용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시기에 이르면 우주와 탱주는 디자인적 요소로 격하될뿐, 감은사탑을 만들 때처럼 구조재라는 인식 자체가 사라졌음을 읽을 수 있다...>
<청송사탑/기성동탑과 비슷한 시기에 만들어진 경주 남산리서탑 기단부다... 상층이나 하층기단부 면석을 판석식으로 가공했기 때문에, 오른쪽 우주에서 1개의 이음새만 노출됐고, 앞 시기 석탑에 비해 규모가 줄어든만큼 하층기단부 갑석의 이음새도 1개만 노출돼 훨씬 간결하고 산뜻하게 보인다... 여기서 보이는 상층기단부 탱주는 더이상 구조적인 이유가 없어지고, 화면을 분리하는 테두리로 밖에 보이지 않는다...>
결국 석가탑과 술정리탑을 결구방식으로 비교하면, 감은사탑에서 시도한 방식은 석가탑에서 완성되었지만, 실제 통일신라 석탑은 술정리탑에서 양식적으로 완성태를 이뤄 이후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나갔다고 정리할 수 있는데, 이는 한편으로 통일신라 석탑 조형에서 귀틀석 사용방식이 완전히 퇴화됨을 의미한다. 이 변화는 생각보다 큰 영향을 끼치게 되는데, 목조와 석조건축 결구방식이 혼용된 석탑 기단부를 판석 혹은 면석만의 조합으로 만들었다는 것은, 목조건축 결구방식이 석탑 조형에서 완전히 사라지고 석탑 조형에서도 유지되던 건축적 의지와 다양한 방식의 혼용을 통한 기술적 발전이 중단됨과 동시에, 구조적인 측면에서는 기단부가 감당할 수 있는 중량에 한계를 노출하여 장중한 크기와 미감의 석탑이 다시 등장할 수 없는 원인으로 작용하게 된다.
* 통일신라 후기 석탑의 기단부 변천...
<영양 화천리 삼층석탑의 기단부... 위에서 설명했지만 이 석탑의 하층기단부는 면석+갑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아예 8매의 통돌을 가공해 만든 것으로 확인된다... 때문에 신용철의 분류에 의하면 감은사탑과 동일한 방식이라고 하지만, 개인적으로 완전히 퇴화 변형된 모습으로 생각된다. 인근의 현일동탑도 동일한 방식이다...>
<경주 효현동 삼층석탑 기단부... 이제부터 술정리탑-남산리탑의 기단부 결구방식(판석+판석)이 고착된 이후, 통일신라 석탑 기단부의 변화과정을 살펴보려 한다... 이때까지만 해도 남산리탑에 비해 규모만 작아졌을 뿐 비례와 조화는 균일하게 적용되었다...>
<보령 성주사지 삼층석탑... 성주사지탑들에 대한 편년에 대해 말이 많지만, 900년을 넘지 않는다는 게 내 생각이다... 아무튼 매우 정교한 짜임새와 가공에도 불구하고 일층몸돌에 별석으로 가공된 괴임이 추가되고, 상층와 하층기단부를 비롯해 지대석에도 괴임이 조형되는데, 전통적인 2단 방식이 아니라 3단으로 가공되어 매우 장식적 욕구가 컸음을 확인할 수 있다...>
<장흥 보림사 삼층석탑 기단부... 870년이란 편년이 정확해 국보로 지정되었지만, 비례와 조화 미감 등에서 전성기와 상당한 차이를 확인할 수 있다... 하층기단부가 갑석과 면석이 통돌로 가공되어 디테일이 떨어지고, 상층기단부의 면석 우주와 탱주도 입체감이 없이 평면적으로 보일 뿐 아니라, 상층기단부 갑석은 불필요하다 싶을 정도로 넓게 돌출되었는데 이는 갑석의 넓이가 줄어들었을 때 구조적인 안전을 자신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즉 상부 탑신의 무게를 감당하기 위해 단면적과 체적의 증가를 위한 조치였다는 말이다... 갑석이 돌출된만큼 부연은 급격히 퇴화할 수밖에 없었고, 상하층기단부 괴임도 형식적으로만 조형됐다...>
<단양 향산리 삼층석탑 기단부... 소규모화 되고 완전히 정사각형에 가깝게 좁고 높아진 상층기단부 비례에서 말기석탑의 보편적 흐름을 감지할 수 있지만, 동시대 석탑들에 비해 세부 디테일과 기법은 통일신라 석탑의 특징을 충실히 구현한 석탑으로 볼 수 있다... 퇴화하고 약화되고 축소됐지만, 매우 성실하다는 느낌이 드는 석탑...>
또한 기존의 기단부와 탑신의 비례를 지키기 위해 상층기단부 갑석의 면적은 유지하면서, 탑신의 중량을 감당하기 위해 면석을 줄여 안쪽으로 들이게 되니, 상층기단부 갑석이 불필요하게 돌출(이후 부연의 의미도 퇴색하면서 약화된다)되고, 상층기단부가 자꾸 좁고 높아져 정사각형에 가깝게 변하는데 영향을 미치게 된다. 물론 이후에도 판석과 귀틀석이 절충된 양식이 사용된 예가 일부 발견(화달리탑 등)되지만, 한번 망각된 기법이 다시 복원되는 건 불가능해 이후 통일신라 말기에서 고려초기에 이르면 기단부가 완전히 통돌로 가공되거나 몇 개의 통돌 조합으로 마무리되는 등 온전한 적층식 구조로 바뀌게 되는데, 그 전제에는 기단부 결구방식에서의 구조적 기술적 퇴화가 결정적인 원인으로 작용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 없다.
* 고려시대 석탑 기단부와 괴체감에 대하여...
<이렇게 변화된 통일신라 후기와 말기의 석탑 기단부는 라말려초와 고려시대에는 어떻게 변화할까? 같이 비교하는 의미에서 몇기를 골라본다... 먼저 940년 전후 원주 흥법사 삼층석탑은 모든 면에서 격이 떨어지지만, 결구방식과 양식은 충실히 따르고 있다...>
<하남 동사지 삼층석탑과 오층석탑... 역시 라말려초에 조성된 두기의 석탑을 살펴보면 이후의 변화를 추정할 수 있는데...>
<하남 동사지 삼층석탑 기단부는 기존의 양식을 어떻게 이해하고 계승했는지 확인할 수 있고, 지붕돌의 변화도 읽을 수 있다... 좁아진 우주와 전반적인 비례, 균형 등 이미 석공의 의지만으로 통일신라 석탑의 미감은 재현 불가능한 것이었을까?...>
<하남 동사지 오층석탑 기단부... 이 탑부터는 고려석탑의 괴체감이 살아난다... 삼층석탑과 동시대에 만들었다 하더라도, 처음부터 오층을 염두에 두었다면 당대의 기술력으로는 삼층석탑과 동일한 결구방식으로 상부의 하중을 감당할 수 없었을 것이다... 즉 800년대까지 이어져오던 결구방식을 완전히 잃어버렸거나 복원할 필요를 느끼지 않았던 것이겠지... 결국 상하층기단부의 면석에 해당하는 부위는 굵은 통돌의 조합으로 바뀌게 된다...>
<홍천 희망리 삼층석탑... 그리고 이때쯤되면 지대석과 하층기단부 등은 결구방식이 아예 사라진 통돌로 바뀐다... 규모가 작아진만큼 복잡한 구성을 쫓을 필요까지 없어진 것이다...>
<안성 봉업사 오층석탑... 석조건축의 특징인 부피의 건축과 괴체감을 제대로 살리기 위해서도, 최소의 조합과 구조적 분절이 필요하다고 생각된다... 왜냐하면 석탑의 안정감과 상승감을 살리는 비례와 조화가 상실된 봉업사탑과 충주 미륵사지탑 등을 보면서, 석재의 괴체감을 궁극적으로 완성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즉 건축적 결구방식을 완전히 상실한 석탑은 아무리 규모가 커지고 장대한 기품을 쫓더라도 공예적이고 모형으로 느껴질 수밖에 없을 뿐 아니라, 목탑/전탑과의 대비에서도 석탑의 특성과 본성을 충분히 살리지 못한다고 생각된다... 결국 가공한 통돌을 완전한 적층식 구조로 쌓아 가면서 조화로운 비례와 공예적 완성도를 높이려면, 경천사지탑 정도의 디테일로 가든지, 담양읍내리탑 수준의 조화로운 비례로 가든지, 아니면 지광국사현묘탑이나 신복사탑 정도의 화려한 조각장식과 세련된 디자인이 필요했다는 말이다...>
<술정리탑에서 완결된 기단부 결구방식의 변화는 이후 석탑의 규모와 비례, 미감 등 질적인 변화를 수반하는 계기가 되었다고 정리할 수 있겠다...>
즉 시기적으로 시차가 있고 내 개인적인 주관에 따른 비약이 있을지 모르지만, 술정리탑에서 고착된 양식은 후대 통일신라석탑이 공예적 기법에 치중하고 모형화된 석탑 양산의 결정적 계기였다고 생각된다. 또 이런점까지 감안한다면 통일신라 삼층석탑이 석가탑 이후 술정리탑에서부터 전국적으로 확산되는 출발점에 있다는 설명에는, 조성 지역과 시기만이 아니라 우리 눈에 확인되지 않는 결구방식도 포함된다는 점과, 그 변화된 결구방식으로 인해 석탑의 체감과 미감, 그리고 규모가 달라질 수밖에 없었으며, 이후 통일신라 전성기를 구가했던 결구방식이 고려시대에 완전히 망각되고 복원되지 못한 출발점이라는 점에 대해 그냥 간과할 수 없어 일부러 부연한 것이니 참고 바란다.
<석가탑과 술정리탑... 통일신라 석탑을 대표하는 두기의 석탑을 수학적 질서와 비례, 그리고 기단부 결구방식을 통해 비교해 봤다... 석가탑은 비례의 완성을, 술정리탑은 양식적 완성을... 그래서 이후 모든 석탑은 이 둘을 모본으로 변화 발전해갔다는 게 내 생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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